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과 졸업생과 변호사에게 소개하고 건네본다. 싸늘함과 냉랭함이 돌아온다. 책을 읽지 않고 처지를 고민하지 않는데 소설 나부랭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많은 법조인들이 있지만 이 책은 회자되지 않는다. 



노동과 행위, 그리고 활동. 아렌트를 얇은 책버전으로 소개한 교수의 심화저작을 발견할 수 없다. 별반 돈도 인기도 보증해주지 않는 것이니 그를 탓할 수도 없다. 그녀의 저작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늘 책 속의 책들에 걸리는 것이 그녀다. 그러니 느리게라도 저작의 결을 헤아리면 된다.


'세계-안-현존재'라는 철학이 얼마나 무력한지 스스로 살아내고 증명해냈다 저자 스스로 말이다. 죽음을 전제한다는 것의 철학관점이 수많은 청춘을 들뜨게 만들었지만, 타자나 죽어가는 이들에게 한 줌의 위안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아이러니. 갇힌 철학의 한계다. 진은영시인은 이 대목에서 진면목을 보여준다.

레비나스의 가족을 탈출시킨 블랑쇼. 그들은 타자의 죽음에 동요되지 않는 스승을 본다. 그들에게는 망자 역시 타자일 수밖에 없으며, 타자의 요동과 아픔을 어루만진다. 타자란 무엇인가? 아픔이란 무엇인가?






























볕뉘


늦은 밤, 저녁의 살폿잠이 깨어 책상 곁에 놓여있던 휠덜린 시 전집이 들어온다.  이상하리만큼 손이 가지 않던 휠덜린이 이제서야 잡힌다.


시선詩仙. 시인 가운데 헤겔이라는 느낌이 든다. 무수한 것들을 엮고 하나로 묶으려는 긴장이 도처에 느껴진다. 그렇구나 싶다.  릴케도 좋아할 수밖에 없구나 싶다.


책 속의 책들을 읽으면서, 같은 책이라고 하더라도 시선들이 묘하게 틀어지며 겹치지도 않을 수 있구나 한다. 하지만 같이 읽고 느끼고 사유함을 멈추지 않고 있음에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또 다른 책 속의 책으로 들러갈 수 있다니.


 피노키오의 모험 역시 이렇게 신화와 우화로 연결되어 있다 한다. 문 안의 문. 서로 이어지고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 말미 어디쯤 새로움이 꼬여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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