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그건 사실을 바로잡거나 레토릭으로부터 진실을 가려내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실존 조건을 바꾸는 문제이지요. 그것도 몇 명이 아니라 70억명의 실존 조건을요.  브루노 라투르.

1.

내 쪽에 앉은 임원들은 ‘왜 사람들이 환경 위기가 불거지는 가운데에도 행동하지 않는가‘에 대해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고있었다. 바로 그때 스즈키가 나를 바라보더니 특유의 직설 화법으로 질문을 던졌다. “왜 우리가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는 증거가 이렇게 많은데도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걸까요? 그리고 정부에 행동을 촉구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5

2.

다시 말해 우리는 실제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건을 설명하려고 이야기를 지어내느라, 그러고 나서 그 이야기를 변호하느라 정작 새로운지식을 배우지는 못한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와 설명을확신하게 되며 이런 확신은 배움을 가로막는다. 데이비드 스즈키가 던진 중대한 의문에 대답하고자 한다면 새로운 배움이 절실히 필요한데도 말이다. 17

3.

우리가 처한 상황이 불가피하거나 통제를 벗어난 상황이라고 단언하는 것은현명한 전략이 아니다. 이는 정치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불가피한 문제를 두고는 정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다른 가능성이 없다는 메시지, 너무 늦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도 할 수가 없다. 사람들의 정치적 관심을 자극하려면 라투르가 제안하듯이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의지를 꺾어버리는 메시지라면, 근거가 완벽한 메시지라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대중으로부터 어떤 반응도 이끌어내지못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다. 과학은 불가피하거나 불가항력적인 문제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107

4.

라투르는 말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을 사적으로 검토합니다. 사람들이 과학계를 신뢰하던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요. 완전히 불가능한,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라투르가 사실을 버려야 한다고, 진실을 제쳐놓아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진실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라투르는 절대적 진리가 오직 실험실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공적 영역에서는 진실이 여러 얼굴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광장에서는 모두가 자신이 진실을 말한다고 공언하는데 과연 우리가 어떻게 진실을 판별할 수 있을까? 우리는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즉 서로의 의견 차이를 인정하고 싸우지 않기로 합의해야 한다.

˝진실은 상황을 왜곡합니다. 사실 진실은 그리 과학적인 용어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진실은 우리로 하여금 대화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니 진실이라는 개념을 버려야 합니다. 객관성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이 심판관 역할을, 논쟁의 결정권자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결정권자가 없으면 우리는 함께 모여서 다양한 의견을 나눌 수 있다. 공통 기반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함께 논쟁을 벌일 수도 있다. 누군가 광장에 와서 “내게 소중한 가치가 있어. 이 가치는 누구도 짓밟아서는 안 돼” 라든가 “내가 사실들을 알고 있어. 이 사실들은 반박 불가야” 라고 말한다면 어떤 논의도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라투르는 우리가 문명이 변화하는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109

볕뉘.

바꿀 수가 없다. 객관이라는 잣대. 중립이라는 잣대 역시 그러하다. 회피하거나 도망가게 만들지 마라. 논쟁이라는 것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으니 바꾸고 싶다면 궁금하게 만들어라. 그 길밖에 없다. 인간은 인지부조화의 편향된 존재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비단 환경문제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문제를 사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시대이기에 조심스럽게 싸움을 걸어야 한다. 아니 정말 제대로 싸워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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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이론도 나와 남을 나누는 이분법의 사고가 아니라 내게 이로운가 해로운가로 나누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갈급하다고 한다. 아직도 면역의 그물망, 면역 네트워크를 살피는 견해가 부족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평생을 바친 면역연구전문가의 입장이기도 하다.


1.

팬데믹 시대, 면역학자의 질문들

실제로 코로나 19가 전 지구적으로 번진 2020년 1년 동안 전 세계의 면역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을 구하고자 치열하게 연구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 면역반응은 잘 작동하는가?‘ ‘회복 후 항체 및 기억 T세포는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항체 및 T세포 면역반응은 바이러스 돌연변이에 의해 쉽게 무력화되는가?‘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후 왜 사람마다 무증상, 경증, 중증과 같은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가?‘ 11~12

2.

우리는 늘 서로의 환경이다. 면역은 (…)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즉 비스가 통찰한 면역은 우리 각자가 가진 면역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가지는 면역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집단 면역의 개념과 일치한다. 우리는 보통 환경이라 하면 자연이나 도시 등 내가 있는 곳의 공간적인 외부 요인들을 떠올리지만, 사람을 하나의 개체 단위로 보면 나이외의 모든 사람은 나의 환경이 된다. 이는 반대로, 나 또한 상대방을 중심으로 보면 누군가의 환경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백신을 접종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개인 선택의 문제를 떠나 우리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이는 배신이 지닌 사회 집단적인 의미를 시사한다.
126



3.


미국의 면역학자 폴리 매칭어 Polly Matzinger는 나와 남의 구분이라는 면역학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정립했다. 매칭어가 논문에서 제시한 위험이론dangerous theory에 따르면 면역반응이란 나와 남이라는 이분법에 따라, 즉 외부에서 유입된 낯선 물질이라고 무조건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5

면역반응은 외부로부터 유입된 남이 무해하다면 일어나지 않으며, 반대로 내 것이라고 하더라도 유해하다면 작동한다. 이는 오늘날 연구를 통해 증명되었으며 실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개념이다. 위험이론에 따르면 나와 공생하고 있는 장내세균은 남이지만 무해하므로 면역반응을 유발하지 않는다.

면역학 발전의 초기 단계에만 하더라도 면역반응에 관한 연구는 어떻게 나와 남을 구분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나와 남보다는 무해한 것과 유해한 것의 패러다임에 따라 면역 현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학문의 개념과 이론은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연구를 통해 끊임없이 다듬어지면서 보다 정교하게 발전한다.

170

4.

면역세포들 간의 네트워크 관계 한 가지를 추가로 밝히는 데만 해도 최소 몇 년의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면역학이 학문적 영역을 넘어 우리 삶과 중첩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면역 네트워크에 있다.

여러 차례 설명했듯이 항체는 면역반응에 의해 본래부터 몸속에 존재하는 물질이며, 항체의 원리를 활용해 감염을 예방할 수 있도록 개발한 것이 백신이다. 즉 백신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지만 항체가 원래 가지고 있는 면역반응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바이러스에 결합하는 항체를 항체 치료제로 개발해 환자 치료에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바이러스 질환만이 아니라 다른 질병에 대해서도 항체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각 질병의 면역 네트워크를 보다 정교하게 파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장 좋은 예가 류머티스관절염이나 염증성 장질환, 건선과 같은 자가면역질환이다. 이전에는 이런 자가면역질환의 발병 기전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1980~1990년대에 걸쳐 수행된 수많은 연구들을 통해, 각 질환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면역세포들 간의 네트워크는 꽤  잘 이해하게 되었다

193

볕뉘.

책을 받아들고, 서문의 질문과 결론을 좀더 일찍 얻고 싶긴 했나보다. 결론은 없고, 마지막장부터 읽기 시작해, 중간부터 다시 시작한다. 하지만 답은 앞 부분에 있었다. 아래를 보시면 된다.  AZ 접종 사흘째 어제 해열제 두 알을 먹은 이후로 체온도 그리 오르지 않는다. 덕분에 푹 자고 체중도 줄었다.

뒷부분의 자가면역질환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최신 결과들에 대해서도 반갑다 싶다. 덕분에 생쥐들 좀 그만 괴롭혔으면 싶다. 생쥐면역학이 아니라 인간면역학이라는데 한표. 나와 남의 구별에 결정적인 분별을 2006년 장내세균이라는 연구결과 발표인 듯싶다. 인간 세포보다 100배나 만은 남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문제에 놓인 것 같다.

면역학도 자가 발전하는데 정치는 굳이 나와 남의 이분법에 사로 잡혀 있을 이유는 또 무엇인가. 곁의 나를 이롭게 만드는, 지금보다 나은 것을 만드는 것에 목숨을 걸어라. 니편내편 나누지 말고... .

0.

코로나19 가 사라질 가까운 미래

코로나19 백신의 경우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언론을 통해서는 주로 중화항체에 대한 보도를 접할 수 있는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T세포다. 코로나 19백신 접종을 통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중화항체가생긴다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들어오더라도세포 안으로의 침투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중화항체가 생겼다 하더라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이를 회피하며 세포를 감염시킬 수도 있다. 이때 백신으로 유도된 기억 T세포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를재빨리 제거해준다면 우리 몸속에 코로나19 바이러스가그리 많이 증식하지 못하고 신속히 회복될 수 있다.

한편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최근 보고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한 번도 노출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도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기억 T세포 반응이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들이다. 어떻게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기억 T세포가 존재할까?

비밀은 감기를 일으키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감기의 원인이 되는 여러 가지 바이러스 중에는 감기 코로나 바이러스도 있다고 언급했다. 감기 코로나 바이러스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는 다른 바이러스지만 크게 보면 동일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속하기에친척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친척 바이러스다 보니단백질 구성에서도 어느 정도의 유사성이 있다.

이런 바이러스 간의 유사성 때문에, 감기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감염 경험을 흔하게 가지고 있을 경우 코로나19 바이러스에도 반응할 수 있는 기억 T세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면역학에서는 교차 면역반응이라고 한다. 감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형성된 기억 T세포가 조금은 유사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해서도 면역반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에 감기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린 적이있는 사람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걸리더라도 더 약한 감염을 겪게 될까?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지만 현재까지 정답은 알 수 없다. 면역의 문제는 간단한 원리와 달리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문제가 얼기설기 엮여 있기 때문이다.

최근 뉴스를 보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변이에 대한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되어 세계적으로 접종을 하기 시작했는데, 변이 바이러스가 나오면 백신이 무용지물이 될지 모른다는 염려다.

실제로 어떤 회사의 백신은 남아공에서 생긴 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예방 효과가 크게 떨어진다는 뉴스가 전해지기도 했다. 스파이크 단백질 부분에 변이가 일어날 경우 백신으로 생성된 중화항체가 더 이상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세포 침투를 막아주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변이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할까?

바이러스 면역학자의 시각에서 봤을 때,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앞서 이야기한 T세포다. 면역학계에 T세포의 존재가 알려진 지는 이미 꽤 시간이 흘렀지만, 백신을 개발하는 백신 회사나 이를 활용하는 방역 당국은 아직도 중화항체만을 주로 의식하고 T세포는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만약 T세포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변이 바이러스에 대해 조금은 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중화항체는 바이러스 단백질에서도 좁은 한 부분에만 집중적으로 결합하는 특성이 있는 반면, T세포는 바이러스 단백질 내에서도 여기저기 다양한 부분을 인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바이러스가 설사 변이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T세포의 감시망을 완벽히 빠져나가기는힘들다는 의미다.

물론 T세포를 고려했을 경우 변이 바이러스의 출현에대해 조금 덜 걱정해도 되는 대신 양보해야 하는 것도 있다. 백신의 예방 효과에서 중화항체가 주 역할을 한다면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게 하는 효과가 크겠지만, T세포가 주 역할을 한다면 감염을 막는 것이 아닌 중증으로 진행되지 않고 빨리 회복되게 하는 효과로 만족해야 할지모른다.

이는 앞서 자세히 설명한 중화항체와 T세포의 작동원리를 생각해보면 그 이유가 추론된다. T세포는 세포가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에감염된 세포를 빨리 제거해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는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코로나 19의미래 시나리오도 어느 정도 그려진다. 현재 개발된 백신이 전 세계적으로 접종되는 와중에도 변이 바이러스는계속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어떤 회사는 재빨리 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새로운 백신을 개발하겠지만 이런 끝이없는 게임을 계속할 수는 없다. 다행인 것은 그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백신에  의한  기억 T세포를 가지게 될 것이다.

10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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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학은 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무엇을 하고자 한 것이나 있는 것일까. 문학과 예술의 역할에 대해 다시 묻는다. 기후 위기의 시대, 과학이 떨어나오지 않은 시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그 지평을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


1.

근대 소설은 “전례 없는 사건은 배경(background)으로 밀어내고 나날의 일상을 전경(foreground)으로 끌어내는 식의 변화를 겪었다.‘

그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을 추방하고 일상을 부가하는 소설이 태동하기에 이른다. 32

2.

‘평범함‘? ‘온건함‘? 자연이 대체 어떻게 이런 단어들과 함께 연상되기에 이르렀을까?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연상에 불신감을 드러내는 것은 지구 온난화가 인간 문명을 꽃피우게 한 시기 즉 홀로세(Holocene) - 에 누린 상대적인 기후 안정성을 토대로 구축된 수많은 가정을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다. 그와 반대되는 우리 시대의 관점에 의하면, 부상하는 부르주아적 질서의 현실 안주와 자신감은, 지구가 인류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자유로이 주조할 수 있다고 가정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인류를 농락했음을 보여주는 기묘한 사례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지만 19세기는 실상 소설에서도, 지질학에서도 자연을 온건하고 질서 정연한 것으로 가정하던 시대였다. 이야말로 새로운 ‘근대적’ 세계관의 확연한 특징이었다. 반킴은 자연을 온건하지 않게, 극단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동시대 시인 마이클 마두수단 다타(Michael Madhusudan Datta)를 비난하는 데 비상한 노력을 기울인다. 35

3.

하지만 이제 우리의 시선은 되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불가사의하고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들이 인식(recognition)이라는 감각을 일깨워준 듯하다. 즉 인간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우리는 늘 스스로가 더없이 분명하게 우리 것이라 여겨온 요소- 의지·사고·지각과 관련한 능력 - 를 공유하는 온갖 유의 존재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해준 것이다. 그것 말고 달리 어떻게 지난 10년 동안 인문학 및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비인간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즉 그것 말고 달리 어떻게 범심론(別心論: 만물에 마음이 있다.는 생각 - 옮긴이)에 새롭게 관심이 생기고,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옮긴이)의 형이상학, 사물 지향적 존재론, 행위자 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뉴 애니멀리즘(new animalism)의 중요성이 부상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새로운 인식의 타이밍은 그저 우연일까? 혹은 그 동시 발생(synchronicity)은 인간의 사고 과정에 그들 자신을 끼워 넣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독립체들이 숲과 같은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는가? 47

4.

2005년 7월 26일에 뭄바이에서 살아가는 수백만 시민에게는 삶이 결코 이전과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이례적인 폭우가 마침내 오랫동안 널리 만연한 통설, 즉 비이는 그 어떤 유의 충격을 받아도 신고 파괴될 수 없는 탄성 회복력을 지녔다는 설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2005년 폭우를 겪은 뒤 시민 단체, 비정부 기구, 심지어 주 의회들조차 다투어 수많은 권고 사항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인 2015년 6월 10일 또 한 차례 폭우가 발생했을 때, 그들의 권고 사항 가운데 이행된 조치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강우량이 2005년의 3분의 1에 불과했음에도 그 도시의 상당 부분이 다시 홍수에 잠기고 만 것이다. 67




5.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공공의 안전과 관련한 경우에조차 건설업계 로비를 억제할 만한 시민 단체가 거의 없다. 실상 오늘날 전 세계적인 수많은 연안 도시의 ‘성장‘은 위험에 질끈 눈을 감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69

6.

정확히 거의 미친 것처럼 보이는 강박적이고 편집적인 사람들만이 스스로 뿌리째 변화하고 올바르게 준비할 수 있다.

만약 모든 사회와 정책이 지구 온난화에 적응하려면, 마치 전시나 국가비상사태처럼 그에 요구되는 결정을 정치 제도 내에서 집단적으로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그것이 바로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서 정치가 해야 할 몫 아닌가? 집단의 생존과 정치적 통일체의 보존 말이다. 76

7.

초과(물의 개념은 합리성과 이성에 바탕을 둔 근대적 사유 체계 밖에 존재한다. )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점점 더 확실하게 우리 삶과 밀착하는 접착력에 의해 규정된다. 그중 가장 안전한 주제인 날씨에 관해 말하는 것조차 이제 부인론자인 이웃과 입씨름을 벌일 위험을 내포한다. 초과물은 국민 국가의 경계와 불연속성을 조롱한다. 이러한 연관성은 ‘공간‘의 구분에 도전함으로썩 벵골, 루이지애나주, 뉴욕주, 뭄바이, 티베트 그리고 알래스카주를 가리지 않고 경험의 연속성을 만들어낸다. 87

8.

“유대교의 중심에는 말과 글이 아니라 자연과사건을 통해 만난 신이 있다. 반면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날씨, 기후, 정치권력과의 관련이 덜하고 말과 글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종교 형태다. . ˝

하지만 심지어 그런 기독교 내에서조차 인류가 독단적인 신 앞에서 과감하게 스스로를 고립시킴으로써 자기 신성화를 꾀할 꿈을 꾼 것은 개신교가 도래하고 난 뒤의 일이다. 그러나 비인간을 침묵하게 만드는 그 꿈은 결코 완벽하게 성취된 적이 없다. 심지어 오늘날 볼 수 있는 근대성의가장 핵심부 내에서조차 아니었다. 실제로 비인간이 지닌 행위 주체성의한 측면은 테크놀로지와 나란히 공존할 수 있는 그들의 불가사의한 능력이다. 인간이 만든 아이패드나 아이폰 같은 물건을 능숙하게 다루는 오늘날의 10대와 20대도 우리 환경 안에는 어디에나 그 나름의 행위 주체성이 숨겨져 있음을 여전히 의식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베스트셀러 서적이나 많은 돈을 거머쥐는 영화가 꾸준히 늑대 인간, 뱀파이어, 마녀, 변신 가능한 사람, 외계인, 돌연변이 종, 그리고 좀비 따위가 등장하는 작품에 그토록 유별난 관심을 기울이겠는가?

따라서 비인간의 행위 주체성과 관련해 진정한 미스터리는, 그것을 새삼스레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런 인식이 애초에 적어도 지난 수세기 동안 주축을 이룬 사고 양식과 표현에서 억압당한 경위다. 필시 그 과정에서는 문학적 형식이 중요한, 아마도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해왔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처음 시작하면서 제시한 전제 - 즉 급격히 변화하는 지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어깨너머로 바라보는 또 다른, 똑똑히인식하고 있는 눈들이 있음을 알아차리도록 만들어준다 .91

9.

18세기와 오늘날 사이에 완전히 뒤바뀐 한 가지 플롯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다름 아니라 문학적 전통이 과학과 맺고 있는 흥미로운 관계다.

근대성이 태동할 무렵 문학과 과학의 관계는 대단히 밀접했으며,

괴테 역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자신이 가진 문학적 관심과 과학적 관심 사이에서 아무런 충돌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광학 실험을 시행하고, 오늘날까지 설득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허먼 멜빌 역시 해양 동물 연구에 관심이 깊었으며, 그 주제에 관한 상당한 식견은 응당 《모비딕》에 상세히 실렸다. 나는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의 수학에서부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의 화학에 이르기까지 그 밖에도 수많은 예를 인용할 수 있지만 딱히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 98

10.

그렇다면 문학 창작과 과학은 어쩌다 그토록 심각하게 서로 갈라서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라투르에 따르면, 분할하기 프로젝트는 늘 그와 유관한 기획의 지지를 받고 있다. 바로 자연을 전적으로 과학에 위임함으로써 문화와는 무관한 영역으로 남겨두려는 의도를 지니는, ‘정화(purification)라고 표현되는 기획이다. 이는 혼성체(hybrid)에 대한 구별과 억압을 수반한다. 공상과학 소설을 주류 문학과 구별되는 장르로 규정하는 것이 정확히 그러한 예다. 그들 사이에 그어진 선은 오로지 정돈(neatness)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최근의 근대성이 지닌 시대정신은 자연~문화 혼성체를 결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99




11.

《소금도시》는  ‘전체로서 인간‘에 관심을 기울인다.”

빼어난 문단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분명하게 밝힌 소설 개념이 비록 세계의 상당 부분에서, 특히 영어권 국가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음에도 실제로 말로 표현되는 경우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업다이크의 소설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소설을 우화나 연대기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개인의 도덕적 모험‘이라는 구절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자문하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왜 소설의 모험에 관한 정의에, 말하자면 지적·정치적 혹은 영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도덕적’이라는 표현을 써야 하는가? 대체 어떤 점에서 《전쟁과 평화가 ‘개인의 도덕적 모험‘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가? 분명 내러티브에서 몇 가닥은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전체 가운데 극히 일부만을 설명해줄 따름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착수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강력한 견해를 피력했다. 《전쟁과 평화》는 소설이 아니고 긴 시는 더 더욱 아니며 역사적 연대기는 더 한층 아니다. 이 말의 의도는 전술한 형식들을 통합하고 대체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멜빌의 《모비딕》에도 드러나 있는 야심이다. 이러한 작품들을 ‘개인의 도덕적 모험‘이라는 틀 틀에 욱여넣는 것은 필시 작가의 의도를 협소화할 우려가 있다. 107

12.

하지만 지구 온난화 시대는 비인간의 새롭고도 비판적인 목소리가 들리도록 해주었는데, 그 목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의 그 사실주의자들이 끝내 너무 지쳐버린(used-up’ 것은 아닌지 묻게 만든다. 존 스타인벡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아방가르드가 결코 달가워하지 않은 존재였으며, 유명한 이야기지만 언젠가 라이어널 트릴링(Lionel Trilling: 1905~1975. 미국의 문학 평론가 옮긴이)으로부터 소설가라기보다 소설의 사회적 기능에 더 관심이 많다는 이유로 비난받은 바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오늘날 지구의 미래에 관해 알려진 바를 충분히 인식한 상태로 스타인벡
을 다시 돌아본다면, 그의 작품은 폐기되기는커녕 그 반대임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비인간 속에 인간이 시각적으로 재배치되는 광경을 본다. 미처 ‘그 용어가 만들어지기도 전에(avant la lettre: before the letter 옮긴 이 기후변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하나의 형식, 하나의 접근법을 보게 되는 것이다. 110


볕뉘.

대혼란의 시대는 문학, 역사, 정치의 세 파트로 나눠져 있다. 생각보다 분량이 길어져 이대로만 남겨야겠다. 기후 위기는 아시아의 역할이 더 크다. 피해와 가해 동시뿐만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해석 역시 그러해야 한다고 한다. 정치 역시 파리협정문과 카톨릭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비교하고 있는데, 그 무게를 제대로 감당해내길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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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통사회는 좋아요의 사회다. 진통사회는 좋음의 광기에 빠진다. 모든 것이 만족감을 줄 때까지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좋아요는 우리 시대의 징표이자 진통제다. 좋아요는 소셜미디어뿐만 아니라 문화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어떤 것도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 예술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인스타그램에 적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고통을 줄 수 있는 모서리나 귀퉁이, 갈등이나 모순이 없어야 한다. 고통이 정화한다는 사실은 잊혀진다. 고통은 카타르시스적인 작용을 한다. 만족의 문화에는 카타르시스의 가능성이 빠져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만족 문화의 표면 아래쪽에 쌓이는 긍정성의 찌꺼기에 에워싸여 질식한다. 13

2.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는 우리를 영혼의 내면관찰로 이끎으로써 현존하는 지배연관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잠재운다. 모두가 사회적 상황을 비판적으로 파고드는 대신 그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자신의 심리에 대해서만관심을 갖도록 이끈다.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할 고통이 사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로 간주된다. 개선되어야 할 것은사회의 상태가 아니라 영혼의 상태다. 영혼을 최적화하라는 요구는 실제로는 지배 관계에 적응하라는 요구이며, 사회적 폐해를 은폐한다. 이런 식으로 긍정심리학은혁명의 종언을 확정 짓는다. 혁명가들이 아니라 동기부여트레이너들이 무대에 올라 어떤 불만도, 나아가 어떤 분노도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22

3.

행복장치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사회의 탈정치화와 탈연대화를 초래한다. 각자가 스스로 행복을 추구해야한다. 행복은 사적인 문제가 된다. 고통 또한 개인적인 실패의 결과로 해석된다. 그래서 혁명 대신 우울이 있다. 자신의 영혼을 치료하려고 이리저리 애쓰는 사이에 우리는사회적 불화를 낳는 사회적 연관을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를 괴롭힐 때, 우리는 그 책임이 사회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함께 느끼는 고통이야말로 혁명의 효소다.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는 이런 고통의 싹을 질식시킨다. 진통사회는 고통을 의학적 문제로, 사적인 문제로 만들어 탈정치화한다. 이를 통해 고통의 사회적 차원을 억압하고 은폐한다. 피로사회의 병적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만성적인 고통은어떤 항의도 낳지 않는다. 24

4.

면역학적으로 조직된 사회는 냉전 시대처럼 울타리와 장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공간은 서로 분리된 구획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면역학적 방벽들은 상품과 자본의 유통속도를 늦춘다. 냉전 종식 후 대규모로 진행되는 탈면역과정인 세계화는 상품과 자본의 흐름을 가속화하기 위해 이런 방벽들을 철저히 제거한다. 효과적으로 면역 작용을 하는 적의 부정성은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 체제에 적합하지 않다. 이 체제 안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과 전쟁한다. 타자 착취 대신 자기 착취가 일어난다. 32

5.

고통은 처음에 이야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둑”이다. 하지만 이 둑은 “이야기의 물살이 충분히 강해서 그것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행복한 망각의 바다로 휩쓸어간다면” “무너진다.” 아픈 아이를 쓰다듬는 엄마의 손은 이야기가 흘러갈 강바닥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고통은 이야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둑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 자체가 이야기의 강물을 불어나게 하여 이 강물이 고통을 휩쓸어가게 만든다. 고통이 비로소 이야기가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럴 때만 고통은 실제로 “배를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마르지 않는 물을 지닌 강” 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탈서사적 시대에 살고 있다. 이야기 Erzählung가 아니라 계산Zählung이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서사는 몸의 우연성을 극복하는 정신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모든 병을 치유할 수도 있다는 벤야민의 생각은 일리가 있다. 39

6.

고통공포는 심지어 고통을 유발할 수도 있다. 외부로부터 오는 수많은 고통을 막아내야 하는 훈육된 몸은 둔감하다. 이 몸은 완전히 다른 지향성을 갖는다. 이 몸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 몸은 외부를 지향한다. 반면 우리의 관심은 훨씬 더 우리 자신의 몸에 쏠려 있다. 테스트 씨처럼 우리도 강박적으로 몸속에 귀를 기울인다. 이 나르시시즘적이고 건강염려증적인 내면관찰이 우리의 과민성의 한 가지 원인일 것이다. 41

7.

고통의 근저에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놓여 있다. 예컨대 억압은 부정성의 폭력이다. 타자가 억압을 행사한다. 그러나 타자만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과도한 성과, 과도한 소통, 과도한 자극으로 나타나는 긍정성의 과잉도 폭력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부하負荷로 인한 고통을 낳는다. 오늘날 주로 심리적 긴장이 고통을 낳고 있는데, 이런 긴장은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의 특징이다. 이런 긴장은 자기공격적인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성과주체는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다. 성과주체는 쓰러질 때까지 자발적으로 자신을 착취한다. 노예는 주인이 되기 위해, 나아가 자유를 얻기 위해 주인의 손에서 채찍을 아 자신을 때린다. 성과주체는 자신과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에서 발생하는 내적 압박Pression은 성과주체를 우울
Depression 로 몰아넣는다. 또한 만성적인 고통을 낳는다. 46,47

8.

고통은 인간 현존재의 중력을 형성한다. “기쁨이 커질수록 그 안에 숨어 있는 슬픔도 더 순수해진다. 슬픔이 깊을수록,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기쁨도 더 간절히 부른다. 슬픔과 기쁨은 서로의 안으로 들어가 유희한다. 닦이 가까워지게, 그리고 가까움이 멀어지게 함으로써 기쁨과 슬픔이 서로 어울리도록 조율하는 유희 자체가 고통이다. 그래서 가장 높은 기쁨과 가장 깊은 슬픔은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고통스럽다. 그러나 고통은 유한자의 정조Gemüt를 조정하여anmuten 유한자가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중력을 얻도록 한다. 모든 동요에도 불구하고 유한자가 자신의 본질 안에 고요히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이 중력 덕분이다. 고통에 조응하는 ‘정조 muot‘, 고통에 의해, 고통을 향해 조율된 마음이 우울이다.” 72

9.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은 오늘날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의일시적인 중단만을 의미한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는 오직 소비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의 총계 이상의 것이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계는 아우라를, 나아가 향기를 잃는다. 이 세계는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은 타자의 다름, 즉 타자성 Alteritat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타자성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다. “근원적 거리˝81없다면 타자는 너가 아니다. 타자는 그것으로 사물화된다. 타자는 그 다름 속에서 호출되는 대신 소유된다. 75

10.

티자에 대한 무방비성을 ˝영혼의 나체성Seederracktheit˝라고 부른다. 타자가 내게 안겨주는 불안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이 불안은 타자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게 만든다. “그는 자신의 가린한 인간관계에 대해, 자기 마음속의 삶에 대해, 그리고 노년에 갈수록 더 다급하고 강렬하게 사랑하게 된 데 대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대신, 가장 친밀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줄곧 신경 쓰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갈수록 ‘냉철한 태도를 취하기가 어려워지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전혀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숨쉬기, 느끼기, 통찰하기가 아닌 모든 것을 경멸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영혼의 나체성은 타인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이 타인으로 인한 두려움을 통해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83


11.

이 책의 마지막 장은 “마지막 인간”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장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니체가 말한 “마지막 인간으로 체현되는 진통사회를 낳는다. 이 사회는 지속적인 마취화를 실행한다. 때때로 약간의 독을 주입. 이렇게 하면 기분 좋은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기분 좋은 죽음을 위해 다량의 독을 주입 […] 낮에도 작은 쾌락을 누리고, 밤에도 작은 쾌락을 누린다. 그러나 건강을 섬긴다. 마지막 인간은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라고 말하면서 눈을 깜빡거린다.”
85

마지막 인간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아니다. 그는 자유보다 안락함을 더 높은 가치로 간주한다.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념을 궤멸시키는 디지털 심리정치는 마지막 인간의 평안함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인간의 건강 히스테리는 그가 자신을 영구적으로 감시하도록 한다. 그는 자기 안에 내면의 독재를, 내면의 통제정권을 구축한다. 내면의 독재가 생명정치적 감시와 일치할 때, 시 감시는  더 이상 억압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감시가 건강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90,91

볕뉘.

상을 타야 유명해지는지도 모르겠다. 더 유명해지려는 욕망이 상을 갈망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수상소감으로 신음처럼 가려진 영혼들을 드러내는 것 역시 맞는 일인지도 감을 잡지 못하겠다. 확율이 낮더라도 심리적인 응어리를 풀어준다면, 어쩌면 상들은 가려지거나 비명이 난무하는 분야에는 우후죽순처럼 생겨야 하는 것인지도 헷갈린다.

짤려도 퇴직해도, 그만두어도 배우고 배우고 배우고, 어찌나 배울 것들은 많은 지, 하루하루가 빠듯하다조차 못해 잠이 늘 마중나와 스스로를 맞는다. 즙이 되도록 스스로를 갈아넣을 것이 없을 무렵, 건강과 기울기가 삐끗할 때 우울은 서슴없이 기어온다.

어쩌면 저자의 성실성과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저평가 되어있음을 느낀다. 뼈아픈 이야기임에도 기획하지 않고 다루지 않는다. 진정성과 성실함, 성과를 질투로 느껴서일까. 유독 지식인사회에서 더 인색한 것 같다. 나만의 느낌일까. 무엇을 얼마나 더해야 절규가 진실로 받아지거나 마음을 움직이는 지렛대로 쓰일 수 있을까.

그런 냉소들이 발화자에게조차 허허로움으로 되몰아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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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관련 책을 읽다가 술술 읽혀 책 속에서 글쓰기 책 두권을 소개받았다. 그 책들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트레이닝 서적이다.


1.

작가가 되는 방법의 시작은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어떤 작가를 경멸할 수는 있어도 글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 물론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반드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작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작가가 될 수 없고, 작가가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중에서 작가가 나온다고 믿는다.

‘감히 내가 작가를?‘

작가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제 쓴 글을 오늘 고치고, 내일도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이 작가라고 믿습니다. 글을 쓰기싫은 마음이 드는 순간에도 참고 쓴다면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쓰다 만 글을 끝내 완성하는 사람이 작가입니다. 글쓰기 PT를 시작한당신은 이미 작가입니다.

33

2.

조디는 카야의 부엌에 대롱대롱 매달린 외로운 삶을 보았다. 채소 바구니 속 소량의 양파들, 접시꽂이에서 마르고 있는 접시 하나, 늙은 미망인처럼 행주에 곱게 싸둔 콘 브레드에 고독이 걸려 있었다.

그동안 ‘외롭다‘는 표현을 할 때 쓸쓸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것 같았다‘ 라고 썼다면, 이처럼 사물을 통해 표현하는 방법을 새롭게 터득하는 거죠.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와 점점 닮아가듯,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닮고 싶은 작가의 글을 모방해서 자꾸 써보세요. 문장의 리듬을손끝을 통해 체화하세요. 필사 노트에 낯선 단어와 표현 방식을 채집하고 달아나지 않도록 꼭 붙잡아두세요. 종류별로 최신 장비를 보유한 수리공처럼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47

3.

노하우를 리스티클로 쓰면 글쓰기에 왜 도움이 될까?

- 정보를 선별하고 요약하는 훈련이 된다.

예를 들어 ‘시간 관리 잘하는 법’을 리스티클로 쓴다고 해보죠. 우선 내가 써본 방법이 떠오르겠죠? 시간대별로 해야 할 일을 엑셀에 정리해 기록해둔다든지, 중요도와 급한 일의 우선순위를 따져본다든지,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모두 쓸 수는 없으니 그중 ‘시간 관리 잘하는 다섯 가지 비법’으로 내용을 한정해보세요. 후보군 중 매력적인 다섯 가지를 취사선택합니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연습이 됩니다. 88

4.

기초 체력을 충분히 쌓았으니 오늘부터는 균형 잡힌 몸매를 만들어봅시다. 부위별로 골고루 글쓰기 근육을 단련하는 것이죠. 사물이나 사유를 세밀하게 표현하는 ‘묘사 근육‘, 상대방을 설득하는 ‘논리 근육‘, 없는데 있는 것처럼 창조하는 ‘상상 근육‘ 같은  것을 붙이면 어떨까요. 92


5.

그림을 썼으면 이제 자신이 리포터가 된 것처럼 상황을 중계하듯 ‘말 쓰기‘를 해봅니다.

그림 쓰기/말 쓰기

큰 초 두 개가 꽂힌 케이크 → 누군가 스무 살을 맞이했나 보네요.

고깔 모자를 쓴 친구들→ 친구들이 축하 파티를 준비한 모양입니다.
주변에 놓인 선물 상자→ 테이블 가득 쌓인 선물 상자를 보고

설레는주인공 표정→ 주인공 입이 귀에 걸렸네요. 114

볕뉘.

몇 가지 팁들을 남겨본다. 애써 시도해보지 않았던 방법들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싶은 내용들. 해보고 싶은 부분들에 대한 실전훈련 방법들이 재미있다 싶다. 자연스럽게 해보게 만드는 방법들이 배여 있다. 끝내주는 맞춤법 책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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