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은 과정을 사유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다.
19p 그리스와 중국: 자연은 원하고, 겨냥하고, 착수하며, 능란하고, 목표를 세운다. 그런데 중국의 현자나 전략가는 자연처럼 ‘변화시키려는’ 바람을 나타낼 뿐이다. 20p 사람들은 당신을 찬양하지 않을 것이다. 영웅담도 서사시도 없다. 24p 연인 - 그들이 이제 더 이상 영향을 줄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의 차원은 점차 개인의 차원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더 단순하고 실효성 있는 사실 아닌가?
1장 주체/행동과 다른 관점: 변화
27-28 이행과정의 존재 자체, 즉 그것의 핵심이 바로 이행과정인 그 존재 자체를 사유하는 데 있다. 그런데 유럽인의 사유에는 이행과정이 ‘존재’에 속하지 않으므로 벗어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사유를 멈추고, 아무 할 말이 없어 침묵에 빠진다. 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변화는 ‘고요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회색: 잘라 내어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분명한’ 색깔이다. ‘둘 사이’를 ‘사이’ 그 자체로서 사유하지 못하는 것은 ‘둘 사이’에서는 ‘존재’를 규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스 방식의 전제를 따르자면, 흐릿한 ‘존재’는 없고, 구분되고 규정된 존재만이 있기 때문이다. 30p
이미 문장에 포함된 바대로 논리의 관점에서 보면, 양보절과 결과절이 어떻게 나란히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하고, 분리 위주인 우리 유럽 통사론을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이다. 而. 실제로 이행과정의 사유는 이 둘을 떼어 놓지 않고 동시에 생각할 것을 내포한다. 본질과 정체 규정의 관점이 아닌 사물들의 운행에 투입된 에너지의 관점이다. 33p
2장 변화 아래에서: 이행과정
차이가 아니라 간극: 다른 조망을 부각하고, 시도해 볼 새로운 기회나 모험할 것이 떠오르거나 떼어져 나오게 한다. 간극은 간극이 갈라놓은 것을 긴장 상태에 놓고, 그것을 갈라진 것들 각각에 의해 발견하며, 각각에게서 비춰 본다. 간극은 문화나 사유의 다양성을 얼마든지 사용가능한 자원으로서 생각하게 한다. 이 자원은 모든 지성이 스스로 확장되고 다시 모색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방기하는 대신 오히려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36-37p
각각의 사유를 분류함으로써 밋밋하게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맥 탐사가처럼 서로 간의 생산성을 탐색하면서 각각의 사유에서 끌어온 정합성을, 우리의 사유되지 않은 것을 사유하기 위해 시험해 보는 것이다. 39p
이행과정만으로도 철학의 오랜 유럽식 도구들이 해체되거나 탈구축된다. 이행과정은 다름 아닌 보편 형상, 가지계의 형상으로 ‘이데아’를 해체한다. 40p 존재가 구별되는 정의는 항상 격리하는 힘에서 비롯한다. 플라톤은 녹는 중의 눈을 사유할 수 없다. 41p 반면 도의 이미지는 특징화하는 대신에 모든 특징화 가능한 것을 제거한다. 현상과 감각 한가운데 우리를 머물게 하면서도 그것들을 지우는 쪽으로 우리를 이끈다. 여기서 무미 淡가 음미된다. 43p
중국 사유는 변화의 기체-주체로서 제3의 항을 전제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중국 사유에서는 어떤 것의 ‘펼쳐짐’에 반드시 다른 것의 ‘응축’이 답하지만, 동시에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전환되고 이 다른 것을 통해서만 쇄신될 수 있다. 따라서 ‘실체’의 필연성은 지워지고 변화 아래 유지되‘는 어떤 것’의 관념은 엉뚱한 것이다. 여기서 ‘자기동일성’의 관념 자체는 해체된다. 45-46p
3장 눈은 녹는다(또는 존재를 위한 입장은 이행과정의 사유를 가로막는다)
변화에 대한 생생한 지각을 되찾으려면 우선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을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 표상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운동과 마찬가지로 변화를 서로 잇따르는 위치들로 분할하여 파악함으로써, 간격이 통과되는 이행을 놓친다. 49p
플라톤이 “되어가는, 하는, 사라지는, 변하는” 등으로 ‘성질에 따라’ 분절하면서 말해 본다. 하지만 곧바로 끝난다. 왜냐하면 그리스어는 ‘존재자들’의 분절만이 아니라 격변화, 빈위규정, 성, 수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심지어 등위사로 연결되었을지라도 현상을 나타내는 이 수식어들은 존재에 기대어 있고 그들 사이에 공백을 계속 온전히 남겨 두기 때문이다. 51-52p
철학의 질문이 아무리 철저하더라도 모든 철학은 관용어법에 묶인 채 나중에서야 나타난다. 철학은 관용어법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철학자의 사유는 언어가 ‘접어 놓은’ 것으로 나타나고, 결정론이 자신의 사유를 짓누르게 두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성향을 미리 준비시키는 것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55p
담론을 위해 기능한 기체로서 사물, 남쪽의 ‘존재’를 이루는 주체는 없다. 여기서도 변화는 술어 양상에서 열거를 통해 포착되기에는 너무도 전면에 걸친 분위기의 변화이며 이행과정은 지도위에 표시되기에는 너무도 끊임없는 것이다. 56p
시는 지루하다. 특질이 정해지는 ‘사물’들을 항상 전제하기 때문이다. 바다는 잿빛이고 하늘은 어둡다는 등으로 말하고 만다. 57p
4장 변용에 시작이 있는가?
자연을 음양이라는 상관 요소들로 본 중국인들과 달리, 그리스인들은 자연을 운동하는 물체로 보고 논의함으로써 변화를 운동을 본떠서 생각했다. 59p 늙음이 이행과정 대신에 목적성과 늘어남의 두 논리 사이에 취해지면서 해독불가능하게 된다. ‘삶’이라 불리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목표로 한 것의 목적과 끝의 관점 아래 정리되는 것도 아니고 (도약이나 회전의 경우처럼) 변화-운동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 이해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61p 그리스의 오해는 목적의 차원에 속하는 것과 결과의 차원에 속하는 것을 서로 혼합된 채로 유지했다. 모든 결말을 도착지로 생각했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늙음은 아무 데도 ‘향하지’ 않으며, 반복해서 말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는 늙음의 결과를 차츰차츰 헤아리기 때문이다. 63p 유럽철학은 늙음을 침묵에 빠트렸고 끝만을, 즉 죽음만을 염두에 두었다. 하이데거도 그렇다. ‘향함’과 도착점의 사유, 무엇을 위해서와 앞으로 다가옴의 사유이다. 64p 욕망을 “죽느냐 사느냐”와 같이 현기증 나게 매혹하는 그야말로 존재론 차원의 양자택일이 첨예화하고 드라마틱해지며 절대화되는 논점이, 다른 한편으로는 서스펜스와 그 해소, 실추와 구원, 신비와 부조리가 동시에 극화되는 논점이 그것이다. 65p 모든 것의 의미라는 관점에서 죽음에 대해 묻지 않고서 죽음에 접근했을 것이다. 죽음은 신비로 이끌지 않듯이 더 이상 부조리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죽음은 의미 바깥일 것이다. 65p 삶은 나를 “힘들게 하고” 늙음은 나를 “편안하게 하며” 죽음은 나를 “쉬게 한다” 늙음은 삶과 죽음 사이의 이행과정이나 완충으로서 정당한 자리를 부여받는다. 죽음이 문제로서 초점화되도록 두면 이 문제는 끝이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죽음에 대해 논의하지 않으면 죽음은 사물들의 운행에 서서히 흡수되고 고요하게 이해된다. 원체 죽음은 고요하다. 67p
5장 이행과정 또는 횡단 - 늙음은 항상 이미 시작되었다.
주체의 변화가 아니라, 상황에 내재한 전개과정으로서 그 상황 속에서 진행되는 경향에 따라 이행되는 것을 그리스의 아이티아구도에 따라 인과성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대립하며 보완하는 음양의 효로 조합되고, 이 효들 사이의 관계만으로도 도래할 진화 과정을 양극성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81p 化의 개념은 그 자체로 變의 개념과 쌍을 이룬다. ‘변’은 우선 음악에서 반음의 변화이고 주역의 운영에서 음효에서 양효로, 또 양효에서 음효로의 대체로서 사물들의 ‘변-화’의 거대한 운행, 더 넓은 수준에서 하늘과 땅의 양극성에서 비롯하고 실재 전체의 ‘틀을 잡는’ 모습 그대로의 운행을 뜻한다. 83p
6장 반전의 모습
변화는 언어에 대한 우리의 사용법 자체와 관계가 있는바, 훨씬 더 은밀하고 숨겨진 방식으로 고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립하는 규정들을 각각의 정의에 가둬 두고 각각의 본질에 굳어지게 하면서 서로 격리시키기 때문이다. ‘젊음’과 ‘늙음’, 또는 ‘힘’과 ‘약함’, 또는 ‘삶’과 ‘죽음’을 떼어 놓고 보며, 고정된 규정들에 불과한 것 아래에서 한 규정이 다른 규정으로 이행하는 것은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하게 된다. 103p
7장 삶의 유동성(또는 어떤 것이 이미 다른 것이 되어 있는가?)
그리스인들 이래로 우리는 개념상의 분류 및 분리를 통해 정당화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시간’의 용어로 포장했고, 시간을 우리 삶에 대해 지배권을 가진 수수께끼 같은 원인으로 세웠다. 시간은 사유되지 않은 것을 이름 붙여 구별하기 위해 우리가 발명해 낸 허구의 드라마 배역이 아닐까? 105p
(1)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자연을 운동하는 물체의 관점에서 논의 함으로써 동체 A의 동체 B로 이동, (2) 그리스 형이상학은 시간을 영원성과 대립시키는데, 여기서 시간은 이제 분할 가능하고 연속된 크기가 아니고 끝없는 계기와 변질이 결합된 측면의 시간이다.(3) 유럽언어들은 동사 변형이 있다.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형태론을 분리하며, 따라서 우선 시간을 어떤 시간에서 다른 시간으로의 이행으로 생각한다. 107-108p
8장 시간들을 발명해야만 했는가?
사건은 동화 불가능한 것을 내포하거나 외부를 가리킨다. 여기서 동화 불가능한 것과 외부는 단지 인과에 의한 모든 설명을 초월하고 해석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사건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대로 사건은 숙성보다는 급격한 돌출의 사태인가? 또는 어떤 점에서 사건은 귀결보다 마주침으로 생각되어야 하는가? 즉 이 마주침이 가정하는 바깥, 나아가 통합 불가능과 더불어 마주침으로 생각되어야 하는가? 121-122p 사건은 유럽에게 그토록 소중한 단절의 이데올로기를 가장 잘 뒷받침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철학을 풍부하게 하고 있다. 126p 중국 사유는 매 순간 작동하는 이행과정의 현상에 천착함으로써 사건의 마력을 해소하는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 중국은 서사시도 또 극화로서 구성된 극작품도 짓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하자. 고대 중국은 한결같이 때에 맞는 적응을 위해 사건의 예외성을 희생시켰다. 131p
미디어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된다. 왜냐하면 사건은 고유의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건은 고전 존재론을 벗어난다. 사건은 선별되고 처리되며 자기 주위에 말과 구경거리를 엉겨붙게 하는 방식에 따라 견고함과 성과를 갖는다. 뉴스는 일상의 기도가 아니라 조직된 구경거리를 의례화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명백하다. 사건-오락이라고 말해야 할까? 사건-오락의 신뢰성은 우선 그 분량에 기인하고 순환주기에 따라, 놀라게하고-열중하게 하고-분노하게 하고-기분을 전환시키고-다시 잠잠해진다. 사건은 사건 놀이를 한다. 왜냐하면 사건은 소비되기 때문이다. 133-136p
9장 사건의 신화
10장 부족한 개념: 역사, 전략, 정치
프랑수아 줄리앙, 『고요한 변화』 그린비
볕뉘.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하지만 고요한 변화가 십여년 먼저 출간되었다. 탈봉인, 재귀성의 관점에서 잘 된 책이다. 한병철처럼 다작하는 듯싶다. 아포리즘과 책의 중간. 괜찮은 컨셉이라고 여긴다. 번역이 많이 되면 좋겠단 희망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