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영화. 정말 믿기지 않는 영화. 대단한 영화.
주인장이 요 근래 봤던 영화 중의 최고로 꼽는 영화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안 그래도 그동안 '[뿌리아름]비평의창' 게시판에 영화 관련된 글을 거의 안 썼는데 이번에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정말 다른 사람들한테 소개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잠깐이나마 글을 쓰고자 한다. 아마 알만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을텐데, 아직 국내 개봉이 결정안 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다.

일단 영화의 줄거리를 가볍게 얘기하도록 하자.
존 올드먼이라는 학자가 갑자기 10년간의 대학 생활을 청산하고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려고 한다. 이미 다음 학과장 자리에 내정되어 있던 그였기에 동료 교수들은 모두들 이를 의아하게 여긴다. 신학자 에디스, 고고학자 아트, 심리학자 윌 그루브, 생물학자 해리 등등 7명의 손님이 그의 오두막을 방문하고 그 곳을 떠나려는 친구를 배웅하고자 한다.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이 오두막과 그 앞의 주차장이 전부이다. 그리고 약간의 엑스트라를 제외한다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배우 8명의 대사가 전부인 영화이다. 그럼에도 왜 대단하냐면, 아무렇지도 않게 무덤덤히 자신의 존재를 알린 존 올드먼의 언행때문이다. 다른 것은 없다.
그는 후기 구석기때부터 살아왔던 크로마뇽인이라고 자기를 소개한다. 이미 14,000살이 넘은 그에게 나이는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 35살 정도에서 세포가 끊임없이 재생되면서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나이를 속이기 위해 10년 단위로 끊임없이 사는 곳을 옮겨가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불사신은 아니다. 다만 노화가 진행되지 않을 뿐이다. 그렇게 존 올드먼은 동굴벽화를 그렸을 때부터 대학교수로서 살아오기까지의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그의 얘기를 농담처럼, 하나의 설정이라고 생각하고 스무고개 넘듯이 받아들였던 동료교수들은 점점 그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가 정신병자 혹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논리적으로 정확했으니까.
주인장이 여기서 대단하다고 느꼈던 점은 존 올드먼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갖는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그는 구석기시대에 어디에 살았었냐고 묻는 질문에 답을 못한다. 왜냐하면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산과 평야만 그의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당연한 질문인다. 오늘날처럼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지리적으로 자신이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안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일테니 말이다. 거기서 만약 아프리카 어디쯤이야, 혹은 유럽 어디쯤에서 난 살고 있었어~라고 말했다면 이 영화의 재미는 그 순간 반감됐을테고 그냥 저예산 영화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지극히 구석기인이 현생한 것처럼 올드먼은 대답했다.
또한 수십년전 지금 어디에 있었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그럼 당신은 1년전 오늘 어디에 있었는지 반문한다. 맞는 말이다. 그걸 일일히 기억하고 있겠는가? 특별한 기념일이나 어떤 사건이 있던 날도 아닌데. 거기다가 그는 14,000년을 넘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것도 그나마 현재 학습을 통해서 계산된 나이이다. 그가 크로마뇽인으로 불렸다는 것 역시 현재에 와서 배운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떤 존재인지 스스로 자각했던 것이 아니라 후세 학자들이 붙인 명칭을 배우면서 알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이란 말인가. 내가 누구인지 나도 잘 모르는데 그걸 수만년 지난 뒤의 사람들이 부르는데로 알고 넘어간다는 것이.
구석기시대 유물을 두고 누군가 묻는다. 이거 정말로 벼룩시장에서 산 거 맞냐고. 그러자 올드먼은 말한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볼펜 하나가 수천년 지나면 중요한 유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예상해서 그 볼펜 하나를 갖고 있겠는가? 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개인 기록이 영원히 남는 것과 달리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에야 정말 대단한, 당시 생활상을 복원하는데 아주 중요한 유물(토기나 석기 각종)일지는 몰라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냥 살면서 쓰고 버리는 소모품에 불과한 것들이었을테니 말이다. 만약 1만년이 넘게 살아온 사람이 있다면 난 무엇을 물을까? 무엇을 기대할까? 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을 여지없이 깨버리는 대사들이 쏟아진다.
올드먼은 살면서 10개가 넘는 학위를 받고 실제 강단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세상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있는 천재라는 소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받은 학위, 그가 공부한 것들은 그 당시의 지식일 뿐이지 미래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자리에 있던 동료교수보다 결코 그 분야에 있어서 전공자라고 할 수 없었다. 이 역시 맞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오래 산 사람, 연장자야말로 지혜로운 인물, 세상에서 모르는 것이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아니다. 그가 오래 산만큼 경험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새롭게 배워야만 하는 분야에서까지 그가 만능은 아닐테니 말이다. 이 역시 주인장이 영화를 보면서 아~하고 머리를 쳤던 부분이다.
그렇게 그는 과거에 그가 했던 일들을 말한다. 그 중에서 가장 쇼킹한 부분은 그가 예수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신학자 에디스는 넘어간다. 말도 안 된다며. 그는 그냥 부처를 만나 수양하는 법을 배웠고 그 교리를 서양에 와서 전파했던 것 뿐이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혔을때는 신진대사를 최대한 늦춰 죽은 것처럼 위장했고 사람들 몰래 도망가려다가 그걸 본 몇몇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의 이야기가 생겨난 것이라고 말이다. 동방박사도, 마굿간의 아기 예수도, 십계명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정작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정말 쇼킹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간 감독과 극작가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낄 뿐이었다. 하긴, 그만큼 오래 살았으니 그런 위대한 인물이 될 수도 있었겠지. 다소 허황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를 처음부터 보면 그런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라고~
<신학자 에디스(좌)와 심리학자 윌 그루브(우) :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이다>
하지만 올드먼은 결국 마지막에 가서 다 거짓말이라고,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정리한다. 에디스는 자신의 신앙이 틀리지 않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른 동료들 역시 나중에 책으로 쓴다면 꼭 보여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다들 나갔지만, 거기에서 거한 반전이 하나 기다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올드먼의 이야기를 믿어줬던 샌디(그녀는 사실 그에게 호감이 있어서 그를 믿은 것도 없지 않아 있다)가 갑자기 그에게 오래 산만큼 여자도 많았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하면서 잡담을 한다. 그리고 그는 과거 한 여성과 자신의 아들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그때 뒤늦게 오두막에서 나오던 윌 그루브가 그 얘기를 듣는다. 올드먼은 그가 어렸을때 갑자기 사라진 그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대단한 반전. 이 장면에서 주인장은 박수를 쳤다. 반전의 반전.
어쨌든 정말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는 가장 감명깊게 봤던 영화였다.
아마 이 영화를 이미 보신 분들이 계시다면...역시 주인장과 같은 말을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짧은 글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