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없고 타자만 있는 것인가?


 


니체와 철학

 

발생론적 발상으로 일관된 초월론적 경험론으로부터 어떤 실천이 유도되는가?


(1) 사유의 강제:


 ‘생은 사유의 능동적 힘이고, 사유는 생의 긍정적 힘이다. 사유하는 것은 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렇다면 사유란 무엇인가?

 

프루스트와 기호들

 

진리는 앞서 존재하는 적극적 의지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고 내의 폭력의 결과라는, 이 테마 이상으로 프루스트가 강조하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한 조각의 맛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과거의 기억이나 소환이 아니다. 마들렌을 통해 기호의 해독방식을 배

우고 이 기쁨의 비밀을 이해한다. 이처럼 기호를 해독하는 기술을 습득하면서 최종적으로 어떤 종류의 진리의 계시에 도달한다. 우연적인 기호와 만남, 그 해독방식의 습득이라는 경험이 프루스트의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 사유의 새로운 상을 제시하기에 이 책을 이리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마들렌은 나에게 비의지적·무의식적인 상기를 강요한다. 그것은 일종의 폭력’, ‘강제이다. 이 폭력 내지 강제의 작용에 의해서 비로소 사람은 사유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진리에 도달한다. 진리는 어쩔 수 없이 사유하게 됨의 결과로서 획득된다. 사람은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사유하게끔 된다. 사고는 강제의 압력에 의해서만 개시되는 것이고, 그것을 강제하는 기호는 항상 우연적 만남의 대상이다. 여기서 묻고 있는 것은 사고의 발생에 대한 질문이다. 사물을 생각한다는 사태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그는 그것을 폭력이나 강제우연적 만남에 의해 설명한다.

 

반복은 동일한 것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동일한 것이 계속되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반복은 매회가 교환 불가능, 치환 불가능하다. 습관은 그러한 하나하나 교환 불가능, 치환 불가능한 경험의 반복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 즉 차이를 훔쳐내는 것으로 성립한다. 그리하여 성립한 습관이 인간 행동의 규범이 된다. 사람은 반복 속에 차이를 훔쳐내는것으로 살고 있다. 반복은 매번 새롭게 차이를 동반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새로움에 매번 직면하고 있어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이 계속되어간다는 기대 속에서 비로소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수동적 종합이라는 지복이라 부르고, 인간은 이 지복 속에 멈춰있기를 원한다. 이것을 되짚어보면 사고를 강제적으로 일으키는 것이란 수동적 종합이라는 지복을 방해하는 한 불법침입이고 폭력이며 이다. 철학이란 앎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출발점은 애지가 아니라 혐지다. 하이데거도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게끔 된다고 했는데 사유시키는 것이란 선물이라고 했다. 이 은유 안에는 인간이 진리를 사랑하고 사유하는 것을 추구하는 욕망과 의지가 있다는 주관적인 전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유하면 사유시키는 것과 사이에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다가 사유가 발생하는 현장을 놓쳐버린다. 들뢰즈는 사유를 강제하는 폭력을 기호라 부르고 있다. 기호는 선사되는 것이 아니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만남의 대상은 그대로 있는 소여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상의 변화에 관계하는 무언가를 받아들였을 때 사물을 생각한다. 생각하는 것은 변화와 단절될 수 없다.

 

(2) 사유의 습득과 방법


주체를 전제할 수 없으므로 의지도 전제할 수 없다. 어떤 위화감이나 의문을 느끼게 하는 기존 질문과 만남이야말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다. 이것은 해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건인 것이다. 이런 사유는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기분을 모두 버리는 것이다. 사건만을 초월론적인 요소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조우하는 것, 그것은 발견하는 것이고, 포획하는 것이며, 훔치는 것이다. , 긴 시간에 걸쳐 준비하는 것 이외에, 발견하기 위한 방법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사유 못지 않게 습득이 중요한데, 수영처럼 흐르는 물 속에 뛰어들지 않고는 배울 수가 없다. 그것은 같은 것의 재생으로 행해지지 않고 기호에 대한 응답 및 다른 것과 만남으로 이뤄진다. 사람은 자신과 일치하지 않은 것에 대응하려해서 무언가를 배운다. 그때의 응답들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는 하이데거와 유사하지만 교사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 속에서 전개하도록 몇몇 기호를 발할 수 있는 자이다.

 

질문 그 자체를 결정하고 구성하는 능력 속에 우리는 참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문제에서 출발하는데 거짓문제들로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 비존재의 문제에서 쓸데없다는 허무를 상상하거나, 기대하고 있지 않은 질서가 나오면 무질서하다거나, 만약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이랬을텐데 가정하는 것들이다. 문제는 적절한 방식으로 제기되면 스스로 해결되지만(정치경제학 비판), 중요한 것은 해결하는 것 이상으로 문제를 발견하는 것, 문제를 적절한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문제로서 규정되는 조작들, 문제로서 제기하기 위해 이용되는 수단과 매개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론에서부터도 실천의 시점에서부터도 인간의 역사는 문제 구성의 역사이다. 베르그송의 거짓문제에 대한 지적과 문제의식은 비슷하지만 그는 너무 깔끔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차이와 반복4장에서 문제와 질문을 구별하고 있다. 문제란 질문이 거기서부터 행해지는 기원이다. 사고는 문제로부터 질문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칸트의 이름을 들면서 문제라는 것은 이념’(자아, 세계, )이라고 한다. 이런 문제는 해에 의해서는 소거되지 않는다. 확실히 문제는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우리는 그 해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질문이 올바른 해를 발견했다고 해서 최초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문제를 필요없다고 던져버리는 것을 특히 주의해야 한다. 해를 생각함에 있어 필요한 것은 여건이 해의 싹을 포함하도록 점진적으로 문제의 조건들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어서 이 이념 다양체라고도 기술한다.

 

이념이 다양체라면 문제에 대한 해는 그것을 규정하는 조건들에 의해 변화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이 잠재성을 억압하고 이것이 해이다라고 하여 문제를 가둬버리는 것이다. “하나의 문제는 그것에 대한 여러 해들의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 문제를 덮고 있는 그 해들 속에서 소실되기는커녕 집요하게 지속한다. 문제는 풀려야할 것임과 동시에 규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앎이 아니라 배움이다. 배움에 있어서 문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통찰해야만 할 것이다.

 

(3) 물질에 부가되는 주체성:


시네마2


<유럽 1951> 영화에서 주인공인 아이린은 공장 체험을 하고 마치 수인들을 보는 듯했어요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주체성의 새로운 의미를 보려고 한다. 베르그송이 쓴 자동적 재인(소는 풀을 재인하고 그것을 먹는다)과 주의깊은 재인(그때마다 대상으로 향하고 특이성과 직면한다)이란 개념을 쓴다. 지각과 행동의 거리가 생기면 홀연 주체성이 나타난다.(1주체성) 이것은 연장 방식이 결정되어 있고, 새로운 것을 야기하지 않는다. 주의 깊은 재인은 회상에 의해 일어난다.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이었는가? 이것이었는가? 회상도 또한 앞의 거리를 메우려고 한다. ’아아, 그렇다. 여기는 공장이다.., 이곳은 일해야 할 곳이다...‘ 이것에 잠재적인 것을 현동화시켜 대상이 다양한 회로를 통과하고 공장은 감옥이다라는 지각을 낳고 새로운 주체성을 발동시킨다. 주의깊은 재인은 성공했을 때보다도 실패했을 때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친다. 들뢰즈는 이를 제 2의 주체성. 물질에 부가되는 주체성이라 부른다. 세계라는 물질의 요청 내지는 필연성에 합치하도록 해서 새로운 주체성이 발동하는 것이다. 주체/객체라는 도식을 갖지 않아 들뢰즈는 객체에 부가된다라고 말하지 않고 물질에 부가된다고 말한다.


3. 실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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