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문학은 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무엇을 하고자 한 것이나 있는 것일까. 문학과 예술의 역할에 대해 다시 묻는다. 기후 위기의 시대, 과학이 떨어나오지 않은 시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그 지평을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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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소설은 “전례 없는 사건은 배경(background)으로 밀어내고 나날의 일상을 전경(foreground)으로 끌어내는 식의 변화를 겪었다.‘
그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을 추방하고 일상을 부가하는 소설이 태동하기에 이른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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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 ‘온건함‘? 자연이 대체 어떻게 이런 단어들과 함께 연상되기에 이르렀을까?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연상에 불신감을 드러내는 것은 지구 온난화가 인간 문명을 꽃피우게 한 시기 즉 홀로세(Holocene) - 에 누린 상대적인 기후 안정성을 토대로 구축된 수많은 가정을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다. 그와 반대되는 우리 시대의 관점에 의하면, 부상하는 부르주아적 질서의 현실 안주와 자신감은, 지구가 인류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자유로이 주조할 수 있다고 가정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인류를 농락했음을 보여주는 기묘한 사례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지만 19세기는 실상 소설에서도, 지질학에서도 자연을 온건하고 질서 정연한 것으로 가정하던 시대였다. 이야말로 새로운 ‘근대적’ 세계관의 확연한 특징이었다. 반킴은 자연을 온건하지 않게, 극단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동시대 시인 마이클 마두수단 다타(Michael Madhusudan Datta)를 비난하는 데 비상한 노력을 기울인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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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 우리의 시선은 되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불가사의하고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들이 인식(recognition)이라는 감각을 일깨워준 듯하다. 즉 인간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우리는 늘 스스로가 더없이 분명하게 우리 것이라 여겨온 요소- 의지·사고·지각과 관련한 능력 - 를 공유하는 온갖 유의 존재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해준 것이다. 그것 말고 달리 어떻게 지난 10년 동안 인문학 및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비인간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즉 그것 말고 달리 어떻게 범심론(別心論: 만물에 마음이 있다.는 생각 - 옮긴이)에 새롭게 관심이 생기고,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옮긴이)의 형이상학, 사물 지향적 존재론, 행위자 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뉴 애니멀리즘(new animalism)의 중요성이 부상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새로운 인식의 타이밍은 그저 우연일까? 혹은 그 동시 발생(synchronicity)은 인간의 사고 과정에 그들 자신을 끼워 넣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독립체들이 숲과 같은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는가?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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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6일에 뭄바이에서 살아가는 수백만 시민에게는 삶이 결코 이전과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이례적인 폭우가 마침내 오랫동안 널리 만연한 통설, 즉 비이는 그 어떤 유의 충격을 받아도 신고 파괴될 수 없는 탄성 회복력을 지녔다는 설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2005년 폭우를 겪은 뒤 시민 단체, 비정부 기구, 심지어 주 의회들조차 다투어 수많은 권고 사항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인 2015년 6월 10일 또 한 차례 폭우가 발생했을 때, 그들의 권고 사항 가운데 이행된 조치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강우량이 2005년의 3분의 1에 불과했음에도 그 도시의 상당 부분이 다시 홍수에 잠기고 만 것이다.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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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공공의 안전과 관련한 경우에조차 건설업계 로비를 억제할 만한 시민 단체가 거의 없다. 실상 오늘날 전 세계적인 수많은 연안 도시의 ‘성장‘은 위험에 질끈 눈을 감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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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거의 미친 것처럼 보이는 강박적이고 편집적인 사람들만이 스스로 뿌리째 변화하고 올바르게 준비할 수 있다.
만약 모든 사회와 정책이 지구 온난화에 적응하려면, 마치 전시나 국가비상사태처럼 그에 요구되는 결정을 정치 제도 내에서 집단적으로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그것이 바로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서 정치가 해야 할 몫 아닌가? 집단의 생존과 정치적 통일체의 보존 말이다.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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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과(물의 개념은 합리성과 이성에 바탕을 둔 근대적 사유 체계 밖에 존재한다. )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점점 더 확실하게 우리 삶과 밀착하는 접착력에 의해 규정된다. 그중 가장 안전한 주제인 날씨에 관해 말하는 것조차 이제 부인론자인 이웃과 입씨름을 벌일 위험을 내포한다. 초과물은 국민 국가의 경계와 불연속성을 조롱한다. 이러한 연관성은 ‘공간‘의 구분에 도전함으로썩 벵골, 루이지애나주, 뉴욕주, 뭄바이, 티베트 그리고 알래스카주를 가리지 않고 경험의 연속성을 만들어낸다.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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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의 중심에는 말과 글이 아니라 자연과사건을 통해 만난 신이 있다. 반면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날씨, 기후, 정치권력과의 관련이 덜하고 말과 글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종교 형태다. . ˝
하지만 심지어 그런 기독교 내에서조차 인류가 독단적인 신 앞에서 과감하게 스스로를 고립시킴으로써 자기 신성화를 꾀할 꿈을 꾼 것은 개신교가 도래하고 난 뒤의 일이다. 그러나 비인간을 침묵하게 만드는 그 꿈은 결코 완벽하게 성취된 적이 없다. 심지어 오늘날 볼 수 있는 근대성의가장 핵심부 내에서조차 아니었다. 실제로 비인간이 지닌 행위 주체성의한 측면은 테크놀로지와 나란히 공존할 수 있는 그들의 불가사의한 능력이다. 인간이 만든 아이패드나 아이폰 같은 물건을 능숙하게 다루는 오늘날의 10대와 20대도 우리 환경 안에는 어디에나 그 나름의 행위 주체성이 숨겨져 있음을 여전히 의식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베스트셀러 서적이나 많은 돈을 거머쥐는 영화가 꾸준히 늑대 인간, 뱀파이어, 마녀, 변신 가능한 사람, 외계인, 돌연변이 종, 그리고 좀비 따위가 등장하는 작품에 그토록 유별난 관심을 기울이겠는가?
따라서 비인간의 행위 주체성과 관련해 진정한 미스터리는, 그것을 새삼스레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런 인식이 애초에 적어도 지난 수세기 동안 주축을 이룬 사고 양식과 표현에서 억압당한 경위다. 필시 그 과정에서는 문학적 형식이 중요한, 아마도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해왔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처음 시작하면서 제시한 전제 - 즉 급격히 변화하는 지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어깨너머로 바라보는 또 다른, 똑똑히인식하고 있는 눈들이 있음을 알아차리도록 만들어준다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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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와 오늘날 사이에 완전히 뒤바뀐 한 가지 플롯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다름 아니라 문학적 전통이 과학과 맺고 있는 흥미로운 관계다.
근대성이 태동할 무렵 문학과 과학의 관계는 대단히 밀접했으며,
괴테 역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자신이 가진 문학적 관심과 과학적 관심 사이에서 아무런 충돌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광학 실험을 시행하고, 오늘날까지 설득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허먼 멜빌 역시 해양 동물 연구에 관심이 깊었으며, 그 주제에 관한 상당한 식견은 응당 《모비딕》에 상세히 실렸다. 나는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의 수학에서부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의 화학에 이르기까지 그 밖에도 수많은 예를 인용할 수 있지만 딱히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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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문학 창작과 과학은 어쩌다 그토록 심각하게 서로 갈라서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라투르에 따르면, 분할하기 프로젝트는 늘 그와 유관한 기획의 지지를 받고 있다. 바로 자연을 전적으로 과학에 위임함으로써 문화와는 무관한 영역으로 남겨두려는 의도를 지니는, ‘정화(purification)라고 표현되는 기획이다. 이는 혼성체(hybrid)에 대한 구별과 억압을 수반한다. 공상과학 소설을 주류 문학과 구별되는 장르로 규정하는 것이 정확히 그러한 예다. 그들 사이에 그어진 선은 오로지 정돈(neatness)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최근의 근대성이 지닌 시대정신은 자연~문화 혼성체를 결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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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도시》는 ‘전체로서 인간‘에 관심을 기울인다.”
빼어난 문단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분명하게 밝힌 소설 개념이 비록 세계의 상당 부분에서, 특히 영어권 국가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음에도 실제로 말로 표현되는 경우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업다이크의 소설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소설을 우화나 연대기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개인의 도덕적 모험‘이라는 구절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자문하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왜 소설의 모험에 관한 정의에, 말하자면 지적·정치적 혹은 영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도덕적’이라는 표현을 써야 하는가? 대체 어떤 점에서 《전쟁과 평화가 ‘개인의 도덕적 모험‘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가? 분명 내러티브에서 몇 가닥은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전체 가운데 극히 일부만을 설명해줄 따름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착수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강력한 견해를 피력했다. 《전쟁과 평화》는 소설이 아니고 긴 시는 더 더욱 아니며 역사적 연대기는 더 한층 아니다. 이 말의 의도는 전술한 형식들을 통합하고 대체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멜빌의 《모비딕》에도 드러나 있는 야심이다. 이러한 작품들을 ‘개인의 도덕적 모험‘이라는 틀 틀에 욱여넣는 것은 필시 작가의 의도를 협소화할 우려가 있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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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구 온난화 시대는 비인간의 새롭고도 비판적인 목소리가 들리도록 해주었는데, 그 목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의 그 사실주의자들이 끝내 너무 지쳐버린(used-up’ 것은 아닌지 묻게 만든다. 존 스타인벡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아방가르드가 결코 달가워하지 않은 존재였으며, 유명한 이야기지만 언젠가 라이어널 트릴링(Lionel Trilling: 1905~1975. 미국의 문학 평론가 옮긴이)으로부터 소설가라기보다 소설의 사회적 기능에 더 관심이 많다는 이유로 비난받은 바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오늘날 지구의 미래에 관해 알려진 바를 충분히 인식한 상태로 스타인벡
을 다시 돌아본다면, 그의 작품은 폐기되기는커녕 그 반대임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비인간 속에 인간이 시각적으로 재배치되는 광경을 본다. 미처 ‘그 용어가 만들어지기도 전에(avant la lettre: before the letter 옮긴 이 기후변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하나의 형식, 하나의 접근법을 보게 되는 것이다. 110
볕뉘.
대혼란의 시대는 문학, 역사, 정치의 세 파트로 나눠져 있다. 생각보다 분량이 길어져 이대로만 남겨야겠다. 기후 위기는 아시아의 역할이 더 크다. 피해와 가해 동시뿐만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해석 역시 그러해야 한다고 한다. 정치 역시 파리협정문과 카톨릭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비교하고 있는데, 그 무게를 제대로 감당해내길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