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잃어버렸다. 일터 약속에 따로 챙겨간 것이 화근이다. 호프집에서 일어나면서 둔 것 같아 전화를 주니 따로 챙겨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구입을 고민하던차였다. 며칠뒤 일터 한켠에 그 책이 버티고 서있다. 반갑기도 한데 챙긴 이가 확실하지 않다.  모임과 집안행사가 겹쳐 빈 몇꼭지를 보지 못해 책에 대한 여운이 있던 차, 십여일이 지나서 모임의 말미에 시간이 난다. 어느 이는 책을 보면 외롭다고 하지만, 어느 이는 외로워서 책을 본다고 하지만, 이렇게 책안에서 외로움이 찔끔거리며 나오면 난감하다. 그래서 외로움을 뒤돌아본다. 절망의 그늘에 드린 희망, 그리고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난감함들. 그리고 그 결들을 건드려보지만 아무도 움찔거리지 않아, 또 다시 울먹거리며 다시 들여다봐야하는 곤혹스러움들.

처음뵙는 분이 말한다.복지라는 정책의 선명함, 이렇게 하면되지 않겠느냐구 말이다. 민주주의를 발라내는 것이 아니라 한몸으로 드리워야하며, 머리에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과 선입견을 고려해야 한다라는 의견을 다른 이들이 보태는데, 날선 입장과 해야할 일정이 선명하기만 하지 일상이 들어있지 않다. 활동가는 바쁘고 조직은 얇디얇고 단단해 이런저런 고민을 스며들게하는 쿠션이 없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고민에 멈춰서기도 급급하다. 어김없이 선거는 다가왔고 또 한탕을 건지려는 이들의 말은 내일 세상이 바뀔 듯 선동적이다. 나에게는 외려 그런 말보다 [진보가 양보해야한다]라는 것에 더 솔깃하다. 오히려 정규직의 일자리는 별반없다. 들어가기가 이렇게 힘들다라는 것이 실업을 산술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정책보다 더 가슴을 기울이게 된다.

곧 생각을 고쳐 진보가 양보해야 한다는 순간,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팔, 다리를 채가고 분열시킬 데마고그가 더 현실적이라는 판단이 선다. 하지만 대학강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교협의 어떤 이들이라도 교수의 월급을 줄여 그 비용으로 등록금과 강사처우개선에 쓴다고 하자. 또 전교조교사가 기간제 교사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월급을 이렇게 줄일테니 이렇게 해달라고 하자. 노조가 정규직의 월급을 이렇게 줄일테니 이렇게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해달라고 하자. 내가 비록 돌을 맞더라도 행여 그렇게 조금씩 달라져 이 정규직은 더 안달하고 비정규직은 더 황폐하고, 삶의 호흡마저 곤란해져가는 이땅의 현실을 바꾸는 거름이 될 수 있다면 말이다. 


행여 행여, 진보가 조금이라도 믿을 구석이 있다라는 신뢰의 싹이 돋아날 수 있다면, 사회적 타협의 여지는 만들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전에 진보의 악다구니 속에 입에 재갈을 먼저 물리게 될까?

정책도 믿고, 열정도 믿는다. 하지만 정책만을 믿지 않고 열정만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갑자기 출몰하는 부류를 경계한다. 복지라는 놈과 친해지려 정치의 외연을 차려입으며 앞으로 몇년을 갑론을박하겠지만, 자꾸 그 틈에 민주주의든, 삶의 결을 집어넣으려하지 않는 이는 계속 패배만을 되풀이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삶의 척박함을 핑계로 피폐해지는 현대차노조의 이기심중독증들. 여기저기 곰팡내나는 현실을 깨뜨리는 일은 역시 운동의 몫인 것 같다.  너무도 너가 간절하다. 너없이는 아무것도 도모할 수 없다. 생각도 고민도, 일보도 이보도, 양심선언도, 고기를 줄이는 일도, 자식키우는 일도 너의 일거수일투족 살림살이 하나하나, 네마음 하나하나 모두 절실하다. 머리 속으로만 다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다르게 살 수 있는 것인지 타산해보고 싶다. 단 한발이라도 내일 명이 다하더라도 생각의 한걸음, 삶의 한걸음을 다르게 딛고 싶다.
 

뱀발.  

1. 정치철학 5강 뒤풀이를 조금 가로챈다. 오버에 대한 책임은 제 몫이다. 표현은 거칠지만 진심은 아니다. 좋은 이들을 보면 늘 설렌다. 미숙함은 더 매만지고 싶다.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매만져달라. 그렇게 빚지고 살자. 

2. 저자의 결들을 뒤척여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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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조금 +]

일터 일로 이동중 여기저기 눈길을 멈추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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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다녀오다. 꽃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거리의 공백도 없이 피고지는 꽃들이 한결같다. 진달래꽃들이 유난스럽게 짙고 붉다. 여기저기 산줄기와 산등성를 가리지 않고 수줍음을 경쟁하듯 피어있다.

몸은 모임으로 붉고 지쳐있다. 돌아오는 길 궁금증을 참지 못해 일터부근 인적 드문 벚꽃길을 들렀더니 오르막끝이다. 마지막이 아쉬워 가벼운 차림으로 봄마실을 나선다. 목련한잎, 산벚꽃을 따서 매만져 날린다.  중간중간 학교길은 상춘객으로 들떠있고 옷차림새도 여름으로 향한다.

팝콘처럼 펑펑 터진 꽃들은 매화부터 철쭉까지 한모둠이다. 이렇게 봄은 얇은 막처럼 얇다. 한주 반짝하다 비누거품처럼 터지면 여름이다. 세상의 경계가 이렇게 얇으면 좋으련만 온난의 위험이 겹쳐 불안하기만 하다. 7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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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한마지기, 고등어 한손 그리고 난초 한촉(酌)

목련이 익어 유성처럼 툭툭 떨어질 듯 싶다. 맑스의 자본론 제1장을 읽는다.  

20아마포=1저고리 

를 놓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 이 얘기도 저 얘기도 한참을 이야기한다. 가치형태에 대한 모든 배려를 하는 듯이, 산은 이야기하지 않고 여기저기 나무들 꽃들에 대한 수다다. 그러다가 개인적인 생각을 툭툭, 정작하고 싶은 이야기는 압축을 해놔서 몇번이고 되돌이켜 읽지 않으면 빗나갈 정도로 해놓았다 싶다. 작은 고개에서 풍경을 보고 쉴 즈음에 다가 톡톡 서문에서 봤던 얘기를 슬쩍 건들여놓는다 싶다.

등호 =는 산술의 등식이 아니었다. 물신의 이면에서 보이지 않는 그것을 보게 하는 다양할 것을 권면하는 장치는 아닌가? 이전의 경제학자들이 보지 못하거나 뒷심이 부족해 결코 보지 못했던 추상적 노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뒷풀이엔 젊은 친구와 *보*당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 첫강의보다는 나았다는 평으로 시작한다. 마지기가 수확기준이라는 이야기, 고등어한손처럼 도량형의 통일이 어쩌면 이렇게 몸말이나 느낌이 살아있는 말들을 죽이고 있다. 표준어와 사투리처럼 획일화의 문제점들에 대해 콕콕 짚어본다. 청년 맑스의 행간을 보며, 뭔가 통찰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때로는 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에둘러 보이기도 하고, 이렇게 고전을 보는 재미는 요약본과 해설서의 번역과는 남다르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고전의 생명력이란 늘 전후시대적 맥락이 이해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잠깐 나오지만 그는 [좋은 삶]을 이야기했다. 그 이후에 번진 자유, 평등, 박애를 나눠 이야기하지 않았다. 앞집 형과 같은 이가 맥주한잔하며 [좋은 삶]에 대해 이야기는 표준어나 도량형이 통일된 회색톤이 아니었을 것이다. 들으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손발이 꿈적거리는 몸말이지 않았을까? 가끔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멋진 선배, 친구, 연인을 제대로 사귄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게 고전이야기를 보탠다. 그 점에서 맑스는 글감으로 보건데, 가슴이 따듯하고 두루두루 살필 줄 아는 친구이자 하고픈 말이 많은 친구는 아닐까?

한친구와 교육와 교양의 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진보는 가분수다. 머리만 큰. 당장만 관심이 있다. 헌데 시간의 길이에 바래지 않을 수 있을까? 바래지 않으려면 방법은 없을까? 책읽는 인문학모임을 내심 바라지 않은 것은 아닐까? 현안이 산적해있는데... ... 시간을 길게 잡으면 다들 문화, 교양, 교육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에 쫓기고 머리의 의욕이 가슴도, 손발도 감당하지 못하는 체계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거나 감당하지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당원이나, 단체의 회원을 그저 소비자처럼 개인으로 환원시켜 보는 것에도 한가지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서사적인 나, 이웃의 이웃, 이웃의 3승처럼 연결되어 있는 그물속의 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입을 시켜야 하는 개인으로만 보는 것은 아닌가? 머리말만 겹쳐는 것이 아니라 몸이 겹치고 겹쳐, 한 일곱번쯤 겹쳐야 친구의친구에게 진심이 동심원처럼 퍼지는 것이 현실 아닌가? 그렇다면 이념이나 하고자하는 정치적 판단을 주입시켜서 당장을 끌고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관심을 둬야하는 것은 당원이 회원이 끌고 가는 아우라를 함께 봐야하는 것은 아닐까?

함께 느껴야 하는 가슴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이념과 정치적 양식을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면에서 진보는 순수한 것이 아니라 순진하기 그지 없는 것은 아닐까?

제발 가입해주세요라고 애원하는 것보다, 친구의친구의 아우라속에 몸의 겹침이 일곱번 있는 것과 어느 쪽이 회원가입율이나 당원 가입률이 높을까? 해보기나 한 것일까? 그런면에서는 다단계나 보험의 집요함은 벌써 과학과 철학을 몸으로 넘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돈만 관심이 있어서 그렇지만... ...
 

[ 강독 조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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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적에 목숨 거는 대학
    from 파란여우의 뻥 Magazine 2011-04-14 15:06 
     올해들어 카이스트에서 네 명의 대학생이 자살을 했다. 징벌적 등록금 제도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자가 죽는 것이 미안해서 교수도 죽었다. 카이스트는 영재들이 모인 학교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방식을 ‘미국식 명문대’ 로 지향하는 카이스트의 ‘강제된 경쟁’ 방식은 공감이 안된다. 미국대학이 세계대학의 롤모델로 이상적인 대상인가? 한국풍토에 맞는 방식이란 정녕 없단 것인가? 그렇다면 미국식 경쟁위주 교육이 대세라는 말인데 학문의 탐구가..
 
 
 

 뱀발.  

1. 새로운 삶, 새로운 길, 새로운 관계....와 종언. 역사는 끝났는가? 아마 개인주의자의 역사는 끝이 났다. 발명을 시기하고, 새로운 인물을 시기하고, 새로운 인물이 이 세상을 구원해낼 것이라고 하고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발명을 해내고,  모의를 하구,  먼저 이론을 발표하고...그것들이 우리의 삶에 끼어들어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서로 가져가고 싶어 안달할 수 없는 것일까?


2. 많은 연구자들이 바디우도 좋고, 지젝도 좋고, 들뢰즈도 좋고 화이트헤드도 좋고 그렇게 연구를 이어나가곤 하는데, 개인적으론 김영민님을 학자들이 너도나도 서로 연구하고 싶어 안달했으면 좋겠다.  

3. 언저리의 사유와 인문의 힘, 그가 몸을 끄을면서 옮기는 꿰미를 보면서, 그래 담을 넘어봐야지, 삶의 담을 너머... ...삐죽 다른 길이 있겠지 싶다.  홀로주의자의 시대는 가고 어떻게라도 다른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지식인축에도 들지못하는 시대가 성큼 왔으면 좋겠다.  

4. 주말 바쁜 틈으로 한켠에 있던 책을 조금조금 살금살금 보고 느끼다.  

5. 생산양식에 따라 생산관계가 결정된다? 삶의양식으로 삶의 관계가 결정된다면...어떻게 다른 삶들을 살아갈까가 회자되었으면 싶다. 머리로만 움직이는 진보가 아니라 손발이 함께 움직이는 진보의 삶을 따라하고 싶을 것이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길, 새로운 삶, 새로운 삶들로.....사리사욕을 채우는 인문이 아니라 배워남주는 인문이 시도해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 강독 조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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