죽음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을 향한 존재(태도)”도 영웅주의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삶을 다 산 것으로서의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것은 나약한 기분(분위기)에 젖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영웅적 태도는 죽음을 마주보고 거기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 을 향해 존재할 때 굳센 “내가 있음(나의 존재)”이 싹틉니다. “그때그때마다 ㄴㅐ가 죽으면서만 경험하는 죽음과 함께 나에게 닥친 것은 나의 가장 고유한 존재, 즉 매 순간 나의 존재가능성입니다. 나는 ㅁㅐ 순간 나의 현존재(삶)dㅢ ‘마지막‘에 있을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ㄱㅏ능성은 나의 가장 고유한 ‘내가 있음‘의 가능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ㄴㅏ는 나의 ㄱㅏ장 고유한 나(자아)로 있을 것입니다. 144, 145

영웅주의와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태연함은 유한성을 거슬러 일하지(슬퍼하지) 않고, 마치 유한성과 보조를 맞추는 것 같습니다. 147

‘삶‘과 ‘죽음‘을 분리하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살고, 전체적으로 죽습니다. 판단 작용에도 들어 있는 구분에서 걱정이 생깁니다./죽음이 죽지 않은 한, 다시 말해서 죽음과 삶이 ㄷㅐ조를 이루는 한, 산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있습니다. 죽음을 죽이고 나서야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살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삶과 다른 것으로 응시하지 않는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삽니다. 155,156

친절

주인도 손님도 아닙니다. 주인이자 손님인 것이 분명합니다./헤겔의 투쟁에서는 각자가 ㅈㅏ기를 비우기보다는 절대적 자아로 정립하기를 ㅅㅣ도합니다./내가 소유한 것에서 한 부분을 조금이라도 의문시하는 것은 나 자신의 전체에 해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ㄴㅏ의 부분들 가운데 하나를 ㅊㅣㅁ해하는 것은 무한한 침해입니다. 그런 침해는 절대적이고, 나의 전체와 나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분으로 인한 ㄷㅐ립은 모두 전체가 걸린 투쟁입니다. 162, 163 성스러운 바보 165 그 친절은 온화하고, 관찰하고(사려깊고), 태연합니다...반면 니체의 귀족적 친절은 “창문”의 친절입니다. 창문 뒤에는 내면성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 내면성은 창문이 달린 단자의 친절입니다. 이런 친절은 다른 곳에서 산책하는 온화한 관찰자의 시선의 고귀함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ㅌㅐ고의 치ㄴ절은 ‘선한‘ 것보다 ㄷㅓ 오래되었고, 모든 도덕법칙보다 ㄷㅓ 오래되었습니다.....모든 법과 규범을 넘어서 자유롭게 놀이를 하는 삶은 설명될 수 없습니다. 167, 168

친절의 공감은 심리적 동일시를 매개로 함께 슬퍼하거나 ㄱㅣ뻐할 자아를 모릅니다. 모든 ‘감정‘이 ‘주체‘에 묶여 있다고 한다면, 공감은 ‘감정‘이 아닐 것입니다. 공감은 ‘주관적‘ 감정도 아니고, ‘경향‘도 ㅇㅏ닙니다. 공감은 나의 감정이 ㅇㅏ닙니다. 아무도 느끼지 않습니다. (무아가 느낍니다) 공감은 ㅅㅏ람들에게 일어납니다. 공감은 친절합니다. / 친절한 함께함(공)은 자아와 다른 ㅅㅏ람 간의 구분이 없는 비어 있음 덕분에 있습니다. 그런 함께함은 자기가 공감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할 자아를 ㅎㅓ용하지 않습니다....이는 증오와 사랑으로부터도 자유롭고, 호의와 혐오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174, 175

선불교의 비어 있음은 부버가 말하는 ㅅㅏ이와 많은 점에서 다릅니다. 비어 있음은 나도 ㄴㅓ도 없는 부차별한 장소입니다. 그와 반대로 사이는 ㅂㅣ어 있음만큼 비어 있지도 개방적이지도 않습니다. 나와너의 ㅅㅏ이는 ㄴㅏ와 너가 굳게 자리한 ㄷㅜ 개의 극점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179

부버는 대화의 끈들을 묶고, 끈들이 하나의 중심을 향해 뻗게 합니다./부버가 ㅁㅏㄹ하는 “너”는 사랑과 긍정의 말로서 강조되어 말해집니다. 감동 혹은 숭고가 근본 분위기를 이룹니다. 이런 근본 분위기는 대화를 나누는 관계의 분위기를 규정합니다. 부버의 말이 친절한 말이라고 불릴 수는 없습니다. 182, 184

볕뉘.

0. 벽암록은 사무실 책꽂이 앞에 두고 가끔 봐주었고, 바쇼의 하이쿠도 보면서 다른 느낌에 놀란 적도 있는데, 그렇게 선불교와 하이쿠를 이어놓은 책이다. 사실은 문지강연 소식를 보다가 스스로 소개한 책이어서 수소문을 해서 보게 되었다.

1. 소승을 너머, 대승....불교의 마음 자리는 혜량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가끔 빡빡한 서양철학의 경계를 지우기 위해 살펴보기도 한다. 주체와 개인, 이분법의 철학과 학문은 이렇게 다시 짚지 않으면 현실을 제대로 보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하이데거의 죽음이 관건인 듯 싶다. 서동진도 최근 감정, 정서 등등 감정이론의 배후가 하이데거의 죽음, 그 존재론에 머물고 있어, 정작 마르크스의 구조를 보지 못하는 누를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 후속 글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일정 일리가 있어 보인다. 진은영 역시 하이데거의 죽음이 지나치게 개인을 돋보이게 만들고, 사유를 거기에 멈추게 한다고 한다.

2. 하이데거와 부버를 다룬 것. 특히 부버를 다른 것이 새롭다. 김상봉교수가 너와 나의 정신적 임신이 필요하다는 말씀이 겹쳐지는데, 어쩌면 부버의 자장인 것을 아닐까하는 의심도 곁들여진다. 이렇게 서양철학의 경계를 지워나가거나 새롭게 사유해보자. 멈추거나 정지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그대로 흐름을 쫓아가며 총체적인 사유를 곁들이다 보면 새로운 깨달음이나 통찰이 생길수도 있지 않을까

3. 한병철은 어쩌면 자신의 책은 쓰레기같다고 자조하는 지도 모른다. 너무도 쉬운 책들을 써내어 부끄럽다고, 그 중에 그래도 덜 부끄러운 책이 이 책이라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4. 지금 여기, 한반도는 섬나라인지도 모르겠다. 어디 철도도 사유도 이어지지 못하고 섞이지 못한다. 서양철학과 서양사고가 횡행한다고 할 수 있다.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확장과 연장이 절실한 지도 모르겠다. 몸에 맞는 옷처럼, 진리와 철학도 계절을 타고, 몸에 맞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어읽기 가운데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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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탄생철학의 고된 탄생에 대하여

미래에 놓인 것으로서의 죽음은 죽어야 할 운명인 자들의 시간을 향해 열린 존재를 근본적으로 동요시킨다. 이러한 죽음과 달리, 탄생은 탄생한 자들이 모두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혼란스런 자유 이전의 과거에 속한 것이다. 17

하이데거의 “죽음으로 미리 달려감”과 쌍을 이루는, 이전에 결정된 “탄생으로 되돌아감”때문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탄생은 반드시 개별자의 죽음과는 달리 처음부터 타자와 결부되어 타자에 종속되는 “사회적 생겨남”(한스자너)을 가리킨다. 18

철학은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탄생보다 죽음에 대해 더 많이 논의하였다. 탄생이 아니라 죽음이 철학의 “뮤즈”가 되었던 것이다. “탄생에 대한 망각”(한스 자너)과 “탄생에 대한 맹목성”(페터 슬로터다이크)은 무의 망각과 “죽음의 심취”에 보완적으로 작용하면서 탄생에 대한 철학의 결핍을 강조한다. 19

2. 철학적 조산술에 대하여

스승은 오히려 인식을 낳을 수 있는 자들 안에 이미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나게 할 뿐이다./단지 자신이 의도했던 깨달음을 제자 스스로 낳을 수 있을 때까지 현명하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참을성 있게 제자에게 질문해야만 한다. 철학적 조산사가 이렇게 함으로써 노예는 인식하는 자로서 자율적이게 된다. 32

3. 한나 아렌트의 출생성 철학

하이데거의 해석은 죽음의 철학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이 사실적인 현존재를 대부분 등한시했다. 사실상 “끝을 향한 존재”가 하이데거 해석의 중심이다./한나 아렌트의 탄생 철학은 궁극적으로 하이데거의 죽음학과 대립되며, 하이데거의 “죽음으로 가는 존재”에 대한 선호는 “탄생하는 존재”(한스 자너)와 대립되며, 죽어야할 운명은 “출생성”과 대립되며,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내던져짐”의 철학은 탄생에서 유래하는 시작함과 대립된다./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시작을 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능력이 ㅂㅏ로 그녀의 “탄생성”의 핵심 개념이다. 43

이 새로운 철학은 하이데거처럼 존재와 무의 긴장으로부터 현존재를 규정하지만, 현존재의 배열에서는 완전히 다른 변화를 시도한다. 48

“가장 최상의 삶은 둘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아는 것이다...제3자의 근원은 둘이 그렇게 하나가 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여기서 복수성이 비로소 시작한다. ‘개체화의 원리‘라는 의미에서의 실존이 여기서 발생한다.” 59/ “사람들과 함께 시작은 세계로 왔다. 여기에 인간의 자발성의 성스러움에 근거한다.” 60 “만약 인간의 창조가 우주 속에서 시작의 창조와 동시에 발생한다면, 자신들이 새로운 시작인 개별적 인간들의 탄생은 인간들의 근원적 성격을 증명한다. 이 근원은 결코 더 이상 과거의 일이 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시작들을 기억하는 지속성이 세대의 연속에 있다는 사실은 결코 끝나지 않는 역사를 보증한다. 왜냐하면 탄생은 그 존재가 시작인 피조물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64, 65

죽음은 단지 이 세상의 사건으로서... 한 번 이 세상에 와서 세상의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단 한 번이고 단 한 번의 새로운 것이 단지 단 한 번 발생할 뿐이다. 이에 반하여 한나 아렌트는 출생성을 구원과 결부된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인간으로서의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이라고 이해한다. 단지 한 아이가 탄생한 것이 아니다. – 우리 모두가 아이이듯이 우리에게 모든 아이가 탄생한 것이다. 69 :.

하이데거와 플라톤이 “모든 것을 간직하면서” “더욱더 고향을 추구하는” 입장으로 결코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철저하게 보수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아렌트는 신과 같은 형상이라는 이념에 대해서도 ㅇl렇게 말한다.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유일한 피조물이라면” 인간은 “신에 상응하는 시작하는 능력을 타고나게 된다.” 이는 하나의 상호 관계로서, 신과 같은 형상은 시작하는 능력을 함의한다. 71

“시작이 있기 위해서” 인간이 창조되었다면, 그 인간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최초이며 이미 주어져 있는 “원칙적으로” 창조된 세계에서는 새롭고 유일한 “누군가”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누군가는 강조된 의미에서 “시작”이라는 술어를 획득한다. 76

“인간의 조건” 안에서, 즉 행위의 조건은 탄생성이고 사유의 조건은 죽어야 할 운명이다. 삶과 관련된 사유는 죽음에 비해 삶을 우선시하는 조건들을 미리 확정한다.” 뜻밖에 그녀는 다시 경건해진다. “ 이 세계에서 불멸성을 소망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모독이다. 이 소망이 죽음을 제거하기 때문이 아니라 탄생을 부정하기 때문이다./”인간들 사이의 인간으로서의 인간”이라는 복수적 현존재는 죽음이 아니라 탄생에 기초한다. “하이데거는 틀렸다. 인간은 ‘세계로‘ ‘내던져지지‘않았다. 만약 우리가 ㄴㅐ던져진 존재라면 – 동물과 다르지 않게 – 이 지구에 ㄴㅐ던져진 것이다. 인간은 세계로 바로 ㅇㅣ끌어진 것이지 내던져진 것이 아니다. 여기서 바로 인간의 연속성이 성립되며 인간의 귀속성이 개시된다. 우리가 세계에 내던져진 것이라면 슬픈 일이다!” 86, 87

“이해하는 것은 행위의 다른 면이다” 이 행위의 한편으로 제시된 의사소통적 행위인 “말하기”와 마찬가지로 이해는 말하자면 화용론의 쌍둥이이다./”이해”는 정확히 행위와 탄생의 시작성에 부합한다. “시작을 본질로 하는 ㅍㅣ조물은 주어진 범주없이 ㅇㅣ해하기 위해서..그 자체에 충분한 근원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88

4. 시작된 시작에 대하여

슬로터다이크는 “세상에 오는 것”에 대한 분석에서 탄생과, 세상에 와서 자신에게로 오는 것 사이를 구분한다. 하이데거의 선입견과 상관없이 인간이란 차라리 탄생한 “강림한 동물”이지만, 실제로 자신 스스로 이 세상에서 무언가 시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한 번은 이 세상으로 스스로 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105

그는 “스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응답한다./인간이 성숙해지는 날은 결국 주체가 삶의 노고와 위험에 대한 충분한 통찰을 가지고 죽음의 확실성을 파악하며서, 이러한 삶을 이어가게 하는 생식에 대한 위임을 자신의 부모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을 결심하는 날일 것이다. 107

나는 주어진 것이다. 108

5. 탄생의 강제에 대하여

“강제”가 문자적으로 함축하는 의미 말고도, 부과된 존재, 규정된 존재, 운명적인 존재라는 강한 은유로 탄생의 숙명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111
이러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 탄생을 죽음과 구분 짓는다. 112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영혼들이란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미 항상 순환적으로 돌며 움직이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첨예화한다. “그래서 탄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이 지니는 어떤 수준에 대한 심판이 된다. 누구든지 자신의 영혼의 완성을 향해 스스로 만드는 인생을 살아간다. 115

탄생 철학의 질문들과 문제들은 시작함을 부정하는 업보설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117

“탄생의” 현존은 현존재의 존재 성격이며, 스스로 “시작을 향한 존재”로서 자기 존재와 관계하는 것이다. 120

사르트르는 내가 갑자기 홀로 어떤 도움도 없이 이 세계에 참여하고 이 세계에 대해 총체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123 스스로 거부하는 내던져짐은 바로 “내던져진 기획”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스스로 기획하는 내던져짐의 총체 개념이 될 수 있는 것이다.125

그들의 미성숙한 자녀가 가능한 한 일찍 성숙할 수 있도록 하고 “세계시민”으로서 지체 없이 자유의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의무인 것이다. 단지 이러한 자유만이 탄생의 강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128

탄생이 활동적 삶의 본질적 차원으로서 생산과 노동보다 우위에 있는 행위를 의미한다면, 그래서 이것을 스스로 시작하는 존재의 행위라는 고유성으로 이해한다면, 생산은 이러한 시작하는 행위를 취소하게 한다...인간공학은 생산자라는 돌연변이가 된 창조자가 자신의 생산물에 대해 가장 지속적으로 구속하는 강제인 것이다. 133

6. 원인이 되는 자의 원칙과 책임의 윤리에 대하여

출산은 불가피하게 책임이라는 구속을 부여한 것이다. 124 부모와 자식 사이에 취소할 수 없는 비대칭적인 책임 관계를 정초한다. 135

지구가 하나의 책임을 지게 하는 유산인 한에서 미래와 연관된 가장 멀리 나아간 윤리의 계명에 따라 지구를 훼손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생겨난다. 81 이상 한스 요나스

7. 삶의 선물과 “세계의 빛”에 대하여

인간은 그 어떤 시작이 아니라면, 죄인으로 탄생한 것이다. 149

왜 탄생한 자들이 희미해진 “세계의 빛”을 바라보는지 그리고 왜 그들의 삶의 “선물”을 부담과 구분하기 힘든지, 그 이유를 고통의 교육학도, 그 어떤 죄 혹은 벌에 대한 구성주의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없고 전혀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151

8. 내던져짐의 거부에 대하여

고대 그리스는 성경의 전통과는 달리 어던 본래의 창조주도, 즉 “무로부터의 창조”도 알지 못한다...창조주와 재판관 사이의 최종 심급의 합치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철저하게 “무엇을 위해서”라는 탄생한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다. 165

“최악의 것은 바로 죽는 것이며 두 번째로 악인 것은 한 번은 죽는 것이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인간들이 그들의 공허함을 탄식한다는 의미에서 죽어야 할 운명인 ㅈㅏ들로 간주되는 것이라면 그들의 죽어야 할 운명을 구제할 수 있는 자는 바로 탄생한 자들이다. 171

우리 모두는 자기 스스로에게 머무르는 무능력을 물려받았다. 이 무능력 때문에 창조자는 유감스러운 입증 방법을 제공했다. 그것이 바로 생식이다....생성이라는 죄를 짓게 하는 요청, 즉 ‘성장하고 증식하라‘는 것은...이러한 요청은 나쁜 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신의 거침없는 나르시시즘이 그의 피조물을 부추겨 가장 효과가 큰 모든 모방 행위를 하도록 했다. 174

9. 금욕에 대하여

오늘날 출산 통제가 쉽게 이루어지는 이 시대에 여전히 “희생‘에 대해 말해야만 하는가? 완전한 포기나 완전한 고된 금욕 없이도 탄생하지 않은 자의 파라다이스로 가는 편안한 치유의 길이 열린 것이 아닌가? 178

10. 마치 선물과 같은 것에 대하여

그 반대의 반응은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근본적인 원한 감정의 의혹에 있다. 탄생한 자로서 탄생을, 살아가는 자로서 인생을 한탄하며 사는 자들은 아마 틀림없이 삶을 미워하고, 창조자를 미워하고, 부모를 미워한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삶에 무력해지고 생기를 잃어 분명히 삶에 감사할 줄 모를 것이라고 추측된다. 180

(탄생이) 강제라는 타당한 근거로서 아이의 미성숙성은 들이닥친 선물과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되어 있다....제1의 탄생은 강제적으로 시작된 삶으로서 미성숙하지만, 제2 의 탄생은 칸트적 의미로 성숙한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자발적 능력, 아렌트적 입장에서는 스스로 시작하는 행위의 능력을 지니는 성숙한 인간의 탄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들이닥친 선물) 189

모든 고전적이고 지엽적인 윤리에 맞서서, ...자신의 동의 없이 탄생한 (모든) 존재는 자신이 실존한다는 사실과 화해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삶이 선물인 것처럼, 이 세상이 빛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122

볕뉘

0. 선불교의 철학을 읽은 뒤였다. 궁금하여 몇권을 더 추천받아 읽고 싶었다. 같은 출판사의 이 책을 인상깊게 읽었다는 관계자의 말에 따라, 연관읽기로 제목이 무척 끌렸다. 아래는 읽는 도중 몇 꼭지 생각꼬리다.

1. 한나 아렌트의 말이란 책에서 인터뷰 여러 꼭지에서 흥분되기도 하고, 사유의 긴장을 늦추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다. 아렌트의 박사논문, 하이데거와 다른 사유를 잉태하였다는 점, 그 전개가 놀랍다. 혁명에 대한 사유도 거침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에게는 ‘공화‘의 지평을 멋지게 확장한 이로 마음 속에 다시 박혀있다. 몇 번의 다시읽기가 전제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척 흥미로운 책이었다.

덧말 1. 죽음은 본질적으로 나만 생각하게 한다. 이상하게도 개인에 사로잡히게 하는 장치인 듯하다. 단 한 번인, 단을 붙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삶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탄생으로 사유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우리 삶들을 적절하게 나타낼 수 있다. 말을 하고 ㄴㅏ누는 존재, 복수성을 전제로 하는 우리의 삶을 잘 어루만지게 한다는 점에서 더 낫다

덧말 2. 우리는 세계에 이끌어진 것이다. 아렌트는 정치성의 핵심이 말을 하는 존재라고 했다. 혼자가 아니라 서로 말을 하는 복수성이 아렌트의 핵심이자 공화(주의)의 열쇳말이다. 실존주의는 삶과 존재를 어렵게 설명한다. 다시말하면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내던져지거나, 기투(던져야)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현존재와 나를 고정시켜 세계를 분리시킨 뒤에서나 행위를 하게 만든다. 쓸데없는 논리를 만든 것이다. 이끌어진 존재-손잡아야하는 존재-말해야하는 존재-서로 시작해야하는 존재라는 표현이 삶과 세계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쓸데없는 논리로) 서로를 분리시켜 따로따로 설명해내지도 않으면서, 전체를 감싸안으면서 나아가는 방향을 적확하게 묘사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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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은 나에게 무조건 필요한 겁니다. 나를 살게 하고, 나에게 살아 있는 세계와의 연결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이니까요. 그 세계를 느끼지 못하면 단 한글자도 쓸 수가 없고, 단 한 줄의 시나 산문도 내 입에서 흘러나오지 못할 겁니다. 산책을 못하면 나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내 일도 무너져버릴 겁니다. 339

멋진 산책 길에는 형상, 살아 있는 시, 마법, 그리고 온갖 아름다운 자연물들이, 비록 작은 존재들이라고 해도 꿈틀거리며 차고 넘치는 것이 보통이죠./만약 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고 아이들 같은 눈부신 자연이 선함과 아름다움의 원천으로 매번 신선한 자극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시인은 얼마나 비참하고 빈한한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지 말입니다/산책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감정에 겨운 나르시시즘이나 너무 민감하게 상처받는 성향을 지녀서는 안 됩니다. 340, 341

산책자는 사물을 오직 바라보고 응시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을 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비탄, 자신의 욕구와 결핍, 자신의 모든 궁핍을, 산책자는 마치 용감하고 투철하고 헌신적이며 모드 자질이 입증된 군인이 전쟁터에서 그러듯이, 전부 무시하고 개의치 않고 잊어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매 순간 그는 동정과 공감과 감동의 감정을 느낄 줄 알아야 ㅎㅏ고, 바라건대 그것을 느낍니다./산책자에게는 갖가지 아름답고 미묘한 산책의 사색들이 신비하고도 비밀스럽게 따라붙게 되는데, 그래서 신중한 걸음을 부지런히 옮기던 중에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추어 가만히 귀를 ㄱㅣ울일 수밖에 없으며,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유령에게 사로잡힌 듯이 마법에 홀린 듯이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갑자기 땅속으로 꺼져들어가는 듯한, ㅁㅣ혹과 혼란에 빠진 사색가의 눈이자 시인의 눈앞에 거대한 심연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342, 343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 어떤 다른 존재였으며, 또한 바로 그렇게 때문에 비로소 진정으로 나 자신이었다. 349

하나의 기쁨은 또 다른 기쁨을 불러들였으며, 부드럽고 친숙한 대기에서는 유쾌함이 두둥실 떠다녔고 즐거움을 억지로 참는 듯한 떨림이 느껴졌다. 350

올바른 태도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남들에게 엄격한 만큼 우리 자신에게도 엄격해야만 하고, 우리 자신의 행위에 관대하고 너그럽듯이 남들의 행위도 마찬가지로 너그럽고 관대하게 평가해야만 한다. 356

볕뉘.

0. 친구가 읽어주었다. ‘....음악도 없이 나는 유쾌하였다. 나는 시간에 현혹당하는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듯이 시간에 말을 걸었고, 시간도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생각했다. 시간에 얼굴이 있는 듯 한참을 쳐다보았고, 시간 또한 묘하게 다정한 눈동자로 나를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첫 장의 ˝시인˝의 한 대목이다. 낭독하는 사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봄을 마주하는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래..그렇지 맞아....추임새가 트이는 명문이었다.

1. 한 친구에게 책을 추천해주길 권했고, 그 책들 사이를 거닐다, 어느 서재를 갔고, 그 서재에서 발저를 또 만났다. 책을 주문을 했고, 발저의 민음사 판본과 지금 이 책 가운데 어떤 것을 원하느냐는 말에 민음사보다 더 많은 산문이 있다는 이 것을 골랐다.

2. 주말의 여정이 깊어 피곤이 몰려와 일찍 잠을 청하다보니 자정에 말뚱해져 이 책이 손에 잡혔다. 산책을 마저 읽다가 기어이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에 말을 거는 방법도, 남과 나에게 말거는 태도도,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도 서로 나눌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헤세도 카프카도 벤야민도 사랑했던 작가 사교에는 미숙했지만, 산책과 삶을 대하는 모습은 경이롭고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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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고독-글쓰기-연대]의 곱셈으로 나아가는 사유들

 

 

 

느낌말들 : 발라낸나,정신,서사로서나,이야기,관계--자아,고독,글쓰기,연대,감정,,관계,달의이면,사유,반지성주의, 활동주의철학,느낌,일상,사건,상황

 

1. 이야기 후회는 이야기를 하려는 열망이다”/”이야기하는 이는 물 긷는 장치에 묶인 낙타처럼 계속 원을 그리고 돌면서 부지런하게 비극을 길어 올리고, 매번 다시 이야기할 때마다 그 때의 감정도 되살아난다. 서사가 없었더라면 희미해졌을 감정이 생생하게 유지되고, 과거에 있었던 일과 거의 관련이 없고 지금과는 더욱더 관련이 없는 감정이 서사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한다.” 39

감정의 보존법 : 밑줄은 감정의 생성때문에 긋다. 이야기가 감정을 되살리고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고 말이다. 새로운 서사는 그렇게 새로운 감정을 융기하게 하고 번지게 하는 것이다. 더구나 통찰과 맞닿아 있다면 시간과 속도를 그리 걱정할 일이 못된다.

 

2. 자아라는 것 역시 만들어지는 것, 당신의 삶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자, 모든 이로 하여금 예술가가 되게 하는 어떤 작업이다. 늘 무언가 되어 가는 이 끝없는 과정은 당신이 종말을 맞이할 때 비로소 끝나며, 심지어 그 후에도 그 과정의 결과는 계속 살아남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만들어 가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아라는 작은 우주와 그 자아가 반향을 일으키는 더 큰 세계의 작은 신이 된다.” 85

 

를 다루는 법 : 몽테뉴는 내 과제는 내 삶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직업이며 유일한 소명이다라고 하였다. 예술에서도 최고의 예술은 자기 보존의 예술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정신이란 우리가 자기 자신을 다루는 태도라고 한다. 인생 경험은 모두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리고 정확히 이것은 정신의 이해 과정, 곧 자아와의 만남이라는 의미의 이해과정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가는 과정에서 정신은 영글어 간다.

 

3. 고독 작가의 재능이란 많은 시간 동안의 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독자이며, 책 속에서, 책을 가로지르며 살아간다.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또한 다른 삶의 머릿 속에서, 매우 친밀하지만, 지극히 외롭기도 한 그 행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96

 

사랑의 그림자 :한 시인은 고독이 발바닥 굳은 살처럼 다져졌다/아프지 않게 생의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외로움이 밖으로 향하고 있다면 고독은 안으로 아래로 향한다. 중심과 관련된 행위인 것이다. 외로움은 끊임없이 부여잡고자 하는 구심성을 가진 욕망이지만 고독은 가득차오르는 순간 밖으로 향하는 원심성으로 번진다. 관대함과 너그러움이 자란다.

 

4. 글쓰기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100

 

함께글쓰기란 저항행위 :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말하는 능력보다 침묵하는 능력을 가졌으면 삶이 훨씬 더 윤택해졌을 것이라고 한다. 침묵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로 글쓰기는 권장할 만하다. 결과가 아니라 아직 말이 되지 않는 나의 사유의 근육을 키우는 일만으로도 고독은 빛이 나는 일이고, 글쓰기라는 행위자체가 현실을 거스르는 의미있는 일이다.

 

5. 연대 01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는다‘(나병과 고통) “/ “당사자를 당신 안으로 불러들여, 그들의 고통을 당신의 몸이나 가슴, 혹은 머리에 새기고, 그다음엔 마치 그 고통이 자신의 것인 양 반응한다. 동일시라는 말은 나를 확장해 당신과 연대한다는 의미이며, 당신이 누구와 혹은 무엇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정체성이 구축된다.”/”이러한 동일시는 애정 어린 관심과 지지를 통해 더 큰 자아라는 지도의 경계선을 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51, 158

 

고통의 사용법: 한센병에 대한 통찰이 이 책 가운데 가장 끌리기도 하였는데, 혼자 궁금해하던 것 가운데 사람들이 정치적 참여를 하는 과정은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인식이 전제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이 숙성된 뒤에서나 있을 수 있다는 진단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맹점을 인식하되, 자신을 벗어나거나 구조를 의문시하지 않는 경우도 대부분이다. 인식은 나아가지 못하고 맴돈다. 그런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대부분이다. 문제를 인식하기에 성숙하다고 보아야 하지만, 이면을 살피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다. 전체로 확장하려하지 않고 보고싶은 것만 보게되는 이분법의 아류에 머무는 인식은 이렇게 따끔한 사유 속에 성숙된다.

 

6. 연대 02 - 정신의 무감각 스스로 냉담해짐으로써 살아남으려는 전략. 이것은 비인간화의 한 측면이자 실패한 복구과정이다. 이런 무감각은 자아의 경계를 수축시키는 것이다. 반면에 감정이입은 그 경계를 확장한다. 161

 

슬픔을 줄이는 법 : 얼마나 많은 냉담이 지금여기 공존하는가. 끊임없이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벌레 취급하는 그들의 정신승리를 목도하는 것은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시간에 무감각하며 자신만 옳다는 반지성주의의 표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것조차 과분한 일인지도 모른다.

 

7. 연대 03 감정이입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살짝 나와서 여행하는 일,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정으로 타인의 현실적 존재를 알아보는 일이며, 바로 이것이 감정이입을 탄생시키는 상상적 도약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들어가 느끼다” 286

 

기쁨의 요소로서 감정이입법: 한 장소에 지나치게 머무르면 자신 조차 제대로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다. 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관성을 갖고 보고싶은 것만 보게 만든다. 그래서 늘 여기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시공간의 이동이 그러하며 일박의 공간이동은 미처 보지 못했던 관계들을 헤아리게 만든다. ‘관성의 착각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고정관계에 우리는 중독되어 있다. 그래서 스스로, 외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을 밀어내는 연습들이 필요하다. 주기를 갖고...

 

8. 사유 우리는 정상적인 것과 미친 것, 좋은 것과 파괴적인 것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그 사이에 마치 뚜렷한 경계가 있다는 듯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우리는 수천 가지 방식으로 서로를 취하고 있으며, 누군가는 그 덕분에 즐거움을 얻고, 누군가는 범죄를 저지르고 악몽을 꾼다.” 302

 

사유의 근력단력법: 이분법은 지금까지 인류가 살아온 이래로 버리지 않는 인식법이다. 여전히 그 방법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지식체계를 구성해나간다. 하지만 나누는 순간 2n만큼 봐야하는 것들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아야할 것이다. 전체의 절반의 절반은 횟수를 거듭하면서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사유를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전체를 향해서....또 하나는 총체를 가정하면서 내려와야할 것이다. 여전히 흑백이 횡행하는 세상이기에 말이다.

 

덧글. 죽음을 통해 삶을 길어왔고, 삶으로서 개인은 발라낸 나(자아)로 끊임없이 미래만 주입하는 상품광고로서 자신을 앓고 현재를 살아지기만 한다. 침묵과 고독은 현재를 살아가게하는 유일한 가교다. 미래가 아니라 지금여기를 충만하게 하는 기쁨의 근력이다. 그렇게 걸음을 걷는다. 세상에 홀로선나가 아니라 손내미는 나로 자란다. 걸음걸음마다 이야기가 자란다. 기쁨의 감정이 햇살처럼 강열하다. 뺄셈은 덧셈으로, 덧셈은 분홍으로 끓어넘쳐야 한다. 죽음을 뒤집는 건 탄생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한방향으로만 지문을 남겼고, 그 지문들만 해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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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따라가길 잠시 멈추고 나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이야기의 진정한 핵심이다. 95

이야기는 온갖 종류의 옷이 될 수 있으므로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 옷은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95

희망은 반발에서 나온다. ‘너는 낙오자야‘, ‘너는 사랑스럽지 않아‘따위의 말을 들을 때, 그럴 때 희망이 발생한다....하나는 우리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우리는 역사를 거듭 바꾸어왔다는 사실이다. 96,97 미래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데서 희망이 생겨난다고 본다. 미래는 심히 불확실하나, 불확실하기 때문에 우리가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곧 희망이다.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알 수 없는 것과 확실하지 않은 것을 포용해야만 한다. 98

화가 난 독선적 좌파의 태도는 인터뷰나 운동을 이끄는 건 고사하고 참다운 인간이 되는 데도 전혀 보탬이 안 될뿐더러 조금도 흥미롭지 않다.....나는 선택받았다....구원받을 수 있는 참된 길은 오직 이것뿐이다..99 너는 지옥에 떨어지도록 저주 받았다. 이러한 태도는 불관용과 파벌주의와 분열을 낳는다. 분노는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으며, 어떤 면에선 진짜 감정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100

네바다 핵실험장 – 형식적 돌파구...찾아낸 것이 이야기 서술, 일인칭의 사색, 문화적 분석, 탐사 보도 따위를 모두 아우르되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는 역사적 목소리였다....꿰맨 자국 없이 매끄럽게 은유를 하고자 했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것을 배웠다. 100 어둠 속의 희망은 공적인 삶에 관한 ㄱㅗ무적인 책이고, 길 잃기 현장 안내서는 사적 삶에 관한 매우 우울한 책이다. ..가깝고도 먼곳의 결말도 알려지지 않은 것과 알 수 없는 것, 어둠과 신비에 쌓인 것을 포용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마지막 책 결말에는 위급에 처한 삶과 위기 속에서 관계가 재구축되는 방식에 대한 사색도 풍부히 들어 있다. 개인의 질병에도 똑 같이 적용된다. 101

시위에 미적요소 – 희망과 역사가 운이 맞을 때가 종종 발견된다. 102

미국인의 대다수가 정치와 무관하게 살아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자아의식이 좁은 테두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시민으로서의 자의식이 없고 자신의 삶이 정치에서 얼마나 크게 좌우되는지 자각하지 못한다....이 사람들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모르는구나 하는 기분이 들 때가 더러있다. 그들이 아는 것이라곤 티브프로그램이나 소설, 시트콤 같은 데서 배운 게 전부인 듯할 때가. 그런 것은 영혼을 울리지도, 시민 의식을 가르쳐주지도 않는다....지난 20-30년간 민영화를 통한 경제 사유화보다 먼저 진행된 것은 일종의 감정 사유화였다. 103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정치적인 것과 서정적인 것이 어떻게 불가분의 하나가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하고, 충실한 삶은 양쪽 모두를 성취할 수 있음을, 아니 어쩌면 성취해야 함을 보여준다...존 버거나 버지니 울프는 그 삶은 굉장히 다채로운 영역을 아우르는데..울프는 의식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토록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하는 동시에, 의식을 그토록 정확하게 이해하고 묘사한 작가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107 존 버거의 경우, 매우 미적인 것과 매우 정치적인 것 두 가지 모두에 관여하는 글을 쓴다는 점에서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108

걷기의 역사가 다루는 걷기는 다각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거대한 주제다. 인체 해부학부터 공공 공간과 낭만시에서의 젠더정치학까지, 그야말로 수백 가지 주제를 포괄할 수 있다. 이와같이 좀 더 큰 이야기를 사유하고, 추구한다. 109

볕뉘.

0. 리베카 솔닛에 대한 관심으로 전후 맥락을 알고 싶었는데 지인이 추천한 책 가운데 인터뷰가 있었다. 책에서 짐작했던 부분이나 강렬함에 대한 물음이 많이 해소 되었다.

1. 존버거, 버지니아울프, 라틴아메리카문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높다. 저자가 미술평론가이기도 한 연유가 있지만, 정치와 예술을 적확하게 묘사하는 놀라움이 매력을 낳는 것이겠다.

2. 악셀 호네트가 사회주의 재발명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좌파의 직선적인 역사관과 진리에 대한 보다 낫다라는 의식은 상황을 헤쳐나아가는데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야기, 글쓰기, 고독, 연대에 관한 꾸준한 말씀에 관심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 연결성이 느껴지도록 여러권을 겹쳐읽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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