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과 고고학
크리스 고스든 지음, 성춘택 옮김 / 사군자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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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인류학에 대해 조금 얘기해보려고 한다.
흔히들 인류학은 고고학과 동일하게, 혹은 비슷하게, 그러면서도 서로 다른 학문처럼 취급되어 왔다. 학교에서도 이렇게 배운다. 미국에서는 고고학이 인류학의 하위 분과로서 동일하게 취급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고 말이다. 고고학 전공 수업에서 배우는 인류학은 뭐 이 정도 선에서 그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게 전부일까? 국내에도 고고학을 공부할 수 있는 학교는 많다. 당장 고려대학교만 해도 고고미술사학과(대학원은 고고학과 미술사학과로 이원화)가 있으며, 서울대학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충남대학교에는 고고학과만 있으며, 경북대학교에는 고고인류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그에 반해 영남대학교와 한양대학교에는 인류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상당히 많은 학과가 개설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배우는 것들은 모두 비슷한가? 아니면 같은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가?

아마 고고학(또는 인류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궁금증을 한번쯤은 가져봤을 법도 하다. 이 책은 주인장이 고고학에 처음 눈을 뜨고 흥미를 가졌을 때 이런 궁금증에서 구입했던 책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약 10년 전에 산 책인데 이번에 읽으려고 다시 펴봤더니 앞부분 1/3 정도까지 읽고 말았던 흔적이 있었다. 딱 인류학사가 서술되기 시작한 시점인데 아마 지루해서 보다 말았으리라. 하지만 이번에 주욱 한번 읽어봤더니 생각보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서 필자 본인도 신기했다. 솔직히 웬만한 개설서를 보면 대개 앞부분에는 學史가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지루하기도 하고, 왠지 외워야만 할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하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이 책, 저 책 보다보면 그 얘기가 그 얘기 같고, 여기서는 이렇게 얘기했는데 딴 데서는 다르게 얘기한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런 느낌이 든다(필자만 그러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 더군다나 이런 것들은 수업시간에 지겹게 외우질 않는가?(물론 그때 외운다고 얼마나 오래 내 머릿속에 남아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얼마 전에『환경고고학』을 읽어서 그런지 상당히 잘 읽혔던 것 같다. 그래서 일단 그때보다는 더 가볍고 즐거운(?) 기분으로 책을 읽었음을 밝히고 싶다.

이 책을 쓴 크리스 고스든은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피트리버스박물관 학예연구관이자 대학교수이다. 그리고 인류학과 고고학에 대해서 상당히 폭넓은 식견을 토대로 이야기를 개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 고고학자들에게 인류학을 설명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는 고고학과 인류학이 지속적으로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기 때문이다 -

엥? 이게 뭔 소리지? 그렇게 밀접한 관련성을 맺어왔는지 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대강 왜 그런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고학은 때론 인류학과, 때론 민속학 등과 연계하여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는 인류학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방법론적인 측면이나 사상적인 측면에서 유사한 점도 많았으며, 같은 점 혹은 다른 점도 많았다. 즉, 고고학이 인류학인지, 인류학이 고고학인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지 그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경우가 많았다는 소리가 된다. 그러다보니 정확하게 양자의 경계선을 그어 둘을 분리시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차라리 전혀 상관없는 통계학을 설명하는 것이 고고학자에게는 더 쉬울 것이라는 저자의 말이 쉽게 와 닿았다(알다시피 통계학은 고고학에게 있어 인류학만큼 친숙한 분야가 아님에도 말이다). 암튼 머리말에서 이미 저자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를 추려내면 다음과 같다.

1. 영국의 말리노프스키가 사회인류학을 발달시키면서 의도적으로 고고학과 인류학의 차이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2. 고고학은 인류학적 방법론과 생각을 도입했으나, 역으로 고고학적 결과나 이론의 수출은 빈약하였기 때문에 양자의 상호 교환에 불균형이 초래되었다.
3. 고고학은 과거의 긴 시간대를 다루며, 인류학은 현재에 가까운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대를 다룬다. 즉, 인류학은 의미 구조를 현재 존재하는 상태대로 관찰할 수 있으며, 고고학은 의미 체계의 발달과 의미가 생산되는 일반 환경에 대한 긴 시간대에 걸친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

뭐 이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인류학사와 고고학사를 나열하고, 유럽(특히 영국을 중심으로)과 미국, 더 나아가 아프리카나 오세아니아 등지에서 어떻게 인류학과 고고학이 관계를 맺어왔는지 서술하였다. 먼저 목차를 가볍게 한번 살펴보자.

제1부 : 학사(Histories)
1장 인류학적 고고학과 고고학적 인류학
2장 식민시대의 고고학과 인류학
3장 고고학과 인류학의 확립 : 현지조사의 역할
4장 진화, 사회, 문화인류학 : 다양한 인류학 패러다임
5장 제2차 세계대전 이후 : 신진화론, 마르크시즘, 구조주의

제2부 : 현재의 문제들(The Contemporary Scene)
6장 젠더, 섹슈얼리티, 실천
7장 물질인류학 : 경관, 물질문화, 역사
8장 탈식민시대의 세계화와 민족성 

보면 알겠지만 전체 370쪽 가운데 1부가 210여 쪽을 차지하고 있다. 상당한 분량이다. 그리고 2부에서는 이제 저자가 하고 싶은 얘기들을 하고 있다. 현재 인류학의 상황이라든가, 연구경향이라든가, 앞으로 인류학과 고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제시라든가, 본인의 주장이라든가 뭐 이런 것들 말이다. 그래서 2부에는 인류학적인 내용이 주로 많으며, 그나마 1부가 오히려 읽는데 편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저자도 언급하고 있듯이, 이 책이 고고학자들에게 인류학이 어떤 학문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개설서이기 때문에 상관없을 것 같다. 다만,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2부를 읽으면서 ‘무슨 소리지?’ 하면서 책을 덮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잠깐 해 본다. 이전에 필자가 1부를 보다가 책을 덮은 것처럼 말이다.

1부 1장에서 저자는 인류학적 고고학, 고고학적 인류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아마 머리말에서 저자가 했던 단언과 연결시켜 이해하면 쉽게 수긍이 가는 단어일 것이다. 확실히 초기 고고학은 오히려 인류학에 가까웠으며, 순수한 유물과 유적에 의한 역사 복원이 시도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고고학과 인류학은 분명히 식민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유럽이라는 세계가 팽창하면서 전 세계를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포함시키고 자신들의 기준으로 세계를 재단하기 위해 고고학과 인류학을 발달시켰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스페인의 탐욕에 찌든 약탈자들이 잉카제국과 아즈텍제국을 멸망시키지 못 했다면, 고고학이나 인류학이라는 학문은 아예 생기지 않았거나,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저자는 북아메리카(미국)와 영국의 인류학적 고고학에 대해 언급하고, 양자의 관계에 대해 가볍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1부 2장에서는 애쉬몰리언 박물관과 피트리버스 박물관을 예로 들면서 유럽의 개념, 식민시대의 두 학문적 발달에 대해 서술한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학사는 3장부터라고 생각하면 될 듯 싶다. 인류학하면 항상 등장하는 말리노프스키를 필두로 보아스, 스펜서와 길런(이 둘은 잘 모르는 사람이다. 보아스까지는 고고학에서도 언급해서 아는데...), 해든과 리버스(리버스는 또 안다)의 현지조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말리노프스키는 인류학에 있어 거의 신화적인 인물이다. 그는 인류학 방법론과 현지조사(고고학으로 치면 현장조사 혹은 야외조사) 절차를 고안하여 사회인류학이라는 독자적인 학문을 확립하였다. 양자는 이미 체계적으로 많은 자료를 수집하면서 분화되기 시작했고, 진화적인 경향이 쇠퇴하면서 양자를 결합시킬 이론 구조가 없어지게 되었는데 말리노프스키의 등장으로 완전히 구분되기에 이르렀다. 말리노프스키는 현지에 직접 들어가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사회를 조사하는 ‘참여관찰’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조사자 개인의 성향과 주관적인 생각, 해석의 문제 때문에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는 그의 뒤를 이은 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필자가 볼 때 그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해든과 리버스인 것 같다. 해든은 심리학, 언어학, 형질인류학, 사회인류학 등의 학문을 통해 인간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다학문적인 조사를 목적으로 삼았으며, 리버스는 계보적 방법(genealogical method)을 개발하여 조사의 혁신을 이끌었다. 그는 모든 생활양식에 친족체계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거주, 혈연관계, 토템, 사람의 생애, 인구, 형질인류학, 이주, 언어 및 집단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정리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류학은 고고학과 완전히 다른 방법론과 풍성한 자료를 갖추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고든 차일드, 그라함 클라크 등에 의해 초기 고고학 역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저자가 언급하듯이 이론적 진보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고든 차일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여러 고고학 정보를 종합하여 사회과정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였고, 진화적인 틀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지역적인 다양성과 창조성을 강조하였다(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마르크시스트이기도 했다). 또한 그라함 클라크는 기존의 형식학적 관점을 버리고, 문화를 환경에 대한 반응이라고 보았는데(그의 이러한 견해는 영국 인류학의 관심을 끌지 못 하였고 오히려 미국 인류학의 관심을 끌어 이후 레슬리 화이트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를 위하여 과거 환경의 복원이 필수적이며, 환경 복원이야말로 인류 생활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것임을 역설하였다.

두 학문은 유럽과 미국에서도 각자의 행보를 걸었는데, 영국에서는 이론의 발달로 많은 가능성을 열었으며, 1970년대 말부터 고고학과 인류학은 긴밀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론과 방법론상 양자가 가깝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고고학 교육과 조사 또한 인류학과 안에서 이뤄졌다. 이는 미국 고고학이 여전히 진화적인 틀 안에서 연구된 반면(유럽은 아니었지만), 인류학은 진화를 멀리하고 문화를 강조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보면 조금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유럽(다 자세히 말하면 영국)은 오히려 사회인류학의 독자적인 방법론(현지조사)을 재평가하면서 그 학문을 인정해주면서 더 밀접한 연관성을 맺었는데, 미국은 양자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아 인류학 안에 뭉뚱그려서 모여 있으면서 왜 밀접한 연관성이 없을까? 하고 말이다. 간단하다. 앞에서도 한번 언급했듯이, 서로 상대방의 실체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상대방에 대해 확실하게 대응할 수 없다. 知彼知己면 百戰不殆라는 말 있지 않은가? 사상적인 발달이 더디다고 해야 하나? 그렇기 때문에 더 확실하게 학문이 발전하지 않은 것 같다. 춘추전국시대때 중국이 크게 발전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4장으로 넘어가면 고고학도라면 누구나 수업시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법한 사람들이 줄줄 나온다. 진화주의를 표방한 모건과 타일러, 앞서 언급했던 해든과 리버스, 보아스의 상대주의와 문화사, 과대전파론을 지나 기능주의의 에밀 뒤르켐, 말리노프스키, 래드클리프브라운까지. 5장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신진화론(신고고학까지)의 레슬리 화이트, 줄리안 스튜어드, 살린스와 서비스, 빈포드, 그리고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던 마르크시즘과 구조주의 등등. 1부의 대미를 장식할 내용들이 약 100쪽에 걸쳐 주욱 서술되어 있었다. 이 많은 분량을 필자가 1~2개의 단락으로 정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필자의 생각을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으로 評을 마치려고 한다.

다윈 이후 진화주의는 18~19세기 전 세계를 휩쓸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진화주의는 유용한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진화론이 등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며, 최근에도 다윈을 재평가하기 위한 학술적 움직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모건과 타일러처럼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 역사를 재단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너무 단선적인 발전방향만을 언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전파론은 흔히 진화론과 반대개념으로 많이들 알고 있지만, 해든의 주장처럼 양자는 상호 보완적으로 봐야 적절할 것이다. 거기에는 보아스의 상대주의와 문화사적 접근방법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할 것이다. 물론 그는 문화적인 특수성과 지역사의 중요성을 뛰어넘는 이론적인 틀을 만들지 못 했다는 약점이 있다. 즉, 나무만 자세히 보느라 정작 큰 숲을 외면해버린 셈이다. 그리고 기능주의 또한 중요하지만 마치 전쟁사에서 기술결정론이 비판받는 것처럼(전쟁에서 승리하는 쪽이 항상 기술적으로 뛰어난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기동성을 살린 전차부대를 육성했고, 프랑스는 육중한 장갑과 파워를 강조한 전차부대를 육성했으며 결론적으로 전자가 승리했다) 효율성과 기술적인 측면, 유물론적인 측면만 중요하다고 강조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이 초기 고고학이 가진 결점, 초기 인류학에서 간과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그런 상황에서 신고고학의 등장은 아마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처럼 당시 젊은 학자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모건과 타일러의 후계자로 자타가 공인한 레슬리 화이트는 에너지의 효율성을 언급했으며(문화는 단위 에너지 양의 증가, 곧 에너지의 효율이 증가함에 따라 증가한다는 주장을 했다. 마치 신흥대국이 그 성장에너지를 발판으로 급격한 팽창주의 노선을 걷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다), 전 인류 혹은 전 세계에 적용 가능한 일반진화의 틀을 만들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에 비해 줄리안 스튜어드는 환경에 따라 문화적 반응이 달라진다는 소위 ‘문화생태학’을 주창했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그라함 클라크, 루이스 빈포드, 켄트 플래너리와도 상관성이 깊다. 살린스와 서비스는 뭐 너무나 유명해서 부언이 필요없을텐데 그들은 일반진화(화이트의 주장)와 특수진화(스튜어드의 주장)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였다고 주장하며, band-tribe-chiefdom-state에 이르는 진화단계를 설정하기도 했다.

이런 주장은 물론 요즘까지도 유효하며, 루이스 빈포드나 콜린 렌프류 등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 · 보완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일반진화의 한 모델일 뿐, 특수 진화와는 별개로 살펴봐야 할 진화모델이라는 생각이 든다. 뭐 경제에 치중한 마르크시즘을 기반으로 인류사를 살펴본 고든 차일드나 마빈 해리스 등도 거론은 되고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종합적인 시각에서 인류사를 고찰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역사복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런 自問을 구한다. 우리는 인류사를 관통할만한 그러한 일반적인 틀(혹은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까? 라고 말이다. 글쎄~하지만 반드시 그런 일반적인 틀이 필요한 것만은 아닌 듯 싶다. 그런 사상적 · 이론적인 지식이 일천한 필자가 보기에는 그렇다. 다양한 방법론으로 접근해서 각각의 방법론에 걸맞은 모델들을 다양하게 마련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암튼 1부에서는 대강 이런 내용들이 나온다. 그리고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현재의 인류학에 대해 거론하기 시작하는데 솔직히 내용이 조금 벅차기는 하다. 그래도 읽으면서 흥미를 가졌던 부분들을 몇몇 거론하도록 하겠다.

먼저 요즘에는 일상적인 행위들에 대한 연구가 새롭게 주목받는다고 했다. 우리 삶에 있어 너무도 평범하고 기본적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러한 목적으로 아비투스(habitus) 개념이 새로이 설정되었다고 한다. 이는 다시 아비튀드(habitude : 버릇이나 습관)와 엑시스(exis : 획득된 능력이나 재능)로 나뉘는데 바로 이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도 아비투스를 뭐라도 딱히 정의하기는 어렵다고 하면서 비교사례를 들어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는데, 뭐 쉽게 말하면 어떤 한 사회에 속해 그 안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이나 능력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는 인지과정주의 고고학에서 다루는 범주와도 맞물리는 것 같다. 지극히 추상적인, 물질자료로 파악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범위이니 말이다. 이는 인류학을 인류학답게 만든 현지조사로도 파악하기가 어려운 주제가 아닐까 싶었다.

공간분석, 즉 경관에 대한 언급도 흥미로웠다. 지도를 통한 데카르트식 공간분석은 1960년대 신지리학과 신고고학에 바로 적용되었는데, 당시 연구자들은 취락의 공간적인 배열과 유물의 분포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사회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현재 한국고고학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접근법으로서 주로 국가단계 이전의 청동기시대 취락연구에 적용하고 있다(아마 그 이전 시기에 해당하는 대단위 취락이 많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류학에서도 이런 관점으로 접근한다니 재밌었다. 하긴 초기 인류학자들 역시 원시사회를 직접 방문해 참여관찰을 하면서 그들의 문화, 사회 등을 서술할 때 이런 식의 해석을 하긴 했으니 말이다. 다만, 요즘에는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이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 했던 부분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니 분명 차이가 있긴 한 것 같다.

또한 저자는 사회적 성 구분인 젠더와 함께 종족정체성(ethnicity)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다뤘다. 인류는 처음부터 각기 다른 기원과 각기 다른 형질 및 정신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다원발생론은 최근 문화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단일발생론적인 시각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이러한 종족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유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즉, 일련의 고정관념이나 획일화된 시각이 최근에는 많이 지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식민화가 인류학에 미친 영향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기도 하였다. 요즘에는 제국주의에 기반을 둔 식민주의가 사라졌으며, 우리는 탈식민세계에 살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고고학과 인류학은 식민주의의 산물로서 그 안에는 여전히 식민적 잔재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스스로 의구심을 자아낸다. ‘만약 식민주의가 전 세계적인 맥락 속에서 서양의 문화 및 이론적인 장치가 형성된 것이라면, 우리 서양인은 사회 분석에서 얼마나 많은 원죄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말이다. 어떤 사회이든지 서로 다른 두 존재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로마제국과 주변의 정복된 피정복민들처럼, 세계제국을 건설한 몽골과 그 사위국으로 편입된 고려처럼 말이다. 저자는 고고학과 인류학 역시 이처럼 서로 대화하고 비교하면서 같이 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경향이 언제쯤 본격화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론적인 틀이 마련되고 사상적인 측면이 완비된다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필자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본인 스스로도 장담할 수가 없다. 어려운 내용도 많이 있는데다가 필자가 읽은 인류학 책이라고는 군대에서 뭣도 모르고 읽은『황금가지』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에 인류학에 대한 필자의 이해가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고학과 인류학이 오랜 시간 밀접한 연관성을 맺어왔으며, 앞으로도 밀접한 연관성을 맺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은 확실하게 드는 것 같다. 원저의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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