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포그래피 전시;강연

지금 인간들은 두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다.

선입견과 편견이다.

 

덕분에 사색의 감옥,

아니 삶의 감옥에 갇혀 다른 삶을 볼 수 없다.

그 우물은 좁고도 까마득히 길고 깊다.

 

한번 빠져나가도록 올라가보자.

 

1. 개인은 없다.

 

여긴 외로운 섬이다. 나밖에 없다. 너라는 흔적조차 없으니 점점 잊는다. 건망증도 아니고 여긴 여기서는 대체 나를 가늠할 길이 없다.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혹자는 이를 너라는 말을 곁에 둔다. 나를 주체라 부르기도 하고 너를 객체라고도 하고 타자라고도 한다. 곁에 두어보자. -, 겨우 아니 너저분하게 타짜를 붙여서야 내가 가

늠된다. 이런 나를 상정해서 개인이라 셈하고 금칠을 해버린다. ‘내가 싫은 건 남에게 시키지 마라’ ‘내가 싫은 음식을 남에게 주지말라고 큼직하게 대문에 걸어놓은 것이 황금율이다. 이천년동안 말이다. 과연 그럴까. 내가 싫은 음식을 남이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질문을 곁에 두어야 그토록 같다고 여긴 가 다른 너(타자)와 연결되는 것이다. 내가 없어져야 겨우 다른 너, 또 다른 나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거창하게는 이질적인 자들의 도래라고 말한다.

 

우물 벽을 타고 조금 더 올라가보자. 신이 인간에 대한 동정심 으로 돌아가신 뒤, '나'는 우울하고 외롭다. 외로워졌다. 등에 새긴 개인이라는 타투를 새겨 자신감 뿜뿜이었는데 시대가 도와주질 않는다. 나는 앓는다. 스르르 풀려난 줄 알았는데, 자유라는 쇠구슬마저 쇠사슬에 묶인 채  발목에 달려있다. 환장하시겠다. 그래 무의식이다. 이렇게 개인을 발명한 인간들은 무의식이라는 물음표를 붙인다. 정신을 육체에서 발라낸 뒤 둘로 나누다가 생긴 병들을 이름붙이기 시작한다. 억압이니 분열증 정신병이니 분석이니 하면서 말이다.

 

자아란 없다. 니체돌멩이엔 중언부언하지만 자기다. 자기가 있다. 내몸이 있다. 마르크스란 벽돌모양의 바위에는 인간의 본질이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란 애매모호한 발언을 하고 '노동을 통해 본성도 생성된다'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관계라니 하면 본성도 만들어진다고 하니 무슨 어처구니인가? 조금 더 우물벽을 타보자 제법 큰 바위돌덩어리가 있다. 기관없는 바위라고, 기관없는 몸이라고 한다. 기관없는 몸체냐 신체냐. 번역 좀 잘하시지. 토르소. 릴케는 이 제목의 시 끝에 이렇게 말했다고 해.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고 이게 무슨 아귀아구맞춤이야. 기관없는 몸, 토르소, 그 말랑말랑함


어느 한 곳이라도 툭 터져버릴 듯해. 싹이라도 나올 듯 말야. 그래. 이 양반은 좀 전 얘기했던 무의식의 대가. 프로이트 그 양반 참 어이없어. 하지. 정신을 분석하다니. 정신분석. 형용모순. 그게 분석이 되냐고, 말이야 맘이야. 따라서 해보시라고. 말해. 이렇게, 그게 아니라 분석 앞에 분열을 붙여보라고, 크게 얘기해보시겠어요. 분열분석.!!! 이 양반을 까면서 이렇게 얘기하니 잘 들으세요. “무의식을 생성할 수 있다.” 벽을 타고 올라오다 본 구절하고 비슷하지 않나. 본성도 생성된다. 무의식에 의해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분열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잖아. 그러니 프로이트가 얼마나 작아 보이겠어. 지독한 환원주의자라구. 거세콤플렉스같은 소리라니.

 

정리해봅시다. 나는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서로 보완하며 마주칠 때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너라는 것은 없고 그 관계만 있는 것이다. 둘로 나누다보면 죽는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의 주인공이 다 이 이분법이라는 개에게 물려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기 바랄뿐.


2. 인과는 없다 


안타깝게도 이 나라 우엔 과학을 신주단지 모시 듯한다. 그러니 곁을 준 과학철학 같 은 건 별종 취급받는다. 하물며 시인에게까지 말이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가 아니다. 그래서 칸트가 까인다. 경험이전의 선험적인

진리가 있 다의 용례인 이것이 무참히 밟혔다. 아시는 것처럼 양자역학이다. 입자이면서 파동이 다. 불확정성의 원리, 상보성의 원리를 원리를 말한 보어까지. 프랑스 정치철학은 이 런 과학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그래서 진리는 거짓말쟁이들의 발명품이라고 말하 며, 인식론의 단절을 철학에 꺾꽂이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냥 4가지로 나눈 작용 인과 목적인을 그대로 받아들여 원인과 결과로 미래를 지금으로 가져와(계획하여) 지 금을 소진하는 것들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우연 우연 우연. 사물에 대하여를 쓴 루크레티우스..비가온다. 우연히 사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에테르로 쌓인 천상세계 가 헬리혜성의 출현으로 무너지듯이, 아무 것도 아닌 인식방법은 이렇게 백년전까지 버텨왔고, 우리가 숨쉬는 여기저기는 아무런 균열의 지점도 없다. 앨버트 허시먼은 경 제학의 이해관계라는 개념을 역추적하였더니 별 이유없이 그냥 우연히 유통되다가 만 들어진 것이라는 걸 밝혀낸다. 카렌바라드는 해러웨이의 회절개념을 발전시키고 얽힘 현상까지 철학에 끌여들였다. 존재의 기본단위를 현상으로 본다. 마르크스의 관계론적 존재론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 사유의 전개는 비단 서구의 일만이 아니다. 뤼쉰은 이 길로 가다보면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에 늙은 노인이 나올지 꽃을 든 소녀가 나 올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리고 그 것은 내일이 아니다. 나는 오로지 주어진 길 을 갈 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또 다른 인과라는 편견. 그것이 이항대립, 이분법이란 선입견과 맞물려 이 사단이사달이 나 게 된 것이다. 


3. ‘하기’라는 뱀 


이제 좁다랗고 긴 우물의 끝부분에 빛들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것 같다. 우물가장자리 가 휘윰하다. 닫힌 우물덮개 한쪽을 밀어올린다. 눈이 부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다.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뒤 보니 풀밭에 뱀이 천지다. 무슨 일이람. 이 꼴 보려 고 이


 짓을 했단 말인가. 에휴. 뱀이 움직인다.


 ‘하기’라는 머리가 움직이면 알기라는 배와 되기라는 꼬리가 같이 요 동을 친다. 간을 맞출 줄 알게 되면 요리들이 쉬워 보이고 다른 음식을 찾게 되고 더 만들고 싶어진다. 굳이 어렵게 이야기하면 인식론과 존재론이 한몸이고 실천이란 머 리를 쳐들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것이 생명이다. 윤리라는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 고 하기의 끝에 자연스럽게 붙어있는 것이다. 하는 순간만 뱀의 꼬리를 볼 수 있다. 이게 무슨 재미냐. 재미다. 


안다는 것은 정보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앎은 지혜에 가깝다. 그 앎은 외운다고 해결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깨우침에 가까운 것이다. 하는 것이 동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관계를 지어본다면 프락시스, 실천, 하기라는 말만 다를 뿐이 다. 해석하기가 아니라 변혁한다는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 거듭“나”는 나를 끌어내리 지 말고 끌어올려보자. 


우연으로 사유한다고 해서 많은 것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고유한 것들은 그렇게 연습하면 하나 더하기 다수이하의 범위에 머무른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감안하고 보 는 눈과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늑대였다. 개가 아니었다. 인간인 줄 알았는데. 개였고. 개가 아니라 늑대였다 니. 왠 개족보람?


 

2.6이분법(이항대립).우연. 3.4,9무의식, 1.5자본주의,우울, 타자.. 늑대.환원주의,선험,진리 현상,관계,5.10하기(되기),프락시스, 실천, 상보성,미결정성,실타래,7 마주침 등등 면역,공동체,선물. 2자기스텍트럼,신경다양성,자연문화, 철학물리학 철학인간학(과학철학/정치철학) 대중개인 7사물 인식론단절,주어,동사,형용사,부사.야성,,.2황금율.백금율.이질적인자 속도. 벡터. 8 제어. 광인. 뤼신. . , . - 있음.가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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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0-28 0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마리 개를 키운다는 말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