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에 혁명의 자격을 부여하여야 하는가?(作)
[무엇]을 할까가 고민이죠. [무엇]을 해야하는데, 무엇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무엇]을 물어봐도 답변도 잘 해주지 않고 응답도 무덤덤하기만 합니다. 어제 [파시즘] 작은강의가 있었죠. 파시즘이 무엇일까?라고 물어보면 막막합니다. 파시즘이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무엇이다라고 하며 파시즘을 꽉 잡아버리는 순간, 손가락사이를 빠져나가는 놈들이 무진장 많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한번, 조금만 힘을 다른 곳으로 써 봅시다. 궁금증을 무엇이다에 두지말고 어떻게 생겼을까? 왜? 그랬을까?에 방점을 두어보는 겁니다. 파시즘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각인되었는지, 파시스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한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보는 겁니다. 어떠신지요? 파시즘이 하나씩 둘씩 걸려들어오나요? 파시즘이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기 이전에 전후좌우의 맥락에 신경을 써야하는지? 가 들어오나요? 이데올로기의 그물로도 부족하고 맑스시트의 그물도 그렇고 전체주의 설명도 부족하죠.
어떻게? 왜?의 힘은 무엇일까요? 파시즘은 무엇이구나라고 정의하는 순간, 파시즘에 대해 지금 이상 알거나 느낄 수 없습니다. 설명할 수 있을 뿐이죠. 그런데 파시즘이 어떻게? 왜? 라는 물음은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궁금하죠. 왜 일본이나 스페인이란 나라의 거동에 궁금해해야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조금 샛길로 접어들었군요.
어제 뒤풀이 가운데 이야기, 아니 고민이 번져 이어봅니다. 우리 모임은 무엇을 해야합니다. 잘 해야하는데, 초조하기도 하고, 실무의 동선이나 쳇바퀴에 잡히면 어지간히 딴 생각을 하기 힘듭니다. 무엇에 대한 강박이라고 이름을 붙일까요? 사람들은 무엇을 내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엇에 구금되어 있는 [어떻게]나 [왜]를 시간에 얽매이지 않게 석방시켜버리면 어떨까요? 어떻게 상설위원회나 [왜왜]에게 자유를 주면 어떨까요?
아, 그 얘기를 하지 않았군요. [어떻게]할까? 어떻게를 [무엇]에게서 자유롭게 두려면 생각도 해금시켜주어야 합니다. 뒷담화를 비롯하여 희노애락애오욕을 다 인정하여야 합니다. [무엇]에 거스른다고 째려보거나 노려보거나 하면 되지 않습니다. 무조건 달라야 합니다. 의견하나하나 색깔하나 하나, 기분 하나하나 그대로 저축을 시켜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이 색, 저 색, 이맛 저맛이 창고에 가득하도록 놓아두셔야 합니다. 그러니 거기에 시간이란 족쇄를 채워두시면 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왜]에 대해서도 고민이 하나 둘. 셋 쌓아두는 겁니다. 왜 하는 거야? 왜 했느냐? 왜 하지 않는거야? 왜, 어떻게하면도 섞어두시거나 같이 맛을 보거나 해야합니다. 진도가 지나치게 많이 나갔나요? 그럴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서로 다른 왜나 서로 튀는 어떻게가 많으면 많을수록 서로 튀어 올라가는 이견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안에 앞으로의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밑져야 본전 아니겠어요. 아님말구. 아니? 정말 앞날이, 모임의 미래가 있습니다. 있을 겁니다.
무엇에 막힌다면, 그래요. 거기에 붙어있는 [어떻게]와 [왜]를 자유롭게 놓아둡시다. [어떻게]와 [왜]의 연대가 고민을 숨펑숨펑 낳도록 멍석깔아줍니다. 성숙한 [무엇], 다른 [무엇]을 위해서 말입니다. 성원이 한분 한분 [어떻게]와 [왜]에 마음을 주지 않는데, 대행만 바라는데 굳이 무엇을 할 필요가 있나요? 무엇을 지키는 사람들은 무진장 힘듭니다. 그 무거운 짐을 왜 져야 하나요? [어떻게-왜]는 모임의 성원의 마음을 뺏을 수 있습니다. 그리 더디가는 길이 아닐 겁니다. 새로운 무엇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무엇을 해볼 수 있습니다.
[무엇]의 짐이 버겁긴 하지만, 늘 여백을 딴 짓을 하거나 딴 생각을 하는 부분들에 마음의 공간을 열어두는 것이 다 [무엇]을 위한 일입니다. 달아난 [어떻게와 왜]가 돌아와 [무엇]과 같이 버무려지거나 같이 산다면 나날이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아마 그 속에는 회원들의 아픈 마음, 기쁜 마음, 슬픈 마음, 들뜬 마음들이 담겨있을 수도 있으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겠죠. (다른생각 다른마음 다른논쟁 색다른모임마음 궁금해지는마음-모임)
뱀발.
1. 달님을 잊은지 오래~. 아침 어제 묶어둔 차를 가지러(핑계삼아 달림) 갑니다. 하늘은 비와 햇살을 절반씩 품었습니다. 가는 길, 꽤를 내어봅니다. 카이스트 전시회와 시립미술관을 끼고 가자구 말입니다.(그런데 손전화사진을 찍어두어도 프로그램이 맛이가 남길 수가 없어 아쉽습니다.) 카이스트에 전시관을 몇군데 둘러보니 관람객이 유일무이하더군요. 느낌이올듯 말듯한 전시입니다.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가면 재미난 전시가 될 것 같군요. 그런데 왠걸 절반의 햇살이 비로 바뀌어버렸네요. 다른 전시관을 가니 햇살로..이거 비나 흠뻑 맞을 것 같네하구 천천히 달리는데, 검은 먹구름에 아차 싶네요. ..어쩌나..하는 순간...그래요. 비가 눈으로 바뀌었어요. 전에 갈증만 나는 첫눈이었는데 제대로다 싶습니다.
2. 그렇게 낙엽도 내리고 첫눈도 내리는데 매그넘사진전은 설렁, 이응로미술관은 덜컥, 걸음이 머뭅니다. 대형 브로마이드 [외금강]도와 [대숲]그림앞에 한참 넋을 잃고 있다 손전화로 찰칵~(후레쉬도 없는, 좀 봐주시지..) 찰칵~하다고 그만 경고받았습니다. 마음이 찔려 새그림은 마음에만 넣고 옵니다.(가운데 낙서참고) 그래요. 그러고 나니 마음의 갈증이 무엇이었는지 모르는데 조금 풀린다 싶습니다. 외금강도가 무척이나 큽니다. 계곡 하나하나 넘다보니 그만 마음도 덜컥 풀려버렸습니다. 다시 보고 싶군요.
3. 딴짓이군요. 그래요. 모임.에 잡혀있다보면 아쉬움이 많아요. 늘 [어떻게]와 [왜]에 마음이 가시처럼 걸립니다. 다 마음이 같지 않죠. 산행할 때 돌탑처럼, 그렇게 하나씩만 던져주면 좋을텐데. 그것이 쌓이다보면, 그렇게 다른 것이 섞이다보면 더 풍성한 그런 것일텐데 하면서도 점점 달라붙는 조급함이 문제입니다. ㅎㅎ 우리의 마음은 왜 그렇게 [무엇]에 구할이나 가 있는 것인지? 그 [무엇]이 시덥지 않으면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는 것인지 말입니다.
4. 그런 것을 보면 우리는 대부분 [명사]에 갇혀산다는 말이 적절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양이고 관계에 익숙하다고 하는데, [동사]라고 하는데 우리 심보, 제 심보는 늘 [명사] 사대주의에 푹 절여져 있습니다. 어디에나 [어떻게]나 [왜]의 공간이 열려져 있지 않습니다. 수다를 떨고 싶어도 수다 떨 사랑방이 없습니다. 제가 몸을 담고 있는 모임도 그러하죠. 다른 모임에도 [어떻게]란 [왜]란 마음 하나 기부하지 않는 인색함을 보면 저도 그러한 놈이라고 자임합니다.
5. 미술관을 나서자 눈발이 가뜩이나 굵어졌습니다. 바람도 세어지구요. 몸이란 놈이 약죠. 이내 달님에 익숙해져 편안한 티를 냅니다. 그렇게 차를 가지러 일터로 가는 길이 세시간가량 걸렸네요. 주말 잘 보내시구요.
6. 행여 글이 연결된 모임에 누가 되는 것은 아닌지 합니다. [무엇]의 구할이 [어떻게]와 [왜]로 흘러들어갈 수 있는 구조나 시스템에 대해 걱정하고 고민하고 있구나라구 너그럽게 봐 주시길 바랍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절반이라도, 절반만 되면....배부를 듯 싶어요. 뭘할까? 걱정도 없구 말입니다. 너도 나두 이렇게 하고 싶다라고,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이런 이런 이유로 이렇게 해야한다. 저런 저런 이유로 저렇게 해야한다라는 성원들의 만찬은 요원하기만 한가요. ㅁ.
7. 제목이 선정적이지 않죠. ㅎㅎ 나름 애를 쓴건데. 하하
8. 마음과 모임을 번갈아 보다나니 낱글자가 같아 이리저리 섞어본다. 저리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