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인간의 비참함을 만드는 것은 ‘인간’과 ‘시민’ 사이의 충돌이다. 이 둘을 하나가 되게 만들면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그를 국가에 전적으로 내여주거나 완전히 그 자신으로 내버려두어라. 그렇게 하지 않고 그의 심장을 둘로 나누려고 하면 그의 심장은 갈갈이 찢어지게 될 것이다. 947 허시먼은 ‘다성적’인 즉 독자적인 여러 음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어울리는 방식의 해결책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사람들과 정책 결정자들이 그것의 복잡성을 인식하고 인정하면서 복잡한 제도들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할 ”문제해결적 정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948 허시먼은 파스칼이 먹을 거리, 놀이, 기도, 정치에 대해 언급했던 바를 떠올렸다. 그런 영역에까지 비용-편익 계산은 불가능”했다. 946
<사회과학에 대한 우리의 견해> 우리의 초점은 더 해석적인 것입니다.954
<<금지된 경계를 넘어서: 경제학에서 정치학으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서구에서 좌우파 모두가 전후 서구의 정치경제가 복지국가의 위기라는 구조적 위기에 처했다고 보고 있었다...‘성장과정에서 오는 고통’을 ‘시스템적 위기’와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현재의 문제는 자본주의가 가진 근본적인 불합치성이나 ‘근본 모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의 전환에서 발행하는 복잡하고 알기 어려운 특성들이 드러나는 것이었다....실제세계의 복잡성과 모호성을 생각할 때 정말로 유용한 기능은 이런 식의 반대되는 반응을 하는 와중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좌파의 사고가 자기파괴적이라고 보았다. 숙명주의는, 종국에는 반대쪽을 유리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인 덫‘이었다. 966 시장이 협동과 갈등 둘 다에 대해 흔히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도덕적인 제약들을 만들어내고 ’무임승차‘ 개념에 도전할 은유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바로 ’노젓기‘였다. 함께 노를 저으면 개인들은 노력을 덜 들이면서도 빠르게 나아갈 수 있을 터였다. 967
허시먼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배타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기분에 의해서든 취향에 의해서든 ‘사람들은 언제나 선택을 내린다’는 것이 허시먼이 주장하려는 바의 핵심이었다. 그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선택이라는 활동이었다. <<이탈, 발언, 충성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다양한 선택을 내리면서 제도를 바꾸는지 설명했다면, 이제는 그들이 왜 선택을 내리는지 설명해야 했다. 93 마음속에서 올슨과, 그리고 더 넓게는 개인주의와 벌였던 내적 투쟁은 사회변화를 추동하는 인간 행동에 대한 내생적 모델을 만들고자 했던 오랜 목표로 이어졌다. 973 섭리적 설명. 기술 변화든, 전쟁이든, 수입된 거대 계획이든, 외부 자본의 주입이든, ‘해외로부터의 원조’이든, 재앙이든, 발견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외부 요인이 사회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역사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번쩍 들어 옮겨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했다. 974
‘집합행동의 시계추 운동’. 만족과 실망, 공적 행동과 사적 행동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역학을 설명하려고 했다. ‘인간의 경험’이라는 영역에서 ‘감정의 반응’이라는 영역으로 이동했다. BMW는 흥분을 약속하면서 불만족과 청구서도 배달했다. 모든 곳에 행복이 뿌려지고 있었지만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뒤에는 실망의 긴 흔적이 남았다. 실망은 희망의 짝궁이었고 희망의 필수불가결한 쌍둥이였다. 후회와 실망.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는 높은 기대를 가지고 수행된 활동의 결과였다. 실망으로 가득한 삶은 슬픈 삶이지만 실망이 없는 삶은 아예 견딜 수가 없는 것이 삶이다. 실망을 장엄한 전망과 야망을 누리고자 하는 성향의 자연스런 짝궁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을 세르반테스가 한탄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어리석음에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이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975
이러한 노력은 ‘사적인 추구’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공적인 참여’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사적 추구와 공적 참여가 비슷한 동기들에 의해 추동된다는 점이다. 허시먼은 여러 충동들의 복잡한 혼합물인 자아를 무대로 펼쳐지는 ‘변증법’을 제시했다. 근대적 인간을 영구적으로 분열된 심장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이분법적 범주들을 사용하지 않는 정치경제학을 만들어냄으로써, ‘사랑스럽고’ ‘비극적이며’ 더 ‘복잡한’ 인간 주체를 되살리고자 했다.. 976
실망을 일으키기 쉬운 것들을 구매할 때 수확체감이 발생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 실망은 공적인 행동을 촉발할 수 있게 된다. 실망이 ‘사다리’를 놓아서 소비자-시민이 ‘사적인 삶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점차적으로 올라갈 수 있게’해 줄 수도 있고 이데올리기 자체를 잠식할 수도 있다...공적인 행동도 시계추가 오락가락하는 스펙트럼의 범위에 속해 있는 한 지점이었다...공적인 행동은 “과도한 헌신”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실망을 일으킬 수 있다. 사회주의가 “저녁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기 때문에” 자기파괴적이라고 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선거 역시 비용-편익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중적인 특성’을 갖게 된다. ‘과도하게 억압적인 국가’에 맞서서 방어하는 기능과 ‘과도하게 표현적인 시민’으로부터 방어하는 기능을 둘 다 갖는 것이다...“중요한 것은 열정적인 사적 시민이 이제 다양한 실망에 맞닥뜨렸다는 점”이다. 행복을 추구하며 오만가지 물건을 구입해 집에 채워 넣었지만 그것들이 다양한 실망을 안겨 주고 있었고, 따라서 이제 중력이 시계추를 반대편으로 움직이게 하리라는 기대였다. 978-980
찰스 테일러. 크리스토퍼 래시<<나르시시즘의 문화>> . 이런 종류의 비관주의가 “그 자체로 빈약할 뿐만 아니라” 공적 행위를 “건설적이지 못한 ‘공적 특성’이 주기적으로 분출하는 것”정도로 폄훼하는 경향을 낳는다고 본다. 허시먼이 말하고자 한 것은 ‘불안정한 균형’이었다. 그는 ‘공적인 것’이 일상의 노동과 소비에 더 많이 스며들어서 “공적 행동의 특성인 ‘분투하는 것’과 ‘획득하는 것’의 혼합이 사적 영역에서 육성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합리적 행위자보다 “행복의 다양한 상태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기에 더 ‘우월’했다. 982
<<참여의 시계추 운동: 사적 이해관계와 공적 행동>> 내가 하려는 일은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동기들에 대한 이론을 만드는 것입니다. 나의 설명은 이후 경제학자나 정치학자들의 손에서 가설로 발전할 것입니다. 990 허시먼이 인간을 “실수하는 이상주의자, 이해관계와 정념 둘 다를 가진 자”로 묘사하자 이것을 도덕적인 주장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가 원한 것은 인간 행위자를 “더 사랑스러운 인물로, 어느 정도 안쓰러운 인물로, 그러면서도 약간 무서운 인물로, 따라서 비극적인 인물로”그리는 것이었다. 탈미혹된 소비자에게 공적인 삶이 은신처가 될 수 있으려면 ‘발언의 기술’이 더 정교하게 다듬어져야 했다. ‘공적인 인간’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소비자 안에도 시민의 맥동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희망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허시먼은 이것이 자기파괴적이라고 생각했다.희망을 포기하는 발언은 자기실현적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식인을 향한 윤리적 메시지가 있었다. 994-995
14.
<<손주들을 위한 사회과학>>. 허시먼은 윤리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사회과학을 만들고 싶었다. ;윤리에 대한‘사회과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의 윤리‘를 다루는 사회과학 말이다. 999 “합리적 행위자”냐 “공동체적 정신”이냐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받던 시대에 “결합되었으되 불안정한 주체”야말로 ’통합된 사회과학‘의 초석이었다. 1000
마키아벨리는 인간이 어떠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실제로 어떠한지에 기반해 정치학을 구성하려고 했고, 몽테스키외는 정치적 실천이 도덕이나 정의와 얼마나 많이 충돌하는지를 논하는 것이 무용하다고 경고했으며, 애덤 스미스는 이기심을 추구하는 “머리”를 감정을 느끼는 “심장”에서 효과적으로 분리시켰다. 마르크스조차 자본주의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냉정한 과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002 마르크스주의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법칙을 추구했지만 그만큼이나 강렬하게 “도덕적 분노”에도 쏠려 있었다. 허시먼은 “이 희한한 혼합, 풀리지 않는 이 모든 내부적 긴장이야말로, 과학에 중독되고 도덕적 가치는 거의 상실된 시대에 마르크스주의가 가질 수 있었던 그리고 지금도 가지고 있는 막대한 호소력의 원천”이었을 것“일고 언급했다.1003 허시먼은 도덕적 이해와 비도덕적 분석 사이의 풀리지 않는 마찰에 대한 주장을 정교화해 나갔다. 이 둘을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누르고 승리하는 것도 아닌, ”영구적인 긴장“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제시하고자 했다. 1004 도덕적 사회적 규범은 시장과 별개가 아니라 시장이 기능하는 방식의 일부라고 볼 수 있었다. 1005 그에게 사회과학의 도덕성은 ”연구의 중심“에 속하는 것이어야 했으며, 이는 ”사회과학자들이 도덕적으로 살아 있고 스스로를 도덕적 우려에 깊이 영향받도록“ 만들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사회과학자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연구를 생산해낼 수 있게 될“ 것이었다. 1009
내부가 아니라 외부를 바라보는 것이 주는 즐거움과 자극을 재발견함으로써 객관적인 접근과 규범적인 접근 사이의 긴장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1015
<<집단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기: 남미의 풀뿌리 경험>>1984 개발 업무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좌절하는 흔한 원인 중 하나는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를 수량화가 가능한 것 위주로 측정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느라 다른 점들, 예를 들면 사랑이라든가 시민적 추구 같은 것들이 간과되어 버린다.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자기육성과 향상, 머리와 심장을 조화시키고 자아와 사회를 조화시키기 위한 개선 등이 평가에서 누락되는 것이다. 프로젝트의 평가는 정해진 비용-편익 모델에 꼭 맞아떨어지지 않는 활동과 동기들에 열려 있어야 한다. 1025-1026 애초에 너무 거대한 비전을 가졌던 탓에, 계속 타협과 양보를 해 가며, 또 반대편의 힘에 의해 변형되어 가며 이루어지는 매우 제한적인 진보는 진보로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핵심은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느냐’가 아니라 ‘더 낫게 만들 수 있느냐’이어야 했다. 1027
허시먼은 이 책의 독자와 이 책의 연구대상자가 분리되지 않길 원했다. 그래서 이 책을 개발이 실제 진행되는 과정을 기록한 ‘여행기’의 형태가 되게 하고 싶었다. (문어와 구어를 연결하고) 1037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혼합”.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선진국에 비해 이 두 영역 간의 혼합이 도미니카 학교에서 더 많이 존재한다. 상층에서는 많은 기업인이 실제로 공적인 활동을 한다. 공적인 사안과 관련해 실제로 공식적인 지위를 갖고 있으며 공적인 대의와 단체에 시간을 많이 쓴다...우리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섞인다고 하면 추한 면을 떠올리는 데 익숙하다. 그러느라 이러한 결합이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어떤 종류든 진보에는 이런 결합이 필요하다는 것도 보지 못한다.” 1043
15.
<<반동의 화법:역효과론, 무용론, 위험론>>1991. 시민집단들 사이(진보진영과 보수 진영 사이, 급진 진영과 반동 진영 사이 등)에서 소통이 체계적으로 제거되는 현상에 대한 우려가 ‘대중사회에서 원자화된 개인들의 고립’이라는 문제보다 더 위험해 보인다. 1108 개혁이 왜 그렇게 망가지는지를 파악하려면 “개혁을 향한 운동이 왜 그에 대한 거부감과 강렬한 적대감을 이끌어낸느지 파악해야”했다. 1103 ‘위험 명제’ 보수주의자들이 정치를 말할 때믄 좋은 의도에서 나쁜 결과가 나온다고 주장하면서 경제를 말할 때는 나쁜 의도에서 좋은 결과 가농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의도와 결과의 불일치를 찬양함과 동시에 비난한다. 1105 자신에게도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집단들이 열린 대화를 유지할 수 있는 역량이야말로 한 사회의 민주적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이자 그 사회가 시민을 위한 미래를 일뤄 나갈 수 있는 역량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였다. 1109 1. 위험명제는 개혁이 과도한 비용을 유발하고 이전에 있었던 모든 혁신을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는 주방. 2. 무용명제는 변화를 위한 모든 노력은 무용하며 아무리 바꿔도 결국 제자리라고 말하는 주장. 1111 전통적인 적대와 비타협 담론으로부터 ‘민주주의에 더 친화적인’ 종류의 소통으로 가는 길은 길고 힘든 길일 것이다. 1117
16.
<<자기 전복의 경향>>1995 ‘정치 이전의 공동체적 감수성’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개념이라고 경고했다. 충성심이란 정치로부터, 그것의 혼란과 가능성들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이전의 주장들을 전복하는 데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과거의 개념들을 되짚어보려는 경향이 그 개념들을 확장할 수 잇는 방법을 찾기 위한 것이기에 그의 작업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1133 <<경계를 넘다>>crossin boundaries
볕뉘. 지인의 모친상으로 부여를 다녀오다. 전날 소식에 몸과 마음이 흔들렸는지 하루 종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따스한 봄볕. 따뜻한 마음들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된 것 같다. 당사자는 오직할까 싶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지만 몸짓에서 벌써 마음이 읽힌다 싶다. 대보수 마지막 날이라 일터에서 이렇게 매듭을 짓는다. 시계추처럼 끊임없이 반복하는 모습들이 읽혀 아쉽고 안타깝다. 한 번이라도 멈추면 한번이라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진보는 계속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지와 몽매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멈추시길, 그리고 둘러보시길...스스로 안까지. 마음 속까지. 자기전복의 경향조차 없는 무리들이 아니길. 스스로 증명하는 방법은 늘 열려있다는 사실까지 망각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