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최고'라고 칭할만한 사극을 봤다. 처음에는 별로 얘기도 못 듣고 주목하지도 않았던 작품이다. 우연히 2회를 보다가 '오호~재밌겠는데'라는 생각에 다운받아서 1~8부까지 며칠만에 주경야독(?)의 심정으로 다 봤다. 이걸 보기 얼마전에『뿌리깊은 나무』를 감명깊게 읽었던 터라 다시금 쉽게 빠져들었던 면도 있지만 그걸 떠나서 스토리나 장면장면마다 나오는 영상미와 대사가 주인장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그렇기에 주인장은 지금까지 무수히 방영되었던 사극 중에서 단연 '최고'라고 칭할만한 작품이라고 단정하는 바이다. 그렇기에 주변에 적극적으로 '한성별곡-정'을 소개하고 보라고 선전 중이기도 하다.
배경은 정조 시대, 임금은 시파와 벽파의 정쟁 속에 어렵게 왕위에 올라 수원 화성으로의 천도를 단행하는 등 경장(정치개혁)을 강하게 실시하고 조선 천지가 소란스러울때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다. 작은 살인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대하고 어두운 음모의 중심부로 향해간다. 기본적으로『뿌리깊은 나무』를 본 독자라면 잘 알겠지만, 그 책은 조선시대 스릴러의 최고봉이라 불릴만한 작품이다. 주인장도 이미 서평을 한번 쓴 적이 있듯이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 세심한 시대적 고증, 놀라우리만치 탄탄한 스토리, 무수히 많은(그리고 숨겨졌던) 소재들의 절묘한 조합 등등 여타 역사소설이 따라가지 못할만큼의 작품성을 보유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주인장의 이러한 극찬(?)은 이 사극에도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등장인물들의 비중이 어느 것 하나 한 곳에 치우침이 없어 절묘한 균형을 맞추고 있으며 시대고증이나 묘사 등이 수준급이었다. 스토리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2중 3중으로 깔아놓은 복선은 글이 아닌 영상으로 표현되었기에 오히려『뿌리깊은 나무』를 능가할 정도라 생각한다. 8부작 미니시리즈지만 8회 마지막 1분까지도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스토리 속에서 정말 대단하다~라고 감탄을 내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자세하게 한번 논해보자. 사극을 보면서 주인장이 가장 놀란 것은 시대적 배경과 절묘하게 부합하는 소재의 선택이었다. 예전 안성기 주연의〈영원한 제국〉이라는 영화가 제작된 적이 있다. 역시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개혁정치를 펼치는 임금과 신하간의 긴박한 하루가 묘사되어 많은 화제가 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보다 다이나믹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흔히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영-정조 시대, 이 시대는 역동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대로서 많은 소설의 소재로서, 많은 연구자들의 연구주제로 활용되었다. 그런만큼 시대적 변혁을 상징하는 많은 사건들이 이 시대에 벌어졌는데, 격렬한 정쟁(政爭) 또한 이에 해당한다. 드라마 내내 신료들의 정쟁은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정조 임금의 의지와 상충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 중에는 왕의 편에 서서, 혹은 왕의 반대편에 서서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자도 있지만 이들은 유동적으로 움직이며 자신이 서야 할 편을 골라내기 바쁘다. 정치인들이 머리가 좋다고들 말하는데,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정치인들의 놀라운 정치 감각은 빛을 발한다. 극에서 최고로 꼽힐만한 극적 요소 중 하나는 '반전 '인데 정쟁으로 인한 반전 또한 빼놓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반전은 당시 시대적 상황과 절묘하게 부합하며 극적 재미를 배가시킨다. 변혁과 개혁에 어울리는 극적 긴장감이 드라마 전체를 휘감는 것을 보는 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등장인물의 '성격'이다.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위에 보인 3명이라 할 수 있는데 각각의 캐릭터가 상당히 독특하다. 어리버리하지만 나름의 소신과 확신이 있는 서얼 출신의 박상규, 명문대가의 딸로서 역도로 몰려 집안이 풍비박산되고 음모의 중심으로 돌아선 이나은, 천민 출신이지만 돈의 위력을 알고 세상을 돈으로 바꿔보려는 양만호. 서로 다른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3명의 주인공 덕분에 극 전개는 더욱 극적이 된다. 그리고 이런 극중 인물설정은 당시 시대상황과 절묘하게 부합된다. 이조판서를 비롯해 서얼들의 사회 진출이 본격화되는 시점에 박상규라는 캐릭터는 당시 조선사회에서 서얼의 차별이 어느 정도였는지, 서얼의 신분적 위치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조판서가 자신의 몸 안에 흐르는 쌍놈의 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장면에서 주인장은 절로 감탄했다. 심리묘사가 절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상규는 약간 이상주의자로서 당시 조선시대 지배층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지닌 이였다. 그러하기에 정조는 그에 대한 기대를 더욱더 하게 되고 의금부 도사로 임명하여 직접 보검을 하사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만의 신념으로 끝까지 극을 이끌어나간다(심지어 사랑하는 이나은이 독주를 마시게 했을때도 그는 강렬하게 부인하였다). 이나은은 역도의 집안 출신으로 관비가 되어 몸과 마음이 망가진 채 살아가다가 거대한 음모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나은의 아버지가 역도로 몰리게 된 이유가 서구사회처럼 민중에 의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원했기 때문이다. 정조의 측근으로서 정조도 그의 역모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그 역시 알고 있었다. 민중에 의한 쿠테타는 먼 미래에나 가능한 일이라는 정조의 대사가 바로 그러하다. 이 비밀이 밝혀질 때까지 이나은은 오직 복수만을 생각하는 독을 품은 여인일 뿐이었다. 더불어 양만오 역시 천민이지만 객관으로 성공하여 거부로 성장한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후기 상업 네트워크가 활기를 찾으면서 화폐경제가 발달하고 돈의 위력이 발휘되는 시점에 양만오는 아주 적절한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즉, 각 인물들이 당시 사회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소리가 된다. 그럼에도 기존 사극에서는 보지 못 했던 인물들이어서 전형적이면서도 전형적이지 않은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세번째는 새로운 임금상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정조 임금의 독백은 물론, 그가 다른 인물들에게 툭툭 던지는 대사까지 어느 것 하나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없다. 최선책이 아니면 차선책을 선택해야 한다는 강한 어조의 대사, 박상규의 이상을 바꿔보려는 정조의 집념이 느껴지는 장면은 물론이요,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의 중심에 서 있는 이나은의 정체를 처음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에게 희망을 걸고 마지막 임무를 지시하는 그 장면, 마치『칼의 노래』에서 봤던 이순신의 고독한 독백과 같은 임금의 고뇌까지 또 다른 임금의 상을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을만 했다. 그는 내려올 수 없는 고독한 1인자였으며 그 자리에서 자신들을 꺽으려하는 신료들과 싸웠다. 하지만 그의 적은 신료들만이 아니었다. 천년조선을 이끌어가는 어둠의 세력에 의해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알지 못하는 적과의 싸움에 힘들어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강한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하였으며 극이 진행되는 내내 그의 강렬한 의지가 자연스럽게 전달되었다. 주인장은 내심 박상규가 독을 마시고도 살아서 일어났던 것처럼,『한반도』의 마지막 부분과 같이 정조가 일어나 자신을 해하려했던 자들을 벌주는 그런 장면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정조는 자신의 죽음으로 조선의 충신을 가려내고자 하였고, 그 마지막 대임을 이나은에게 건네준다. 얼마나 통한의 삶을 살았을까,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도 조선을 바꾸고 백성들을 생각했던 임금의 처절한 삶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네번째는 끊임없이 시청자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극적 복선과 반전이 대단하다는 사실이다. 이럴까? 하면 저렇게 진행되고 저렇게 되겠지~하고 단정지으면 다르게 진행되는 스토리는 복잡하면서도 복잡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숨막히는 속도감으로 시청자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러한 극적 복선은 매회를 거듭할수록 긴장감이 배가되어 8회 마지막에서는 극에 달한다. 그동안 정조의 개혁의지를 꺽으려는 조직의 전말이 드러나면서 그 주인공은 바로 대왕대비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고 정조는 죽기 직전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차려 버린다. 하지만 복선과 반전은 거기서 마무리되지 않는다. 정조가 목숨받쳐 건네준 대임을 다하기 위해 이나은은 박상규와 함께 고난을 헤쳐나간다. 그러면서 결국 정조가 가장 신임하는 사파의 영수 채승환에게 정조의 유지를 가져간다. 장용영은 정조와 채승환만이 움직일 수 있는 조선시대 최강의 정예부대로서 정조는 유사시 이 부대를 움직여 왕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미 정조가 죽은 시점에 장용영을 움직이느냐 마느냐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리고 또 한번의 반전이 등장한다.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최전선에 앞서 개혁정치를 지지하던 이재한이 채승환을 베어버린 것이다. 그는 정조가 죽은 마당에 그의 개혁은 너무 급진적이었다고 되뇌인다. 어떻게 양반에게 군역을 지우냐는 말과 함께.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장용영 외영 대장인 최인우 장군 역시 이재한에게 무언의 동조를 보낸다. 그러면서 이재한은 만약을 대비해 정조의 유지를 자신이 챙기는데 이것도 역시 복선이었다. 왜냐하면 마지막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나은은 비밀조직의 일원이 바로 이재한이었음을 알아보고 그제서야 모든 인물들이 대왕대비를 정점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 장면은〈다모〉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했는데 그만큼 아름답고 가슴아픈 영상을 만들어냈다.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극의 전개가 굉장히 속도감있게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8부작이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은 여느 대하사극보다 많은 것들이 있었다. 물론 8부작인만큼 빠른 전개는 당연하겠지만 그러면서도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게 하는 것은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건 영화로 만들어도 충분히 극적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을만한 소재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이런 식의 사극이 나오지 않아서 주인장이 더 감탄하면서 빠져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충분히 그럴 정도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차후 이런 류의 사극이 또 나오지 않는 한, 스릴러적인 요소를 지닌 사극이라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최고의 자리를 놓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서슴없이 다른 분들께도 한번 이 사극을 꼭 보라고 권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