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최근 인기소설 <바리데기>는 지금도 신음하는 북녘땅, 아파하고 있을 바리가 만주를 거쳐, 저 끝단 런던에 까지 이르러 지구를 통틀어 어떻게 아픔이 이어지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애석하게도 같은 땅떵어리 남과 북을 가르고 살아도, 그 아픔은 전달되지 않는다. 오늘도 자동차로 출근하고, 넘칠 정도의 에어콘을 틀고, 샤워까지 내 더위를 사가라고 그렇게 좁은 땅떵어리에 내뱉고 있다. 그것이 우리 일상이다. 그리고 현실이다.
지구는 독수리오형제가 지켜야지, 왜 아무런 힘없는 나보고 지키라고 난리부르스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미국은 절반에 가까운, 일본, 독일, 영국이 1/3쯤 책임이 있고, 우리도 스물가운데 하나의 책임이 있으니, 제일 많이 더위를 먹히는 놈에게 대들어야지 왜 그러시냐고 하면, 딱히 대답하기가 망막하다. 님의 반론대로, 경제의 세계화 덕에 점점 까탈스러운 삶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전방지축 뛰기만 하고 자정력도 제어력도 없는 경제의 세계화는 정신이 없다.
이 담론에 빌붙어 더 더 우리몫을 찾아야 한다고 외치는 우리의 그림자도 약간은 책임이 있다. 어쩌면 정말 세계화되어야 할 것은 민주주의란, 정치라는 것이 세계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경제'만 살길이라고 외치는 우리 모습은 최면 상태는 아닐까? '경제'가 우리를 살릴 것이라고... ...
온갖 음료에, 온갖 아이스크림에, 온갖 술과 고기에, 우리의 주지육림에 우리는 안전한가? 수백배 부풀려진 경제란 환상에 나는 안전해왔는가? 살만한가? 더 지지고 볶고, 더 각박해지고, 더 위험한 것은 아닌가? 당신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경제만 세계화된 세상은 살만한가?
정작 필요한 것은, 아픔의 세계화이지 않을까 싶다. 모두의 소설처럼, 지금도 폭우에 먹을 거리에 촌각을 다투는 우리 북쪽 사람들을 마음 한쪽에 조금 비워두는 일, 아프리카 땅에서 에이즈에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친구들의 '아픔'을 마음 저켠에 들어갈 수 있도록 비워두는 일이 또 다른 하나이지 않을까?
우리의 겉은 지구에서 10번째, 11번째의 자본주의 국가이다. 부자나라만큼이나 지구가 더울 때 채워둔 석유같은 에너지를 전유해서 펑펑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에어콘이 없으면, 단 1도라도 낮추거나 덥지 않으면 안달할 정도로 나약해진 것이 또 다른 '우리'의 한 모습일 뿐이다. 어떤 연구는 오히려 육류와 유제품 섭취가 가축으로 인한 메탄가스가 과다생성되어 지구를 덥게한다고 한다. 또 어떤 나라는 환경세라는 제도로 이 틈을 보완하기도 한다. 살림집도 좀더 ... ...
소비자로서, 일터에서, 맞닿으며 부딪치는 곳곳에, 연구현장에서 이산화탄소를 잡아두는 방법으로, 또 기발한 상상력으로, 대안 에너지로도 그 속도를 조금이나마 줄이거나, 많이 늦출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의 테두리'에 '사회적 감수성'을 키우는 부단한 연습을 하지 않고서는
찰나의 빵빵한 에어콘 바람, 요란한 음식욕심, 현란한 쓰고싶은 욕심과 유혹은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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