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1988년 칸느광고 대상 작품_ 워싱턴 올리베또감독 작
모처럼 퇴근 뒤 도서관에 들러 독서시간을 갖는다. 책을 알랭 드 보통 책 두권과 전에 봤던 [호모파시스투스] 책을 빌리다.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보았던 장을 다시 보니 되살아난다 싶다. 다소 산만하게 전개되는 [파시즘]을 [계급]이 있는 9장만 여운을 남겨두는데 다소 산만하다 싶다. 느낌이 오는 것이 아니라 퍼지는듯 산란되는 듯하다. 이에 대한 느낌은 또 라이히나 가타리에서 오는 것과 다르다. 최근의 논쟁이나 이론을 반영하는 '새로운 합의'와 색깔이나 강도에 엄연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잠도 자야하니 [작은강의] 뒤의 느낌들과 버무려 흔적을 남겨야지 싶다. 여부는 전적으로 제마음... ...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보아야할는지도 ... 다소 제목이 선정적이기도 한데 읽은 뒤 많은 부분 공감한다. 그 이유도 나누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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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파시즘적 결정화 - 히틀러라는 인물 안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리비도적 계열이 연접되어 대중 사이에서 새로운 욕망하는 기계주의의 변이를 결정화함.
- 평민적 유형
- 1차대전으로부터 나온 재향군인의 유형(군부의 신뢰는 받지 못하더라도 중립화할 수 있음)
- 점원 유형의 기회주의, 융통성, 순응성 (금융 및 산업부호들과 타협가능. 그들이 자신을 쉽사리 조종할 수 있으리라는 인상을 줌)
- 인종주의적 망상. 집합적 죽음충동에 일치하는 광적인 편집증적 에너지
파시즘은 우리의 가장 복잡한 방어망을 뚫고 스며들어 발전을 계속한다. 파시즘은 밖에서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에너지는 우리 각자의 욕망의 핵에서 나온다. 외관상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재앙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
파시즘은 암흑의 검은 고양이를 찾는 것과 같지만, 근대와 반근대, 혁명과 보수, 과거와 미래의 양극을 가진 기계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것이 낳는 상품은 언제나 미래란 상표를 달고 있다.
- 민족 공동체구성(혁명적 차원) - 대중을 동원하려는 대중주의차원 - 추동하는 힘으로서 신화적 차원이 있다. 쇠퇴하는 민족주의를 부활시키려는 유기체적민족주의가 신화의 두축으로 자리잡고 있다한다. 파시즘은 논리의 표면수준이 아니라 상상의 세계와 감정, 믿음, 정서가 버무려진 것으로 느껴야 한다. 신화를 눈여겨봐야 할 것은 잘못된 믿음이나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비전이나 이미지의 마력은 감정적 에너지를 끊임없이 만드는 힘이다. 이 힘은 열정, 예술로서 삶,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 용기의 페티시즘, 공동체의 황홀함을 갖고 지성을 비나하며, 소외감을 줄이는 기제로 작용하고, 잠자던 담론의 재생산체계를 만들어간다. 주력영역 역시 경제가 아니다. 정치문화와 사회문화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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