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신선하면서도 독특했던 판타지 영화.
여자친구가 보기 싫다는 것을 억지로 설득(?)해서 같이 본 영화인데 주인장은 정말 괜찮게 봤다.
먼저 내용을 잠깐 보자면 전체적으로 이게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아주 먼 옛날, 인간들이 모르는 지하왕국이 있었는데 그 행복한 동네에서 살던 어린 공주님이 인간 세계로 올라왔다가 그만 다시는 돌아가지 못 하게 됐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 오필리아는 꿈많은 어린이로 만삭인 어머니와 함께 군인인 새 아버지의 군 막사로 향하게 된다. 그 곳은 신비한 숲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그 곳에서 오필리아는 지하왕국에서 온 '판'을 만난다(주인장은 처음에 이 판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었다). 그리고 판이 제시한 3가지 미션을 수행하는데 그 자세한 미션은 영화를 보면 잘 알 수 있으니 여기서는 뭐 더 말하지 않겠다.

영화를 보면 딱 알 수 있지만 시공간적 배경이 참 독특하다. 아마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스페인(프랑코 총통이 지배하는)인 것으로 보이는데 오필리아의 아버지인 캐피탄 비달 대령은 프랑코의 수하로 등장한 듯 했다. 그는 작전지역을 돌아다니다 잡힌 약초 캐는 부자를 잔인하게 죽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반군을 사살하는 냉정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오직 자신의 핏줄을 남기기 위해 비천한 출신의 오필리아 어머니와 결혼했을 뿐이며,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오필리아는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다. 물론 오필리아도 그런 새 아버지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까지만 보면 판타지 치고는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어 조금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처음에 영화를 보면서 판이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그런데 판이 나오면서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판은 오필리아에게 불가능할 것 같은 3가지 미션을 제시하는데 현실적인 문제에 맞부딪쳐 제대로 미션을 수행하지 못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오필리아는 결국 판이 제시한 미션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정부군과 반군의 대립은 계속되고 반군을 잡아 죽이려는 캐피탄 대령의 광기는 극에 달한다. 이처럼 영화는 판을 내세워 오필리아를 매개로 판타지 세계를 보여주지만 그와 동시에 당시 혼란스러웠던 스페인의 현실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게 현실과 판타지가 뒤섞이며 보여지고 있지만 오필리아가 제대로 미션을 수행하고 있었고 판타지적 요소가 현실에서도 통용되는 걸 보면서(판이 인삼같이 생긴 요정을 주면서 몸이 아픈 어머니 침대 아래에 두고 우유를 정기적으로 갈아주면 아이가 잘 자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필리아가 그렇게 하는데 새 아버지는 그걸 찾아서 인삼을 불태우고 만다. 그리고 어머니는 피를 흘리며 난산 속에 죽게 되고...또 오필리아가 흰 분필로 문 만드는 것도...이건 100% 현실과 판타지가 섞인 것이라 생각했다) 으음~판타지는 판타지가 맞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영화가 점점 흘러 갈수록 다시 헤깔리기 시작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더 그러했다. 판은 지하왕국으로 가려면 오필리아의 남동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의 순수한 피가 있어야만 지하왕국으로 갈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판의 제안을 거절하고 두 눈에 쌍심지를 키고 자신의 핏줄을 찾으러 온 새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녀는 드디어 지하왕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첫번째 미션은 용기를 필요로, 두번째 미션은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면 세번째 미션은 자기 희생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지하왕국의 수문장인 판은 더없이 다정한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하고 지하왕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모두의 환호 속에 부모님과 재회하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나는가 싶었다.
마지막에 반군에게 둘러싸인 캐피탄 비달 대령은 자신의 핏줄을 잘 남겨달라고 하면서 자신이 아버지임을 밝혔지만 반군은 그를 죽이고 그의 자식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키울 것이라 다짐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결말. 반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정부군은 전멸했으며 새 아버지와 어머니, 오필리아는 모두 죽고 말았다. 여기까지 딱 보자 문득 드는 생각은 이거 지금까지 오필리아의 상상 속에서 진행된 얘기 아니야? 였다. 어려서부터 동화를 즐겨 읽던 오필리아였기에 그녀는 판이라는 상상의 캐릭터와 지하왕국이라는 상상의 나라를 자기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었고, 이야기 전반을 이끌었던 미션들은 모두 그녀의 꿈 속에서 진행된 것이라고 말이다. 인삼같이 생긴 요정도 오필리아에게만 중요한 존재였고 그녀의 새 아버지에게는 한낱 쓸모없는 나무조각일 뿐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에게 당시 스페인의 혼란한 현실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고, 그렇기에 더욱더 그녀는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인기를 끌었던 유명한 판타지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새로운 판타지 영화. 처음에는 그저 그랬는지 몰라도 보면서 주인장도 모르게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현실세계와는 전혀 상관없는 판타지 속의 새로운 세상에서 벌어지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 현실세계와 연결은 되어 있지만 역시 새로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앞의 두 작품보다 현실세계와 훨씬 더 밀접한, 현실세계와 뒤섞여 있는 판타지세계를 다룬 '해리포터' 시리즈까지 그간 인기를 끌었던 판타지 영화들은 대개 이런 3가지 시공간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처럼 아주 세세하게 당시의 현실상황을 자세히 반영한 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지극히 현실적이기에 그 내용조차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는 영화. 보고 나서도 그게 현실일까, 판타지일까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 독특한 영화였다.
물론 기존의 판타지 영화 스타일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이런 영화는 별로 재미없고 흥미를 유발하지 못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기존의 판타지 영화와 다른 영화이기 때문에 한번쯤 경험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른들을 위한 잔혹동화라는 표현에 걸맞게 다소 잔인한 장면도 여과없이 나오기는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판타지 영화이기에 15세 관람가가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새로운 판타지 세계에 한번 빠져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