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그림자 - 멕시코 한 혁명가로부터 온 편지
마르코스 지음, 윤길순 옮김 / 삼인 / 1999년 3월
평점 :
품절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EZLN]은 1994년 1월 1일 NAFTA 발족일날 무장봉기한 멕시코의 혁명군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조직의 부사령관인 마르코스라고 하는 사람이 세계 유수의 언론기관과 주고받은 편지와 성명서를 모아 만든 책이다. 일단 다소 엉뚱할지도 모르는 이 책에 대해서 얘기하려면 이 책을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 말해야 할 듯 싶다.

주인장은 이번에 '영상으로 보는 라틴아메리카 역사와 문화'라는 수업을 듣는다. 원래는 학점을 꽉 채워서 들으려고 이런저런 수업을 찾던 중에 후배들이 이 수업이 괜찮다는 얘기를 해줘서 수강신청을 하게 된 과목이다. 그리고 실제 3시간 수업 중 1시간은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강의하고 2시간은 라틴 아메리카에 관련된 영상을 보는 것이어서 널널했다. 중간고사나 리포트는 없었고 단지 발표 1개와 기말고사만 준비하면 되는 거였다. 기말고사는 상당히 두꺼운 책을 읽고 그 안에서 서술형으로 문제를 내는 거였지만 어차피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 걱정될 건 없었다. 문제는 발표 준비였다. 지난 학기에 하도 발표수업에 질려버려서 이번 학기에는 발표수업을 하나도 안 들으려고 고르고 골랐는데 미처 이 수업에 발표가 있다는 건 체크를 못 했던 것이다.

주제는 고고미술사학과나 혹은 역사와는 전혀 관련없는 것들이었다. 라틴아메리카의 문화와 정치, 경제상황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탱고나 삼바, 축제, 벽화작가들, 군부독재자들 뭐 이런 식이었다. 그 중에서 뭘 고를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는데 후배 하나가 사파티스타를 같이 하자고 하는 것이었다. 사파티스타? 그게 뭐야? 라고 했더니 하는 말이 혁명군인데 체 게바라 만큼이나 유명한 아이템이라고 하는 거였다. 그래서 결국 사파티스타에 대해서 조사하기로 하고 이런저런 책을 찾아봤는데 관련 논문도 생각보다 적었고 개설서격으로 나올만한 책도 없었다. 물론 없어야 정상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노란색 표지에 박힌 검정색 스키마스크를 쓴 한 인물. 이 사람이 바로 EZLN의 부사령관 마르코스였던 것이다.

EZLN이 활동하는 멕시코 동남부의 치아파스州는 멕시코에서 가장 천연자원이 풍부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난한 곳이다. 뭐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와 외세 자본이 이 곳에서 모든 천연자원을 뽑아가면서도 정작 이 곳 원주민들의 삶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 과테말라에 속해있던 이 곳은 몇몇 엘리트주의자들에 의해 멕시코로 이탈하여 복속되었고 그 이후 줄곧 수탈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곳에 사파티스타 몇몇 혁명군이 1983년에 도착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애초에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가지고 이 곳에 도착해, 위로부터의 지도와 교육을 통한 혁명을 준비하려고 했지만 정작 그들은 오랜 아즈텍-마야 문명지였던 이 곳의 사상과 정신에 감응하여 독특한 혁명사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인 마르코스는 실질적으로 이 반군의 지도자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는 이곳 마야 원주민이 아닌 까닭에 사령관이 아닌 부사령관직에 있다. 그리고 전체적인 구성은 CCRI-CG라고 하는 군사조직이 있고 그 대리인으로서 마르코스가 활동하는 셈이다. 최근에는 JBG라는 행정조직도 새롭게 꾸려 각 자치도시 운영에 있어서 군사적인 성격을 배제하는 진일보를 겪기도 했다. 복면을 쓴 그의 모습은 탈냉전 시대 자본주의의 세계적 지배에 도전하는 반란의 상징이 되었고,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전략 덕분에 포스트모던 전사로서의 이미지도 얻고 있다.

그의 이름인 마르코스는 군사 검문소에서 죽임을 당한 한 친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그는 멕시코 사회가 가면을 벗으면 자신도 가면을 벗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멕시코 사회가 가면을 벗으면 사람들은 그 위선과 실체를 알게 되어 엄청나게 큰 파장이 일어날 것이지만 본인이 가면을 벗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냉소적으로 멕시코 사회를 비웃기도 한다. 실제 그들이 쓰는 스키마스크는 우리 모두가 동일하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검은색인 이유는 불씨를 안고 살아가며 남을 위해 희생하는 숯검정색을 의미한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라는 모토 아래 활동하는 혁명군의 자서전 격이 바로 이 책인 셈이다.

그는 멕시코 중산층 가정 출신의 백인으로, 프랑스에 유학해 파리대학교를 졸업한 뒤 멕시코 국립자치대학(UNAM)에서 철학을 강의하던 중 원주민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혁명을 일으킨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렇기에 그는 원주민 공동체를 지도하는 사령관직을 거부했다. 그의 학식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 책에 나와있는 그의 편지와 성명서들은 하나같이 세련되고 우아하다. 혁명군의 문체가 이렇게 멋있을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실제로 세계 유수의 언론은 그를 두고 최고의 문학가라고 칭할 정도로 그의 글솜씨와 학식은 대단하다. 혁명군 지도자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내용을 읽어보면 EZLN과 마르코스는 하나같이 멕시코 정부의 진실된 모습과 양측간의 평화로운 협상을 원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절대 악에 굴하지 않을 것이며 정의를 실현해나갈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실제 이들의 요구조건을 보면 국가를 전복시키거나 국가 최고 지도자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들은 없다. 단지, 민중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토지개혁이나 원주민, 여성, 소수민족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 뿐이다. 이런 모든 부분들 때문에 그들을 포스트모더니즘을 실현한 최초의 혁명군이라고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멕시코의 상황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정말로 대단한 사건들이 터지고 있다는 것 또한. 이것은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을 연구한 연구서적도 아니요, 그에 대한 개설서도 아니다. 다만 그 혁명군을 이끌고 있는 부사령관이라는 사람이 조직을 대표하여 전세계에 호소했던 내용을 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호소력짙은 글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하게끔 만든다. 비록 그 책을 읽는 사람이 멕시코에 전혀 상관이 없는 한국의 대학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조용한 분노의 그림자, 우리의 길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쌀 것입니다'

마르코스가 '원주민과 캄페시노의 주 평의회, 멕시코 민중, 전세계 민중과 정부, 국내 및 전세계 언론에게'라는 제목으로 1994년 발표한 성명서에 나온 말이다. 이만큼 사파티사트민족해방군을 잘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싶어서 이 말을 끝으로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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