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감수성 

1.1 타인의 가능한 고통을 창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미학적 감수성과 관련을 시키다니? 글을 읽다 숨이 막힌다. 고통을 창조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걸린다. 소설맹?인 나는 늘 소설에 친숙하지 못함을 빌미삼고 있다.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데 소설책을 소개해서 그렇다는 벗의 문자에 근근이 시로 굶주림을 땜방을 하고 있다고 변명을 건넨다. 얼핏보고 판단하는 능력이 통찰력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일 역시 잣다란 관계들의 합을 예민하게 느끼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두렵기도 하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만 잔뜩인 것은 아닌가? 

무 시 

2.1 무시를 느끼는 감각은 학력별, 계급별, 계층별, 성별, 나이별로 차이가 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나치게 익숙해지면 어떨까? 지나온 길들을 살펴보면 뜨끔거린다. 아마 관계가 풀리지 않았을 경우 아마 좀더 이런 관점에 섰으면 일을 달리 풀어가지도 않았을까 하는 후회막급도 덜컹거린다. 나의 관점에서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없고를 떠나 상대방이 느꼈을 감정에서 돌이켜보면 서투름이 하나 둘이 아닌 것 같다. 일의 시급으로 그렇게 처리했을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고 사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희롱처럼 피해자가 느끼는 감정이라면... ... 민주주의를 화려한 논리로 정의하지 않더라도 이것도 비슷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사실 자신이 없다. 두렵다. 감당해낼 수 있을까? 가정으로 들여온다면....모임으로 들여온다면.... 

친 구 

3.1 우정의 철학; 필라소피의 필라가 친구, 우정이란 뜻의 어근이 들어가있다한다. 관심있는 주제가 여기저기 펼치는 책 안에서 두더지처럼 불쑥불쑥 나온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식구들 생각나듯이 친구란 그저 알고 친한 사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다. 그것도 철학에서 좋은 삶을 이야기한다면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우정이고 친구이다. 함께 지각한다는 것, 뭉클거리고 좋아하는 것, 인식의 문을 열어주거나 결합시켜주는 것, 곁에 있으면 더욱 많은 느낌들을 고스란히 가져가고 생각의 깊이가 함께 깊어져 또 다른 시야를 볼 내공의 공유를 기대할텐데 하고 말이다. 정의도 자유도 평등이란 떨어진 가치도 좋겠지만 그렇게 따로따로 사유를 분리시켜 진도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통채로 사유를 펼치면 훨씬 힘도 덜들고 사고의 보폭도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동시대인 

4.1 동시대인, 가슴떨리지 않는지?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해서 기뻤다. 펑크낼 수밖에 없는 약속시간을 지킬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지키기 위해서 너-나가 말을 꺼내볼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아니 혼자 생각일 수도....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시간들을 지금에 꺼내어 놓고 나눌 친구들이 있어야 될텐데. 친구들은 입이 무겁다. 무거운 것인가? 어둠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저 짝사랑만 하다 말아야되는 것인지? 

전 주 

5.1 전주를 여러번 갔지만 애써 답사 준비자료를 읽지 않았다. 오히려 느끼는 편이 훨씬 다가서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남고사를 오르고 억양대를 오르고 저기 목포의 숨결을 더듬듯이 더듬다보니 서로 이어져버린다. 부자들도 동학도...일제시대처럼 부자시대를 살아내는 지금도 겹쳐들고 마음 사이사이 냉기가 스민다. 프랑스혁명, 68혁명, 여기 동학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숱한 피는 지금을 살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32살의 역사샘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밤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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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학적 감수성 - 한 사회의 도덕적 진보는 직접적으로 규범적 개선을 제도화하는 형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소극적으로 사회적 불의를 점진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발상이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불의를 탐색하는데는 타인의 가능한 고통을 창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예술가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학적 감수성이야말로 도덕적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본래의 추진력이라고 본다. 



2. 무시 - (엘리트를 자처하는 부류는)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인식이 일상화될 경우, 그것 역시 무리를 지으며 다른 집단을 이질화시켜 그 무시를 재생산해낸다. 엘리트 의식을 갖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일상에서 관계의 문제가 고착화되는 것이 정말 문제이다. 지적인 무시, 이해 정도 등으로 인한 하대 경향은 인식은 받는 쪽에서도 머리의 영역이 아니라 가슴, 몸의 영역이므로 본능적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무시와 감수성은 서로의 방향을 달리한다. 타인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을 창조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에 자기보다 부족하다 싶으면 감수성보다 심리적으로 무시를 택한다. 결국 무시의 네트워크로 좁혀진다면 바람직한 관계가 자랄 수 없다. 엘리트로 운신할 공간도 없어져 결국 연대도 없고 배려도 없다. 결국 그 생태내에서는 엘리트마저 소멸된다. 그래서 무시를 택하지 않고 미학적 감수성을 택하는 편이 앞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모두 제거하고 스스로 능력도 높일 수 있다. (지적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감수성이 부족해 상대의 입장에서 설명해내지 못하는 능력의 부족이 문제다. 그래서 감수성이 부족한 불감을 문제삼아야 한다.) 



3. 친구 - 우정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감 속에서 친구의 존재를 함께-지각하는 심급이다.  함께 산다는 것은 공통의 실체에 참여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존재적인 함께 나눔, 이른바 대상 없는 함께-나눔으로 정의된다. 그러므로 우정은 존재한다는 순수한 사실을 함께-지각하는 것이다.; 





 

  5. 전주(온다라) - 지난 2-30년 아파트값이 오르지 않아 오히려 뜨는 도시. 주택값이 원도심,구도심이 비슷하여 공동화도 없고 오히려 문화의 뿌리를 살릴 수 있는 도시. 천가지 경치를 볼 수 있다는 천경대를 지나 만경대, 억가지 경치를 볼 수 있다는 억경대에 오르자 정말 북쪽은 평야로 훤히 트이고 수천수만의 경관이 사로 잡는다. 태조어진을 모신 경기전의 사대문안쪽, 서학-천주교를 효시한 성곽은 동학군이 사수하였으나 일제와 관군의 포화로 성곽은 무너졌다. 그리고 그 성곽의 돌은 명동성당과 꼭 닮은 전동성당의 주춧돌들로 사용되었다 한다. 동학-일제-지금의 동선이 겹친다. 양반보다 향리의 도시인 이곳은 한옥마을이든 문화의 뿌리가 그렇게 깊지 못하다고 한다. 대전-목포에 이은 세번째 전주를 가슴에 담자 내내 답답해진다. 새벽 눈썹을 닮은 달은 눈물을 그렁그렁 안고 있다.

4. 동시대인 -동시대성이란 시차와 시대착오를 통해 시대에 들러붙음으로써 시대와 맺는 관계이다.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와 완벽히 어울리지 않는 자, 자기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 자, 그래서 이런 뜻에서 비시대적인/비현실적인 자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까닭에, 바로 이 간극와 시대 착오 때문에 동시대인은 다른 이들보다 더 그의 시대를 지각하고 포착할 수 있다.(나의 세기, 나의 야수여/누가 너의 동공을 바라보고/두 세기의 척추와 피를/함께 붙일 수 있을까?)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빛이 아니라 어둠을 지각하는 자이다. 세기의 빛에 눈멀지 않고 그 속에서 그림자의 몫, 그 내밀한 어둠을 식별하는 데 이르는 자만이 동시대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대의 어둠에 시선을 고정할 수 있다는 것뿐 아니라 이 어둠 속에서 우리를 향하지만 우리에게 무한히 멀어지는 빛을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결코 있어보지 못한 현재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동시대인이란 시간을 나누고 가필함으로써 시간을 변형할 수 있고, 또 그것을 다른 시간과 관련시킬 수 있으며, 역사를 미증유의 방식으로 읽을 수 있고, 그것을 필연에 따라 '인용할' 수 있는 자이기도 하다. 그것은 펑크 낼 수 밖에 없는 약속시간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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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도 고프고, 지인들의 생각길도 궁금해 문자를 열다섯분에게 보내다. 이 좋은 가을날 무슨책이냐 가을이나 즐기지!!!부터 지적 이력을 느낄 수 있는 짧은 비평까지 보내 주신다. 그 생각길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이 가을이 좀더 풍성해지거나 친구들의 마음을 좀더 부여잡을 수 있을까.  

갑작스런 추위에 구절초의 꽃잎들이 시큰둥해져버렸다. 잎도 당황한 듯 숨이 죽어버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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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미국 인디언 멸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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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무지개- 자연과 인간의 다양성, 젠더와 섹슈얼리티
조안 러프가든 지음, 노태복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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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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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youtube.com/watch?v=-FHjYSttaUQ&feature=player_embed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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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27 저녁 ㄴㅇㄷㅅㄱ을 찾다. 시험기간을 지난 열람실은 횡하다. 그래도 인적이  절반을 넘어 허전하지는 않다. 어제 반납하며 빌린 디자인책 3권과 여물여물 씹고 있는 책, 그리고  함께 섞어온 아감벤 책을 두고 보다.

 

 

 

  

한국 디자인 책임자는 "어디에도 없는 디자인을 하라"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 어쩌면 한국에 기발한 제품이 많은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평가기준'이라는 것이 평가기준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편 한국 기업의 디자인 미팅에 들어가보면 경쟁사의 제품을 가지고 들어와 '이것을 이길 만한 제품을 만들라.'라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즉, 한국의 제조사에게 디자인이란 눈앞의 라이벌에게 이기기 위한 도구이며, 라이벌 기업을 기준에 둔 상대적인 가치 창조인 셈이다. 역으로 말하면 자신들이 보유한 절대적인 개성을 디자인으로 표현하려는 사고방식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장사의 도구로서만 디자인을 생각하기 때문에 디자인을 통한 브랜드 아이덴티티으 구축이라는 사고방식은 정립되지 않은 것이다.

한국 기업과의 작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프레젠테이션 제출용으로 만들 목업(실물모형)이 그대로 제품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일본 기업에는 조직적인 디자인 작업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공동작업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만큼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이 작업에 반영된다. 그 결과 프레젠테이션 단계에서는 거칠었던 디자인 안도 제품화될 때 즈음에는 평범한 디자인으로 안착하는 경우가 많다.(71-72, 디자인의 꼼수)

 

** 이 일본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차 싶다.  지난 월요일 후배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지나치게 일에 강박이 되어있지 않아 마음이 풀리기도 했는데, 정작 스스로도 이렇게 일의 강박에 매여있다. 안도 다다오의 작품여행을 통해 그것이 같은 효과를 짚어낸 것이 있었고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제안같이 보였다. 다른 주제들은 현실적인 입장이나 새로운 관점의 당위만 있을 뿐 그대로가 현실과 관점을 동시에 안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우리에게 새로움에 대한 숙성의 과정을 찾기 힘들다. 일터이든 삶터이든 모임과 모임이 겹치는 부분도 그러하다.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 밀어부치는 힘에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여지없이 견디고 보듬어지지 않는다.

** 왜 아이디어에 다른 생각이 겹치지 못하는가? 어쩌다 운때가 맞는 기획만 살아남거나 지난 것은 없는 것이다란 무의식이 여기저기 자리잡은 때문인가? 불쑥 그런 생각이 든다.

** ㄴㅇㄷㅅㄱ에 책들을 풀고 시작하는 사이 졸음이 바람처럼 몰려와 깜박하는 사이 몇몇 단어들만 주먹만큼 커져 기억의 흔적을 남긴다.  악셀 호넷이 들려주는 칸트씨와 헤겔씨의 가족, 정의, 배려, 사랑 그리고 그 닫힌 그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리뷰를 해서 본다. 그리고 생각도 몸도 가슴도 턱없이 지금..그리고 여기 3-40년의 흔적이 켜로 남아 어쩌지 못하는 [나]가 있다. 담론의 틈바구니에서 머리를 들이밀고 생각을 기웃거리려 하지만, 이미 가슴과 몸, 그리고 손 발은 여기를 살아왔고 살고있어 낯설다. 머리 속으로만 유영할 뿐 가슴의 뿌리로 몸의 뿌리로 다시 내려올 수 있을까란 두려움이 행간에 나타난다.

** 메모장에 떠오르는 사람 얼굴을 그려본다. 이렇지 않은데, 초상의 미묘함은 실망으로 번진다. 색을 넣어 그려본다. 얼굴을 그려보고 싶단 느낌은 어쩌면 어제 전시 관람의 여파인지도 모르겠지만 야초와 꽃들의 특징처럼 쉽지 않다. 한꼭지를 잡아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표정을 잡아내는 일이 힘겨울 듯싶다.

** 아침 일찍 눈이 떠져 책의 다른 곳들을 뒤적여본다. 을씨년스런 추위가 몸을 감아 옷을 겹쳐입지만 책으로 맺힌 생각은 더 또렷하다.  

뱀발. 디자인 책들이 손에 간다. 아무래도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함은 표현력과 관계가 있으며, 표현의 수단인 느낌을 전달하는 매체에 대한 관심은 아닌가 싶기도 한다. 설명한다는 한계를 벗어나 때론 직관의 풍부함에 관심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어디를 걷고 있는지, 걷다보면 늘 생각도 사람도 만나는 것을 알지만 짙은 가을 불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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