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이란 무엇인가 동문선 현대신서 10
폴 빈 지음, 박범수 옮김 / 동문선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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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고학이란 무엇인가...

 제목만 보면 연상되는 것이 없는가? 맞다. 카 교수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가 문득 떠오를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보면서 주인장은 역사철학이라는 분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 책을 보면서 주인장은 고고학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역사학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카 교수의 책은 필독해야할 대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고고학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입문서나 개설서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주인장은 이 책을 고고학 입문서로 적극 추천한다.

책의 페이지수를 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고고학에 대해서 어렵게 설명하지 않은 책이다.

그냥 고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충실하게 읽는 이로 하여금 정보를 전달해 줄 뿐이다. 어려운 학술 용어는 물론이고 복잡한 내용은 거의 없다.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개략적인 소개와 더불어 고고학의 구성, 고고학이 차지하는 위치, 고고학을 공부하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등에 대해서 그야말로 이제 막 고고학을 배우는 대학생들에게 참으로 좋은 지침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은 처음에 '고고학자'하면 흔히 떠올리는 장면 2가지를 언급하면서 시작된다. 첫째는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 나오는 멋진 모습의 고고학자, 엄밀히 말하면 보물수집가나 탐험가에 더 가까운 모습이며 둘째는 중절모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배나온 할아버지가 안경에 묻은 먼지를 털며 흙구덩이에 있는 모습이 그것이라 한다. 상당히 극과 극을 달리는 모습이지만 이 두 모습은 모두 고고학자의 모습이 맞다. 주인장 역시 고고학이나 발굴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때는 첫번째 모습을 떠올렸지만 발굴도 다녀오고 고고학에 대해 배우면서 첫째 모습을 갖추기란 상당히 힘든 일이구나~하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들 중 중요하다 생각되는 것은 고고학이 더 이상 보물 수집이나 약탈적인 것에서 벗어나 순수한 학문 추구라는 목적을 따라 독립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시간 고고학은 역사학의 한종류로서, 인류학의 한종류로서 부차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학문이라고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고고학은 첨단 과학과의 만남을 통해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는데 노력하고 있다. 고고학 없이는 역사학도 인류학도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언제나 말하지만 여러 종류의 사료 중에서 1차 사료가 갖는 가치는 감히 함부로할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가치때문에 앞으로 고고학이 갖는 진정한 가치가 더 발전될 것이라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고고학을 하고 싶으면 돈 벌려는 생각은 버려라'

배고픈 인문학자. 하지만 돈보다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명예를 전해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고학자가 갖는 가치는 위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역사학도 마찬가지지만 고고학을 하는 사람이 부자가 될 수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더 이상 슐리만과 같이 보물을 발굴해 그로 인해 부를 얻는 시대는 지나갔다. 고고학자는 아직도 땅 속에서 햇볕을 보길 원하는 수많은 유물, 유적들을 후손들에게 전해야만 하는 사명감을 지닌 위대한 학자라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할 것이다.

앞으로 고고학자의 길을 걷고자하는 주인장에게 이 책이 정말 잠깐의 시간이지만, 많은 것을 알게 해주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줬듯이 주인장처럼 고고학도로서의 꿈을 갖고 있는 사람들, 고고학이라는 인문학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정보와 내용을 전해줄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만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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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 김영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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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읽은때가 벌써 5년전이니까 막 신입생으로 대학교에 들어간 때다. '동양사의 이해'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교수님이 몇가지 책들을 주고 5장 분량으로 서평을 써오라고 했는데 그때 주인장이 선택한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에도 역시 조선사에 대한 관심이 미천했던지라 약간의 강제성을 빌어 조선사에 대해 한번 알아보고 싶었던 생각으로 이 책을 읽었던 것이다. 하물며 송시열이라는 사람이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이 넘게 거론될만큼 널리 알려진 사람이라는데 궁금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최근 주인장이 조선사에 대해 약간의 공부를 하면서 이 책을 다시 보고 싶어 구입해서(당시에는 빌려서 봤다) 1번 더 읽었는데 처음과 느낌이 약간 다른지라 이렇게 글을 남긴다.

우선 이덕일은 성리학의 대가, 조선조 최고의 학자, 송자라고도 불리는 송시열을 두고 조선 전체와 한국사가 낳은 비극이라고 대담하게 말한다. 기실 주인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주인장 앞에서 조선사를 잘 얘기하지 않는다. 조선사만 나오면 주인장 입에서는 '쓰레기'니 '쓸모없는 역사'니 '부끄러운 나라'니 이런 얘기들이 나올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주인장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증오하고 싫어한다. 오죽하면 한국사에서 조선이라는 나라는 외부 민족의 역사가 침투한 것 같다고까지 하겠는가. 그런 조선사에서 주인장이 유일하게 관심을 표명하고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조선의 학문적 성과와 정치 체제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가이자 고명한 학자이신 플라톤이 늘 말하던 철인정치가 실행된 나라는 역사상 조선이 아마 유일하고 또 가장 잘 실현되었을 것이다. 학자이자 사상가이자 철학가였던 사대부가 곧 관료로서 학문과 국가를 지배했던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도 많은 변화가 생겨 여러 부처에 담당 전문가가 관료로 나가는 일이 종종 있지만 대학 교수가 전부 나서서 국가를 이끌어나간다면 어떻겠는가? 약간 웃음이 나오지 않겠나 싶다. 하지만 실제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러한 체제로 운영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조선의 뛰어난 학문적 성과와 정치 체제 속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이 송시열인데 어찌 그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겠는가.

조선 정치사에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붕당(朋黨)이 아닐까 하는데 여기서 붕당이 어쩌구 저쩌구, 붕당의 변천사가 어쩌구 저쩌구 떠들 생각은 없다. 다만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선조 시기에 이르러 조정의 인사권을 담당하는 이조전랑이라는 자리를 두고 붕당이 갈라지고 이때 동인과 서인으로 불리는 붕당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동인이 우세한 위치에 서게 되지만 곧 북인과 남인으로 분열되고 조일전쟁이 끝날때까지도 북인, 남인, 서인 세 당파가 정치적으로 대립 혹은 협력하면서 조선을 이끌어 나가게 된다. 하지만 조일전쟁 이후 광해군이 소북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고 국정이 흔들리자 서인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게 된다.

바로 이 서인의 총수가 송시열이며 서인과 남인이 100여년간 공존하며 조선을 좌지우지하는 동안 조선의 사대주의는 그 도를 더해갔다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인조 시대때 조선의 임금이 적장에게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거행한 역사를 갖고 있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진 것일까? 이미 조일전쟁으로 전쟁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낀 조선이 어째서 청나라의 1, 2차 침입에 무방비였던 것일까. 인조 즉위와 서인 집권 이후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들이 송시열과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송시열은 뛰어난 유학자요, 대철학가였다. 하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서인 정권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반대파를 조용히, 지속적으로 억누르며 존속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할 것이다.

송시열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대표적인 북벌론자였다. '효종의 노신', '효종때의 신하'라는 접두어가 항상 따라붙을 정도로 그는 효종 시대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효종의 북벌은 조선의 꺼져가는 마지막 불빛을 불태우듯 활활 타올랐고 우리는 후세에 그런 북벌 의지를 기리며 조선의 저력을 확인하곤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아니다. 북벌을 주장하고, 효종의 의지에 더불어 북벌을 실행한 실권자가 바로 송시열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효종이 적극적으로, 일생일대의 숙원으로 북벌을 여겨 실천했다면 송시열은 반청복명의 기치 아래 약간의 노력으로 대내외적인 명분만 얻으면 된다는 식의 가식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로 북벌을 대했던 것이다. 애초에 공통의 목적을 갖고 추진한 국가적 프로젝트였지만 나아가는 방향이 점차 틀어지자 양자간에 이견(異見)이 생기고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 와중에 효종이 급사하게 된다. 강력한 의지로 북벌을 주장해 그것을 실행에 옮겨 하나둘씩 결실을 맺고 신하들의 무수히 많던 반대 의견도 간단히 압도해 버릴 정도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던 조선 제일의 권력자가 갑자기 이유없이, 몇가지 의혹만 남긴채 죽어버린 것이었다.

 저자가 이 책말고도 다른 몇가지 조선사에 대한 저서에서도 밝혔듯이 조선의 왕들은 굉장히 많은 수가 독살의 의혹을 안고 사망하였다. 왕권의 강약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효종의 경우도 피해갈 수 없는 의혹을 품고 있다. 왕이라고 하는 최고 권력자가 친위 세력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채, 독살이라는 허술한 방법으로 세상을 등지는 나라가 한국사에 또 어디있단 말인가. 어쨌든, 효종이 죽음으로써 그가 평생의 사업으로 추진하던 북벌의 불꽃은 사그라든다.

 이후 서인의 장기 집권은 날이 갈수록 더해진다. 효종의 모후인 조대비의 복제 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했던 것이다. 실제 남인이 주장하는 3년설이 맞지만 서인은 1년설을 주장한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생각해보자. 이미 조선 사회는 왕이라는 최고 집권자의 존재보다는 정치적인 입지, 실리에 의해 당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며 그 당을 위해서 활동하는 것이 요구된 고도의 정치적 실체에 입각한 사회였던 것이다. 이것이 주인장이 앞서 얘기했던 조선 사회의 뛰어난 정치 체제다. 기실 절대군주제를 표방한 나라에서 이처럼 오늘날 민주주의에서나 볼 수 있는 정당 정치가 실현된 나라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철인정치의 결과물인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속칭 '예송논쟁'이라고 불리는 이 논쟁이 애초에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후 사이의 학문적인 논쟁에 불과했었는데 점점 두 사람이 속한 당쟁의 당론으로 대변되면서 문제가 변질/확대된 것이다. 거기다가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죽자 이번에는 서인측에서 3년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송논쟁이 더 이상 학문적 논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송시열이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역사적 사실들이라 생각한다.

 이 예송논쟁 사건 이후 서인은 실각하지만 남인의 분열로 인해 송시열과 서인은 재집권하게 된다. 하지만 서인도 송시열을 당수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당수로 하는 소론으로 분열되고 송시열은 숙종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억지를 부려 결국 사약을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서인의 거두가 쓰러지자 남인이 득세했지만 결국 붕당 정치의 폐해를 두려워한 숙종에 의해 숙청되고 붕당 정치는 바닥을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후 영, 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대거 숙청된 남인을 대신해 노론과 소론에 의한 일당 독재체제에 가까운 국정 운영이 이뤄지게 되고 조선이 멸망하는 날까지 변질된 붕당 정치가 조선 사회를 피폐케했던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일제가 조선 침략의 정당성을 위해 주장한 식민사관 중 하나인 붕당론이 나온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당시 사회는 급변하는 시대였다. 일반 서민들의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변화가 요구됐고 자연스레 거기에 맞춰 흘러가던 시대였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성리학을 주장하고 거기에 맞춰 고집스럽게 조선을 다스리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던 셈이다. 그는 그 거대한 시류에 당당히 맞서서 존재했고 일개 학자에 불과한 그가 조선을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그의 실체는 그가 죽은 후에 더욱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생전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았지만 하물며 그가 마지막 사약을 받는 모습까지도 어쩜 그렇게 극단적인 양자의 표현이 등장하는지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어째서 반대파에 있어서는 반드시 없어져야 할 존재로 인식되었던 그가 서인들에게는 신적인 존재, 심지어 왕보다도 더 권위있고 중요한 존재로 우선시 되었단 말인가.

 주인장은 저자의 송시열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지지한다. 그가 처음에 조심스럽게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한 것처럼 송시열에 대해 논하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분명 조선사에 있어서 손꼽히는 대학자였으며 그가 끼친 학문적 영향은 대단히 많을 뿐더러 그 영향력도 엄청나다. 그런 그의 학풍을 따르는 무수한 후진들이 이후 조선을 좌지우지했고, 조선은 점차 망국의 조짐을 보였으니 이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송시열은 분명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협소한 시각으로 사회, 정치를 바라봤기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나아가지 못 하게 했다. 또한 그는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일을 처리하고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당을 위해서 그가 주장하는 대의와 그의 지식을 교묘히 위장한 위선자이기도 했다. 그가 조금 더 개방적인 시각을 가지고 조금 더 너그러운 입장을 지녀 물러설 줄 알는 겸양함을 지녔더라면 조선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송시열이라는 인물이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조선이라는 나라의 확고한 정치 체제에 대해 다시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을 통해서 붕당 정치와 조선 사회 속에서 송시열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송시열이라는 인간 그 자체를 한번쯤 바라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하며 이만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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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5-09-14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이덕일씨 책 접한 게 바로 이거였는데 정말 충격이 대단했죠 송시열이라는 인물 자체는 제껴 두고라도, 어쩜 이렇게 붕당 정치와 예송 논쟁을 일목요연 하게 정리했는지 감동 그 자체였답니다 지금은 이 분 시각에 다소 고개를 갸우뚱 하긴 합니다만... ^^

麗輝 2005-10-02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이덕일은 현재 최고의 대중 역사서적을 쓰는 몇 안 되는 작가시랍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분 책은 즐겨보는 편입니다.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 세계전쟁사 001
김성남 지음, 노경민 그림 / 수막새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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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성남이형의 책이 나온 것에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전하며 그간 형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생각하니 주인장이 직접 책을 쓴것마냥 기쁘다. 그동안 전쟁사, 군사학에 있어 주인장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고 새로운 시각을 넓혀줬었던 형의 책은 애초 기대만큼이나 주인장에게 많은 것을 안겨준 책이었다.

일단, 전쟁이라고 하는 분야를 역사의 한 종속물, 다른 학문의 하위개념으로 보지 않고 독자적인 개념으로 이해해 서술한 부분이 와 닿았다. 몽고메리가 쓴 '전쟁의 역사'라는 책에서도 그는 비슷한 생각을 내비쳤는데 거기서 그는 전쟁이라는 부분을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집합체, 생동하는 존재로 언급했었다. 똑같은 하나의 전쟁이 지휘관의 입장과 부하의 입장에서 봤을때 각각 다르다는 것과 전쟁이라는 것을 다양한 시각에서 보려고 했었다. 다음의 그의 생각에서 우리는 그가 전쟁이라는 대상에 대한 막연한 기존 관념에 일침을 가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더러는 전쟁이 문명의 소산이라고 말할 테고, 더러는 전쟁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즉 합의를 도출할 다른 방법이 없을 때 항상 중재자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전쟁이 내린 판결은 정의보다 힘에 기초한 것이었다 --

이처럼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에서도 역시 전쟁이라는 개념에 대해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우쳐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로마 격언으로 시작한 책은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라는 트로츠키의 말로 끝맺는다. 전쟁이라고 하는 부분이 인류 문명사에 있어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했으며 결코 다른 학문의 종속물이나 하위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 책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이 몇가지가 있는데,

우선, 시대별로 역사를 구성하지 않고 몇몇 테마별로 단락을 나눈 것이 눈에 띄었고 마치 역사스페셜의 3D를 보는듯한 자세하고 신선한 전장 지도가 인상깊었다. 아울러 기존에 알고 있던 몇몇 전투에 대해 새로운 해석, 합리적인 해석을 도출해내는 점이 돋보였다.

이 3가지 특징만으로도 이 책이 가지는 의의는 대단히 크다고 생각한다. 기존에도 몇몇 장수와 정복군주에 대한 전략전술을 소개하는 책이나 고구려나 백제의 정복 과정을 국력의 변화, 국제적인 질서와 연계해 총체적으로 언급한 논문이나 책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개개의 전투를 중심이 갖는 의미를 되살리고 그 전투가 당시 미쳤던 파급효과에 대해서 언급했던 책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군사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학문과 접목한 전쟁사가 우리에게 밀접하게 다가설 수 있는 이유가 이런데 있지 않나 싶다. 독자들이 그동안 느끼고 있던 갈증감을 해소해줬다고나 할까?

주인장이 특히 주의깊게 봤던 부분은 황산벌 전투, 천문령 전투, 탄금대 전투, 성양 전투 부분이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황산벌 전투는 이전에 주인장도 글을 몇번 쓸만큼 관심이 높았던 부분이었다. 결사대라는 단어에 주목해 계백이 이끌었던 부대가 죽음을 불사한 자살부대가 아니라 계백의 사병적 성격을 지닌 정예병이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주인장에게 당시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끈 5천군이 전부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해석은 참신한 것이었다. 전투의 규모가 달라지면서 당시 나당 연합군의 백제 원정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으며 백제 멸망에 대한 이해도 달리할 수 있었다. 당시 백제는 국경을 돌파한 신라군에게 제대로 된 병력도 내보내지 못할 정도로 국력이 허약한 나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발해 건국의 기반이 된 천문령 전투는 기존에 단편적인 사료들을 통해서 당군에게 쫓겨가던 여러 유민들이 천문령 골짜기에서 매복과 기습으로 적을 무찔렀다,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다양하고 자세한 전장 지도와 함께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어 주인장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정착군대의 힘과 유목세력의 용병적 군대의 차이점에 대해서 일정한 개념을 잡을 수 있었고 천문령 전투가 전쟁사적 관점에서 바라봤을때 어느 정도로 중요하고 대단한 전투였는지에 대해서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발해가 건국하고 동북방에 또 하나의 통일된 집단이 형성되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당의 입장에서 봤을때 천문령 전투가 얼마나 뼈아픈 패배였겠는가 싶기도 하다.

탄금대 전투는 주인장이 1차 조일전쟁에서 가장 미스테리로 여겨졌던 부분이었다. 주인장의 선조이기도 한 신립 장군이 당시 야인들과 오랜 세월 겨뤘던 당대 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하의 요새를 버리고 왜 하필 탄금대로 갔을까에 대한 오해를 풀게 해주었다. 강병이 아니기에 배수진을 치고 싸울수 밖에 없었다는 기록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적의 전력을 무시한채 북방 야인들을 상대하듯 기병을 앞세우고 강제징집된 병력들의 전의를 불러일으키려고 배수진을 쳤다가 대패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성양 전투 부분은 남아있는 사료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이렇게 새롭게 재현해냈다는 것이 우선 대단하다고 여겨지고 당대 백제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였으며 성양 전투로 인해 동아시아에 어떤 국제 질서가 성립되었는지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백제군이 적을 유인해 안심시키고 전략적 후퇴를 하였다가 다시 들이쳐 적을 대파했다는 대목은 전혀 생각치 못 했던 것이라 더 새로웠던 것 같다. 백제의 대륙진출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런 식으로 다양하고 새로운 내용들이 자꾸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조선의 숭문천무 사상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다가오는 냉정한 국제 사회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반문한다. 보다 많은 전투에 대해서 실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램이 있지만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전투에 대해서도 잘 몰랐었기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전쟁이라고 하는 주제를 갖고, 전쟁사와 군사학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본 한국사가 주인장에게 새롭게 다가온 계기를 마련해준 책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밝히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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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산문선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 미다스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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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미친 바보'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다. 주인장도 개인적으로 책을 좋아해서 어떨때는 방에 틀어박혀 일주일간 10여권의 책을 독파하기도 할 정도인데 그렇다고 봤을때 주인장도 이런 사람이지 않을까 싶었다. 책만 보고, 공부만 하는 사람. 그래서 군생활을 하는내내 주위에서는 음악도 좀 듣고 운동도 좀 하고 TV도 좀 보라고 하면서 사람이 사는데 있어 어떻게 책만 보고 살 수가 있냐고들 했었다. 그런 주인장이였기에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책을 꼭 보고 싶었다. 그래서 부대에 있을때 신문에서 이 책을 보고 휴가나와서 읽었던 것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박학다식했던 인물 이덕무가 쓴 다양한 글을 정리해놓은 책이다. 이덕무에 대해 이 책을 읽기전에는 관심도 없었고 잘 몰랐기 때문에 여기에 잠깐 이덕무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덕무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중 한사람으로 박지원ㆍ박제가ㆍ유득공 등과 교유하면서 한시사가로 청나라에까지 그 명성을 떨칠 만큼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박학으로 널리 이름을 알린 대학자였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의 말에 따르면 이덕무는 평생 2만 권의 책을 읽었으며, 손수 수백 권의 책을 필사했는데 아무리 바빠도 속자(俗子)를 쓴 것이 한 글자도 없었다니 정말 혀가 다 내둘러지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은 말씨가 어눌하고 성품은 졸렬하고 게을러 세상 일을 알지 못하고 오직 어릴때 부터 책 보는 일만을 즐거움으로 삼아 하루도 책을 손에서 놓았던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에 마음이 맞는 사람과 얘기를 하면 절로 신이나 심중의 얘기를 꺼내놓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상대방과 마음도 맞지 않고 상대방의 말에 억지로 장단을 맞춰주지도 못해서 수십년 살아오면서 사람 사귀는 법 하나 제대로 못 배웠다고 하기까지 한다. 어떤가? 이덕무라는 사람에 대한 대략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가?

하물며 그는 책을 읽다 심오한 뜻을 깨우치기라도 하면 매우 기뻐하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하기도 하였는데 그 소리가 마치 갈가미귀 우짖는 듯하였고 아무소리 없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때로는 꿈꾸는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였기에 주변에서는 그를 가리켜 '책에 미친 바보(간서치:看書痴)라고 불렀다고 한다. 웃음이 나올법한 상황이다.

이 책에는 그가 평생 써온 편지, 서평, 공부하고 책 보는 법, 인생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쓴 글, 여행 중에 쓴 글 등 다양한 종류의 글이 실려있다. 그가 상당히 어렸을 때부터 글을 깨우치고 책을 보면서 평생을 책과 더불어 살았는데 그를 통해서 당시 조선시대 선비들에 대해 또 다른 면을 엿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 후기, 책만 보고 세상살이와 무관한 삶을 살았기에 겉모습만 허울좋은 양반이었지, 돈에 쫓겨 쌍놈들에게 족보를 써주고 돈을 벌어 살았다고 알고 있는 양반의 모습을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말 그대로 청아하고 박학다식하며 인생의 정수를 학문을 통해 깨우친 사대부였으며 그 지식과 지혜의 깊이가 대단히 깊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평소 '배고픔과 추위, 근심과 번뇌 그리고 기침을 잊기 위해 책을 읽었다'고 말하던 그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집에 있는 가장 좋은 물건이었던 '맹자'를 200전에 팔아 밥을 해먹고 이를 자랑하자 친구인 유득공이 '좌씨전'을 팔아 술을 사줬다는 대목에서는 그가 주인장이 기존에 알고 있던 답답하고 꽉 막히고 지루한 선비가 아니었음을 알게 해 주었다. 아울러 주인장이 많이 느낀 부분은 집이 가난해 변변한 책이 있을 리 없었던 그가 대개는 아는 이들에게 빌려 읽었는데 귀한 책이라도 그이가 빌려달라고 하면 사람들은 '책을 두고 자네의 눈을 거치지 않으면 그 책을 무엇에 쓰겠는가?'라며 책을 선뜻 내줬다고 하는 부분이었다. 이덕무라고 하는 사람의 인품과 학식을 가장 잘 대변하는 부분이 이 대목이 아닌가 싶었다.

보는 내내 주인장으로 하여금 상쾌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정도의 신선함을 안겨 주었던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처음 보는데서 오는 참신함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기존에 갖고 있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해줬다는 점과 이덕무라고 하는 사람의 인물 됨됨이에 흠뻑 빠졌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책은 주인장의 강력추천으로 친구가 보고 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봐도 전혀 거부감이 없을 정도의 깔끔하고 간결한 문체와 그의 사상이 많은 이들에게 어필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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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 바보가 된 고구려 귀족
임기환 기획, 이기담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주인장이 군인으로 읽은 마지막 책이 이 2권이다. 말년휴가를 나와서 이것저것 책을 사고 부대에 가져갔다가 읽었는데 우선 책을 다 읽은 느낌을 말한다면 책이 재미있고, 어렵지 않아 읽는데 부담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단 주인장이 고려사에 대해 단편적인 지식만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 통사 개설서가 필요했는데 여기저기 검색하다가 알게 되어 역동적 고려사를 사게 되었고 온달, 바보가 된 고구려 귀족(이하 온달로 지칭하겠다)은 기존부터 어느정도 윤곽은 잡고 있었지만 참신한 구성으로 만들어진 책이 있어서 사게 되었다. 그리고 2권의 책을 다 본 지금은 대단히 만족스럽고 흡족하다.

역동적 고려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려에 대해 일관된 입장으로 서술한 통사다. 노태돈의 '고구려사 연구'처럼 다분히 학문적으로 연구 중심적의 내용도 아니었으며 김용만의 '고구려의 발견'처럼 다양한 사실을 포괄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고려사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을 짚어내는데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 역사연구가가 쓴 왕조실록 시리즈처럼 허무맹랑하게 자신의 주관적인 개념만 잔뜩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서적과 원사료와 각종 학술논문 등을 토대로 책을 완성했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역사 공부를 한다는 차원에서도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서 주인장이 고려사에 대해 일관된 틀을 짜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아울러 온달은 역사 연구가가 기획하고 역사 소설가가 글을 쓴 독특한 작품이다. 이런 작품은 처음이었는데 보는 내내 신선하고 참신하다는 생각을 멈추지 못 했다. 온달에 대해서는 기존의 학술서적이나 논문을 통해서 어느정도 개념을 잡고 있었지만 역사적인 접근만 했었지 국문학적, 설화적인 접근은 이 책을 통해서 최초로 시도해봤다. 그 결과 기존에 주인장이 알고 있었던 온달에 대한 개념에 변화가 생겨난 것이 사실이며 그가 오늘날까지 천수백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잊혀지지 않고 언급된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2권의 책을 동시에 언급한 이유는 모두 그렇게 가볍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무겁지 않은 책들이며 또한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흔히 역사라고 하면 무겁고 딱딱하고 배우기 어려운 학문을 머릿속에 떠오르게 하는데 이 책들은 그런 개념과는 동떨어진, 그야말로 재미있고 읽기 좋은 책들이었다. 아무리 좋고 중요한 역사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만큼 학문적 중요성과 소설적 재미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데 이 2권의 책은 역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첫 지침서로 좋은 역할을 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방송가에는 사극이 또 하나의 인기 트랜드로 작용하고 있는데 기존의 조선사, 그것도 왕조 중심의 시대사만 언급하던 사극에서 벗어나 요즘에는 남북국시대, 고려시대 등 다양한 배경의 다양한 인물을 중점적으로 다룬 사극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다. 그런 현상은 퓨전이라는 형식에 걸맞게 기존 사극과 전혀 다른 새로움을 우리에게 선사하게 되고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분들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 여성들도 사극의 팬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미 홍길동, 허준, 홍국영, 대장금, 임꺽정, 상도 등 다양한 인물과 다양한 주제를 다룬 사극이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으며 최근에는 민족 최고의 영웅 이순신을 다룬 '불멸의 이순신'과 장보고를 소재로 다룬 '해신'이 방영되어 연일 인기몰이에 나서고 있다. 현재 방영중인 두 프로그램은 극과 극인 평을 받지만 주인장은 양쪽 다 역사 알리기에 좋은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인 사실 해석과 전달에 치중하다보면 다소 정통 사극의 길을 걷게 마련이고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고 소설적 상상력을 가미해 극적 효과를 강조한다면 퓨전 사극의 길을 걷게 마련인데 이 양자가 어느정도 절충하는 부분에서는 좋게 이해되어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추세에 맞추어 더이상 역사책이나 역사소설에도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더 이상 역사책은 딱딱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게 되고, 역사소설은 더 이상 허무맹랑한 극적 효과만 강조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변화에 걸맞는 가장 적당한 책이 이 두권이 아닌가 생각하며 이만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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