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표를 본다. 공약수 가운데는 '협동'이 있고, 삼분할해서 생각, 자본, 노동의 교집합이 그려져 있다.  '협동' 협동이라. 그 '협동'이란 단어를 마음과 입 안에 공글려본다. 공동체라. 모임이라. 혼자가 아니라 같이 가치를 추구하며 산다. 여럿이. 


위태로운 일상, 차고 넘치는 하루하루는 불안하다.  어떤 이는 <불안사회>라 말하기도 하고, 위태로운 '상황'은 불안한 대기처럼 지금을 잠식하고 있다.  '벌거벗었다'라고도 하며 액체상태라고도 한다. 불안한 하루하루는 '나"를 끊임없이 요동치게 만든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기도 힘들어 사소한 다정다감에도 목숨건다. 



표지화를 본다. 정교한 소묘와 치밀한 덧칠이 아니다. 많게는 서 너번, 작게는 한 두번 잎새와 꽃, 꽃잎에 색을 올린다. 각자의 모양으로 피고 있는 꽃들.  뒷표지에는 팔이 하나인 꽃,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꽃, 운동하고 있는 듯한 꽃, 세 송이의 다른 꽃을 그려둔다.



자리이타 自利利他 . 나도 좋고 남도 좋다. 나도 피고 너도 피고, 서로 꽃피우는 일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대행에 대리다. 빠르고 빠르게 순환을 만드는 체계이기에 보이지 않는다. 남기는 것만 드러날 뿐, 그 안을 움직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닫힌 삶을 기계처럼 상품처럼 낳기만 할 뿐이다. 닫힌 방에 갇혀 하늘을 볼 수 없다. 하늘이 어디인 줄도 눈길을 잃어버린다. 점점 깊어지는 터널이다. 나갈 길이 요원하기만 하다.


우리는 세 개의 공을 동시에 던져야 한다. 놓치지 말고, 생각과 자본, 노동이라는 공을 동시에 던진다.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받고, 대리나 대행이 아니라 품을 팔고 나눈다. 그렇게 십시일반 꾸려진 돈을 나눠 몸을 키운다. 모임을 자라게 한다. 하나가 아니라 둘, 둘이 아니라 셋을 나누는 연습을 해야한다. 겨우 닫혀진 방에서 나올 수 있다. 겨우 닫혀진 나에게서 나오기 시작한다. 다행히 돈만 남기는 사회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공짜는 없다. 


그렇게 나눈 것들은, 그렇게 채운 것이 서로에게 선물이다. 매번 달라지고 생기가 도는 모임이다. 열려지는 삶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열린 삶의 출발이다.


볕뉘


1. 읽고 나서 저자의 다이어그램 속 '협동'이란 말 대신이 '일상'이란 말을 넣어보기도 한다.


2. 화마가 드리운 날,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꽃. 스스로 만든 법의 테두리조차 타는 듯한 나날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3. 반드시 그럴 것이다.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느끼기 시작한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질문들은 아마 출구를 낳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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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헤겔의 비유로, 철학이 이미 역사로 굳어진 것만을, 즉 기존의 것만을 인식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세상을 사유하는 철학은 현실이 형성과 준비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철학이 그것이 가진 회색을 다시 회색으로 덧칠하기만 한다면 생의 모습은 낡아 버리게 되고, 회색을 그대로 두면 젊어지지 못할 것이며 다만 인식되기만 할 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내릴 부렵에야 비로소 비행을 시작한다. 헤겔은 철학이 앞으로 도래할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회색으로 덧입힌 회색'은 '기존의 것'이 지닌 색이다. 철학은 돌이켜 생각함이지 앞서 생각함이 아니다. 그것은 전망적이지 않고 회고적이다. 이와 반대로 희망의 사유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어 현실을 본다. '새로운 태양이 뜨는 아침의 닭 울음소리, 세계의 젊어진 모습을 선언하는 것이다. 117-118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본질의 로직을 벗어나 새로운 것이 동트는 광채를 볼 눈이 멀어 있다. 희망의 사유는 인식의 초점을 미래로, '기존의 것'에서 '앞으로 도래할 것'으로 옮기며, 본질의 시간성을 나타내는 항상 이미 아직 아님을 대비시킨다.


 블로흐는 회색에 희망의 색인 파란색을 대비시켰다. "먼 색인 파란색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미래적인 것과 아직 무엇이 되지 않은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괴테는 파란색을 '끌어당김이 있는 무'로 정의했다. 파란색은 우리를 매혹하고 갈망을 일깨우는 '아직 아님'이다. 파란색은 우리를 먼 곳으로 끌어당긴다. 쾨테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높은 하늘, 먼 산을 파랗다고 보는 것처럼 파란 면은 우리 눈앞에서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눈앞에서 멀어지는 어떤 호감 가는 대상을 우리가 기꺼이 좇는 것처럼 우리는 파란색이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이 색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희망이 없는 공동체는 회색으로 덮여 있다. 것이 없다. 


희망의 정신을 지닌 우리는 '지나간 것' 안에서도 '앞으로 도래할 것'을 발견한다.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자 다른 것인 '앞으로 도래할 것'은 '지나간 것'이 꾸는 낮의 꿈이다. 희망의 정신 없이는 동일성 안에 갇히게 된다. 희망의 정신은 '지나간 것' 안에서 '앞으로 도래할 것'의 흔적을 좇아 나아간다. 그렇게 과거는 구원을 암시하는 은밀한 지표를 지니고 있다. 125-126


'아직-아:닌' 전시는 희망을 다루는 만남이다. 희망의 원리라는 책의 부제, 아니 원제목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기도 하다. 밤꿈이 아니라 낮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위의 <<불안사회>> 역시 희망을 다루고 블로흐를 언급하고 있다. 오프닝때 전시설명을 마무리하면서 낭독한 대목이기도 하다. 


Bowl시리즈는 공동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모임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붙이고 긁고 오리고 금가게 하고 다른 것들로 채우기도 하고, 선물present이기도 한 것이다. 말하고 싶은 텍스트들도 판박이처럼 붙어있기도 한데, 훗날 알게될 스토리이기도 하다.


Blue 시리즈는 옮긴 대목을 다시 보며 환기시켜도 좋을 듯하다.




볕뉘


소소영화관에 전시중인데 상주하고 있지는 않다. 주말 간간히 들르긴 하지만, 위의 스토리를 갖고 보시면 더 좋을 듯하다. 소소영화관에서 추천중인 영화 <쇼잉업>을 보시면 더더욱 좋겠지만, 이 역시 작가의 욕심일 수도 있겠다싶다. 아마 4월 중순까지 편하게 오셔서 둘러보시고, 한 켠에 마련한 책장과 책들도 전시를 위해 준비한 소품이니 참고하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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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1까지 대전 소소아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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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첫손님이다. 전집 사장님은 월요일 손님과 통화중이다. 생굴을 먹은 것이 문제가 생긴 듯하다. 노로 바이러스. 음식으로 인한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해서 보험을 들어둔 것 같다. 아. 이런 굴전이나 생굴 생각이 나 왔건만 어쩐다. 요즈음 오후 날씨가 봄날 같더니 이런 사달이 났구나 싶다. 딸아이와 p협력사의 쉰이 되지 않은 아빠가 일손을 거들어주기도 하는데, 쉽지 않겠다 싶다. 책을 읽지 못할 정도로 전등이 흐리기도 하는데, 손님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알바도 구하기 쉽지 않아 절절 매던 일들도...그래서 혼자 오기는 쉬운 게지. 


전집을 온 이유는 계약 관련 긴 협의의 끝이 보이기도 해서이다.  과메기 안주도 되지 않고, 전은 그렇고  두루치기를 시켰다. 막걸리 한 병을 주전자를 가져와 따른다. 제법 요리시간도 많이 걸리는 것이 이 가게의 특징이다. 무와 콩나물 밑반찬에 막걸리 한 모금을 우물거리며 마신다. 계약 당사자인 l감사에게는 원가분석을 하시라고,그래야 거짓말하는지, 일들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것 알 수 있지 않겠냐구 마음을 여러 번 보탠다.  거꾸로 오너의 지시가 역으로 떨어지고 나서도 진척이 보이질 않는다. 서로 바닥은 봐야지 협상 수준을 알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분석을 기대하는데 더디다. 공장은 대보수공사로 북적이고 정신이 없는데, 회의록 작성하라는 오더에 문제해결보다 보고에 더 신경쓰는 모양새다. 


공문도 여러 번 보내면서 결재 수준, 전달 과정, 소통 방식을 확인하는 작업도 병행한다. 뭘 믿고 무얼 확인할 것인가.


아껴서 먹는 막걸리는 배추쌈을 주어서 그나마 더 맛있게 들 수 있다. 알바분이 오시고 말 소리들이 더해져서 전집은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감량 덕분에 위가 많이 줄어든 듯, 배부른데 탄수화물이 당긴다. 오뎅탕은 많고, 적당한 안주는 없는 걸까. 벽에 붙은 오뎅우동 광고가 있어 되느냐고 묻는다. 이 것 역시 혼자 먹을 수 있는 양을 넘어선다. 첫 개시인 듯싶다. 매콤한데 나쁘지 않다. 술은 한 병 더 가져오고 주전자에 담고 한 두잔 먹자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다. 


테스트를 여러 번 해보았다. 물량을 이월해서 정산을 하자고, 월급은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말로 되지 않을 것 같아, 공문으로 보냈고, 공문으로 되지 않아 구두로 확인해보아도 어처구니없는 대답만 한 가득이다. 그럴 줄 알고 보낸 카드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눈 앞에 있는 것만 관심이 있고 배경을 헤아리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여러 번 교차해서 확인한 결과, 영혼이 없구나. 일만 있어 처리만 할 줄 안다. 


남은 막걸리를 병에 다시 따른다. 거의 목까지 올라왔다. 부자가 된 기분이다. 그렇게 술 한병을 들고 촐랑촐랑 사택으로 돌아간다.


볕뉘


야망계급론은 힙스터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신 구별짓기란 신흥부자들의 행태이기도 하다. 어떻게 살아지는가에 대한 관심의 끈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본 소득은 분명 또 다른 출발점이기도 하다. 출발 선이 너무 다르다. 극우들아 제발 공부 좀 해라. 대체 아는 게 뭐냐. 모든 것 갖고 싶으냐. 모든 것을 누리고 싶으냐. 그럴러면 정신은 차려야 하는 것은 아니냐. 보수 한 점 없는 이 땅위에 화만 잔뜩 있으니 누가 너희를 좋아하겠는가. 떠벌이지만 말고 출발선상의 불평등같은 것이 왜 문제인지, 평생에 단 한 번이라고 고민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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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04 0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사이 들어 ‘살림’이라는 이름을 살려서 쓰는 이웃을 이따금 봅니다. 얼마 앞서 《살림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책이 나오기도 하더군요. ‘살림글’이라면, 한자말로는 이른바 ‘생활글·생활문학’일 텐데, 모든 살림이란 시골에서 논밭을 짓는 일부터 우리가 보금자리에서 맡는 모든 집안일부터 헤아립니다.

‘우리한테 있는 빛’이라면, 먼먼 옛날부터 물려주고 물려받으면서 저마다 가꾼 ‘살림’이 있다고 느낍니다. 오늘날에야 왼날개와 오른날개를 가르지만, 지난날에는 누구나 왼날개와 오른날개를 나란히 품고 헤아리면서 ‘온날개’로 하루를 그리고 짓는 온살림을 했다고 봅니다. 우리한테 왼손과 오른손이 있어서 살림을 빚거나 짓거나 가꿉니다. 우리한테 왼발과 오른발이 있어서 기쁘게 거닐면서 이웃한테 마실합니다.

어쩐지 요즈음 자꾸 번지는 ‘극우·극좌’ 같은 이름은 그만 서로서로 미워하는 마음에 싫어하는 등돌림과 따돌림과 손가락질을 부추기는 밉말(혐오표현) 같습니다. 다 다른 사람을 끌어안자는 마음이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정작 걷는 길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넌 틀렸어!” 하고 윽박지르면서 가르치려고 드는 물결이 대단히 드세면서, 날마다 싸움판 같습니다.

틀림없이 “넌 틀렸어!” 하고 말할 만한 자리까지도 ‘그들’이 하려는 말을 가만히 귀담아듣고서 이 말을 하나하나 짚으며 ‘함께 배울 살림’을 이야기로 들려줄 수 있다고 봅니다. 처음부터 “넌 틀렸어!” 하고 딱 끊을 적에는 아무 어깨동무(평등)를 못 이루면서, 아무 살림도 못 나누는 담벼락을 그들뿐 아니라 우리부터 높고 단단하게 세우는 굴레이지 싶습니다.

‘우리한테 있느 빛’은 모름지기 ‘살림’ 하나와 ‘사랑’ 둘에, 살림과 사랑을 심고 가꾸는 ‘두손’이요, 살림과 사랑을 나란히 바라보는 ‘두눈’이며, 살림과 사랑을 함께 그리고 펴는 ‘두다리’이지 싶습니다.
 

지불을 하지 않으면 폰으로 엑셀도 텍스트 작업도 할 수 없다. 취소하려면 찾아가기도 어렵다. 그렇게 돈이 슝슝 빠져나가도록 된 구조다. 합법적이다. 불편을 가장한 합법. 눈뜨고 코 베이는 세상이다. 


기침이 가라앉지 않아 바깥 바람을 쐬기조차 삼가고 있다. 어제 저녁은 그나마 약을 먹지 않고 버티었는데, 새벽 나은 기미가 보인다. 달리면서 몸부리는 재미에 빠졌는데, 부상이 오거나 이렇게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 간절해진다.


어제 저녁 손에 들린 책이다. 피터싱어와 영아살해에 대한 논쟁을 담은 첫 글을 읽는다. 무척 힘들다. 하지만 많이 좋아졌다.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아픈 존재는 무엇인가? 불편한 존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불편하기 그지 없던 예전과 달리 시선에 맞춰 읽어나갈 수 있어 다행이다.


무수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나의 존재 기반을 무너뜨리는 발언을 어떻게 수긍하고 긍정할 수 있을까? 논리와 말 이전에 존재가 있다. 머무르지 않고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말을 찾아야 한다. 논리도 싸움도 찾아야 한다. 끊임없이 출발하는 것이 존재다. 


이유도 없이 굴복당한 무수한 존재들. 삶들. 말조차 없어 끙끙 앓던 이들. 무수한 편견과 시선의 겹겹으로 누르는 짐같은 하늘아래 사는 존재들. 삶들. 한줄기 빛과 같은 깨달음도 함께 하길. 우리는 서로 곡예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만들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삶을 사랑하기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아끼고 마음에 담기에 말이다.


볕뉘


며칠동안의 침체를 딛고 오늘은 강변까지 달려가고 싶다. 싱싱한 바람과 솟아오르는 땀의 호흡을 느끼고 싶다. 조금씩 작업이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갈증을 쌓아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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