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발.
1. 새로운 삶, 새로운 길, 새로운 관계....와 종언. 역사는 끝났는가? 아마 개인주의자의 역사는 끝이 났다. 발명을 시기하고, 새로운 인물을 시기하고, 새로운 인물이 이 세상을 구원해낼 것이라고 하고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발명을 해내고, 모의를 하구, 먼저 이론을 발표하고...그것들이 우리의 삶에 끼어들어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서로 가져가고 싶어 안달할 수 없는 것일까?
2. 많은 연구자들이 바디우도 좋고, 지젝도 좋고, 들뢰즈도 좋고 화이트헤드도 좋고 그렇게 연구를 이어나가곤 하는데, 개인적으론 김영민님을 학자들이 너도나도 서로 연구하고 싶어 안달했으면 좋겠다.
3. 언저리의 사유와 인문의 힘, 그가 몸을 끄을면서 옮기는 꿰미를 보면서, 그래 담을 넘어봐야지, 삶의 담을 너머... ...삐죽 다른 길이 있겠지 싶다. 홀로주의자의 시대는 가고 어떻게라도 다른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지식인축에도 들지못하는 시대가 성큼 왔으면 좋겠다.
4. 주말 바쁜 틈으로 한켠에 있던 책을 조금조금 살금살금 보고 느끼다.
5. 생산양식에 따라 생산관계가 결정된다? 삶의양식으로 삶의 관계가 결정된다면...어떻게 다른 삶들을 살아갈까가 회자되었으면 싶다. 머리로만 움직이는 진보가 아니라 손발이 함께 움직이는 진보의 삶을 따라하고 싶을 것이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길, 새로운 삶, 새로운 삶들로.....사리사욕을 채우는 인문이 아니라 배워남주는 인문이 시도해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 강독 조금 + ]
4부 동무공동체와 장소화
욕망은 개체와 항목을 향한 물신주의이지만 희망은 전체와 관계를 향한 정향입니다...전체상을 문제시하지 못하는 운신은 한갓 사적 낭만주의에 머물거나 차이들에 대한 소비주의적 관리에 그칩니다....동무란 그 전체상을 문제시하는 통전적 시각을 유지하되, 한 곳 한 곳에 발을 딛고 욕망과 소비의 삶이 아닌 새로운 버릇의 길을 뚫어내려는 연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227
희망의 반대말은 체계이며, 그 체계가 용인하고 격려하는 욕망들이며, 그 욕망들이 전달되거나 모방되는 친구/애인/남인 것입니다. 224
개인에게 자연스러운 '욕망'과 그 개인에게 결코 자연스럽지 않을 수도 있을 '희망' 사이의 거리를 살피는 일은 '다른 삶'을 꿈꾸고 공동체를 실천하려는 이들의 일차적인 화두일 수밖에 없습니다. 222
개인 속에 머무는 희망은 단지 '욕망'일 뿐이라고 재평가해야 하겠지만, 문제는, 희망은 개인을 기원으로 삼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의 공동체, 혹은 공동체의 희망은 개인의 욕망이나 이해관심을 전적으로 타매하는 금욕주의나 출세속주의일 수 없습니다. 혁명적 공산주의에 대한 일부의 비판적 해석에서 잘 드러났듯이, 개인의 생활세계에 터를 두는 욕망과 이해관심을 사상하거나 억압한 채 이루어지는 슬로건 정치는 그 종교주의적 템포나 전망 탓에 오히려 양날의 칼이 되는 법입니다. 222
우리 시대의 박잡-현란한 꼴들은 제 '생각'에 사로잡힌 자유이거나 제 '마음'과 짝하는 개성인 탓에 제가 누운 자리(틀)조차 돌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자라면 오직 '틀'과 더불어-로부터가 아니라-깨어나는 법이다. 지망지망 틀을 깨려는 몸짓 속에서 외려 깨어질 것은 바로 너다. 207
마치 산책이라는 긴 공부길에서, 생활양식이라는 허리가 든든하게 중심을 잡아줄 때라야 활성화되는 손과 발(글과 말)의 근기와 슬기 그리고 가슴과 영혼의 온기와 결기로써만 가능해지는 희망의 장소잡기와 같다. 그리고 그 모든 산책은 오직 비평의 행위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결국, 어긋내고 어울려서 어리눅은 듯이 뚫어내는 인문학의 지혜인 것이다. 203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자적 자아; 자본의 융통과 축적을 위해 과거를 손쉽게 망각할 수 있는 자아, 상처와 슬픔마저도 소비의 쾌락으로 대체할 수 있는 자아, 현재의 기분(사랑)과 변덕(소비)와 허영(지식) 속에서 자본제적 삶의 개성을 추구 구가하는 자아는 당대의 증상과 그 기원을 은폐하거나 회피하며 이로써 풍경 속의 문화소비자적 주권에 만족한다.199
동시대의 우리들에게는 우선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발본적인 비평의 실천이 없이는 새로운 공부도 새로운 삶도 가능하지 않다....이제는 관료제나 기업과 같이 정당성의 논리를 갖춘 합리적 체계들이 자본제적 삶의 전 포괄적 계열화 속에서 접속하거나 확산하는 세속의 시공간 그 자체가 피로와 상처와 슬픔의 진원지가 된다. 192
측은지심이란 지식이나 이데올로기, 혹은 특정한 상황에 매개된 감정이 아니라, 존재 일반에 대한 존재구속성의 자각과 이에 따른 동정심에 보다 가까운 것이다. 삶의 불확실성이라는 사실에 기초해서 상실과 취약성에 근거한 공동체의 가능성을 말하는데, 우리들의 연대 속에 조형해야 할 희망의 원리는 역설적으로 '살아내고 있는 순간의 어두움'에서 잉태하는 것이다.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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