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에게  악수를  청해봅니다. 

억새에게  악수를  권해봅니다.  

손안에  님의  머리결 

님의  부드러운  뺨이 

남습니다. 

                  님꽃들로 또 다른  

        삶의 결을 어루만집니다. 

 

뱀발. 짬을 내어 강변을 거닐다. 겹쳐난 억새와 갈대에게 손을 내밀어 보듬어 본다. 움찍 손에 잡히는 감촉이 새롭다. 또 저편의 갈대꽃을 어루만져보고, 솜털같은 억새꽃을 보듬어 본다. 만지고 어루만져야 겨우 느낄 수 있다. 좀더 새로운 시선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가을이 무르익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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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1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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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산업사회의 사회주의를 넘어서 ing

 후기: 파괴적인 성장과 생산의 저성장

  뱀발. [공산당 선언] 과 그 사이 공백, 150년의 현실을 넣으며 이론적 빈틈을 메운 또 다른 <<선언>>으로 읽힌다. 99:1을 앞으로 백년은 기우뚱하게 만들지 않을까? 좀더 구체적이고, 좀더 현실적으로, 자본의 발걸음을 차곡차곡 내면화하면서 현실의 질곡을 깨뜨릴 한발을 요구한다.라고 읽는다.

 

우리의 필요에 관해 숙고하고, 그 필요를 충족시킬 가장 나은 수단들에 관해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고, 이 논쟁에서 주체적으로 집단적 선택들을 이끌어낼 욕구나 능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 함축된 의미를 볼 때, 필요를 기반으로 생산과 소비를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정치적으로 전복적인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은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들이 서로 연합할 수 잇고, 서로 의논할 수 있고, 함께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197 중

그리고 그 생각은 '자본'과(이나) 국가가 투자, 생산, 혁신을 결정하는 영역에서 소유하는 독점권이 폐기되어야 하는 걸 전제한다. 그 생각은 모든 사람이 어떤 합의의 과정을 통해 소비의 본성과 수준에 대해 요구할 수 있어야 하고, 금지해야 할 소비와 넘어서서는 안 될 한계선들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197 하

이러한 전제들은 자본주의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최대한의 효율성과 최소한의 낭비를 선택하는 일은 그 시스템의 합리성과 너무 모순되기 때문에, 거시경제 이론에는 그런 일을 고려할 수 있는 수단들 조차 있지 않다....(중략)...물건들은 부서지고, 기능성을 잃고, 유행이 지나고, 폐기되는 속도가 빠를수록 국내 총생산은 증가하고, 정부의 회계사들은 우리는 부자라고 선전하게 된다. 약과 의료서비스 소비가 증가하는 한에서는, 심지어 육체적 상처와 병조차도 부의 증가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199 상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일이 발생하도록 해보라. 그러니까 우리가 건강하게 되어 약을 덜 소비하고, 우리가 상품들을 반평생 동안 사용하고, 그 물건들이 유행에 뒤지거나 기능이 떨어지지 않고, 쉽게 수선될 수 있고, 심지어 보수를 받는 전문가의 작업을 거치지 않고서도 쉽게 변형할 수 있다면, 이때는 물론 국민총생산이 감소할 것이고, 우리는 더 적은 시간 일하고, 덜 소비하고, 덜한 필요를 느낄 것이다. 199 중

생산이 '자본'의 이윤적 요구에 종속되어 있는 경제를, 생산이 필요에 종속되어 잇는 경제로 어떻게 대체할 수 있을까? 축적과 성장의 명령에서 벗어난 생산양식만이 내일을 절약하기 위해 오늘을 투자할 수 있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더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상품들을 또한 더 적게 생산하며 모든 필요를 충족해야 한다. 200 상

우리는 자본주의 틀내에서는 생산력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의 문턱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상품의 본성, 기술, 생산단계들이 필요를 지속적이고 공평하게 충족하는 일은 물론, 공동체가 충분한 것으로 받아들인 수위에 맞게끔 사회적 생산을 안정화하는 일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엔가는 모두가 충분한 부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더 많은 양'과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대신에 경제 외적이고 비상업적 가치들을 추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게는 낯선 것이다....그러니까 우리가 지금보다 덜,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하고 소비하면서도 더 잘살 수 있다는 것, 또한 지금부터 필연성의 영역을 자발적이자 집단적으로 제한한다면, 그리고 이렇게 제한하는 일만이 자율성의 영역이 확장되게끔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예증할 수 있을 때만 그런 형식이 될 수 있다. 201

이런 이유에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 새로운 소비, 생산,협업의 방식을 '사회적으로 실험하는 일'이 중요성을 갖는다. 개인과 기초공동체들의 자율성을 늘리면서 적은 자원으로 더 많은 양의 더 좋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게 하는 대체기술들도 마찬가지다. 201상

각자가 평생에 걸쳐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을 2만 시간 수행하며 사회적 대가를 확실하게 받는 일, 그리고 각자가 그 시간을 연속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한 활동섹터나 여러 활동섹터에서 원하는 만큼 하는 일, 이런 모든 일은 규제와 보상의 중앙기구, 곧 국가가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203 상

따라서 현 시스템을 대체한다는 것은 가내경제와 마을 자급자족의 시대로 회귀한다는 것도, 모든 활동들을 완전하고 계획적으로 사회화한다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 일은 각자의 삶에서 그 일이 만족스럽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을 최소한 줄인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가 목적인 자율적이고 집단적이고(/이거나) 개인적인 활동을 최대한 늘린다는 것이다. 203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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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20년 안에 생활수준이 50퍼센트 높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아세요?'라고 물을 때, 그들은 이말의 이면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두 번째 자가용을 소유할 필요성에 그들의 주위를 지속적으로 끌지 않는 한, 그들은 그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의 생각 속에서 수요가 생겨나야 하고, 그들로 하여금 두 번째 자가용을 소유함으로써 생기는 편익을 경험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196

고르는 광고주 사장의 이야기를 빌려 '자본'이 어떻게 공급에 상응하는 수요를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머리 속에서 욕망하게 하고, 그 편익을 경험하게 하라.' 거꾸로 사회주의라고 실험하거나 시도한 현실은 생각 속에 수요가 생겨나게 하고, 편익을 경험하게끔 정치를 한 적이 있는가?라고 되묻는다. [사회주의를 넘어서]라는 4장 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자본이 거대화하기 위한 과정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과 국가의 역할, 정치와 사회운동과 정당의 관계를 면밀히 되짚고 있다.

4. 필연성의 영역과 국가


규모의 경제가 더 많은 생산량과 이익을 낳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수익을 계산하는 과정에는 자본의 집중화로 생겨난 사회적 투자금과 비용은 배제된다.( 도로를 건설하는 일, 신도시를 만드는 일, 신도시의 운영비용과 행정비용, 노동자들을 위해 더 많은 교통예산을 들이는 일) 이렇게 도출된 사회적 비용들을 사회구성원 전체가 부담하는데, 이것에 보이지 않는 비용을 덧붙여야 한다. (기하급수적으로 환경에 파급되는 파괴적인 효과, 주민들의 증가하는 발병률,....이런 사실로 수요가 공급에, 국민의 욕구가 '자본'의 기술-금융적 요구에 종속되는 일이 일어난다. 공급되는 상품에 적합한 소비자를 만들어내려는 경영전략이 생겨나고, 최대량의 상품을 판매하려는 경향과, 이와 상관적으로 에너지,원료, 국가의 기반시설과 서비스를 최대한 소비하려는 경향이 생겨난다. 170-171 

자본의 집중이 빨아들이는 부분에서 미처 게산하지 못하고 지나친 부분을 다시 셈해보자고 한다. 지금이야 생태적 파괴에 대한 비용을 현실적으로도 실감할 수 있겠으나, 대기업의 손익계산서에서 누락되는 비용과 노동자의 임금에서 늘어나는 부분이 계산되어야 한다. 어쩌면 가사일도 그러할 것이다. 도중 이반일리히의 문제의식을 인용하고 있기도 한데, 경제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그림자노동과 GDP에 속하지 않는 거래들이 실제로 사회를 유지하는데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는 점도 거꾸로 상기해야 될 것이다.

어떤 비판이든 전복적 행위가 되고, 어떤 문제제기든 복종의 거부 혹은 미시사회에서라면 사랑의 거부가 된다. 따라서 중요한 일은 필연성의 영역과 자율성의 공간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 운영의 필연성을 법,금지,의무사항으로 객관화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개인들이 폭넓은 자율성을 얻고 자신에게 고유한 목적들을 위해 서로 연합하고 협력할 자유가 있는 영역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습과 구분되는 "법'의 존재, 사회와 구분되는 국가의 존재가 필요하다. 이런식으로 타율성과 자율성의 영역이 분리될 때만 객관적인 필연성과 의무사항들을 매우 제한된 공간에 둘 수 있고, 그 필연성과 의무사항들에서 완전히 해방된 자율성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잇다. 180 

고르는  기존의 선과 악이라는 해석에서 벗어나 현실을 선-악사이의 매개물을 주시한다. 그래서 필연성과 자율성의 영역을 분리해서 사고할 것을 주문한다. 이것은 자칫

각자가 해야 할 일을 객관적으로 정의할 때만, 필연의 노동 시간과 자유로운 활동의 시간을 구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각자가 어느 때가 자신과 타인들과의 관계들이 물적 필연성(가령 오물처리, 기계기름칠, 기차의 정시운행, 열매의 냉해방지 등)에 따라 객관적으로 정의된 관계인지, 반대로 어느 때가 그 관계들이 자율적인 주관적 선택에 토대를 둔 것인지 알 수 있다. 두번째 카데고리의 관계들만이 도덕적 판단과 윤리의 영역에 속한다. 도덕은 필연성과 관계가 없이 존재하고, 필연성은 도덕과 관계없이 존재한다. 각 개인데 대해서는 외재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전 의무사항을 객관화할 때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지도자들의 개인적 권력에서, 그들의 사랑에 대한(혹은 사랑의 철회에 대한) 협박에서, 그들의 의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181

'후기산업사회의 사회주의'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국가의 철폐가 아니라 지배의 철폐다. '법'과 지배, 국가기구와 지배기구는 지금껏 항상 혼동되어 왔지만, 분리되어야 할 것들이다. 실제로 국가기구들은 모든 지배의 원천도 그 최종동기도 아니다. 그 기구들 자체는 지배의 사회관계 때문에(한 계급의 전 사회에 대한 지배때문에) 존재하고,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지배양식에 자신들의 고유한 지배양식을 추가하며 그 사회관계를 연장하고 강화한다...대규모 자본으로 생겨난 거대기구들에 의해 국가적 차원의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생겨나고, 이 수요가 충족되면 차례로 자신들의 고유한 권력으로 자본의 지배력을 더 강화하는 국가의 거대기구들이 태어난다....곧 타율성의 영역이 전 사회적 삶을 지배한다. 186

이런 이유로, 그 영역을 축소하는 일이 단지 국가의 영역을 축소하는 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타율성의 영역을 축소하려 할 때, 민영화, 공공서비스의 사적 섹터에로의 이양, 예산감축 등이 최우선적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 큰 규모 때문에 지배의 핵심수단들이 되는 다른 모든 도구나 기구들을 함께 축소하지 않는 한, 국가의 영역과 그 기구들의 영역을 축소하는 일은 타율성의 영역을 축소하는 일로 연결되지 않는다.

국가는 이런 이중의 축소에서 필수불가결한 도구다....국가는 협업과 중앙적 규제 수단들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끝으로 국가는 자율성 영역의 확장을 위해 스스로의 권력과 고유 영역을 축소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187

스스로 변화하기 위해 국가를 이용하고 국가로 하여금 스스로의 목적에 이바지하게끔 만드는 사회가 그 결과를 위해 국가를 조직할 때만, 국가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과 행위를 평범화하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런데 국가의 변화는 사회가 변화하기 위한 조건이다. 187 하

그 변화는 시간적으로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지배게급과 국가기구의 지배를 무력화하는 자율성의 공간들을 열어놓는 사회투쟁들이 사회 내에서 이미 활성화되어 있을때만, 국가는 사회에 대한 지배기구가 되지 않고, 이 결과 사회가 변화를 위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도구가 될 것이다. 어떤 정치적 변화에 대해서든, 새로운 유형의 사회관계, 새로운 방식의 생산,연합,노동,소비를 정립하는 일이 첫 번째 조건이다. 사회투쟁 운동의존재는 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자유와 새로운 법과 국가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지렛대 역할을 한다. 188 상

운동을 실천하는 일만으로도 새로운 자유들이 태어날 자율성의 공간을 창조하고 확장시킬 수 있다. 반대로 그 운동을 실천하는 일만으로는 새로운 "법"과 국가의 토대를 마련할 수는 없다. 그 운동의 실천은 구사회관계들의 망을 찢고 수정할 수 있지만, 이 일만을 할 수 있다. 그 실천은 사회의 기능에서 생겨나는 타율성의 영역이 가능한 최소한의 공간을 차지하게끔 시스템으로서의 사회를 물적으로 재조직하고 기능하게 만들 운명도 그렇게 할 수단도 지니고 있지 않다. 188하

이런 일들은 국가에 일임할 수도 운동을 통해서 실천할 수도 없다. 그 일들은 고유하게 정치영역에 속한다. 정치는 자율성 영역(시민사회내에서는 운동을 통해 이 영역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의 성장과 (물적시스템으로서의 사회가 기능하는 과정에서 생겨나고) 국가가 운영하는 필연성의 일 사이의 긴장이 자리하고 항상 갈등이 유발하는 중개의 공간이다. 정치는 사회가 생산활동을 전체적 과정으로서 의식하고, 그 과정의 결과들을 다루고, 그 제약들을 통제하려 시도하는 특정한 공간이다. 189 상

이런 이유에서 정치는 국가와 동일한 것으로 혼동되지 않을 때만, 또한 시민사회의 증대하는 열망과 동일한 것으로 혼동되지 않을 때만, 제 기능을 행사할 수 있다. 정치는 자율성에 대한 요구와 기술적 필요 사이에, 주관성과 객관적인 제약들 사이에 위치하지만, 그중 어떤 것과도 동일시되기를 피할 때만 중개,재고,조정의 공간이 된다. 오히려 정치는 그 두 축들이 최대한 긴장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즉 그 두 축들의 목적들, 가능성의 조건들, 이 목적과 조건들에 이르는 방법에 대한 논쟁들이 항상 명료하게 존재하고 그 논쟁들에 대해 열려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189하

따라서 정치의 본질적 목적은 권력의 행사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기능은 권력을 제한하고, 조정하고, 법제화하고, 그것에 수단과 목적들을 부여하고, 그것이 제 기능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이다. 정치와 권력 혹은 정치적 투쟁과 권력을 위한 투쟁을 혼동하는 일은 정치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때 정치는 시민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운동과 시스템으로서의 사회를 운영하는 일 사이에서 중개를 맡는 대신, 국가운영에 필요한 기술적 요구사항들을 시민사회에 전달하고 어떤 운동의 기미나 의지가 보여도 국가가 닦아놓는 길로 회유하는 일방적 중개의 공간이 된다. 190상

실제로 사회가 (사회를 전체주의적으로 운영하려는 국가에 장애물이 되고 또한 국가로부터 끊임없이 자율성의 공간들을 빼앗아 오는) 운동,열망,투쟁,욕망,자율적 거부들로 활성화되어 있을 때만 정치는 특정한 공간으로서, 정당은 특정한 힘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만일 정당들이 자율적 운동들로부터 단절된다면, 기술관료 직위에 오를 각 후보들의 장점을 떠벌리는 선거기계들로, 곧 필연성의 영역을 운영하는 국가기관으로 환원된다. 190하

 

뱀발. 조금 꼼꼼하게 느낌들을 적고 싶은데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4장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면서 메모할 예정이다. 3장은 따로. 잠을 챙겨야할 시간이네.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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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원론적 사회를 위하여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것과 반대로, 개인이 자신의 사회적 존재와 완전한 동일성을 이루기란 불가능하고, 또한 그의 사회적 존재가 그의 개인적 실존의 모든 차원을 통합하기도 불가능하다. 개인적 실존은 완전하게 사회화될 수 없다.

그 실존에는 본질적으로 내밀하고, 개인적이고, 직접적이고(곧 매개하기가 불가능하고),(다른 사람들과의) 공유의 것이 결코 될 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 애정, 사랑, 미학적 창조오 즐거움(혹은 환희), 고통, 사별의 슬픔, 고뇌를 사회화 할 수는 없다. 그 역의 과정도 진실이다. (개인들의 활동이 자연적 법칙을 따라 이루어지는) 공동의 물질적 공간 내에 개인들이 서로 공존한다는 사실에서 필연성의 일들이 생겨날 때, 이 일들을 개인화 할 수는 없다.

도덕은 항상 반항으로 시작한다. 한 개인이 "나는 할 수 없어. 그렇게 할 수 없어"라고 선언하며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순간 도덕은 태어난다. 이 할 수 없어가 도덕적 요구의 토대를 이루는 행위, 도덕적 요구의 코기토다. 그것은 "객관적 도덕성"과 이것의 혀실 지배에 대한 반항, 자신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인간이란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절대적그오 부정하며 전혀 다른 차원의 현실의 이름으로 행하는 반항이다. 149상

"내가 이것을 원할 수 있을까?" 내가 방법적 측면에서나 결과적 측면에서 스스로 그 행위를 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행동하면서 "바로 나야. 내가 이것을 이렇게 하기로 원했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객관적 도덕성"의 특성은 개인들에게 이런 종류의 질문을 하지 않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 개인들에게는 탐구할 것도 의심할 것도 없다.(당, 교회가 이 사실을 보장한다.) 149하

사람은 (육체와 정신으로부터) 다른 종류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활동을 교대로 수행하지 않는 한 소진된다. 다른 모든 활동을 배제한 채 타율적 노동을 온종일 수행할 때 그렇고, 이것은 자율적인 활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기 아즈나르가 주목했듯이, 누구도 하루에 12시간 동안, 한 해에 300일 동안 내내 창조적으로 일할 수 없다. 정신력과 육체적 힘을 강도 높게 요구하는 활동과, 머리나 마음을 비우게끔 하는 노동 사이를 오가는 것이 정신과 몸을 균형있게 유지하고 인격을 성장케 하는 원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온종일, 일생 동안 변화하지 않는 동일한 유형의 노동을 하게끔 강요받지 않는다면, 타율적 노동을 폐기하는 일의 불가능성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니다.

또한 아무것도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 축제,커뮤니케이션,즐거움의 기회가 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문화란 그렇게 필요의 것을 임의의 것과 여분의 것으로 제약하는 것, 물적 명령의 것에 이를 초월하는 미학적 감각을 덧입히는 것이다. 167

사회적으로 결정된 노동을 없앤다 하더라도, 혹은 각자가 객관적으로 필요한 모든 일의 완수규칙을 내면화하도록 설정했던 외부적 의무들을 폐기한다 하더라도 해방은 생겨나지 않는다. 반대로 해방은 필연성의 영역이 타율적인 일들을 강요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타율적인 일들의 기술적 요구사항들은 도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정확한 규칙을 정해 그 일들을 특정 사회공간 내로 한정시키는 데 있다. 필연성의 영역과 자율성의 영역을 분리하는 것이 후자의 영역을 최대한 확장하기 위한 조건이다.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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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ng
    from 木筆 2011-10-31 13:39 
    후기: 파괴적인 성장과 생산의 저성장 뱀발.우리의 필요에 관해 숙고하고, 그 필요를 충족시킬 가장 나은 수단들에 관해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고, 이 논쟁에서 주체적으로 집단적 선택들을 이끌어낼 욕구나 능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거기에 함축된 의미를 볼 때, 필요를 기반으로 생산과 소비를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정치적으로 전복적인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은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들이 서로 연합할 수 잇고, 서로 의논할 수 있고, 함께 주
 
 
 

 

 

 

뱀발.  

1. 유니의 절박함이 눈에 밟혀 맘이 편치 못하다. 보자마자 터뜨리는 울음이 그렁그렁하여 다독여도 삭혀지지 않는다. 같이 눈물을 흘려주는 친구들과 샘, 그리고 문자로 인해 어떡하냐는 우려는 조금씩 잦아들기는 한다. 하지만  아침, 녀석은 잔생각으로 또 눈시울이 벌겋게 될 정도로 아픔을 겨워낸 듯 싶다.  슬픔이란 것이 이렇게 몸으로 토해내는 것인지 새삼 느낀다. 몸과 가슴 손발로 번져나오는 것이라고... ... 절실함을 채워주지 못한 아빠의 빈자리가 내내 걸린다. 어떻게 해야할지 마음이 좌불안석이다. 

2. 낙방한 친구가 내려와 할머니집보다 시내가 좋을 듯하여 전화를 하니 받지 않는다. 마음을 읽은 것인지? 시내에서 수다와 여기저기 구경삼아 맘을 풀고 있는 듯하다. 지난 한주의 동선이 꽤나 버거웠던 것 같다. 몸산책 삼아 마실을 나서다. 대학 교정과 산책로, 강변은 낙엽으로 가득하다. 억새와 갈대...사이로 난  달을 담다. 월평공원 쪽으로 난 길을 따라들어가니 숲길이 아늑하고 운치있다.  3:00 12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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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오랜만에 괜찮은 책을 만난 듯 싶다. 앙드레 고르의 [사회주의를 넘어서]와 권력의 자장과 반론을 가정한 글쓰기의 척도를 보여주는 존스튜어트 밀의 책 [여성의 종속], 그리고 조금 시기가 늦은 듯 싶지만 명랑좌파를 꿈꾸는 우석훈이 얼마나 글쓰기에 곤혹스러웠는지? 그리고 노무현시대를 다시 보기엔, 그리고 작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현실을 퉁~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는지 다시 보여준다. 역사는 기회를 가끔씩 준다. 되돌아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당분간은 그리 늦지는 않을 듯 싶다. 앞만 쳐다보고 걷지 않는다면 말이다.

 

 

 

 

 

  

 

 

 

 둘. 요즘 우울하십니까?는 그래도 요기할 만한데,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 아직도 난감하다. 감성들이 들쭉날쭉 여기저기 형채를 볼 수 없듯이 붙어 있는 듯한데...적다보니 묘하게 땡긴다. 나쓰메 소세키 소개서와 이진경님의 책을 골랐다.     

   

 

 

 

 

 

 

 셋. 러셀에 관한 만화책 [로지코믹스]는 자서전에 충실을 기해서 만들었고 평들대로 탄탄하다. 하지만 자서전 만은 못한 것을 각오해야 한다. 촘스키책은 조금 많이 실망이다. 70년 강연을 묶은 것인데 참조만 해야할 듯 싶다.

 

 

 

 

 

 

 

넷. 도서관에서 빌린 그리기 관련 책들. 한권 더 있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천소양의 그림을 보다 놀랐는데, 그는 사실대로 그리는 허구를 깨치기 위해 노력한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느낌을 그리고 추상명사를 그리고, 낙서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법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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