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둘로만 나누는 습관은 몰지각한 것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흄의 질문이란 “정신은 어떻게 하나의 주체로 생성하는가?”라는 것이다. 흄에 의하면 정신이란 서로 관계를 갖지 않는 흩어진 관념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정신은 그 상태로는 어떠한 인식도 갖지 않는다. 정신이 어떤 의식을 갖는 것은 그러한 흩어진 관념들을 관계짓고 연합시킬 때이다. 말하자면 관념들의 단순한 집합이 하나의 체계가 될 때 인식이 발생한다. 천 번 태양이 떠오른다고 해도 내일도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어느 때에 우리가 그렇게 믿는다는 사태가 일어난다. 인식이란 그렇게 해서 우리가 본 적도 없는 것, 접한 적도 없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인식은 소여의 경험을 넘어서 있다. 관념들이 연합됨에 의해 이러한 믿음이 발생하고 소여의 경험을 넘어섬으로써 우리의 인식이 성립한다. 이것이 흩어진 관념의 단순한 집합이 하나의 체계로 생성함에, 요컨대 정신이 하나의 주체로 생성함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관념연합이라는 이론은 확실히 ‘저것보다는 오히려 이것이“를 설명할 수 없다. ”왜 하나의 특수한 의식 속에서, 이러이러한 순간에, 이 지각이, 다른 관념보다도 오히려 이 이러이러한 관념을 환기하게 되는 것일까? 다른 관념보다도 오히려 이 관념이 환기된다는 것은 관념연합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두 관념들이 상상 속에서 자의적으로 접합될 때조차도, 두 관념을 비교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우리가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그 특수한 정황. 이 정황이라는 개념은 흄 철학 속에서 항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러면 흄은 잘 알고 있지 못한 채 ‘정황’을 개념화하고 있던 것이다. 따라서 흄의 연합설이라는 철학적 이론은 지각, 관념, 경험, 믿음, 넘어섬, 그리고 정황이라는 요소에 의해 구성된 복잡한 것이 된다.
철학연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철학자에게 사유를 강요한 어떠한 질문, 그 철학자 본인에게조차 명석하게 의식되고 있지 않은 그 질문을 그려내는 것, 때로는 그 철학자 본인이 의식해서 개념화한 것도 아닌 ‘개념’마저 사용해서, 때로는 그 대상을 논하기에 불가피하다고 생각되는 주제를 뛰어넘는 것조차 꺼리지 않고 그 질문을 그려내는 것, 들뢰즈는 그것이야말로 철학연구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했다. 철학자의 의식을 넘는 것으로서의 사유, 즉 말해진 것과는 다르게 파악될 수 있는, 말해진 것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말해진 것 이전에 위치하는 것으로서의 사유. 들뢰즈는 그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파악하여 사유의 이미지라 부르고 있다.
(1) 데카르트는 모든 전제를 제거하고 자신의 철학을 개시한 것일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제 1의 진리이기 위해서는 사람은 자아(나), 사고(생각한다), 존재(있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나는 사고한다‘의 순수자아가 개시와 같은 외관을 드러내고 있어도 그것은 그 순수자아가 자신의 전제들을 이미 경험적 자아 속으로 되돌려보낸 결과일 뿐이다. 사유의 이미지는 이렇게 철학자가 스스로 사유한 것을 말로 분석해낼 때 암묵적인 전제를 폭로하기 위한 도구이다.
(2) 금이간 코기토: ‘생각하는 나’가 나의 존재를 규정한다.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이것만으로 나의 존재가 어떻게 규정되는지, 또한 어떠한 형식으로 규정된 것으로서 나타나는지 알 수 없다. 나의 존재는 어떠한 형식에 있어서 규정되는 것인가? 바로 시간이라는 형식에 있어서라고 칸트는 대답한다. 시간 속에서 비로소 생각하는 나의 존재가 규정된다. 그 때 사고하는 나(능동적 자아)와 그것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수동적 자아)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따라서 나는 한 수동적 자아로서 규정되는 것이지만, 그 자아에게는 사고하는 ‘다른’ 것이다. 이것을 랭보는 “나란 한 사람의 타자이다.”라고 한다. 칸트는 자아 속의 균열을 발견한 것이다.
데카르트가 다루고 있던 질문을 비판하는 것에 의해 행해지는 새로운 질문의 발견과 개념의 창조. 이것이야말로 질문을 발견하는 유일한 방식이고, 개념을 창조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철학에서조차 인간은 잘 이해되고 있지 않다. 혹은 잘못 설정되었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문제와 관련시켜서만 개념을 창조할 수 있다.
『루크레티우스와 시뮬라크르』
철학은 어디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만드는 것,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신화와 영혼의 동요를 필요로 하는 모든 자를 고발하는 것, 그저 그뿐.
루크레티우스는 “가능한 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극히 적은 것으로 족하다.....그러나 영혼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깊은 기법이 필요해진다”고 기술하고 있다. 들뢰즈는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자연’의 관념이다. 이것은 구별을 가르치는 관념이다. 즉, 인간의 삶 속에서 무엇이 자연에 속하고 무엇이 자연에 속하지 않는지, 그것을 자연의 관념은 가르친다. 자연스러운 관습도 있고, 그런 규약도 있고, 자연권이라는 것도 있기에 ‘발명’과 대립하는 것도 아니다. 발명이란 자연 그 자체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은 ‘신화’와는 대립한다. “인간의 불행은 인간의 습관이나 규약이나 발명이나 산업이 원인인 것이 아니라 그것들 속에 뒤섞이는 신화와, 신화에 의해 인간의 감정과 작업 속에 야기되는 거짓된 무한의 결과인 것이다. 최초의 철학자는 자연주의자다. 그는 신들에 관해 말하는 대신 자연에 관해 말한다.
1. 방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