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을 향한 존재(태도)”도 영웅주의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삶을 다 산 것으로서의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것은 나약한 기분(분위기)에 젖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영웅적 태도는 죽음을 마주보고 거기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 을 향해 존재할 때 굳센 “내가 있음(나의 존재)”이 싹틉니다. “그때그때마다 ㄴㅐ가 죽으면서만 경험하는 죽음과 함께 나에게 닥친 것은 나의 가장 고유한 존재, 즉 매 순간 나의 존재가능성입니다. 나는 ㅁㅐ 순간 나의 현존재(삶)dㅢ ‘마지막‘에 있을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ㄱㅏ능성은 나의 가장 고유한 ‘내가 있음‘의 가능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ㄴㅏ는 나의 ㄱㅏ장 고유한 나(자아)로 있을 것입니다. 144, 145

영웅주의와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태연함은 유한성을 거슬러 일하지(슬퍼하지) 않고, 마치 유한성과 보조를 맞추는 것 같습니다. 147

‘삶‘과 ‘죽음‘을 분리하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살고, 전체적으로 죽습니다. 판단 작용에도 들어 있는 구분에서 걱정이 생깁니다./죽음이 죽지 않은 한, 다시 말해서 죽음과 삶이 ㄷㅐ조를 이루는 한, 산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있습니다. 죽음을 죽이고 나서야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살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삶과 다른 것으로 응시하지 않는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삽니다. 155,156

친절

주인도 손님도 아닙니다. 주인이자 손님인 것이 분명합니다./헤겔의 투쟁에서는 각자가 ㅈㅏ기를 비우기보다는 절대적 자아로 정립하기를 ㅅㅣ도합니다./내가 소유한 것에서 한 부분을 조금이라도 의문시하는 것은 나 자신의 전체에 해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ㄴㅏ의 부분들 가운데 하나를 ㅊㅣㅁ해하는 것은 무한한 침해입니다. 그런 침해는 절대적이고, 나의 전체와 나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분으로 인한 ㄷㅐ립은 모두 전체가 걸린 투쟁입니다. 162, 163 성스러운 바보 165 그 친절은 온화하고, 관찰하고(사려깊고), 태연합니다...반면 니체의 귀족적 친절은 “창문”의 친절입니다. 창문 뒤에는 내면성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 내면성은 창문이 달린 단자의 친절입니다. 이런 친절은 다른 곳에서 산책하는 온화한 관찰자의 시선의 고귀함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ㅌㅐ고의 치ㄴ절은 ‘선한‘ 것보다 ㄷㅓ 오래되었고, 모든 도덕법칙보다 ㄷㅓ 오래되었습니다.....모든 법과 규범을 넘어서 자유롭게 놀이를 하는 삶은 설명될 수 없습니다. 167, 168

친절의 공감은 심리적 동일시를 매개로 함께 슬퍼하거나 ㄱㅣ뻐할 자아를 모릅니다. 모든 ‘감정‘이 ‘주체‘에 묶여 있다고 한다면, 공감은 ‘감정‘이 아닐 것입니다. 공감은 ‘주관적‘ 감정도 아니고, ‘경향‘도 ㅇㅏ닙니다. 공감은 나의 감정이 ㅇㅏ닙니다. 아무도 느끼지 않습니다. (무아가 느낍니다) 공감은 ㅅㅏ람들에게 일어납니다. 공감은 친절합니다. / 친절한 함께함(공)은 자아와 다른 ㅅㅏ람 간의 구분이 없는 비어 있음 덕분에 있습니다. 그런 함께함은 자기가 공감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할 자아를 ㅎㅓ용하지 않습니다....이는 증오와 사랑으로부터도 자유롭고, 호의와 혐오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174, 175

선불교의 비어 있음은 부버가 말하는 ㅅㅏ이와 많은 점에서 다릅니다. 비어 있음은 나도 ㄴㅓ도 없는 부차별한 장소입니다. 그와 반대로 사이는 ㅂㅣ어 있음만큼 비어 있지도 개방적이지도 않습니다. 나와너의 ㅅㅏ이는 ㄴㅏ와 너가 굳게 자리한 ㄷㅜ 개의 극점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179

부버는 대화의 끈들을 묶고, 끈들이 하나의 중심을 향해 뻗게 합니다./부버가 ㅁㅏㄹ하는 “너”는 사랑과 긍정의 말로서 강조되어 말해집니다. 감동 혹은 숭고가 근본 분위기를 이룹니다. 이런 근본 분위기는 대화를 나누는 관계의 분위기를 규정합니다. 부버의 말이 친절한 말이라고 불릴 수는 없습니다. 182, 184

볕뉘.

0. 벽암록은 사무실 책꽂이 앞에 두고 가끔 봐주었고, 바쇼의 하이쿠도 보면서 다른 느낌에 놀란 적도 있는데, 그렇게 선불교와 하이쿠를 이어놓은 책이다. 사실은 문지강연 소식를 보다가 스스로 소개한 책이어서 수소문을 해서 보게 되었다.

1. 소승을 너머, 대승....불교의 마음 자리는 혜량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가끔 빡빡한 서양철학의 경계를 지우기 위해 살펴보기도 한다. 주체와 개인, 이분법의 철학과 학문은 이렇게 다시 짚지 않으면 현실을 제대로 보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하이데거의 죽음이 관건인 듯 싶다. 서동진도 최근 감정, 정서 등등 감정이론의 배후가 하이데거의 죽음, 그 존재론에 머물고 있어, 정작 마르크스의 구조를 보지 못하는 누를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 후속 글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일정 일리가 있어 보인다. 진은영 역시 하이데거의 죽음이 지나치게 개인을 돋보이게 만들고, 사유를 거기에 멈추게 한다고 한다.

2. 하이데거와 부버를 다룬 것. 특히 부버를 다른 것이 새롭다. 김상봉교수가 너와 나의 정신적 임신이 필요하다는 말씀이 겹쳐지는데, 어쩌면 부버의 자장인 것을 아닐까하는 의심도 곁들여진다. 이렇게 서양철학의 경계를 지워나가거나 새롭게 사유해보자. 멈추거나 정지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그대로 흐름을 쫓아가며 총체적인 사유를 곁들이다 보면 새로운 깨달음이나 통찰이 생길수도 있지 않을까

3. 한병철은 어쩌면 자신의 책은 쓰레기같다고 자조하는 지도 모른다. 너무도 쉬운 책들을 써내어 부끄럽다고, 그 중에 그래도 덜 부끄러운 책이 이 책이라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4. 지금 여기, 한반도는 섬나라인지도 모르겠다. 어디 철도도 사유도 이어지지 못하고 섞이지 못한다. 서양철학과 서양사고가 횡행한다고 할 수 있다.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확장과 연장이 절실한 지도 모르겠다. 몸에 맞는 옷처럼, 진리와 철학도 계절을 타고, 몸에 맞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어읽기 가운데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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