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남경태 옮김 / 예지(Wisdom)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지구과학, 고고학, 역사학의 가장 최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저자의 솜씨가 놀랍다.
- 뉴 사이언티스트 - 

머나먼 과거가 지금 우리의 고민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주는 … 흥미진진한 이 책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 네이처 - 

지난 2만 년 간의 기후 대변동의 역사를 펼쳐놓은 놀라운 책.
- 이콜로지스트 - 

감탄에 이은 감탄. 세계 유수의 과학 전문잡지들이 극찬하는 책이 하나 있다. 

바로 기후와 문명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쓴 브라이언 페이건의 책이다. 

브라이언 페이건의 책은 뭐랄까? 전문성과 대중성을 겸비한(그러면서 대중성에 조금 더 치우친) 고고 · 역사책이어서 늘 읽는데 부담도 없고, 재미가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번 책은 조금 더 전문성을 강조한 책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기후’라고 하는 테마는 우리 주변에서 책으로 상당히 많이 다뤄지고 있는데(교보문고 싸이트에서 기후를 검색하니 1,500여 건이 검색된다), 그 중에는 기후가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개설서도 물론 있지만 기후 변화와 온난화, 인간사회와 기후와의 관계 등에 대한 내용을 담은 책들이 주로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데 있어 자연지리와의 상관성이 중요함은 재삼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며, 그 중에서 특히 기후와의 상관성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브라이언 페이건의 이번 책은 기후와 문명, 더 나아가 기후와 인간사회의 역사가 어떤 관계 속에서 유지되어 왔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몇 가지 충고성 멘트를 계속 남기고 있다(특히 360~364p에 있는 내용들은 상당히 충고성이 강한 내용들이다). 예를 들면 지금의 기나긴 온난화가 인류 문명 발달의 좋은 배경이 되고 있지만, 곧 기후가 변화하면 인류 문명은 이에 잘 대처하지 못 하고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지금의 인류 문명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자그마한 나룻배가 아니라 거대한 유조선이기 때문에 거친 풍랑에 휩쓸리면 오히려 더 쉽게 난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개인적으로 이 비유 참 괜찮은 것 같다). 그래서 지난 인류 역사에서도 거대한 유조선처럼 몸집을 불린 문명들은 모두 그 한계점을 넘지 못 하고 멸망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또한 조금 더 나아가 현재 인류 문명 역시 지난 문명들처럼 될 것인지, 아닌지 혹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는 뭐 그런 바람까지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서 재밌는 것 하나는 지구 온난화, 혹은 지금의 이상 기후가 인류 문명이 뱉어내는 나쁜 것들(환경오염과 관련된)과 크게 상관이 없다는 식의 내용이었다(물론 상관은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다고 말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환경오염과 관련된 가벼운 토론이 있었다. 인간의 환경오염이 지금의 이상기후, 기상이변 등과 얼마나 상관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뭐 한쪽은 인간의 환경오염이 지금의 기상이변을 야기했다, 다른 한쪽은 그것과 상관없이 지금까지의 기후 변동주기에 맞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뭐 이렇게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을 간략하게 적자면, 인간에 의한 환경오염이 분명히 지금의 지구를 병들게 하는데 일조하는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구의 엄청난 자정능력을 살펴봤을 때(얼마 전 히스토리채널에서 방영한 ‘인류 멸망, 그 후’라는 방송을 봤는데 지금의 인류가 멸망하고 1만년만 지나면 인류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질 정도란다), 오히려 지금의 지구온난화라든가, 라니뇨 · 엘니뇨 등의 기상이변은 늘 그래왔듯이 지구의 기후 변동주기와 맞춰 벌어지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나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프레드 싱거 · 데니스 에이버리가 쓴『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 일본 뉴턴프레스의『지구 온난화』, 로이 W. 스펜서의『기후 커넥션』등을 보면 더 자세한 지식들을 알 수 있는데 뭐 지금 이 책과는 큰 상관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도록 하겠다(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 사족이 너무 길었는데, 사족 몇 개만 더 달고 이 책에 대해 몇 마디 더 적도록 하겠다. ^^ 

최근 한국학계(고고학계나 역사학계 모두)에서도 기후나 천체와 관련하여 역사를 서술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고고학계야 기후 변화에 따른 해수면 변동을 문화전파(특히 농경문화), 유적의 입지 등과 설명하는 일이 종종 있었고, 역사학계에서도 암각화에 새겨진 문양 등을 외계충격설이라는 이론과 맞물려 해석하는 일이 얼마 전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로 넘어오는 선사시대에 생업경제가 바뀌고, 주민이 바뀌고, 그에 따라 주거지의 형태나 입지, 사회구조 등이 바뀌는 이유를 지형 및 기후의 변화와 찾으려는 연구자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특히 필자가 몸담고 있는 연구소에서는 ‘古環境 복원’에 적지 않은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실제 발굴을 통해서 그러한 연구 성과들이 입증되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지금 모두 개간되어 논으로 사용되는 땅도 그 아래로 5~6m 이상 파 내려가면 구석기시대 이래로 자연스레 형성된 고지형에 맞춰 형성된 취락유적이 존재할 수 있으며(현재 행복도시 대평리에서 그러한 대규모 취락유적들이 속속들이 확인되고 있다. 지금의 땅 밑으로 최대 7m 이상 파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과거에는 구릉 혹은 강이었는데 지금은 지형이 변화되어 있을 것 같지 않은 유구들이 확인되는 경우가 있다. 이 모두 지리학적인 개념과 이론을 고고학에 도입한 것인데, 그 결과는 충분히 만족할 만 하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필자 역시 최근 기후 혹은 고지형에 대해 이전보다 관심이 많이 늘었는데, 마침 이 책을 읽게 되어 개인적으로 느끼는 바가 많았다. 그래서 필자의 서평을 읽은 분들 중 몇몇은 이 책을 읽고 필자처럼 느끼는 바가 있었으면 하는 강제 아닌 강제적인 바람도 든다. 

그럼 이제 정말 본론으로 넘어가서 지루한 사족을 마무리 짓도록 하자. 

책 첫머리를 보면 ‘옮긴이의 말’이 눈에 확 들어온다. 

‘역사를 움직이는 진짜 힘’ 정말? 기후가 정말 그렇단 말인가? 옮긴이는 그렇게 쇼킹한 얘기를 하나 한다. 지금은 바다인 ‘흑해’는 당시에 ‘에욱시네’라는 이름의 호수였단다. 이 에욱시네는 원래 빙하가 물러난 자리에 생겨난 호수인데 전 지구적 온난화에 따라 빙하가 멀리 북쪽으로 물러가면서, 호수로 유입되는 물의 양이 점점 줄어들었다고 한다. 당연히 호수 바깥족의 물, 지중해의 수위는 온난화에 따라 점차 높아지게 되었고 결국 지중해의 수위보다 에욱시네 호수의 수위가 150m나 낮아졌을 때 마침내 둑이 터졌다. B.C 5,600년경에 지중해의 물은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저지대로 흘러넘쳐 흑해로 들어갔고, 양자의 수위가 같아질 때까지는 무려 2년이 걸렸다고 하니, 그 2년간의 인류의 기억이 곧 고대 세계 각지에 퍼진 대홍수 이야기의 모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잉?! 이런 쇼킹한 일이?!’ 뭐 여기에서 그럼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도 그 당시 우연히(!) 발생한 이러한 기상이변이냐, 아니냐를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구의 무시무시한 힘이 인간의 기억인자 속에 엄청난 공포를 안겨줬고, 그것이 종교적으로,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이제 브라이언 페이건이 어떤 말을 했는지 살펴보자. 그는 책 첫머리에서 ‘기후에 관한 소중한 기억’이라는 문구로 운을 떼고 있다. 그리고 ‘취약성의 문턱’이라는 내용을 짧게 서술하고 본론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취약성의 문턱’이라...앞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는 비유를 언급했는데 기억하시리라 믿는다.  

저자는 말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생한 급속한 도시화와 문명의 탄생(한때 메소포타미아의 너무 빠른 문명화와 도시화를 두고 외계인의 소행이라고까지 떠들었다. 이집트도 마찬가지고)은 기후 덕분이었다. B.C 6,000년경 홍수가 빈번하고 강우량이 많았던 시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수많은 촌락이 생겨났고, 그것들은 곧 수천 명 규모의 주민이 사는 도시로 업그레이드되기 시작했다. B.C 3,600년경 기후가 변화하면서 변화 양상은 더 가속화되었으며, B.C 3,1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각 도시국가들은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리고 B.C 2,200년경 북쪽지역이 화산이 폭발하면서 이후 300여 년간 기나긴 가뭄이 시작되었다. 비는 내리지 않고 강은 범람하지 않았다. 비옥한 평원은 사막으로 바뀌었으며, 도시 경제는 붕괴되고 유목민의 침입이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를 무너뜨렸다. 도시국가 우르는 붕괴되었고, 도시에 살던 사람은 도시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다(작은 촌락단위로 살던가, 고지대로 피하던가, 굶어죽던가...). 저자는 얘기한다. 생존에서 중요한 것은 ‘규모’라고 말이다. 우르는 대도시였기 때문에 혹독한 가뭄의 파급 효과로 인해 꼼짝없이 대규모 탈주와 기근을 겪을 수밖에 없었으며, 적응이나 회복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붕괴했다고 말이다. 소규모 재앙은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커졌지만 그만큼 대규모 재앙에 대해서는 더 취약해졌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취약성의 문턱이라는 개념이었다. 그리고 덧붙인다. 우르가 작은 무역선이라면 오늘날의 산업문명은 대형 유조선이라고 말이다. 점증하는 자연재해에 대해 문명 역시 취약성이 점증하고 있다고 말이다.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이런 경고(?)는 그간 많이 있어왔으며 그에 대한 상상도 어느 정도 이뤄졌던 것 같다. ‘2012’라는 재난영화가 얼마 전 개봉해서 화제가 됐었는데, 그때 인류 문명은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정치체가 멸망하고 수십억의 인구가 사라지는 대신 5개(7개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의 방주(우주선같이 생긴)만 남겨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방법을 택했다. 즉, 우르의 붕괴와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방법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 밖에 ‘더 로드’, ‘일라이’와 같은 인류 멸망 이후의 상황을 그린 영화를 보면 거대한 정치체(국가)가 사라진 다음, 인류 문명은 소규모 촌락을 중심으로 아옹다옹 권력을 탐하며 유지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양태만 달랐을 뿐, 과거에도 문명이 붕괴될 때마다 이런 현상은 계속 됐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그렇게 무서운 말 같다는 생각은 안 들게 되었다. 암튼 책을 읽으면서, 혹은 책을 읽기 전이나 후에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게 됐다. 잡생각이라면 잡생각일 수 있겠지만 암튼 그만큼 필자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목차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빙하기의 오케스트라 / B.C 18,000~B.C 13,500년
신대륙 / B.C 15,000~B.C 11,000년
대온난화 시기의 유럽 / B.C 15,000~B.C 11,000년
천년의 가뭄 / B.c 11,000~B.C 10,000년
대홍수 / B.C 10,000~B.C 4,000년
가뭄과 도시 / B.C 6,200~B.C 1,900년
사막의 선물 / B.C 6,000~B.C 3,100년
엘니뇨, 대기와 대양의 춤 / B.C 2,200~B.C 1,200년
켈트족과 로마인 / B.C 1,200~B.C 900
대가뭄 / A.D 1~1,200년
웅장한 잔해 / A.D 1~1,200년
부록 : 1,200년~현대 : 불안한 지구의 여름 

빙하기와 간빙기가 거듭되면서, 온난화와 홍수, 가뭄과 온난화가 되풀이되는 지구의 역사를 저자는 약 300여 쪽에 달하는 분량 안에 잘 정리하고 있었다. 책의 내용은 단 몇 줄에 간단히 정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세부적으로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B.C 16,000년 마지막 빙하기가 지구를 찾아오고, 이후 B.C 11,000년 영거 드리아스기(많이 들어봤을 것이다)가 찾아오기까지 지구는 급속하게 온난화된다. 유럽에 숲이 확산되고, 시베리아 북동부까지 구석기인이 확산된다. 아메리카 대륙에 최초로 인류가 거주하게 되고, 프랑스 니오에서 동굴벽화가 확인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이후 영거 드리아스기를 넘어서면 다시 온난화가 재개되면서 동남아시아에서 농경이 시작되고, B.C 9,000년에는 예리코를 건설하고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한다. B.C 6,000년경에 소빙하기(한랭건조)가 잠깐 찾아오지만 이내 지구는 온난 다습화되고, B.C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는 인류 최초의 문명이 싹트게 된다(예전에 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문명이 그렇게 빨리 발생했을까? 에 대해 고민하다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총, 균, 쇠』를 보고 어느 정도 해소가 됐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한층 이해가 쉬워졌다). 여기까지는 뭐 기존에도 이미 알려진 내용이고, 더 새로울 것이 없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하지만 뒤로 갈수록 내용이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일단,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넘어가고 히타이트와 제국 이집트에 대한 설명, 미케네와 그리스에 대한 설명은 참신했다. 히타이트가 그렇게 강력한 제국을 형성했음에도 순식간에 붕괴되어 멸망해버릴 수밖에 없던 이유와 파라오의 권위가 점점 위축되고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일대에 어떤 변화가 나타났는지 등을 단순히 역사적 사건(주로 정치적인)의 나열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다른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설명하고 있어 그런 부분들이 읽는 내내 필자를 흥분하게 했다. 이러한 집필 방식은 뒤로 갈수록 필자를 더욱 빠져들게 했는데, 평소 쉽게 접하지 못 했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이야기에서 빛을 발했다. 푸에블로 인디언에 대해서는 소략하게 밖에 몰랐는데, 이 책을 통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마야 · 잉카와 같은 아메리카의 고대 문명에 대한 설명은 이 책의 白眉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저자는 과감히 말한다. 마야인들의 근거지는 혹독한 환경으로서 마야 농부들이 살기 힘든 곳이었다고. 그 지역은 숲을 개간하면 땅바닥이 드러나 빗물을 받을 수는 있었으나 열대의 강렬한 햇빛을 같이 받았으며, 그렇게 드러난 지표면은 금새 거북등처럼 갈라져 경작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순간 영화 ‘아포칼립토’에서 봤던 갈라지고 푸석푸석해서 마른 먼지만 나풀거리던 메마른 경작지가 떠올랐다(어떤 미친 어린 소녀가 예언을 하는 장면). 하지만 마야 농부들은 그러한 기후와 지리를 극복하고 이후 1500년 동안이나 번영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 고왕국시대의 이집트, 인더스 강 유역의 하라파보다도 더 오래 말이다. 이러한 마야의 번영을 기후에 대한 설명 없이 일반적인 문명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혹은 군사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마야 문명이 갑자기 몰락한 것 역시 마찬가지로 그렇게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단연코 아니라고 하고 있다. 마야 문명은 결국 취약성의 문턱을 넘어서 그만 붕괴되고 말았다. 자연재해를 극복하고 가뭄이나 기아를 극복할 수 있는 한계점을 넘어서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아주 먼 과거의 거대 제국의 종말을 이처럼 제3자의 입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필자가 그런 심정을 다시금 느꼈다(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런 느낌은 예전에『총, 균, 쇠』를 읽으면서 한번 느꼈다. 사정이 있어 그에 대한 서평은 아직 못 올렸지만 이 부분은 그만 스킵!).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을 꼽으라면 고고학 이외에도 다양한 인접 학문(천문학, 기후학, 지리학, 역사학, 금석학, 인류학을 비롯한 각종 자연과학적 분석방법)의 인용이다. 브라이언 페이건이 이 모든 연구를 혼자 일궈내 책을 쓴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것들을 하나의 일관된 주제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작업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다양한 시각에서 다양하게 해석을 하면서도 늘 최종 종착점은 하나다. 즉, 지난 수천 년의 인류사는 지구라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 했다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간간히(정말 간간히) 제시되는 각종 지도들도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뭐 그러한 시각자료가 별로 없다는 점이 이 책의 단점이라면 단점이겠지만, 반대로 딱히 어려운 표나 그래프 따위를 잔뜩 실을 요량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필자의 관심사가 이쪽으로 쏠려서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요즘 들어 읽은 책 중에서(그것도 전공서적 혹은 전공 관련 서적 중에서) 가장 볼만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잘 안 하는 추천도 곁들이면서 이만 글을 줄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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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삶과 죽음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3
이브 코아 지음 / 시공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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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년이 지나 올해에도 어김없이 예비군 훈련은 돌아왔고, 건빵 주머니 한켠에 잘 담아갔던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를 또 한 번 펼쳐봤다. 3권은『고래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인데 고래에 대한 백과 사전류의 책임이 짐작되었다. 그런데 첫 장부터 참 재밌다. 저자는 나다니엘 필브릭의『바다 한가운데서 : 포경선 에식스 호의 비극』이라는 책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책은 그 유명한 ‘백경’의 소재가 된 실제 사건을 그리고 있는 책이었다. 19세기 초반 미국은 포경산업으로 큰 호황을 이뤘는데 그 중심에 낸터킷 섬이 있었다. 1820년, 낸터킷 섬의 포경선 에식스호가 21명의 선원을 태우고 출항했다가 이듬해 태평양 먼 바다에서 성난 향유고래에 받혀 난파하고, 그 후 근 100일간의 사투 끝에 단 8명의 백인 선원만이 구조되었는데 저자는 책 첫머리를 이 이야기로 시작했다. 

책 첫머리에 기록된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고래 사냥의 위험성과 바다라고 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공포와 두려움이 잘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의 첫 장은 바로 ‘고래의 전설’이다. 고래의 거대한 몸집은 사람들에게 항상 두려움과 경외심을 안겨줄만한데 이는 마치 코끼리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우리가 흔히 상상(想像)이라고 하는 것 역시 코끼리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저자는 성경의「시편」과 플리니우스의『박물지』등을 언급하며 고래가 아주 오래전부터 상상 속의 생물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또한 에스키모와 노르웨이인, 북아메리카 인디언, 바스크인과 일본인들 고래를 어떻게 생각하고 고래를 어떻게 사냥했는지 등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걸 보면서 우리나라의 경우, 고래에 대해 언제부터 인식하고 있었는지, 고래 사냥은 언제부터 제대로 했는지(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고래 사냥에 대한 내용이 있으니 이른 시기부터 했겠지만, 역사시대 이후에도 그랬는지 한번 찾아봐야겠다) 궁금해졌다.

이후 저자는 고래 사냥, 즉 포경 산업의 역사에 대해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얼마 전 종이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숲을 파괴하는 거대 제지회사들의 횡포를 책으로 읽어 자연파괴가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초래하는지 절실히 느꼈는데, 이번에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간 얼마나 많은 생명이 인간의 욕심 때문에 사라져 갔는지 알 수 있었다. 이미 9세기부터 바스크인들은 고래 사냥을 시작했지만, 점차 도를 넘어서는 사냥으로 인해 고래들은 예전에 자주 찾던 바다를 찾지 않았고, 포경 산업은 점점 더 조직적으로, 더 원양해양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19세기가 되면서 포경 산업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던 나다니엘 필브릭의 소설 속에 나오는 낸터킷 항과 뉴베드퍼드 항이 이 당시 떠오르는 포경산업의 황금기를 구가하게 될 공간적 배경이었다.

전반부에서 고래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포경 산업에 대한 개략적인 역사를 서술했다면 후반부에서는 약간 생활사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제5장에서 저자는 포경선원의 생활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었는데, 문화사적인 서술방식을 택하고 있어 조금 의아했다. 그리고 다시 앞장으로 돌아와 저자의 약력을 살펴보니 ‘아하!’ 하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저자는 사학과 민족학을 연구했으며, 현재는 어로 기술과 전략 어촌의 관습 등이 어촌의 사회, 경제 구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즉, 단순히 고래에 대한 연구만 하는 사람도 아니고, 생물학자도 아니었으며, 역사학과 민족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고래가 나오는 여러 문헌들을 검토하고 그에 대한 전설과 사람들의 인식을 1장에서 소개한 다음, 고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고래 사냥이 어떤 식으로 전개됐는지 순차적으로 나열한 것이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이 쓴 글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 제5장을 보면, 고래 사냥이 큰 돈을 벌 수 있게 하는 사업이지만 그만큼 목숨 걸고 덤벼들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수년간 이어지는 바다 위에서의 생활, 향유고래와 같은 공격성이 강한 육식고래와의 사투, 생사를 알 수 없는 하루하루, 비위생적이면서 건강을 쉽게 해칠 수 있는 생활, 고독함과 외로움 등등 저자는 고래 사냥이 어떤 것인지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저자는 6장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 바로 ‘고래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1864년 바다표범의 명사냥꾼이었던 노르웨이의 스벤드 포윈 선장은 포를 이용해서 사정거리 50m 이내의 고래를 공격할 수 있는 작살을 고안해 냈다. 이 혁신적인 방법은 고래 사냥에 일대 혁명을 불러 일으켰는데, 작살이 고래 살에 박히면 작살 끝이 별 모양으로 깨지면서 그와 동시에 황산을 채운 작은 유리병이 깨지고 이어 화약에 불이 붙어 그 폭발로 인해 고래가 죽게 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때까지 덩치도 크고 너무 빨리 잡지 못 했던 대왕고래들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19세기 말에는 노르웨이의 포경기업 5개 사가 아이슬란드에 설립되었는데, 하나의 포경기지에는 200~300명의 인원이 고용되어 이전 시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조직적으로 고래 사냥을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남극에서의 고래 사냥이 재개되고, 엄청난 수의 가공선(포경선과 공장선을 포함하여)이 개발되어 아예 정박지에서 조업을 계속 함으로써 고래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게 되었다.

국제 포경위원회에서는 오늘날 고래 포획 할당량을 정해 놓고 고래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양떼를 지키는 늑대’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회원국의 대표들은 대개가 포경회사의 대주주들이기 때문이다. 즉, 위원회는 고래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관리할 뿐이지, 진정으로 고래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렇기 때문에 그린피스에서는 이 위원회를 국제연합 환경계획기구의 관할 아래 두고, 책임감 있는 과학위원회로 대체할 것은 제안하기도 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은 것 같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역시 참고래를 매년 160마리씩 잡겠다고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야 우리나라에서도 고래 사냥이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이 책의 초판 1쇄가 1995년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예전 내용이 바뀌지 않고 계속 실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필리핀 같은 국가에서는 과학적인 포경을 계속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한다(연구를 목적으로 잡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많이 잡을 필요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즉, 고래들의 운명은 앞으로도 그렇게 밝지만은 못 하다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고래에 대한 여러 소설 작품이나 고래에 대한 국제기구의 대응, 고래의 종류 등을 설명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고래라고 하면 일반인과 쉽게 접하기도 어려운 동물인데다가 그들의 삶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막상 이렇게 책을 통해서 보니 인간의 욕심 때문에 자연이 점점 황폐화되고 있다는 생각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특히 포경 산업의 역사와 현주소를 살펴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수백만 마리의 고래들이 그렇게 사라져가고 있었다니 말이다.

고래에 대해 자세히 알려준 것뿐만 아니라 포경 산업에 대한 진실을 깨우쳐줬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우리 주변의 자연 환경이 자꾸 변화를 겪고 파괴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그런 시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지극히 만족스럽다는 것을 새삼 강조하고 싶다. 아! 하나만 더 얘기하자면 늘 그렇듯이 다양한 도판과 삽화들이 실려 있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었던 독자들도 책을 읽다 보면 흥미를 갖고 책장을 넘길 수 있을 것이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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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사라지는 숲 이야기 - 종이, 자연 친화적일까? 세계를 누비며 밝혀 낸 우리가 알아야 할 종이의 비밀!
맨디 하기스 지음, 이경아 외 옮김 / 상상의숲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전공서적 이외의 좋은 책을 읽어 기분좋게 서평을 하나 쓴다.

이 책은 종이에 관련된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종이가 만들어지는 과정, 버려지는 과정, 다시 수집되어 재활용되는 과정은 물론이요, 그와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집단, 종이로 인해 변화하는 세상 등등 종이와 관련된 내용들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종이야말로 엄청난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는 사실을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종이 1장, 1장이 탄생하기까지 정말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구나~하는 것을 이 책을 보면서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저자인 맨디 하기스는 토지와 산림 관련 소프트웨어 개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전 세계의 숲을 보호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한 사람이다. 그리고 2006년 1월 스코틀랜드를 출발해 핀란드, 러시아, 중국,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과 북미 전역의 종이 생산지들을 여행하면서 직접 목격하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자신의 일에 열정을 다해 이처럼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도 대단하게 느꼈지만, 저자가 밝히는 사실 하나하나가 정말 충격적이어서 전혀 딴 세상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 인류의 먼 조상은 기록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기 위해 꿈과 희망을 품었고, 먼 후손은 그 기술을 지금까지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후손의 지혜는 조상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 -

대체 종이가 어떻기에 이렇게 현대인의 미련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했을까? (사실 플라스틱이나 일회용 용기 등에 의한 환경파괴에 대해서는 수없이 많이 접했지만 종이는 처음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이미 책을 읽기 전부터 이 책에 완전 빠져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종이라고 하면 채륜이라는 인물을 떠올릴 것이다. 한때 중국에서 처음으로 종이를 만든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이미 기원전후에 중국에서는 종이를 만들어 썼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에 채륜은 당시 더 좋은 양질의 종이를 생산한 사람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싶다(저자는 이 책에서 종이를 처음 나든 것은 인도사람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했지만 일단은 상식적인 선에서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암튼 그렇게 만든 종이는 이후 글자의 사용과 함께 이후 수천 년간 도래할 중국의 관료 제도를 발전시키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이 패함으로써 중국의 제지기술은 유럽으로까지 전파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처음에는 수제품이었던 종이가 이제는 최첨단 기계식 설비를 갖춘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이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종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 주변에서 엄청나게 많이 소비되고 있는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이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당장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필자의 책상 위에는 종이로 만든 ‘책’과 종이로 만든 ‘다이어리’, 종이로 만든 ‘휴지’, 종이로 만든 ‘연필통’, 종이로 만든 ‘봉투’와 ‘논문’, 종이로 만든 ‘상자’ 등이 놓여 있다. 어느 것 하나 종이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다보니 종이는 너무 흔해서 그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물품이 아닐까 싶다. 마치 평상시에는 공기와 물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종이 때문에 전 세계의 숲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상당히 분개하고 있고, 또 온 열정을 다해 그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문장 속에서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차근차근, 이성을 잃지 않고 조목조목 종이산업의 음지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었다. 이는 이 책의 목차만 봐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1장 종이의 과거와 현재
2장 얼마나 많은 종이를 쓰고 있는가?
3장 세계의 종이 산업
4장 얼마나 많은 나무로 종이를 만드나?
5장 벌목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6장 나무농장은 숲이 아니다
7장 종이는 기후 변화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가?
8장 종이는 천연제품이 아니다?
9장 종이의 미래, 희망적인가?  

1장에서 종이가 어떤 것인지 간단히 언급한 저자는 2~4장에 걸쳐 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종이가 소비되고 있으며, 그 종이 사용량을 감당하기 위해 다국적기업이 얼마나 많은 파괴를 자행하며 종이를 생산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특히 1톤의 종이를 만들기 위해 3톤의 나무가 파괴된다는 대목에서는 필자도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나머지 2톤의 나무는 그냥 연료로 소모되고 마는 것인가? 전 세계의 나무를 다 잘라버리면 그 1/3에 해당하는 종이밖에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종이는 순식간에 만들 수 있지만 나무는 수십 년 혹은 100년 이상을 자라야만 그 거대한 풍체를 자랑하지 않는가? 그럼 정말 그 나무를 잘라 종이를 만드는 것이 이로운 것일까? 정말 엄청난 손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도 모른 채 그렇게 만들어진 종이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 저자는 벌목지에서 행해지는 무차별적인 벌목에 분개하고 또 분개한다. 1~4장에 대한 내용은 어느 정도 필자가 예상하고, 또 인식하고 있었던 내용이라면 5~8장은 전혀 몰랐던 내용이어서 색다른데다가 놀랍기까지 했다. 전 세계의 원시림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그나마 남아있는 곳이 러시아의 타이가 지역과 캐나다뿐인데, 그곳마저도 최근에는 거대 자본을 앞세운 다국적기업이 진출함에 따라 나무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경우, 예전에는 적정 수량만 벌목하는 식으로 꾸준히 일정 규모 이상의 숲을 보존했었는데, 최근에는 전부 벌목해버리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의 파괴적인 벌목 역시 저자는 소리 높여 규탄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나무농장은 숲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였지? 했는데 실상을 알고 보니 그동안 필자가 알고 있던 상식이 엄청나게 잘못 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000년엔가? 한솔제지와 같은 국내 기업들이 해외의 다른 기업들과 경쟁적으로 성장하면서 동남아시아에 해외조림지를 확보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회사의 사장 사진이 박혀 있었고, 이제는 나무를 베기만 할 것이 아니라 심으면서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을 갖춰야만 한다는 식의 인터뷰를 잔뜩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그딴 것(!)들이 다 필요 없는 짓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기업들은 펄프를 생산하기 위한, 더 효율성이 높은 나무만을 의무적으로 심고, 어느 정도 자라면 잘라 내버리기 때문에 그 안에는 숲이 조성될 수 없고, 단순히 나무가 자라는 농장만 형성될 뿐이라고 말한다. 즉, 다양한 나무들이 공존하며 천연의 생태계를 형성하는 등의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숲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많은 원주민들의 삶 역시 보장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읽으면서 정말 아차! 싶었다.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아카시아 나무의 무차별적인 생장속도를 언급하고 있었다. 펄프를 만들 때 유용한 아카시아 나무를 만들면서 조림지 이외의 생태계까지 바뀌고(더 정확히는 파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가시도 많고 뿌리도 질긴 아카시아 나무는 국내에서도 산에 나무를 늘린다고 잔뜩 심어 어디서나 볼 수 있는데 종종 무덤을 파괴하거나 무덤 주변의 경관을 헤쳐서 문제가 많이 되고 있다. 필자 역시 성묘를 하러 가면 아카시아 나무 때문에 애먹은 적이 많아 저자가 하는 말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저자는 말한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 나무가 사라지면서 기후가 바뀌고, 종이를 만들면서 나오는 엄청난 화학 폐기물들이 공기와 물, 그 터전에 살아가는 모든 동물들을 병들게 하며, 종이를 폐기시킬 때도 엄청나게 많은 비용이 지출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지공장에 가 본적이 없는 필자로서는(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종이라고 하면 한지를 제작할 때, 그 풍경을 기억하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저자는 필자를 꾸짖듯이 말한다. 펄프 폐수는 엄청난 환경파괴를 야기하며, 종이는 천연제품이 아닌 순수한 ‘화학공학’의 산물이라고 말이다. 갈색 나무에서 하얀색 종이가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겠나? 간단하다~눈부시게 하얀 종이를 만들기 위해 염소 표백을 하면 되니 말이다. 아마 8장까지 읽으면 독자는 암담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언제 지구가 종이 때문에 엉망진창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질지도 모르고 말이다. 거대 다국적기업의 욕심은 끝도 없을 테고 원시림은 더 이상 남아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순간 요즘 인기리에 상영 중인 <아바타>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숲을 무대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숲을 파괴하고 개발하기 위한 사람들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9장에서 아직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말이다. 그것은 종이를 적게 쓰고 아껴 쓰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는 없으니깐 재생 종이를 많이 사용하자는 말을 한다. 재생종이 하면 아마 대부분 기억날 것이다. 갈색 빛깔이 뻣뻣한 종이를 말이다. 화장지에서도 쓰기 힘든 그런 재질의 종이. 물론 필자는 고전적인 그런 종이들이 좋아 가끔 재생종이로 만든 노트를 일부러 구입해서 쓰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희고 매끄러운 종이를 사용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저자는 재생종이 제작 기술이 계속 좋아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편견은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재생 종이에 대한 인식이 자꾸 좋아져서 재생종이 시장이 더 커져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범국민적인 인식의 변화는 특정 법규로 제재할 수 없는 것이기에 정말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자신의 책을 재생종이로 찍어 판매한 몇몇 사례를 들기도 했다. 이는 단 1명의 사람이 세상을 바꾼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예전에 어떤 영화를 봤는데 한 아이가 주변에 있는 3명의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고, 그 각각의 사람이 또 3명씩에게 좋은 일을 하자 결국 전 세계 사람들이 서로서로 좋은 일을 하면서 행복해졌다는 식의 내용이 나온 것이 기억났다. 나비효과처럼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한 일은 때때로 큰 결과물을 갖고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생종이 사용을 장려하는 것 이외에도 종이 외적인 기록수단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 역시 저자는 추천하고 있다. 이메일과 같은 전자통신수단이 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이런 규제를 아무리 새롭게 정비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인식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고 역시 빼놓지 않고 있었다. 필자도 가끔 쓸데없이 출력해놓고 읽지 않고 버리는 경우가 있었으며, 글을 쓰면서 수정할 부분을 찾기 위해 비슷한 내용을 여러 번 출력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 무관심한 부분들에 대해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적으로 책은 활자도 크고, 중간에 사진도 들어가 있는데다가 문체 자체가 저자가 여행하면서 겪은 것들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기 때문에 읽는데 전혀 부담이 없었다. 260쪽이 넘는 책을 1시간 조금 넘는 시간 만에 읽었으니 아무리 집중력 있게 읽었다 하더라도 쉽게 읽히는 책이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교훈적인 내용과 필자를 훈계하는 내용이 가득한지라 더 긴장해서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목차나 내용, 구성 등등 짜임새 있게 잘 쓰인 책이구나~하는 생각이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필자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만 필자가 언급한 현장을 찍은 사진들을 책 중간 부분에 한데 모아 놓지 말고 그 내용이 있는 부분에 바로바로 소개해줬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처음에 책을 읽으면서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할 만한 현장 방문이라면 분명 사진도 많이 찍었을 텐데 왜 사진이 1장도 없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뭐 결국 중간 부분에 사진이 왕창 모여 있어 기억을 더듬으며 그 사진의 내용을 곱씹어볼 수 있었긴 했지만 말이다. 그것 말고는 전반적으로 미흡한 부분들은 없었던 것 같다.

종이 1장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물품은 다 자연환경을 파괴하면서 얻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소중한 가치들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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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와 고고학 - 과거와 현재의 정체성 만들기 영남문화재연구원 학술총서 2
시안 존스 지음, 이준정.한건수 옮김 / 사회평론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영국의 고고학자인 시안 존스(Siân Jones)가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을 토대로 저술한 것이다. 솔직히 누구인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책에 적힌 설명에 의하면 ‘사회인류학을 비롯한 인접 학문과의 학제 간 연구에 관심이 많으며, 민족지 고고학, 문화정체성과 민족성, 고고학과 현대 정체성의 생산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고 한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연구자가 없기에 주변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분야를 공부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암튼 저자가 쓴 서문을 간단하게 보면, 그가 박사학위논문을 쓸 때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한 것은 ‘최근의 민족성 이론에 기대어, 고고학에서 민족성을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고 한다. ‘고고학에서 민족성을 분석한다고?’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민족성이라는 것을 그냥 우리가 흔히 언급하는 문화의 개념과 연결시켜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 암튼 우리는 민족성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지 않은가. 그래서 좀 어리둥절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뒤에 보니 저자가 논문을 쓸 때에도 역시 주변에서 “현대 고고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또는 “왜 그 주제를 연구하려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받기 일쑤였고, 본인 스스로도 반신반의하며 혼란스러워하다가 거의 이 연구를 포기할 뻔 했다고 적고 있었다. 이 부분까지 읽으니 필자가 궁금해졌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이 부분은 연구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고고학보다는 인류학이나 사회학과 더 연관이 깊은 주제인 것 같은데 도대체 뭘까? 하고 말이다. 일단 책을 구입한 동기도 주제가 흥미롭다고 여겨서였는데, 서문에서도 필자의 흥미를 돋우는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에 본문을 읽기 전부터 다소 흥분되었다. 나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본문을 읽기 전에 필자 혼자서 민족성에 대해서 고민해봤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주의’, 우리가 흔히 ‘民族主義’, ‘nationalism’이라고 표현하는 이 단어의 의미는 ‘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의 형성을 지상목표로 하고, 이것을 창건(創建) · 유지 · 확대하려고 하는 민족의 정신 상태나 정책원리 또는 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네이버 백과사전 검색 결과). 그런데 민족주의 혹은 민족성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고 이러한 민족주의와 고고학과의 상관관계가 무엇이 있을까? 뭐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면서 책장을 넘겼는데 앞부분에 역자들이 이런 부분에 대해 개략적인 내용을 정리한 것이 있었다. 아마 저자가 쓴 부분을 번역하고 이에 대한 추가설명을 곁들인 것 같다. 암튼 이게 없었다면 책을 읽어나가는데 있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또한 역자들이 책 중간 중간에도 각주로 용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정리한 용어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민족 정체성(ethnic identity) - 문화적 차이 그리고/또는 공통의 혈통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타자들에 대비되는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 개인의 주관적 개념화와 관련된 양상을 일컫는다.

민족 집단(ethnic group) - 문화적 차이 그리고/또는 공통의 혈통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상호작용하거나 공존하는 타자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그리고/또는 그들에 의해 구별되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

민족성(ethnicity) - 이상에서 정의된 것처럼 문화적으로 구성(construction)된 집단 정체성과 관련된 모든 사회적 · 심리적 현상을 통칭하는 것이다. 민족성 개념은 민족 집단을 정체화하는 과정에서나 민족 집단 간의 상호작용에 있어 사회적 과정과 문화적 과정이 서로 교차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필자도 읽으면서 뭔 소린지 잘은 몰랐지만, 암튼 머릿속에 대강의 개념 정도는 정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혹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용어에 대해서 정리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엿보였다. 필자 역시 석사학위논문을 쓰면서 이러한 용어의 정리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가 십분 이해가 갔다. 뒷부분에 나오지만 이사지브라는 학자가 민족성에 대한 사회학과 인류학 분야의 65개 연구 사례를 검토한 결과, 이 중 13개에서만 어떤 식으로든 민족성을 정의하였으며, 나머지 연구에서는 분명한 개념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88쪽). 인문과학에 있어서 연구 대상에 대한 용어 및 개념의 정리, 기본 가설의 정립 등은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너무 기본적이면서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연구방법론이 적용되지 않은 때문인 것 같다. 다시 돌아와서 역사들 역시 저자의 의도에 맞춰 용어 해석에 신중을 기한 흔적이 보였다. 그리하여 ethnic group(민족 집단)은 ‘민족’, ethnicity(민족성)는 그대로 ‘민족성’, nation은 ‘국민’으로 해석하였으며, nationalism은 관행대로 ‘민족주의’로도 해석하고 ‘국민국가주의’로도 해석했음을 밝혔다. 이처럼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드디어 서론 첫 장을 넘겼다.

예상대로 민족주의와 관련한 고고학이 어떠한 행보를 걸어왔는지가 서술되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독일의 선사학자였던 구스타프 코신나가 언급이 되었다. 그는 그 자신이 개발한 ‘취락고고학’이라 불렸던 민족적 패러다임을 통해 게르만족의 인종적 · 문화적 우월성에 대해 주장하였다. 그의 연구는 뚜렷하게 민족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이었으며 이를 통해 게르만족이 선사 · 원사시대에 폴란드, 남러시아, 코카서스 지역 등으로 확산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고고자료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다. 트리거가 ‘대부분의 고고학적 전통은 그 지향점이 민족주의적이다’라고 주장한 것처럼 말이다(20쪽).

이처럼 고고학은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고 영토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되는 사례가 많았다. 19세기 덴마크에서는 민족적, 목가적 풍경을 구성하는 데 분묘나 고인돌 같은 선사기념물들이 이용되었으며, 워새와 같은 고고학자들은 독일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식을 재건하는 데 공공연히 나서기도 하였다. 폴란드 고고학자 콘라트 야슈제프스키는 독일의 게르만족 팽창론에 대항하여 슬라브 민족이 유럽 각지로 확산했음을 주장하였고, 프랑스에서는 로마 제국에 대한 갈리아인의 저항이 민족의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주장하였다. 마사다 유적이 이스라엘 민족의식에 매우 중요한 상징적 표상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국민이 고구려를 동경하는 것과 중국에서 필사적으로 고구려사를 자국화하려는 동북공정을 실시한 점, 박정희 대통령 시절 내부의 단합과 통합을 강조하기 위해 신라를 중요시 여기면서 경주 일대의 문화유적 조사가 활발히 진행된 것들 역시 이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서론에서 이런 얘기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게 뭐야? 별거 없잖아?’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심오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저자는 과연 특정 유물복합체(혹은 유구까지 포함하여)가 어떤 민족과 일대일 대응한다는 가정이 맞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대응하는 민족(혹은 부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안 그런 경우도 있음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고학 연구는 그렇게 진행되어 왔음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듣고 보니 그러했다. 어떤 문화적 현상은 그 집단의 성격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의 인종적인 측면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미국인들은 누구나 햄버거를 먹고, 콜라를 마시며, 청바지를 입고, 영어로 된 책을 읽고 힙합 음악을 즐긴다. 그런 그들이 모두 앵글로-색슨계 백인은 아니지 않는가. 어떻게 고고자료를 통해 인종적인 측면을 구분할 수 있단 말인가.

거기다가 그러한 가정과 더불어 고고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이뤄지는 유물에 대한 형식학적 분류 역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기존의 연구를 통해 정해진 형식학적 분류체계에 따라 새로운 유적들은 상대 편년되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특수성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스켈레톤 그린 유적을 예로 들면서 기존에는 유물복합체에서 ‘로제트(Rosette) 브로치’가 없는 것은 기원후 25~40년 사이에 취락 성격에 변화(아마도 점유의 감소)가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되었다고 했다. 이는 스켈레톤 그린 유적이 주변의 인접한 유적과 같은 유물 형식에 의해 재현되는 동일한 발전 유형을 따라야만 한다는 가정 하에 내려진 해석으로서 문제가 있다고 재삼 비판하고 있다(190쪽 결론 부분). 이와 관련해서 언급되는 것이 로마화 현상인데, 기존에는 단순히 물질문화의 변화상을 두고 로마화의 현상으로 이해하던 것이 이제는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단순히 로마 문화의 확산과 전파가 아니라, 주변 토착 세력의 ‘필요성’에 의한 적극적인 로마 문화의 수용과 변용, 그리고 각 지역마다 다른 레벨과 규모로 이뤄진 로마화에 대한 이해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마치 동아시아 전 역사를 통틀어 언급되는 ‘조공-책봉 관계’에 대한 하나의 이론적 틀을 제시할 수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3~4세기 무렵, 백제 영역(직접통치영역과 간접통치영역을 포함하여)으로 추정되는 각지에서 발견되는 중국제 청자의 존재를 통한 중국화(아니면 중국과 백제 사이의 조공-사여 관계) 혹은 중국 문화의 주체적이면서 적극적인 수용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생각할 때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바로 ‘끊임없이 발견되는 유적으로 인해 기존의 주장이 계속 변화한다.’ 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은 해석은 지극히 위험하다고 할 수 있지만 당장의 이론적 틀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또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제 민족성에 대한 개념적 · 이론적 영역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한다. 간추리자면 특정 민족은 외부의 관찰자가 연구한 ‘객관론적’ 접근방식과 내부 소속원들에 의한 자기정의 체계의 과정을 거친 ‘주관론적’ 접근방식을 통해 그 실체가 규명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민족성에 대한 원초주의 이론과 도구주의 이론, 2가지 방법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원초주의 이론에서는 문화적 상징의 중요성은 강조되지만, 문화와 민족성 간의 관계는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문화의 특정 측면이 지속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단순히 민족 정체성의 심리적 중요성 때문이라고 설명할 뿐이다. 그와 달리 도구주의 이론은 문화와 민족성 간의 차이에 더 중점을 둔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화와 민족성 간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민족성의 조직적 측면만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는 집단의 변화하는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조작적으로 이용되는 부수적이고, 자의적인 상징들로 전락시켜 버렸다. 이러한 장단점 때문에 이 둘을 통합할만한 이론적 틀이 없을까? 에 대한 논의가 있어 왔으며 저자는 부르디외의 실천이론을 거론하고 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 아비투스 개념인데, 이는 필자가 이전에 읽은『인류학과 고고학』에서도 간단히 언급되었던 내용이기도 하였다(그래서 이해하기가 조금 수월했다). 이 부분은 여러 번 읽어봐도 필자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필자가 나름 이해한 부분만 정리하자면, 저자는 대안적인 민족성 이론에 대해 ‘민족성과 문화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 민족성의 구성은 실천의 객관적인 공통성(사회의 관습이나 습득된 지식 등등), 즉 아비투스를 형성하고 또한 아비투스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적 행위주체의 공유된 잠재의식적 성향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처럼 공유되는 아비투스에 의해 재현되는 기존의 문화적 실재에 민족성이 각인되는 정도는 매우 가변적이고, 주민 집단 간의 상호작용과 권력관계의 특성에 의해 발생되는 문화적 변형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은 일시적일 수도 있지만, 끊임없이 재생산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민족성은 유사성과 상이성에 대한 이해 속에서 정의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즉, 쉽게 얘기하자면 민족성은 한쪽의 입장에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아비투스라고 하는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는 개념인 것 같다(이 부분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인데 이 정도밖에 이해를 못 해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

또한 저자는 책 전반에서 민족성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가변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즉, 시간이 흐르면 민족성도 바뀔 수 있고, 당연히 고고학적 물질자료 상에서도 이것이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자료 상에 확인되는 민족성 역시 변화되는 것이라고 봐야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기존에는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고자료의 해석에 있어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면, 원삼국시대 마한과 백제의 구분이 가능한지가 여기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재 마한(을 비롯한 삼한 전체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50여 개국에 대한 뚜렷한 역사, 지역적 경계, 문화적 양상(을 나타내주는 확실한 표지유물이나 유물복합체 등등)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전 시기인 청동기시대와 이후의 백제시기에 속하지 않은 몇몇 특정 유물과 유구가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마한과 백제를 시기적으로, 공간적으로, 민족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까? 단순히 토기의 형식 분류와 묘제의 지역적 분포를 설정하는 것만으로도? 앞서 로마화 현상에 대해서도 언급되었지만, 민족성과 문화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데 전통고고학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저자는 ‘민족성은 고고학 연구의 타당한 주제가 될 수 없다고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입장과, 문화를 자의적이고 이차적인 역할로 한정시키는 입장에서 민족성을 분석하는 기능주의적 접근방식 양자 모두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것 같긴 하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는 다소 추상적인 ‘민족성’이라는 테마를 잡고 그에 맞춰 기존 연구현황을 재구성(혹은 재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결론 부분에서 ‘고고학자들이 과거에 대한 특정한 재현이 특정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기여하는 방식과, 타자에 대한 특정한 재현의 지배가 집단 내부와 집단 간의 권력 관계에 어떻게 깊숙이 관련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고고학자들(또는 다른 사회과학자들)이 사회와 그 이데올로기적 구성의 외부에서 특권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고고학에서 사용되는 분류와 해석 양식이 집단 간의 권력 관계를 형성하는 데 관여하는 방식을 검토하고 책임을 질 필요도 있다. 이는 현대 세계의 정치적 정당화의 속성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관계와 전략의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문득 인류학과 고고학이 식민주의의 기반 아래 생겨난 학문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앞서 민족주의 결합한 고고학의 사례에 대해 언급된 것처럼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이러한 현상은 쉽게 확인된다. 그리고 그것이 효과를 거두는 국가가 있기에 이러한 현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고고학은 올바른 민족 정체성 확립에 기여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차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면 올바른 영향을 주는 것이 긍정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호작용과 분석 양식에 대한 꾸준한 연구와 이론적 틀의 확립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필자가 최근에 읽었던 일련의 책들(『환경고고학』,『인류학과 고고학』)과 중첩되는 내용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특히 고고학사(혹은 인류학사)에 대한 부분, 사상적인 부분을 언급한 것들은 분명 어려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집중적으로 관련 내용들을 읽어와서 그런지 생각보다 쉽게 읽혔다. 사실 필자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이 책을 읽었던 후배가 너무 어려워서 책장 넘기기가 쉽지 않다면서 앓는 소리를 했는데, 생각보다는 쉽게 읽혔고 분량도 260쪽 정도여서 크게 부담이 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1번 읽는 것만으로는 저자의 생각과 의도를 100% 다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앞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1~2번은 더 읽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박사학위논문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라서 그런지 서술방식이 논문을 읽는 듯 한 느낌을 주는 것이 독특했다. 국내에도 박사학위논문을 책으로 엮은 것이 여럿 있는데, 모두 논문의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딱딱하다는 느낌을 많이 주곤 한다(뭐 고고학 서적이면 어떤 책이든지 대부분은 딱딱한 느낌을 주긴 하다만...). 그런데 외국서적 중에는 그런 책들을 많이 못 봐서 그런지 조금 신선하기는 했다. 맨 앞에서 용어 정리를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는 것이나, 어떤 이론을 소개하고 장단점을 분석해서 소개하는 것이나 뭐 전반적인 것들이 다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특정 주제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만약 이 책이 단순히 개설서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면 아마 이처럼 민족주의라는 부분에 대해서 심도 있게 접근하지 못 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번 해 본다. 암튼 그런 부분이 필자에게는 오히려 좋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런 주제들로, 이렇게 서술한 내용이 박사학위논문으로서 재구성된다는 것 자체가 많이 인상에 남았다. 이론적인 면, 사상적인 면에서 한국 고고학계는 아직 발달하지 못 했기 때문에도 그렇겠지만, 이런 주제를 갖고 이런 식으로 글을 풀어나가는 것 자체가 좀 쇼킹하기도 하다(이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이 책의 내용과 주제가 한국 고고학계의 현 실상과 크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민족주의와 관련된 사항은 그간 한국 사학계에서 많은 논의가 되어왔던 부분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사관이 이러한 민족주의와 많이 결부되었는데,『조선상고사』에서 보여준 ‘아(我)’와 ‘비아(非我)’의 구분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한국 상고시대의 거대한 영토를 증명하려는 일부 역사학계(혹은 그를 추종하는 아마추어 역사단체들)의 움직임도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책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것이 이와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적다하더라도 민족주의 혹은 민족성이라는 것이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계에서는 이런 민족성에 대한 논의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찰나에 이 책을 읽게 되어 필자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부분은 고고학도라면 누구나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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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과 고고학
크리스 고스든 지음, 성춘택 옮김 / 사군자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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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인류학에 대해 조금 얘기해보려고 한다.
흔히들 인류학은 고고학과 동일하게, 혹은 비슷하게, 그러면서도 서로 다른 학문처럼 취급되어 왔다. 학교에서도 이렇게 배운다. 미국에서는 고고학이 인류학의 하위 분과로서 동일하게 취급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고 말이다. 고고학 전공 수업에서 배우는 인류학은 뭐 이 정도 선에서 그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게 전부일까? 국내에도 고고학을 공부할 수 있는 학교는 많다. 당장 고려대학교만 해도 고고미술사학과(대학원은 고고학과 미술사학과로 이원화)가 있으며, 서울대학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충남대학교에는 고고학과만 있으며, 경북대학교에는 고고인류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그에 반해 영남대학교와 한양대학교에는 인류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상당히 많은 학과가 개설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배우는 것들은 모두 비슷한가? 아니면 같은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가?

아마 고고학(또는 인류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궁금증을 한번쯤은 가져봤을 법도 하다. 이 책은 주인장이 고고학에 처음 눈을 뜨고 흥미를 가졌을 때 이런 궁금증에서 구입했던 책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약 10년 전에 산 책인데 이번에 읽으려고 다시 펴봤더니 앞부분 1/3 정도까지 읽고 말았던 흔적이 있었다. 딱 인류학사가 서술되기 시작한 시점인데 아마 지루해서 보다 말았으리라. 하지만 이번에 주욱 한번 읽어봤더니 생각보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서 필자 본인도 신기했다. 솔직히 웬만한 개설서를 보면 대개 앞부분에는 學史가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지루하기도 하고, 왠지 외워야만 할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하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이 책, 저 책 보다보면 그 얘기가 그 얘기 같고, 여기서는 이렇게 얘기했는데 딴 데서는 다르게 얘기한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런 느낌이 든다(필자만 그러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 더군다나 이런 것들은 수업시간에 지겹게 외우질 않는가?(물론 그때 외운다고 얼마나 오래 내 머릿속에 남아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얼마 전에『환경고고학』을 읽어서 그런지 상당히 잘 읽혔던 것 같다. 그래서 일단 그때보다는 더 가볍고 즐거운(?) 기분으로 책을 읽었음을 밝히고 싶다.

이 책을 쓴 크리스 고스든은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피트리버스박물관 학예연구관이자 대학교수이다. 그리고 인류학과 고고학에 대해서 상당히 폭넓은 식견을 토대로 이야기를 개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 고고학자들에게 인류학을 설명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는 고고학과 인류학이 지속적으로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기 때문이다 -

엥? 이게 뭔 소리지? 그렇게 밀접한 관련성을 맺어왔는지 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대강 왜 그런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고학은 때론 인류학과, 때론 민속학 등과 연계하여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는 인류학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방법론적인 측면이나 사상적인 측면에서 유사한 점도 많았으며, 같은 점 혹은 다른 점도 많았다. 즉, 고고학이 인류학인지, 인류학이 고고학인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지 그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경우가 많았다는 소리가 된다. 그러다보니 정확하게 양자의 경계선을 그어 둘을 분리시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차라리 전혀 상관없는 통계학을 설명하는 것이 고고학자에게는 더 쉬울 것이라는 저자의 말이 쉽게 와 닿았다(알다시피 통계학은 고고학에게 있어 인류학만큼 친숙한 분야가 아님에도 말이다). 암튼 머리말에서 이미 저자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를 추려내면 다음과 같다.

1. 영국의 말리노프스키가 사회인류학을 발달시키면서 의도적으로 고고학과 인류학의 차이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2. 고고학은 인류학적 방법론과 생각을 도입했으나, 역으로 고고학적 결과나 이론의 수출은 빈약하였기 때문에 양자의 상호 교환에 불균형이 초래되었다.
3. 고고학은 과거의 긴 시간대를 다루며, 인류학은 현재에 가까운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대를 다룬다. 즉, 인류학은 의미 구조를 현재 존재하는 상태대로 관찰할 수 있으며, 고고학은 의미 체계의 발달과 의미가 생산되는 일반 환경에 대한 긴 시간대에 걸친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

뭐 이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인류학사와 고고학사를 나열하고, 유럽(특히 영국을 중심으로)과 미국, 더 나아가 아프리카나 오세아니아 등지에서 어떻게 인류학과 고고학이 관계를 맺어왔는지 서술하였다. 먼저 목차를 가볍게 한번 살펴보자.

제1부 : 학사(Histories)
1장 인류학적 고고학과 고고학적 인류학
2장 식민시대의 고고학과 인류학
3장 고고학과 인류학의 확립 : 현지조사의 역할
4장 진화, 사회, 문화인류학 : 다양한 인류학 패러다임
5장 제2차 세계대전 이후 : 신진화론, 마르크시즘, 구조주의

제2부 : 현재의 문제들(The Contemporary Scene)
6장 젠더, 섹슈얼리티, 실천
7장 물질인류학 : 경관, 물질문화, 역사
8장 탈식민시대의 세계화와 민족성 

보면 알겠지만 전체 370쪽 가운데 1부가 210여 쪽을 차지하고 있다. 상당한 분량이다. 그리고 2부에서는 이제 저자가 하고 싶은 얘기들을 하고 있다. 현재 인류학의 상황이라든가, 연구경향이라든가, 앞으로 인류학과 고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제시라든가, 본인의 주장이라든가 뭐 이런 것들 말이다. 그래서 2부에는 인류학적인 내용이 주로 많으며, 그나마 1부가 오히려 읽는데 편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저자도 언급하고 있듯이, 이 책이 고고학자들에게 인류학이 어떤 학문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개설서이기 때문에 상관없을 것 같다. 다만,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2부를 읽으면서 ‘무슨 소리지?’ 하면서 책을 덮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잠깐 해 본다. 이전에 필자가 1부를 보다가 책을 덮은 것처럼 말이다.

1부 1장에서 저자는 인류학적 고고학, 고고학적 인류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아마 머리말에서 저자가 했던 단언과 연결시켜 이해하면 쉽게 수긍이 가는 단어일 것이다. 확실히 초기 고고학은 오히려 인류학에 가까웠으며, 순수한 유물과 유적에 의한 역사 복원이 시도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고고학과 인류학은 분명히 식민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유럽이라는 세계가 팽창하면서 전 세계를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포함시키고 자신들의 기준으로 세계를 재단하기 위해 고고학과 인류학을 발달시켰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스페인의 탐욕에 찌든 약탈자들이 잉카제국과 아즈텍제국을 멸망시키지 못 했다면, 고고학이나 인류학이라는 학문은 아예 생기지 않았거나,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저자는 북아메리카(미국)와 영국의 인류학적 고고학에 대해 언급하고, 양자의 관계에 대해 가볍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1부 2장에서는 애쉬몰리언 박물관과 피트리버스 박물관을 예로 들면서 유럽의 개념, 식민시대의 두 학문적 발달에 대해 서술한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학사는 3장부터라고 생각하면 될 듯 싶다. 인류학하면 항상 등장하는 말리노프스키를 필두로 보아스, 스펜서와 길런(이 둘은 잘 모르는 사람이다. 보아스까지는 고고학에서도 언급해서 아는데...), 해든과 리버스(리버스는 또 안다)의 현지조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말리노프스키는 인류학에 있어 거의 신화적인 인물이다. 그는 인류학 방법론과 현지조사(고고학으로 치면 현장조사 혹은 야외조사) 절차를 고안하여 사회인류학이라는 독자적인 학문을 확립하였다. 양자는 이미 체계적으로 많은 자료를 수집하면서 분화되기 시작했고, 진화적인 경향이 쇠퇴하면서 양자를 결합시킬 이론 구조가 없어지게 되었는데 말리노프스키의 등장으로 완전히 구분되기에 이르렀다. 말리노프스키는 현지에 직접 들어가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사회를 조사하는 ‘참여관찰’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조사자 개인의 성향과 주관적인 생각, 해석의 문제 때문에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는 그의 뒤를 이은 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필자가 볼 때 그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해든과 리버스인 것 같다. 해든은 심리학, 언어학, 형질인류학, 사회인류학 등의 학문을 통해 인간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다학문적인 조사를 목적으로 삼았으며, 리버스는 계보적 방법(genealogical method)을 개발하여 조사의 혁신을 이끌었다. 그는 모든 생활양식에 친족체계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거주, 혈연관계, 토템, 사람의 생애, 인구, 형질인류학, 이주, 언어 및 집단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정리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류학은 고고학과 완전히 다른 방법론과 풍성한 자료를 갖추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고든 차일드, 그라함 클라크 등에 의해 초기 고고학 역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저자가 언급하듯이 이론적 진보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고든 차일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여러 고고학 정보를 종합하여 사회과정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였고, 진화적인 틀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지역적인 다양성과 창조성을 강조하였다(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마르크시스트이기도 했다). 또한 그라함 클라크는 기존의 형식학적 관점을 버리고, 문화를 환경에 대한 반응이라고 보았는데(그의 이러한 견해는 영국 인류학의 관심을 끌지 못 하였고 오히려 미국 인류학의 관심을 끌어 이후 레슬리 화이트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를 위하여 과거 환경의 복원이 필수적이며, 환경 복원이야말로 인류 생활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것임을 역설하였다.

두 학문은 유럽과 미국에서도 각자의 행보를 걸었는데, 영국에서는 이론의 발달로 많은 가능성을 열었으며, 1970년대 말부터 고고학과 인류학은 긴밀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론과 방법론상 양자가 가깝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고고학 교육과 조사 또한 인류학과 안에서 이뤄졌다. 이는 미국 고고학이 여전히 진화적인 틀 안에서 연구된 반면(유럽은 아니었지만), 인류학은 진화를 멀리하고 문화를 강조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보면 조금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유럽(다 자세히 말하면 영국)은 오히려 사회인류학의 독자적인 방법론(현지조사)을 재평가하면서 그 학문을 인정해주면서 더 밀접한 연관성을 맺었는데, 미국은 양자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아 인류학 안에 뭉뚱그려서 모여 있으면서 왜 밀접한 연관성이 없을까? 하고 말이다. 간단하다. 앞에서도 한번 언급했듯이, 서로 상대방의 실체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상대방에 대해 확실하게 대응할 수 없다. 知彼知己면 百戰不殆라는 말 있지 않은가? 사상적인 발달이 더디다고 해야 하나? 그렇기 때문에 더 확실하게 학문이 발전하지 않은 것 같다. 춘추전국시대때 중국이 크게 발전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4장으로 넘어가면 고고학도라면 누구나 수업시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법한 사람들이 줄줄 나온다. 진화주의를 표방한 모건과 타일러, 앞서 언급했던 해든과 리버스, 보아스의 상대주의와 문화사, 과대전파론을 지나 기능주의의 에밀 뒤르켐, 말리노프스키, 래드클리프브라운까지. 5장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신진화론(신고고학까지)의 레슬리 화이트, 줄리안 스튜어드, 살린스와 서비스, 빈포드, 그리고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던 마르크시즘과 구조주의 등등. 1부의 대미를 장식할 내용들이 약 100쪽에 걸쳐 주욱 서술되어 있었다. 이 많은 분량을 필자가 1~2개의 단락으로 정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필자의 생각을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으로 評을 마치려고 한다.

다윈 이후 진화주의는 18~19세기 전 세계를 휩쓸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진화주의는 유용한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진화론이 등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며, 최근에도 다윈을 재평가하기 위한 학술적 움직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모건과 타일러처럼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 역사를 재단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너무 단선적인 발전방향만을 언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전파론은 흔히 진화론과 반대개념으로 많이들 알고 있지만, 해든의 주장처럼 양자는 상호 보완적으로 봐야 적절할 것이다. 거기에는 보아스의 상대주의와 문화사적 접근방법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할 것이다. 물론 그는 문화적인 특수성과 지역사의 중요성을 뛰어넘는 이론적인 틀을 만들지 못 했다는 약점이 있다. 즉, 나무만 자세히 보느라 정작 큰 숲을 외면해버린 셈이다. 그리고 기능주의 또한 중요하지만 마치 전쟁사에서 기술결정론이 비판받는 것처럼(전쟁에서 승리하는 쪽이 항상 기술적으로 뛰어난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기동성을 살린 전차부대를 육성했고, 프랑스는 육중한 장갑과 파워를 강조한 전차부대를 육성했으며 결론적으로 전자가 승리했다) 효율성과 기술적인 측면, 유물론적인 측면만 중요하다고 강조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이 초기 고고학이 가진 결점, 초기 인류학에서 간과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그런 상황에서 신고고학의 등장은 아마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처럼 당시 젊은 학자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모건과 타일러의 후계자로 자타가 공인한 레슬리 화이트는 에너지의 효율성을 언급했으며(문화는 단위 에너지 양의 증가, 곧 에너지의 효율이 증가함에 따라 증가한다는 주장을 했다. 마치 신흥대국이 그 성장에너지를 발판으로 급격한 팽창주의 노선을 걷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다), 전 인류 혹은 전 세계에 적용 가능한 일반진화의 틀을 만들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에 비해 줄리안 스튜어드는 환경에 따라 문화적 반응이 달라진다는 소위 ‘문화생태학’을 주창했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그라함 클라크, 루이스 빈포드, 켄트 플래너리와도 상관성이 깊다. 살린스와 서비스는 뭐 너무나 유명해서 부언이 필요없을텐데 그들은 일반진화(화이트의 주장)와 특수진화(스튜어드의 주장)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였다고 주장하며, band-tribe-chiefdom-state에 이르는 진화단계를 설정하기도 했다.

이런 주장은 물론 요즘까지도 유효하며, 루이스 빈포드나 콜린 렌프류 등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 · 보완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일반진화의 한 모델일 뿐, 특수 진화와는 별개로 살펴봐야 할 진화모델이라는 생각이 든다. 뭐 경제에 치중한 마르크시즘을 기반으로 인류사를 살펴본 고든 차일드나 마빈 해리스 등도 거론은 되고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종합적인 시각에서 인류사를 고찰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역사복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런 自問을 구한다. 우리는 인류사를 관통할만한 그러한 일반적인 틀(혹은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까? 라고 말이다. 글쎄~하지만 반드시 그런 일반적인 틀이 필요한 것만은 아닌 듯 싶다. 그런 사상적 · 이론적인 지식이 일천한 필자가 보기에는 그렇다. 다양한 방법론으로 접근해서 각각의 방법론에 걸맞은 모델들을 다양하게 마련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암튼 1부에서는 대강 이런 내용들이 나온다. 그리고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현재의 인류학에 대해 거론하기 시작하는데 솔직히 내용이 조금 벅차기는 하다. 그래도 읽으면서 흥미를 가졌던 부분들을 몇몇 거론하도록 하겠다.

먼저 요즘에는 일상적인 행위들에 대한 연구가 새롭게 주목받는다고 했다. 우리 삶에 있어 너무도 평범하고 기본적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러한 목적으로 아비투스(habitus) 개념이 새로이 설정되었다고 한다. 이는 다시 아비튀드(habitude : 버릇이나 습관)와 엑시스(exis : 획득된 능력이나 재능)로 나뉘는데 바로 이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도 아비투스를 뭐라도 딱히 정의하기는 어렵다고 하면서 비교사례를 들어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는데, 뭐 쉽게 말하면 어떤 한 사회에 속해 그 안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이나 능력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는 인지과정주의 고고학에서 다루는 범주와도 맞물리는 것 같다. 지극히 추상적인, 물질자료로 파악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범위이니 말이다. 이는 인류학을 인류학답게 만든 현지조사로도 파악하기가 어려운 주제가 아닐까 싶었다.

공간분석, 즉 경관에 대한 언급도 흥미로웠다. 지도를 통한 데카르트식 공간분석은 1960년대 신지리학과 신고고학에 바로 적용되었는데, 당시 연구자들은 취락의 공간적인 배열과 유물의 분포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사회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현재 한국고고학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접근법으로서 주로 국가단계 이전의 청동기시대 취락연구에 적용하고 있다(아마 그 이전 시기에 해당하는 대단위 취락이 많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류학에서도 이런 관점으로 접근한다니 재밌었다. 하긴 초기 인류학자들 역시 원시사회를 직접 방문해 참여관찰을 하면서 그들의 문화, 사회 등을 서술할 때 이런 식의 해석을 하긴 했으니 말이다. 다만, 요즘에는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이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 했던 부분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니 분명 차이가 있긴 한 것 같다.

또한 저자는 사회적 성 구분인 젠더와 함께 종족정체성(ethnicity)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다뤘다. 인류는 처음부터 각기 다른 기원과 각기 다른 형질 및 정신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다원발생론은 최근 문화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단일발생론적인 시각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이러한 종족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유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즉, 일련의 고정관념이나 획일화된 시각이 최근에는 많이 지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식민화가 인류학에 미친 영향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기도 하였다. 요즘에는 제국주의에 기반을 둔 식민주의가 사라졌으며, 우리는 탈식민세계에 살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고고학과 인류학은 식민주의의 산물로서 그 안에는 여전히 식민적 잔재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스스로 의구심을 자아낸다. ‘만약 식민주의가 전 세계적인 맥락 속에서 서양의 문화 및 이론적인 장치가 형성된 것이라면, 우리 서양인은 사회 분석에서 얼마나 많은 원죄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말이다. 어떤 사회이든지 서로 다른 두 존재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로마제국과 주변의 정복된 피정복민들처럼, 세계제국을 건설한 몽골과 그 사위국으로 편입된 고려처럼 말이다. 저자는 고고학과 인류학 역시 이처럼 서로 대화하고 비교하면서 같이 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경향이 언제쯤 본격화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론적인 틀이 마련되고 사상적인 측면이 완비된다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필자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본인 스스로도 장담할 수가 없다. 어려운 내용도 많이 있는데다가 필자가 읽은 인류학 책이라고는 군대에서 뭣도 모르고 읽은『황금가지』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에 인류학에 대한 필자의 이해가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고학과 인류학이 오랜 시간 밀접한 연관성을 맺어왔으며, 앞으로도 밀접한 연관성을 맺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은 확실하게 드는 것 같다. 원저의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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