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첫손님이다. 전집 사장님은 월요일 손님과 통화중이다. 생굴을 먹은 것이 문제가 생긴 듯하다. 노로 바이러스. 음식으로 인한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해서 보험을 들어둔 것 같다. 아. 이런 굴전이나 생굴 생각이 나 왔건만 어쩐다. 요즈음 오후 날씨가 봄날 같더니 이런 사달이 났구나 싶다. 딸아이와 p협력사의 쉰이 되지 않은 아빠가 일손을 거들어주기도 하는데, 쉽지 않겠다 싶다. 책을 읽지 못할 정도로 전등이 흐리기도 하는데, 손님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알바도 구하기 쉽지 않아 절절 매던 일들도...그래서 혼자 오기는 쉬운 게지. 


전집을 온 이유는 계약 관련 긴 협의의 끝이 보이기도 해서이다.  과메기 안주도 되지 않고, 전은 그렇고  두루치기를 시켰다. 막걸리 한 병을 주전자를 가져와 따른다. 제법 요리시간도 많이 걸리는 것이 이 가게의 특징이다. 무와 콩나물 밑반찬에 막걸리 한 모금을 우물거리며 마신다. 계약 당사자인 l감사에게는 원가분석을 하시라고,그래야 거짓말하는지, 일들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것 알 수 있지 않겠냐구 마음을 여러 번 보탠다.  거꾸로 오너의 지시가 역으로 떨어지고 나서도 진척이 보이질 않는다. 서로 바닥은 봐야지 협상 수준을 알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분석을 기대하는데 더디다. 공장은 대보수공사로 북적이고 정신이 없는데, 회의록 작성하라는 오더에 문제해결보다 보고에 더 신경쓰는 모양새다. 


공문도 여러 번 보내면서 결재 수준, 전달 과정, 소통 방식을 확인하는 작업도 병행한다. 뭘 믿고 무얼 확인할 것인가.


아껴서 먹는 막걸리는 배추쌈을 주어서 그나마 더 맛있게 들 수 있다. 알바분이 오시고 말 소리들이 더해져서 전집은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감량 덕분에 위가 많이 줄어든 듯, 배부른데 탄수화물이 당긴다. 오뎅탕은 많고, 적당한 안주는 없는 걸까. 벽에 붙은 오뎅우동 광고가 있어 되느냐고 묻는다. 이 것 역시 혼자 먹을 수 있는 양을 넘어선다. 첫 개시인 듯싶다. 매콤한데 나쁘지 않다. 술은 한 병 더 가져오고 주전자에 담고 한 두잔 먹자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다. 


테스트를 여러 번 해보았다. 물량을 이월해서 정산을 하자고, 월급은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말로 되지 않을 것 같아, 공문으로 보냈고, 공문으로 되지 않아 구두로 확인해보아도 어처구니없는 대답만 한 가득이다. 그럴 줄 알고 보낸 카드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눈 앞에 있는 것만 관심이 있고 배경을 헤아리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여러 번 교차해서 확인한 결과, 영혼이 없구나. 일만 있어 처리만 할 줄 안다. 


남은 막걸리를 병에 다시 따른다. 거의 목까지 올라왔다. 부자가 된 기분이다. 그렇게 술 한병을 들고 촐랑촐랑 사택으로 돌아간다.


볕뉘


야망계급론은 힙스터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신 구별짓기란 신흥부자들의 행태이기도 하다. 어떻게 살아지는가에 대한 관심의 끈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본 소득은 분명 또 다른 출발점이기도 하다. 출발 선이 너무 다르다. 극우들아 제발 공부 좀 해라. 대체 아는 게 뭐냐. 모든 것 갖고 싶으냐. 모든 것을 누리고 싶으냐. 그럴러면 정신은 차려야 하는 것은 아니냐. 보수 한 점 없는 이 땅위에 화만 잔뜩 있으니 누가 너희를 좋아하겠는가. 떠벌이지만 말고 출발선상의 불평등같은 것이 왜 문제인지, 평생에 단 한 번이라고 고민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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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04 0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사이 들어 ‘살림’이라는 이름을 살려서 쓰는 이웃을 이따금 봅니다. 얼마 앞서 《살림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책이 나오기도 하더군요. ‘살림글’이라면, 한자말로는 이른바 ‘생활글·생활문학’일 텐데, 모든 살림이란 시골에서 논밭을 짓는 일부터 우리가 보금자리에서 맡는 모든 집안일부터 헤아립니다.

‘우리한테 있는 빛’이라면, 먼먼 옛날부터 물려주고 물려받으면서 저마다 가꾼 ‘살림’이 있다고 느낍니다. 오늘날에야 왼날개와 오른날개를 가르지만, 지난날에는 누구나 왼날개와 오른날개를 나란히 품고 헤아리면서 ‘온날개’로 하루를 그리고 짓는 온살림을 했다고 봅니다. 우리한테 왼손과 오른손이 있어서 살림을 빚거나 짓거나 가꿉니다. 우리한테 왼발과 오른발이 있어서 기쁘게 거닐면서 이웃한테 마실합니다.

어쩐지 요즈음 자꾸 번지는 ‘극우·극좌’ 같은 이름은 그만 서로서로 미워하는 마음에 싫어하는 등돌림과 따돌림과 손가락질을 부추기는 밉말(혐오표현) 같습니다. 다 다른 사람을 끌어안자는 마음이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정작 걷는 길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넌 틀렸어!” 하고 윽박지르면서 가르치려고 드는 물결이 대단히 드세면서, 날마다 싸움판 같습니다.

틀림없이 “넌 틀렸어!” 하고 말할 만한 자리까지도 ‘그들’이 하려는 말을 가만히 귀담아듣고서 이 말을 하나하나 짚으며 ‘함께 배울 살림’을 이야기로 들려줄 수 있다고 봅니다. 처음부터 “넌 틀렸어!” 하고 딱 끊을 적에는 아무 어깨동무(평등)를 못 이루면서, 아무 살림도 못 나누는 담벼락을 그들뿐 아니라 우리부터 높고 단단하게 세우는 굴레이지 싶습니다.

‘우리한테 있느 빛’은 모름지기 ‘살림’ 하나와 ‘사랑’ 둘에, 살림과 사랑을 심고 가꾸는 ‘두손’이요, 살림과 사랑을 나란히 바라보는 ‘두눈’이며, 살림과 사랑을 함께 그리고 펴는 ‘두다리’이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