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사 : 사상과 이론
브루스 트리거 지음, 성춘택 옮김 / 학연문화사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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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고학史.
어떤 학문이든 그 학문이 현재까지 걸어온 학사(學史)를 연구하고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때 상당히 어려운 작업일 뿐더러 그 작업을 해냈다는 것은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런 학사를 왜 연구하고, 왜 공부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어떤 학문에 대해서 공부하고 그 학문을 전공삼아 연구한다고 했을때 그 의미는 그 학문 자체로서의 연구이자 공부이지, 그 학문이 어떻게 형성되서 어떻게 변화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는지, 그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과연 그럴까? 어느 분야를 공부하든지 그 학문이 어떤 학문이고, 어떤 변화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는지 알 필요는 없는 것일까?

학문은 인류가 문명을 창출해내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사상과 정신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분야든지 학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인간이 지금까지 걸어온 발자취를 안다는 점에서 반드시 필요하고, 또 선행되어야 할 부분이다. 고고학의 경우, 전공공부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인 학부생때 고고학사에 대해 각 대학마다 수업을 개설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특히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사회과학의 경계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학문이 고고학임을 상기한다면 고고학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특히나 더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뭐 말은 이렇게 거창하게 했지만 보다 실질적으로 살펴본다면 학사를 배움으로써 그 학문이 지니는 기본적인 의미나 방법론, 접근하는 시각 등에 대한 기본 개념을 성립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책 하나를 추천하고자 한다.

고고학사(A History of Archaeological Thought)

이 책의 원제목이다. 단순히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역사가 아니라 '고고학 사상'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의 주 목적이다.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분명 차이가 있다. 사상적인 측면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보다 고고학이라고 하는 학문의 본질에 접근해서 학사를 공부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그 학문이 걸어온 길을 되짚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길을 걸어오게 됐는지를 되짚어 볼 것이며 당연히 이해하는데 있어 상당히 난해한 부분들이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케임브리지대학의 콜린 렌프류 교수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현재 구할 수 있는 고고학사 가운데 가장 좋고 최신의 책'임을 부인할 수는 없기 때문에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필독서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지 않을까 한다.

주인장이 이 책을 산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고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마음먹은 것이 군대에서니까 3년 전쯤일 것이다. 그때 책을 사서 조금씩 읽어봤지만 역시나 어려웠다. 한때 학문의 본질적인 부분을 파악하고자 하는 마음에 인류학, 고고학, 역사학의 유명한 이론서적들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황금가지, 역사란 무엇인가, 고고학이란 무엇인가, 역사철학의 이해, 역사의 이해, 역사는 어떻게 쓰는가 등등. 그리고 같이 읽었던 책이 바로 고고학사였는데 이번에 전공수업 교과서로 채택된 김에 본격적으로 읽었으니, 책한테는 상당히 미안한 일이겠지만 사놓고 잘 안 봤던 것이 사실이다.

책은 고고학의 시작과 끝을 총망라하고 있다. 고전고고학과 고물애호주의부터 시작해서 북구에서의 본격적인 고고학의 학문으로서의 출발, 제국주의와 연결된 식민고고학, 인류학과 사회학 등과 연계된 문화사 고고학, 신진화론 이후의 신고고학과 후기(탈)과정주의 고고학까지 고고학이 걸어온 길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어렵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재미있기도 하다.

일단 책을 보면서 드는 생각들은 이런 개설서가 한국에서는 나오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외국에서, 특히 외국에서 일본을 거쳐 들어온 학문이고 1930년대 여러 서양학문과 같이 한국에 들어왔을때는 그 초보적인 수준때문에 당시 미술사학도(고유섭 같은...)들에게 우습게 취급받던 학문이기도 했다. 그런 한국 고고학계가 오늘날의 수준으로 성장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며 현단계에서 한국고고학계가 이론적인 성장을 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상황에서 비록 외국인이 쓴, 고고학사지만 고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든, 고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꼭 봤으면 하는 책이 이 책이다. 한국에서 차후에 고고학사 혹은 한국고고학사가 나온다면야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말이다.

특히 책을 보면 당시의 사회적 환경의 변화, 그 흐름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기타 학문과 사상의 변화를 언급하면서 그것과 결부시켜 고고학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고고학이 왜 그런 변화들을 겪어야만 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이 책을 보고 후배 한명은 고고학과 서양 철학이나 사상이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하면서 전역하면 그 부분에 대해 공부할 소모임을 하나 만들고 싶다는 말까지 할 정도다. 누가 고고학을 단순히 땅만 파고 유물만 캐내는 학문이라고 했는가. 고고학이야말로 인류의 역사와 길을 같이 해온,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책 맨 뒤를 보면 저자가 이 책 1권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연구서적를 참고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모두 영어로 되어 있는 것이며, 초기 고고학이 모두 서양인에 의해 주도된만큼 어쩔 수 없는 현상이겠지만 모든 고고학 전공자들이 유창하게 영어를 사용해서 서양의 모든 연구서적을 참고할 수 없는 이상, 이같은 번역서를 통해서 고고학을 공부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어렵지만 꼭 읽어봐야만 할 책, 조심스럽게 한번 추천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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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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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머리말

  소위 유학자들이라고 통칭하는 조선시대 지식인들에 대해서 평자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호감을 갖고 있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라는 나라한테까지도 호감을 갖고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자국의 역사 중 어느 것은 좋아하고, 어느 것은 싫어하는 행위 자체가 상당히 치졸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조선사에서 사대주의적이고, 소중화주의적이고, 힘이 없는 약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므로 조선사에 대해 쉬이 호감이 가지 않는 것을.

  이성계라고 하는 강골의 무인에 의해 역성혁명이 일어나 고려를 뒤엎고 등장한 조선은 분명 그 군주만큼이나 신생국이 갖고 있는 생동감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동감을 쓸 줄 몰라 그저 명에 대한 사대에 전심전력을 다하게 되니, 수만 마리의 말을 명에 갖다 바쳐 국력을 깎아먹은 것부터 시작해서 명이 뱃길을 금하니 이후 사행길은 전부 발이 부르트도록(그 발이 사람발이든, 동물의 발이든) 걸어서만 이뤄진 나라가 바로 조선이 아닌가.

  군주와 국가의 힘이 약함을 조상들 덕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요행에 무수히 많은 선조들을 신격화하여 그에 대한 제사로 국력을 낭비할지언정, 명의 억압과 잘나빠진 성리학자들의 주장에 휘둘려 하늘에 대한 제사는 지내지 않았던 조선이요, 편협될지언정 부질없는 것은 필요 없다는 식으로 억불숭유하여 사상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아 일종의 사상 통제를 강하게 가했던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조선이 건국되기 1,500년 이전에 이미 서양의 플라톤이라는 사람이『국가(Politeia)』라는 책을 쓰면서 이상국가의 실현을 위해서는, 진정한 학문이며 인생지도의 지침, 인간형성의 힘으로서의 철학으로 국가지배가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철인정치(哲人政治)를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동 ․ 서양을 통틀어 쉽게 등장하지 않았고 굳이 언급한다면 조선이 가장 적합한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상 국가 자체가 문제가 있는 만큼, 조선이라는 나라에는 문제가 많이 있었다.

  중국사상 가장 약한 왕조를 흔히 송(宋)에 비유하듯이 평자는 한국사상 가장 약한 왕조는 조선(朝鮮)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송은 당대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었기 때문에 송의 경제력은 동아시아 전체의 경제활동에 있어 중요한 요소였지만, 조선은 당대 국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국제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미비한 존재였다. 그러면서도 대마도의 사신이 찾아와 조선왕을 황제 대하듯이 깍듯이 모시자 기분 좋아 엄청난 하사품을 내리며 자기만족을 해야만 했던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철저한 사대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성리학의 실현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던 나라이면서도 내심으로는 허황된 꿈을 꾸던 나라, 그런 조선에 대해서 평자가 유일하게 자랑하고픈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심오한 성리학의 세계일 것이다. 유교의 본고장이 아니면서도 이미 당대 동아시아에서 성리학의 본질과 핵심을 꿰뚫고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나라는 바로 명이 아닌 조선이었다. 그런 자부심 속에서 소중화(小中華) 사상이 발현되어 현실감각을 잊어버린 채 청(淸)에 대항하는 우를 범하기는 했지만 조선의 성리학과 학문적 성과는 세계사에 내놓아도 될 정도의 자랑이라고 본다.

  평자가 가장 처음 조선시대를 다시 보게 되었던 것은 송자라고 불리던 송시열이 조선왕조 500년에 끼친 영향이 엄청났었다는 사실이었고, 또 하나가 바로 조선후기 유학자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읽는 바보 이덕무에 대한 산문집을 보면서 조선시대 유학자들에 대한 생각을 달리한 바 있었다. 조선의 몰락을 성리학에서 찾을 수 있으면서도 조선의 발전을 성리학에서 찾을 수 있는 모순은, 바로 이들 유학자들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지 못하면 풀 수 없는 과제라고 생각하면서 약간의 서평을 쓸까 한다.

        Ⅱ. 책의 구성과 시각

  책은 전체적으로 조선후기 몇몇 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테마별로 정리해서 싣고 있다. 목차를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벽癖에 들린 사람들
                미쳐야 미친다
                굶어 죽은 천재를 아시오?
                독서광 이야기
                지리산의 물고기
                송곳으로 귀를 찌르다
                그가 죽자 조선은 한 사람을 잃었다
 
         2. 맛난 만남
                이런 집을 그려주게
                산자고새의 노래
                어떤 사제간
                삶을 바꾼 만남
                실내악이 있는 풍경
                돈 좀 꿔주게
                노을치마에 써준 글
      
         3. 일상 속의 깨달음
                연기 속의 깨달음
                그림자놀이
                천하의 지극한 문장
                신선의 꿈과 깨달음의 길
                세검정 구경하는 법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저자는 평소 자신이 공부하던 몇몇 조선 후기 산문에 대해 이미 책을 낸 바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일련의 집필과정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될 듯싶다. 특히 불광불급(不狂不及), 즉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 한다는 주제 아래 언뜻 보면 천재(天才)이고, 언뜻 보면 기인(奇人)이라 불릴 수 있는 인물들을 한데 모아놨기 때문에 조선후기 유학자들의 전체적인 학풍이나 사상적인 면을 알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저자는 첫 번째 테마로 벽(癖), 즉 일종의 마니아적인 인물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미쳐야 미친다, 라고 하는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관통하는 주제에 가장 잘 맞는 내용들이 실려 있다. 그러면서 그는『벽전소사(癖顚小史)』라고 하는 명말청초의 저서에서 나온 유옹(劉邕)이라는 인물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부스럼 딱지를 잘 먹는 벽, 즉 창가벽(瘡痂癖)이 있던 인물인데 생각만 해도 메스꺼울 정도다. 저자는 이 책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벽’이며 그 벽이야말로 18세기 지식인을 읽는 코드라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유옹을 언급하며 그런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벽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보이고 있다.

  저자는 어쩌면 뭔가 하나에 미쳐 그 분야에서 최고로 칭해질 만큼의 마니아적 경향을 보였던 조선 후기 지식인들을 언급하면서 오늘날 지식인들에 대한 경고와 귀감의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실제 저자가 언급하는 이런 인물들은 최근에야 일반인들이 주목할 정도로 그동안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며 실제로 천재적인 능력과 뭔가 한 가지 분야에서 보여준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세상에서 괴리된 채, 사회에 수용되지 못한 인물들이 많았다. 성리학이라고 하는 사상적 틀 안에 갇힌 채 그 재능을 썩혀둔 셈이다. 그리고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그런 천재성을 수용하지 못한 조선은 근대화의 이행이 늦어져 오늘날 후손들에게 뼈아픈 일제강점기라는 역사를 전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테마는 ‘맛난 만남’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얼핏 발음하면 앞단어와 뒷단어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면서도 만남이라는 제재를 맛나다는 미감(味感)으로 표현한 것 또한 감칠나다. 그는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나 산문, 시를 통해 그들만의 정신적 공유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인연과 만남이라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하고 또 가치 있는 것인지 언급하는 것 또한 빼먹지 않고 있다.

  아마도 첫 번째 내용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다 보니 다소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 대한 일면만 보게끔 할 가능성이 있어 두 번째 테마에서 이런 소재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 테마까지 지나치면,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어떤 한 분야에 있어 천재라고 불릴 정도의 수준에 있었고 그만큼 일반인들과 달리 다소 특이한 생활을 했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런 그들이 얼마나 인간적이며 정감 있고 운치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으며 학문을 단지 앎에서 만족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실천했던 인물들인지를 알게 해 준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벽이 있을지언정, 진정으로 지성인(知性人)이 되고자 했던 인물이며, 그 안에서 삶의 여유를 찾았던 인물들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테마로 넘어오면 일상 속의 깨달음을 언급하는데 이는 첫 번째와 두 번째 테마를 읽으면서 궁금했던 부분을 해소해준다. 즉, ‘어떻게 마니아였던 그들이 삶의 운치와 인생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답이 마지막에 놓여있다. 연기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이옥과 박지원의 소품산문, 그림자를 통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앎을 얻었던 이덕무와 정약용의 산문, 이상한 방식으로 기행문을 씀으로써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던 홍길주, 유학자의 생각으로 보기 힘들 정도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글을 썼던 허균, 정약용의 유기(遊記)를 통해서 남들과 다른 관점과 생각을 갖고 있던 것까지,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이 하나도 없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고수는 확실히 다르다. 그들의 눈은 남들이 다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들을 단번에 읽어낸다. 즉, 핵심을 한 번에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하면서도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지극한 수준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비범한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세 가지 테마로 준비한 몇몇 인물에 대해서 알아가다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정말 이런 사람들이 조선 후기에 그렇게 많았단 말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중국의 명사나 위인은 많이 알면서도 조선의 이런 훌륭한 조상님들에 대해서는 모르고 지냈던 것이 한없이 죄스럽게 된다. 그렇기에 이런 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수용하지 못 했던 조선사회가 더욱더 안타까운 것이다.

        Ⅲ. 비평

  이 책에 대해서 비평을 한다고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책에 대한 평자의 느낌을 적는 것 이상으로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이미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과 경외심을 지니고 있는 터에, 더 이상 무슨 말이 나올 것이며 그 말들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냉정하겠는가.

  첫 번째 테마를 보면 천문학자 김영, 독서광 김득신과 이덕무를 비롯해 박제가와 노긍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평자는 과거 몇몇 역사기록에서 희대의 천재과학자 김영이라는 인물이 있음을 알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본 바 있다. 또한 이덕무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책을 통해서 접한 바 있기 때문에 그 인물에 대해서는 한없는 존경심을 품고 있는 터였고『북학의』를 통해 박제가라는 인물이 서양의 마키아벨리에 비견될 정도의 혁신적인 개혁가였음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더 주목되는 인물이 노긍이라는 사람이었다. 우선 그 이름을 처음 들어봤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이가환이라는 인물이 노긍을 두고 ‘그가 태어나 우리나라는 한 사람을 얻었고, 그가 죽자 우리나라가 한 사람을 잃었다’고 평한 부분이 이채로웠다. 실제로 그는 관직에 나가 정치를 했던 인물이 아니라 홍봉한이라는 사람의 문객으로 수십 년간 살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과거 시험장에서는 답안지를 팔아 선비의 기풍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귀양살이까지 했던 인물이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에서도 커닝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험 답안지를 대필하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 책을 보면서 처음 알았다.

  그런데 이가환은 왜? 저자가 소개한 그의 글을 보면 하나같이 수천 년 세상을 살아본 신선이 인간사는 부질없다는 투로 쓴 것들이다. 그런 사람에게 과거가 무슨 소용이며, 현세의 영욕과 부귀영화가 다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니 막돌이라고 하는 자신의 노비가 죽자 거침없이 제문을 지어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노비에게 제문을 지어준 것도 충격이지만 그 내용이 어찌나 애절한지 진심을 다해서 썼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가환은 역대 뛰어난 인재들을 비유하면서 노긍을 높이 평가했음에도 그는 세상에 수용되지 못한 천재였기에 결국에는 과거 시험을 대필했다는, 선비로서는 치명적인 죄목을 안고 귀양을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현명했던 노긍, 첫 번째 테마에서 두 번째 테마로 넘어가는 마지막 부분에 노긍을 실었던 것이 우연인지,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절했다고 생각하며 두 번째 테마로 넘어가겠다.

  두 번째 테마에서 가장 눈여겨 본 부분은 ‘삶을 바꾼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정약용과 강진 시설 제자인 황상에 대한 부분이었다. 강진으로 유배된 정약용을 두고 천주쟁이라고 그 지역 사람들이 꺼려하던 터에 15살의 황상은 서울에서 유명한 선생님이 오셨다는 말에 거침없이 찾아가 공부 가르쳐주기를 청했다. 머리가 나쁘고 앞뒤가 꼭 막혔고 분별력도 없다고 하면서 자신을 소개한 순박한 시골 청년은 주눅이 든 채, 정약용 앞에 나섰고, 그런 황상에게 정약용은 첫째도 부지런함, 둘째도 부지런함, 셋째로 부지런함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용기를 복돋아준다.

  정약용의 이런 가르침을 황상은 평생 동안 잊지 않았으며 61년이 지나 76살이 되었을 무렵에는 스승과 자신의 첫 만남을 기억하며「임술기(壬戌記)」란 글을 썼다. 자신이 76살이 된 지금까지 스승이 남겨주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자나 깨나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노라고 눈물겹게 고백하는 그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사제 간의 애틋한 사랑과 존경이 어느 정도까지 달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정약용이 병중에 있던 때, 쉰이 넘어간 옛 제자는 스승이 계시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 문안을 드릴 정도로 열성을 다 하였으며 정약용이 세상을 뜨자 스승의 10주기를 맞아 다시 그 집안을 방문할 정도의 예를 다 하였다.

  아버지의 제자가 이처럼 잊지 않고 집을 방문하자 그 아들 정학연은 신을 거꾸로 신고 마당으로 뛰어 내려갈 정도로 황상을 반겼다. 이제 황상은 얼굴은 검게 그을렸고 발은 부르튼 예순에 다다른 늙은이였으니 정학연이 그런 황상을 붙잡고 울지 않았으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황상의 손에는 아버지가 준 부채가 있었고, 그 아들은 거기에 시를 써서 두 집안 간에 계를 맺어 이제부터 자손 대대로 함께 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정학연이 66살, 황상이 61살 때의 일이니 정약용이 가르쳐준 부지런해라는 조언이 순박한 시골 청년의 인생을 뒤바꿔놓은 셈이었다. 그리고 그 인생은 후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면서 사세지간의 인연이 어느 정도까지 이를 수 있는지 전해주고 있다.

  세 번째 테마에서는 대부분이 좋은 글들이어서 딱히 뭐가 좋았다, 라고 꼬집기 힘들 정도였는데 굳이 언급한다면『연경(烟經)』이라는 책을 쓸 정도로 골초였던 이옥이 연기를 두고 송광사의 행문 사미에 나눈 대화가 가슴에 와 닿았고, 독특한 기행문을 써서 글이란 어떤 것인지 알려준 홍길주의 기행문이 여운에 남는다.

  먼저 이옥의 경우는 그가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을 연기(煙氣)에 빗대어 행문 사미에 불교적 사상에 대해 논쟁하는 내용이 절묘한지라 놀랐다. 그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이옥이 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이토록 정통하다는 것이 신기했었다. 물론 이덕무의 경우에도 역사, 정치, 군사, 경제, 사회, 사상 그 어느 분야에서 빠지는 법 없이 박학다식했었기에 유학자들이 성리학 이외에 대해 정통하다 해도 신기할 것은 없겠지만 이옥이 대화한 상대가 불가에 입문한 행문 사미라는 점에서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연기설과 담배 연기, 향의 연기를 비교하면서 행문 사미를 옴짝달싹 못하게 몰아치는 대목을 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1년, 도교는 5~6년만 공부해도 알 수 있지만 불교는 20년을 넘게 공부해도 그 본질을 꿰뚫기가 어렵다는 말을 할 정도로 불교가 이룩한 종교로서의 사상적 체계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적 사상에 대해서 일부분이지만 자신이 마니아적으로 매달린 담배를 통해서 해석해낸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 많이 쌓여서 될 부분은 아닐 것이다.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옥은 결국 행문 사미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지금까지 얻은 깨달음이 잘못되었다고 고백하게끔 만들 정도였으니 어찌 이옥이 대단하지 않으리오.

  게다가 홍길주는 ‘문장은 다만 책 읽는 데 있지 않다. 독서는 단지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산천운물(山川雲物)과 조수초목(鳥獸草木)의 볼거리 및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이 모두 독서다’라고 하면서 정말 그 깊이를 알기 힘들 정도의 독서관을 역설한 인물이다. 저자 역시 2년째 대학원 제자들과 홍길주의 수필을 공부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생각의 깊이와 너비에 감탄한다고 하면서 그의 생각은 언제나 신선하다고 평하고 있다.

  저자는『수여방필(睡餘放筆)』이라는 글에서 홍길주가 쓴 제목도 없는 여행기를 발췌해서 책에 실었다. 그러면서 세상에 어떻게 글쓰기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지 놀라면서 글을 읽고 안절부절 어쩌지 못하다가 원문을 정리했다고 한다. 대체 어떤 글이었기에 이토록 저자가 놀랐는지 궁금해서 들여다본바, 정말로 폐부를 찌르는 무엇인가를 전해주는 글이었다. 전체적인 내용은 홍길주 삼형제가 함께 했던 두 차례의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여행에 대한 이야기인데 성동격서(城東擊西)라는 표현이 이런 글에 어울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홍길주는 여행기를 쓰면서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문장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 같은 것 같으면서도 같지 않고,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고 글의 말미에는 여운을, 글의 중간 중간에는 파란과 복선에 대해서 설명해놓고 있다. 모두 여행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중심으로 말이다. 이처럼 아주 같다고 해도 안 되고, 같지 않다고 해도 또한 안 되는 것이야말로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라고 설명하는 과정이 여행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고 보는 이로 하여금 홍길주 역시 그런 식으로 이 여행기를 썼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정말 천재는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적절하게 알려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Ⅳ. 맺음말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천재(天才)’, ‘기인(奇人)’ 당시 지식인들은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했을까? 혹은 이런 말을 들으면서 살았을까? 아니면 이덕무처럼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라 할 만큼 겸손하면서도 사회에 저항적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평자 같은 범인이 함부로 언급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전혀 우리와 상관없는,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살았던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아님을 명심해야만 할 것이다.

  다만, 조선 후기, 그들을 수용할 포용력과 능력이 없던 사회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일반인과 다른 괴리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뿐이다. 그 당시, 파격이고 혁신이고 세상을 뒤엎을만한 혁명적인 사고방식으로 취급받으며 위험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지금 보면 얼마나 선구적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벽(癖)이라는 겉포장에 둘러싸여 특이하게 취급받고, 또 수용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자가 조선사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고, 조선사에 대해 긍정적은 커녕, 객관적으로 평가를 내리기도 힘든 상태에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삶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모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삶은 당시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 후손들의 눈에는 굉장히 진실되고 매순간 노력하고 긴장하면서 나태해지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평생 학문을 연구하고 학문을 실천하고 지식이 아닌 지성을 향해 전진했던 조선의 성리학자들. 그런 그들의 삶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는 이 책은 하나의 산수화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여유와 만족감을 주는 동시에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기풍을 뿜어내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끝으로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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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기군 1
박혁문 지음 / 늘봄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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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들은 대학교에 처음 들어가서 읽은 역사소설 중 하나였다. 얼마전 책장 정리를 하다가 먼지묻은 책들 속에 있길래 기억을 되살려 서평을 간단하게 쓰고자 한다.

먼저 팔기군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만주족의 군사-행정조직을 의미한다. 본래 만주팔기만 존재했다가 후에 몽고, 거란 등 주변 부족민들을 통합하여 팔기군을 늘려갔고 결국 십여만의 팔기군은 수십만의 명나라 대군을 격퇴하고 중원대륙을 정복하게 된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 이야기는 만주족과 관련된 이야기다. 그리고 만주족하면, 청나라를 떠올릴 수 있고 청나라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을 것이다. 바로 조-청 전쟁, 흔히들 병자호란이라고 일컫는 전쟁을 말이다. 병자호란으로 인해서 허약한 국방력을 지니고 있던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 이야기의 시공간적 배경은 바로 그 전후의 조선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주인장은 조선사를 상당히 싫어한다. 지금이야 그나마 그런 생각이 약간은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인장은 조선사를 '한국사의 이단아'라고 칭하며 싫어한다. 그만큼 조선이 차지하고 있던 국제적 위상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왕조보다도 못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절정은 조-일 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과 조-청 전쟁(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수차례 이어지는 국난 속에서도 계속되는 당쟁과 국력분열은 추악한 위정자들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시대에 무수히 많은 인재들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날리지 못한 것은 조선이 망국으로 치닫고 있음을 반증하는 현상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요, 금, 청 등이 동북방 만주 일대에서 흥기한 집단임을 이유로 이들이 우리 민족과 동일한 민족성을 지니고 있었고 알고보면 그 뿌리는 고구려, 더 나아가 고조선과 이어진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때 청 황실의 성인 '애신각라'가 마의태자를 비롯한 신라말기사나 고려사와 연관되어 주목받기까지 하였다. 이 책은 그런 시대적 상황에 부합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만주족은 고구려를 계승한 민족으로서 조선과 한족속이고 중국과 대응하기 위해서 조선과 만주족은 힘을 합쳐야만 했다, 는 식의 논지 전개가 소설 전반적으로 흐른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이 가능한 실존 인물들이다. 그리고 저자 역시 실존인물들을 극화시켜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살리면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첫장면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화친 의식을 치루는 것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전개되는데 실존인물인 마부태를 조선인으로 묘사한 것이 흥미로웠다. 즉, 조선 내에서 명나라 말기에 친 여진파가 생겨나게 됐는데 당쟁에 휩싸여 몇몇 중신들이 희생되고 그 희생된 중신의 후손이 만주족에게 투항하여 결국 병자호란때 조선에 대해 복수를 한다는 식의 이야기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이런 식의 스토리를 가진 역사 소설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용 중에는 조선의 대외정책과 대내의 혼란한 상황이 잘 드러나 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실제 이것이 역사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당히 흡입력있는 작품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다시 책을 펼쳐봤을때도 쉽사리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만주족의 역사적 귀속 문제였다. 그 당시만해도 동북공정이 국가적 문제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동북공정이 중요한 사안이 된만큼 이 소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생각한다. 만주족이 여진족의 후신이고, 여진족이 말갈족의 후신이라면 말갈족과 한국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만큼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실제 만주족은 '만주원류고'라는 책을 남겨 숙신, 부여, 읍루, 삼한, 물길, 백제, 신라, 말갈, 발해 등에 대한 기록을 남겨뒀기 때문이다. 이들이 완완부와 건주여진의 역사와 같이 실린 것은 단순히 만주 일대에 이들 국가의 흔적들이 남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는 현재 그 후손들에 의해 어디로 귀속되어지는지가 결정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로마사가 이탈리아로 귀속되고, 신성로마제국의 역사가 독일사로 귀속되고, 고구려사가 대한민국으로 귀속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 현상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그런 것들을 악용하고 있어 영토 분쟁뿐만 아니라 역사 분쟁까지도 서슴없이 일으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학술적인 부분은 약하지만 정말로 그럴법한 내용을 서술한 이 책을 한번쯤은 읽혔으면 한다. 그리고 단순히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한번쯤 곰곰히 생각해봤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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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그림자 - 멕시코 한 혁명가로부터 온 편지
마르코스 지음, 윤길순 옮김 / 삼인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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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EZLN]은 1994년 1월 1일 NAFTA 발족일날 무장봉기한 멕시코의 혁명군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조직의 부사령관인 마르코스라고 하는 사람이 세계 유수의 언론기관과 주고받은 편지와 성명서를 모아 만든 책이다. 일단 다소 엉뚱할지도 모르는 이 책에 대해서 얘기하려면 이 책을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 말해야 할 듯 싶다.

주인장은 이번에 '영상으로 보는 라틴아메리카 역사와 문화'라는 수업을 듣는다. 원래는 학점을 꽉 채워서 들으려고 이런저런 수업을 찾던 중에 후배들이 이 수업이 괜찮다는 얘기를 해줘서 수강신청을 하게 된 과목이다. 그리고 실제 3시간 수업 중 1시간은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강의하고 2시간은 라틴 아메리카에 관련된 영상을 보는 것이어서 널널했다. 중간고사나 리포트는 없었고 단지 발표 1개와 기말고사만 준비하면 되는 거였다. 기말고사는 상당히 두꺼운 책을 읽고 그 안에서 서술형으로 문제를 내는 거였지만 어차피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 걱정될 건 없었다. 문제는 발표 준비였다. 지난 학기에 하도 발표수업에 질려버려서 이번 학기에는 발표수업을 하나도 안 들으려고 고르고 골랐는데 미처 이 수업에 발표가 있다는 건 체크를 못 했던 것이다.

주제는 고고미술사학과나 혹은 역사와는 전혀 관련없는 것들이었다. 라틴아메리카의 문화와 정치, 경제상황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탱고나 삼바, 축제, 벽화작가들, 군부독재자들 뭐 이런 식이었다. 그 중에서 뭘 고를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는데 후배 하나가 사파티스타를 같이 하자고 하는 것이었다. 사파티스타? 그게 뭐야? 라고 했더니 하는 말이 혁명군인데 체 게바라 만큼이나 유명한 아이템이라고 하는 거였다. 그래서 결국 사파티스타에 대해서 조사하기로 하고 이런저런 책을 찾아봤는데 관련 논문도 생각보다 적었고 개설서격으로 나올만한 책도 없었다. 물론 없어야 정상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노란색 표지에 박힌 검정색 스키마스크를 쓴 한 인물. 이 사람이 바로 EZLN의 부사령관 마르코스였던 것이다.

EZLN이 활동하는 멕시코 동남부의 치아파스州는 멕시코에서 가장 천연자원이 풍부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난한 곳이다. 뭐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와 외세 자본이 이 곳에서 모든 천연자원을 뽑아가면서도 정작 이 곳 원주민들의 삶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 과테말라에 속해있던 이 곳은 몇몇 엘리트주의자들에 의해 멕시코로 이탈하여 복속되었고 그 이후 줄곧 수탈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곳에 사파티스타 몇몇 혁명군이 1983년에 도착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애초에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가지고 이 곳에 도착해, 위로부터의 지도와 교육을 통한 혁명을 준비하려고 했지만 정작 그들은 오랜 아즈텍-마야 문명지였던 이 곳의 사상과 정신에 감응하여 독특한 혁명사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인 마르코스는 실질적으로 이 반군의 지도자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는 이곳 마야 원주민이 아닌 까닭에 사령관이 아닌 부사령관직에 있다. 그리고 전체적인 구성은 CCRI-CG라고 하는 군사조직이 있고 그 대리인으로서 마르코스가 활동하는 셈이다. 최근에는 JBG라는 행정조직도 새롭게 꾸려 각 자치도시 운영에 있어서 군사적인 성격을 배제하는 진일보를 겪기도 했다. 복면을 쓴 그의 모습은 탈냉전 시대 자본주의의 세계적 지배에 도전하는 반란의 상징이 되었고,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전략 덕분에 포스트모던 전사로서의 이미지도 얻고 있다.

그의 이름인 마르코스는 군사 검문소에서 죽임을 당한 한 친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그는 멕시코 사회가 가면을 벗으면 자신도 가면을 벗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멕시코 사회가 가면을 벗으면 사람들은 그 위선과 실체를 알게 되어 엄청나게 큰 파장이 일어날 것이지만 본인이 가면을 벗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냉소적으로 멕시코 사회를 비웃기도 한다. 실제 그들이 쓰는 스키마스크는 우리 모두가 동일하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검은색인 이유는 불씨를 안고 살아가며 남을 위해 희생하는 숯검정색을 의미한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라는 모토 아래 활동하는 혁명군의 자서전 격이 바로 이 책인 셈이다.

그는 멕시코 중산층 가정 출신의 백인으로, 프랑스에 유학해 파리대학교를 졸업한 뒤 멕시코 국립자치대학(UNAM)에서 철학을 강의하던 중 원주민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혁명을 일으킨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렇기에 그는 원주민 공동체를 지도하는 사령관직을 거부했다. 그의 학식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 책에 나와있는 그의 편지와 성명서들은 하나같이 세련되고 우아하다. 혁명군의 문체가 이렇게 멋있을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실제로 세계 유수의 언론은 그를 두고 최고의 문학가라고 칭할 정도로 그의 글솜씨와 학식은 대단하다. 혁명군 지도자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내용을 읽어보면 EZLN과 마르코스는 하나같이 멕시코 정부의 진실된 모습과 양측간의 평화로운 협상을 원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절대 악에 굴하지 않을 것이며 정의를 실현해나갈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실제 이들의 요구조건을 보면 국가를 전복시키거나 국가 최고 지도자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들은 없다. 단지, 민중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토지개혁이나 원주민, 여성, 소수민족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 뿐이다. 이런 모든 부분들 때문에 그들을 포스트모더니즘을 실현한 최초의 혁명군이라고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멕시코의 상황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정말로 대단한 사건들이 터지고 있다는 것 또한. 이것은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을 연구한 연구서적도 아니요, 그에 대한 개설서도 아니다. 다만 그 혁명군을 이끌고 있는 부사령관이라는 사람이 조직을 대표하여 전세계에 호소했던 내용을 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호소력짙은 글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하게끔 만든다. 비록 그 책을 읽는 사람이 멕시코에 전혀 상관이 없는 한국의 대학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조용한 분노의 그림자, 우리의 길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쌀 것입니다'

마르코스가 '원주민과 캄페시노의 주 평의회, 멕시코 민중, 전세계 민중과 정부, 국내 및 전세계 언론에게'라는 제목으로 1994년 발표한 성명서에 나온 말이다. 이만큼 사파티사트민족해방군을 잘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싶어서 이 말을 끝으로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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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이산의 책 17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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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옹정제(雍正帝)는 청(淸) 왕조의 5대 군주로서 성명은 ‘애신각라 윤진(愛新覺羅 胤縝)’이고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제(憲帝)’이다. 열정적으로 대외정복 사업을 수행했던 강희제의 넷째 아들로 황위 계승권에서 벗어나 있었던 그였지만 정말 뜻하지 않게 강희제의 뒤를 이어 청을 다스리게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옹정제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양심적인 독재군주'라고 칭하면서 그가 대단한 위임임을 역설하고자 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항상 청나라의 황금시대로 여겨지는 강희제부터 건륭제까지 이어지는 약 150여년간의 치세에 포함되어 설명되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강희제와 건륭제 사이에 즉위했던 군주였기에 그랬다기보다는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자체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당연히 이런 학풍 속에서 옹정제는 두 군주들 사이에서 빛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런 옹정제를 저자는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내어 본래의 빛을 되찾아주는 작업을 한 셈이었다.

  사실 평자 역시 옹정제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리포트를 낼 기회를 맞이해서 읽어보고 관련된 자료를 조금 찾아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저자가 옹정제를 두고 세계에서 제일 가는 독재군주이자 정치가였다고 호언장담한 것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다. 그만큼 옹정제에 대해서 평자가 아는 것이 전무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중의 하나겠지만 그보다는 옹정제에 대한 기존과 다른 시각에서 쓰여진 이 책이 옹정제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전해줌으로써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강희제와 건륭제를 정복형 군주에 비한다면 옹정제는 철저한 내정지향형, 즉 수성형(遂成形) 군주라고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강희제 시절에는 내부적으로 ‘오삼계의 난’이라고 하는 청 왕조의 생사를 결정지을 정도의 대규모 전란이 있었으며 건륭제 시절에는 준가르부로 대표되는 서부 지역을 평정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 작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전쟁 하나만으로는 그들을 정복형 군주라고 할 수는 없으니 두 군주 치세때에는 청 왕조가 군사력을 이용해 어려차례의 활발한 대외 정복이 이뤄졌던 때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옹정제 치세에는 이렇다 할 대규모 전란이 없었다.

  우리가 흔히 옹정제를 잊고 강희제와 건륭제만을 논하는 이유는 또 하나, 옹정제의 재위 기간이 다른 두 군주에 비해 지나치게 짧았던 점도 한몫 담당한다고 본다. 거기에다가 역사에 화려하게 기록될만한 대외 정복 기사가 지나치게 적은 것도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마지막이 강희제와 건륭제만을 논하고 마는 알 수 없는 고정관념일 것이다.

  얼핏 들으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흔히 시작과 끝을 중요시 여기는 풍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옹정제의 치세는 청 왕조 초기, 청 왕조가 기틀을 확실히 잡아가던 그 시기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었고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저자 역시 옹정제가 북경에 입성한 이후 3대째 황제가 된 인물로서 한 왕조의 흥망성쇠는 3대쯤에 결정난다고 보고 있으니 옹정제의 치세가 청 왕조에 있어서 일종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런 몇가지 생각들을 가진채 간단하게 서평을 남기고자 한다.

Ⅱ. 책의 구성과 비평

  이 책은 중국의 거의 모든 분야와 서아시아에 걸쳐 방대한 연구업적을 남기는 등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로 활약하던 저자의 연구 서적 중 하나이다. 저자는 특히「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로 불리는 13년간 옹정제가 지방 관아와 주고 받았던 비밀편지들을 주 사료로 채택하여 옹정제의 치세를 평가하고 있다. 

  옹정제는 종래 중국의 어떤 제왕도 해내지 못하였던 훌륭한 정치를 행하고 일찍이 중국 역사가 경험하지 못하였던 공정한 사회를 건설해서 만민이 안심하고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군주였었다. 그것이야말로 하늘이 청조의 군주에게 특별히 내린 임무이며 그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청조와 만주인은 중국인한테는 물론이고 하늘의 칭찬을 받게 될 것이며 그 일가는 자손 만대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말이다. 이것이 옹정제의 확고한 신념이었고 거의 종교적인 신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이 신념을 당시의 만주인 특유의 성실함과 강한 인내심으로 실행에 옮겼는데 그 증거가 바로 앞서 언급한「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였던 셈이다.

  기존과는 다른 시각으로 이 책을 서술함으로써 비록 교양서적이지만 옹정제에 대해서 굉장히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평가한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희제로부터 건륭제까지의 치세가 왜 청 왕조 최고의 태평성대였는지 알기 위해서는 옹정제에 대해서 알아야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이 책이 제공하는 정보는 실도 대단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의 부록을 제외한 본문의 목차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머리에
1장 고뇌하는 노황제
2장 개가 되고 돼지가 되라
3장 그리스도에 대한 맹세
4장 천명을 받들어
5장 총독 삼인방
6장 충의는 민족을 초월한다
7장 독재정치의 한계
 
        1. 남들과는 다른 타고난 처세술

  개인적으로 처세술은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이 처세술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옹정제 역시 처세술에 있어서 훌륭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는 분명히 강희제의 4번째 황자, 사아거로서 황위 계승권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은지 오래였다.

  후술하겠지만 강희제가 황태자로 지목한 이아거의 말썽으로 인해 청 황실은 많은 내부 문제를 겪은 바 있다. 옹정제가 젊은 나이에 등극하지 못하고 한창때에 등극한 것만 봐도 애초에 강희제가 사아거인 그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님을 잘 알 수가 있다. 이와 더불어 그 와중에 옹정제는 자신의 처신을 잘 했고 그런 다분히 의도적이었던 모습이 결코 우연히 다음 제위를 넘겨 받은 것이 아님을 드러내보였던 것이다.

  저자도 밝히고 있지만 옹정제는 사아거의 신분으로 태자인 이아거의 행동을 보면서 어느정도 제위에 대한 욕심이 생겨났던 것 같다. 물론 다른 황자들도 다 그랬겠지만 사아거는 유독 다른 야심찬 황자들과 달리 정치권과 결탁하지 않았다. 이 말은 곧 옹정제가 당시 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세력들과 모의해 다음 제위에 대한 욕심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것은 대단히 효과적인 고도의 심리전인 동시에 최고의 처세술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렇게까지는 평하지 않고 단지 옹정제가 사아거로서 학문에 정진하고 권력에 욕심이 없음을 밝혔고 그로 인해 강희제의 눈에 들어 황제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분명 당시 옹정제는 제위를 넘볼 수 있는 계승권상에 있었으며 그럴만한 능력과 야욕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오히려 옹정제는 당시 붕당을 이루어 서로 권력을 다투는 정치판을 보고 일종의 회의감과 붕당의 부정함, 정치판의 양면성을 꿰뚫어보기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제위를 꿈꾸는 그로 하여금 더욱 학문에 정진해 더 영민한 군주가 되게끔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실제 그가 즉위하여 행한 일련의 독재정치의 수단, 즉 112책 분량에 달하는「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와 함께 군기처(軍機處)의 설치는 그러한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옹정제는 준가리아 토벌을 계기로 신속한 용병과 기밀보존을 목적으로 1729년 궁내에 임시로 군수방(軍需房)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1732년에 판리군기처(辦理軍機處)로 개칭하고 독립적인 상설관청으로 개설하였다. 처음에는 이 곳에서 군사상의 사무만을 보았으나, 점차 황제의 자문에 응하고 조칙을 작성하고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중요사항까지 처리하여 중요한 국무 전반에 걸쳐 심의 결정하는 국가 최고기관이 되었던 것이 바로 군기처였다.

   ‘하늘이 모르는 일도 황제는 안다’라는 말이 떠돌았을 정도로 공포 정치가 이뤄졌고 옹정제가 죽자 모든 백성이 환호했다는 것만 봐도 그의 독재정치는 상당히 엄격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일련의 옹정제의 정치행보는 황제가 되자 그제서야 생각해낸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늘로부터 절대권력을 이임받아 만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내겠다는 야심은 그가 이미 제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가슴 속에 항상 남아있었다고 봐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그만의 처세술이 돋보이는 것이 아닐까 한다.

        2. 꼼꼼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세심한 성격

  저자는 옹정제가 성격이 내성적이고 유약하며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하고 있다. 솔직히 청 왕조같은 대제국의 대외정책은 그 지도자의 성격이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했을 때 앞서 봤듯이 옹정제는 강건하고 진취적인 기상보다는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고 확실하며 꼼꼼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의 그런 성격은 앞으로 서술할 그의 정치 스타일과 그의 치세 중에 있었던 몇가지 일화를 보면 잘 알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저자가 서술하기를 만주족은 대륙을 지배하면서 한화(漢化)되어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다고 하면서 가족 제도나 아주 근본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러지 못 했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독재 군주로서의 황제는 가족이라는 사사로운 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선 왕조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부득이하게 형제들을 내친 옹정제를 봤을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독재 군주로서 그는 항상 만인의 위에 당당하게 서야만 했으나 그의 유약한 성격이 이런 점에 있어서 어느정도 약점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고, 옹정제는 스스로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런 부분이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는 그 성격으로 인해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얻었으며 청 왕조의 정치체제를 공고히 다져놓았다. 이 말은 곧 그가 ‘청 왕조 제 2의 건국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는 뜻이 될 것이다.

  사실 만주족은 그 수가 수백만에 불과한 군대식 사회조직을 갖춘 기병이 중심인 군단을 운용하던 동북방의 소수민족에 불과했다. 그 이전에 있었던 몇몇 정복 왕조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비슷한 실례로 만주족과 비슷한 배경의 몽골족은 유라시아를 정복하였고 거대한 대륙을 본국인 대원 울루스와 4한국으로 분할하여 다스렸지만 그 치세는 채 100년을 제대로 넘기지 못 했다. 하지만 청 왕조는 오늘날 중국의 계승선상에 존재했던 마지막 왕조로서 당시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라고도 일컬어지던 나라였었다. 원 왕조보다 그 영토는 적을지 몰라도 중국사에 끼친 영향은 그보다 더 했을 것이다. 왜 이렇게 극단적인 차이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청 왕조의 경우는 옹정제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청 왕조는 중국사의 여러 왕조들 가운데 평균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으며 또한 단 한명의 무식한 군주가 등장하지 않았고, 독살이나 내분으로 비명횡사에 간 군주는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청 왕조가 멸망한 이유는 원 왕조가 그러했듯이, 한족의 반란때문이 아니라 서양 세력의 침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대목인데 당시 청 왕조의 지배를 받던 모든 백성들은 청 왕조를 정통성이 있는 명 왕조의 계승국가로 여겼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면에는 옹정제의 치세가 아주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기실 강희제 치세에만 해도 청 왕조는 거대한 영토에 걸맞는 제국적 시스템이 갖춰지지 못 했었다. 역사에는 가정이란 것이 없지만 그런 상황에서 옹정제가 아닌 다른 정복형 군주가 즉위했다면? 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분명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다음에 즉위할 건륭제가 이룬 업적을 본다면 역시 그에 앞선 옹정제의 치세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평자가 보기에는 옹정제의 이런 성격에서 기인한 그만의 정치 스타일이 청 왕조를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3. 뚜렷한 통치 철학과 뛰어난 정치감각

  옹정제에 대해 논할 때 이 부분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중국사에서 가장 강대했던 왕조야말로 바로 청 왕조라고 생각하는데 그 강성함 이면에는 역시 옹정제가 잘 닦아놓은 정치 체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옹정제는 중앙 관제상 종래의 내각은 형식을 중히 여겨 정무가 막펴 잘 처리되지 못하는 단점을 안고 있음을 알고 별도로 황제 측근의 군기처대신(軍機處大臣)을 두고, 군기처가 내각을 대신하여 6부를 지배하게 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것으로 중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정치제도라고 생각한다. 또한 옹정제가 이런 정치적인 개혁을 한 이면에는 전통적인 농경민족인 한족(漢族)이 아니라 탄력적인 사고를 지닌 반농반목의 만주족(滿洲族)이었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본다. 자고로 무슨 일에 있어서나 경직된 사고가 아닌 탄력적인 사고를 지닌 자야말로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지방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도 크게 신경을 써서, 지방대관에서 주접(奏摺)이라는 친전장(親展狀)에 의해 정치 실정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황제 스스로 뜯어 보고 주필(朱筆)로 주비(朱批:비평)를 써서 발신인에게 반송하여 지시, 훈계를 내렸는데 이것들 중 일부를 모아 편찬하고 또 이 책의 주요 사료로 채택된 것이 바로 앞서 여러번 언급했던「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다.

  이것 역시 앞선 왕조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는데 아마 저자도 옹정제를 논할 때 이 부분을 가장 높게 평가하지 않았을까 싶다. 옹정제는 즉위했을 때부터 청 왕조가 들어서기 전부터 대륙에 만연했던 전통적이고 비효율적인 국가 체제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그것을 자신이 바로 잡으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행한 정치적인 개혁은 하나같이 대단히 훌륭하고 대단히 효과적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특히 지방대관들과 나눈 주접이라는 서신은 옹정제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잘 알려주는 것이다. 청 왕조는 몽골족의 원 왕조와 달리 대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려고 하였가. 그 결과, 철저한 계급주의와 원리주의, 무력 통치를 실행했던 원 왕조와 달리 지배자가 직접 백성을 사랑하고 위할 줄 아는 너그러움과 아량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결국 청 왕조의 치세하의 백성들은 모두 천자의 덕을 칭송하고 자신이 청이라고 하는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옹정제 치세하의 독재 정치는 백성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 청 왕조는 수백년의 시간을 더 유지할 수 있었음도 잊지 말아야만 할 것이다.

  이처럼 여러 통로를 통해 얻은 정보들은 황제에게 접수되어 하나같이 주옥같은 정책 실행에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청 왕조는 그 기반을 공고히 하였으니 옹정제가 행한 정책들이야말로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부분일 것이다.

  또 주목할 것이 당시 지방관리의 봉급이 지나치게 적었으므로 그들에게 양렴전(養廉錢)을 지급한 것인데 말 그대로 ‘청렴 결백함을 기르는 돈’이라는 뜻이며 이는 오늘날 보아도 대단히 합리적이고 뛰어난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과는 다른 일인독재체제하의 봉건국가에서 관리라는 것은 명분과 실익을 동시에 가져다 주는 돈방석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탐관오리로 인해서 수탈받는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옹정제는 당시 어느 정도 묵인되었던 관리들의 생존을 위한 수탈을(물론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법적으로 규제하고 대신 충분히 살만한 생계비를 지급하는 쪽을 택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것은 물론이요, 관리들과 중앙 정부간에도 이득이 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밖에 지방의 천민들을 헤아려 양민으로 만들기도 했으나 이것은 그가 행한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될 듯 싶다. 그는 청 왕조를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에서 더 나아가 백성들이 잘 사난 왕조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 같다.

  이렇게 간단한 몇가지 사례만 살펴봐도 잘 알 수 있듯이 옹정제는 정치력에 있어서 대단히 탄력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이는 그가 그만큼 뚜렷한 통치 철학을 갖고 있었고 그에 따른 뛰어난 정치감각을 갖고 있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학습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이런 것들이 갖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옹정제 당시 총독 삼인방으로 불리던 톈원징, 리웨이, 오르타이 등은 모두 앞에 봤던 옹정제의 정책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사람들인데 옹정제같은 군주 밑에서 그와 같은 정책을 무리없이 수행한 것을 보면 이들의 능력 또한 대단했던 것 같다.

  이처럼 옹정제가 갖고 있던 정치적 능력은 저자가 책에서 표현한 이상이라고 평자는 본다. 명군(名君)과 명신(名臣)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봤을 때 신하들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에 걸맞는 임무를 주어 수행케해 결과물을 얻어내는 것이야말로 옹정제가 보여준, 모든 군주들이 가져야할 정치적 능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4. 유순한 성격과 다른 무서운 결단력

  아무리 옹정제의 성격이 유순하고 부드럽다고는 하나 그런 성인적인 면모 못지 않게 군주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결단력과 위엄, 소위 카리스마일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옹정제는 단지 성격 탓에 아버지 강희제, 아들 건륭제와 달랐을 뿐이지 그가 위엄이나 결단력이 없던 인물, 즉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고 판단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수누 일족과 관련된 기독교 문제도 슬기롭고 위엄있게 잘 해결했으며 그 다음으로 윈난, 구이저우, 광시의 산간에 사는 토착민인 먀오족이 토사(土司:토착 호족) 밑에서 반독립적인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개혁했다. 즉, 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인 유관(流官)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는, 개토귀류(開土歸流)의 정책을 펴서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영토를 확실하게 내지화(內地化)했던 것이다.

  당시 티벳이나 먀오족, 통족 등은 중원 밖의 영역이라 하여 간접적인 통치만을 했었는데 명대부터 그들에게 직접적인 통치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옹정제 치세때에 이르러 대륙 남부에 널리 거주하는 먀오족을 본격적으로 직접 다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 정책에 대해 반란의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워낙 철저하게 시행된 정책에 그들은 속소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듯이 옹정제는 어떤 일에 있어서 한번 결심한 바는 곧바로 실행하였으며, 성급하게 실행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준비해서 한번에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는 저자가 언급하듯이 그가 신하들에게 황제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호령하는 것을 떠나서 그야말로 진정한 군왕의 면모를 훌륭히 갖춘 지도자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평자는 앞서 옹정제의 대외 정책에 대해서 강희제, 건륭제와 달리 소극적이고 크게 내세울만한 업적이 없었다고 한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개념이지, 결코 무시할 수가 없으니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개토귀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대외적으로 티벳의 동란을 평정, 지배체제를 확립하면서 서북 지방에서 강성하던 준가르부를 공격해 격파한 일이다. 옹정제의 치세 중후반에 행해진 이 대외 정벌은 그동안 청 왕조를 다스려온 옹정제의 의지이자 당당함의 표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오정제는 그 치세가 13년으로 아버지인 강희제(61년), 아들인 건륭제(63년)에 비해 극히 짧았지만 중국사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리고 그가 늦은 나이에 즉위했던 점을 상기한다면 그렇게 짧은 치세라고도 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대신 그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지 못한 일들을 해냈다. 바로 청 왕조를 내부적으로 다듬고 고쳐서 기본 틀을 만들어냈으니 그것이야말로 옹정제가 칭송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Ⅲ. 맺음말

  중국사상 가장 강대했던 왕조이자 동시대 전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하고 강대했던 왕조, 그 왕조의 기틀을 다진 옹정제를 보는 저자의 시각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왜 지금까지 이런 시각의 책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이런 인물에 대해 간과하고 있던 평자 본인에 대한 부끄러움도 들었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옹정제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을 뒤엎을 정도로 참신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가 그가 마지막에 강조했던 옹정제 독재정치의 한계에서 인간 옹정제를 뒤돌아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천하의 모든 일을 본인이 직접 관장하고 주재하느라고 개인의 영달과 황제로서의 부귀영화는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 한 사람, 거기다가 독재군주로서 포기하기를 강요받아야만 했던 사생활을 통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은 옹정제를 인간으로서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죽으면서 그가 13년간 이뤄놓은 통치체제가 옹정제 치세만큼이나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던 점 또한 주목할만 하다. 왜 옹정제는 하루에 20~30통, 많을 때는 50~60통의 주접을 읽어야만 했을까? 세상만사를 혼자 다 처리할 수는 없을뿐더러 그 자리가 황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정제가 그렇게 했던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가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 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떤 일을 맡겨도 마음에 들지 않을 바에야 자신이 직접 하자는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자는 앞에서 총독 삼인방으로 불리던 옹정제 치세의 관리들이야말로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그가 청 왕조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독재자가 죽은 이후 그만의 독재정치는 다시 재현되지 못 했다. 철저히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었던 것이 아니라 특출난 개인적 능력에 의해 유지되던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 형태는 남았어도 다시 그처럼 철저하게 운영되지는 못 했던 것이다. 즉, 빛 좋은 개살구 격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래서 더더욱 옹정제라는 인물이 대단하게 평가받아 마땅한 것이고, 그의 치세가 청 왕조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올바른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한국사에서 비교해 본다면 아버지 고국원왕때의 엄청난 국난을 이겨내고 왕위에 올라 조카인 광개토태왕이 대제국을 이룩할 수 있게끔 토대를 마련한 소수림왕과 옹정제를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역시 고국원왕때의 끔찍한 국난이나 광개토태왕 시절의 위대한 대외정복 사업에 대해서는 언급하면서도 그 사이 즉위했던 소수림왕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소수림왕이 없었던들, 우리가 오늘날 아는 자랑스런 고구려사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이만 글을 마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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