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 이산의 책 17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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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옹정제(雍正帝)는 청(淸) 왕조의 5대 군주로서 성명은 ‘애신각라 윤진(愛新覺羅 胤縝)’이고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제(憲帝)’이다. 열정적으로 대외정복 사업을 수행했던 강희제의 넷째 아들로 황위 계승권에서 벗어나 있었던 그였지만 정말 뜻하지 않게 강희제의 뒤를 이어 청을 다스리게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옹정제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양심적인 독재군주'라고 칭하면서 그가 대단한 위임임을 역설하고자 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항상 청나라의 황금시대로 여겨지는 강희제부터 건륭제까지 이어지는 약 150여년간의 치세에 포함되어 설명되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강희제와 건륭제 사이에 즉위했던 군주였기에 그랬다기보다는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자체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당연히 이런 학풍 속에서 옹정제는 두 군주들 사이에서 빛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런 옹정제를 저자는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내어 본래의 빛을 되찾아주는 작업을 한 셈이었다.

  사실 평자 역시 옹정제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리포트를 낼 기회를 맞이해서 읽어보고 관련된 자료를 조금 찾아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저자가 옹정제를 두고 세계에서 제일 가는 독재군주이자 정치가였다고 호언장담한 것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다. 그만큼 옹정제에 대해서 평자가 아는 것이 전무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중의 하나겠지만 그보다는 옹정제에 대한 기존과 다른 시각에서 쓰여진 이 책이 옹정제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전해줌으로써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강희제와 건륭제를 정복형 군주에 비한다면 옹정제는 철저한 내정지향형, 즉 수성형(遂成形) 군주라고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강희제 시절에는 내부적으로 ‘오삼계의 난’이라고 하는 청 왕조의 생사를 결정지을 정도의 대규모 전란이 있었으며 건륭제 시절에는 준가르부로 대표되는 서부 지역을 평정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 작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전쟁 하나만으로는 그들을 정복형 군주라고 할 수는 없으니 두 군주 치세때에는 청 왕조가 군사력을 이용해 어려차례의 활발한 대외 정복이 이뤄졌던 때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옹정제 치세에는 이렇다 할 대규모 전란이 없었다.

  우리가 흔히 옹정제를 잊고 강희제와 건륭제만을 논하는 이유는 또 하나, 옹정제의 재위 기간이 다른 두 군주에 비해 지나치게 짧았던 점도 한몫 담당한다고 본다. 거기에다가 역사에 화려하게 기록될만한 대외 정복 기사가 지나치게 적은 것도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마지막이 강희제와 건륭제만을 논하고 마는 알 수 없는 고정관념일 것이다.

  얼핏 들으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흔히 시작과 끝을 중요시 여기는 풍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옹정제의 치세는 청 왕조 초기, 청 왕조가 기틀을 확실히 잡아가던 그 시기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었고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저자 역시 옹정제가 북경에 입성한 이후 3대째 황제가 된 인물로서 한 왕조의 흥망성쇠는 3대쯤에 결정난다고 보고 있으니 옹정제의 치세가 청 왕조에 있어서 일종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런 몇가지 생각들을 가진채 간단하게 서평을 남기고자 한다.

Ⅱ. 책의 구성과 비평

  이 책은 중국의 거의 모든 분야와 서아시아에 걸쳐 방대한 연구업적을 남기는 등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로 활약하던 저자의 연구 서적 중 하나이다. 저자는 특히「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로 불리는 13년간 옹정제가 지방 관아와 주고 받았던 비밀편지들을 주 사료로 채택하여 옹정제의 치세를 평가하고 있다. 

  옹정제는 종래 중국의 어떤 제왕도 해내지 못하였던 훌륭한 정치를 행하고 일찍이 중국 역사가 경험하지 못하였던 공정한 사회를 건설해서 만민이 안심하고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군주였었다. 그것이야말로 하늘이 청조의 군주에게 특별히 내린 임무이며 그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청조와 만주인은 중국인한테는 물론이고 하늘의 칭찬을 받게 될 것이며 그 일가는 자손 만대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말이다. 이것이 옹정제의 확고한 신념이었고 거의 종교적인 신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이 신념을 당시의 만주인 특유의 성실함과 강한 인내심으로 실행에 옮겼는데 그 증거가 바로 앞서 언급한「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였던 셈이다.

  기존과는 다른 시각으로 이 책을 서술함으로써 비록 교양서적이지만 옹정제에 대해서 굉장히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평가한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희제로부터 건륭제까지의 치세가 왜 청 왕조 최고의 태평성대였는지 알기 위해서는 옹정제에 대해서 알아야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이 책이 제공하는 정보는 실도 대단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의 부록을 제외한 본문의 목차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머리에
1장 고뇌하는 노황제
2장 개가 되고 돼지가 되라
3장 그리스도에 대한 맹세
4장 천명을 받들어
5장 총독 삼인방
6장 충의는 민족을 초월한다
7장 독재정치의 한계
 
        1. 남들과는 다른 타고난 처세술

  개인적으로 처세술은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이 처세술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옹정제 역시 처세술에 있어서 훌륭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는 분명히 강희제의 4번째 황자, 사아거로서 황위 계승권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은지 오래였다.

  후술하겠지만 강희제가 황태자로 지목한 이아거의 말썽으로 인해 청 황실은 많은 내부 문제를 겪은 바 있다. 옹정제가 젊은 나이에 등극하지 못하고 한창때에 등극한 것만 봐도 애초에 강희제가 사아거인 그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님을 잘 알 수가 있다. 이와 더불어 그 와중에 옹정제는 자신의 처신을 잘 했고 그런 다분히 의도적이었던 모습이 결코 우연히 다음 제위를 넘겨 받은 것이 아님을 드러내보였던 것이다.

  저자도 밝히고 있지만 옹정제는 사아거의 신분으로 태자인 이아거의 행동을 보면서 어느정도 제위에 대한 욕심이 생겨났던 것 같다. 물론 다른 황자들도 다 그랬겠지만 사아거는 유독 다른 야심찬 황자들과 달리 정치권과 결탁하지 않았다. 이 말은 곧 옹정제가 당시 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세력들과 모의해 다음 제위에 대한 욕심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것은 대단히 효과적인 고도의 심리전인 동시에 최고의 처세술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렇게까지는 평하지 않고 단지 옹정제가 사아거로서 학문에 정진하고 권력에 욕심이 없음을 밝혔고 그로 인해 강희제의 눈에 들어 황제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분명 당시 옹정제는 제위를 넘볼 수 있는 계승권상에 있었으며 그럴만한 능력과 야욕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오히려 옹정제는 당시 붕당을 이루어 서로 권력을 다투는 정치판을 보고 일종의 회의감과 붕당의 부정함, 정치판의 양면성을 꿰뚫어보기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제위를 꿈꾸는 그로 하여금 더욱 학문에 정진해 더 영민한 군주가 되게끔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실제 그가 즉위하여 행한 일련의 독재정치의 수단, 즉 112책 분량에 달하는「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와 함께 군기처(軍機處)의 설치는 그러한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옹정제는 준가리아 토벌을 계기로 신속한 용병과 기밀보존을 목적으로 1729년 궁내에 임시로 군수방(軍需房)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1732년에 판리군기처(辦理軍機處)로 개칭하고 독립적인 상설관청으로 개설하였다. 처음에는 이 곳에서 군사상의 사무만을 보았으나, 점차 황제의 자문에 응하고 조칙을 작성하고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중요사항까지 처리하여 중요한 국무 전반에 걸쳐 심의 결정하는 국가 최고기관이 되었던 것이 바로 군기처였다.

   ‘하늘이 모르는 일도 황제는 안다’라는 말이 떠돌았을 정도로 공포 정치가 이뤄졌고 옹정제가 죽자 모든 백성이 환호했다는 것만 봐도 그의 독재정치는 상당히 엄격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일련의 옹정제의 정치행보는 황제가 되자 그제서야 생각해낸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늘로부터 절대권력을 이임받아 만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내겠다는 야심은 그가 이미 제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가슴 속에 항상 남아있었다고 봐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그만의 처세술이 돋보이는 것이 아닐까 한다.

        2. 꼼꼼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세심한 성격

  저자는 옹정제가 성격이 내성적이고 유약하며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하고 있다. 솔직히 청 왕조같은 대제국의 대외정책은 그 지도자의 성격이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했을 때 앞서 봤듯이 옹정제는 강건하고 진취적인 기상보다는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고 확실하며 꼼꼼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의 그런 성격은 앞으로 서술할 그의 정치 스타일과 그의 치세 중에 있었던 몇가지 일화를 보면 잘 알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저자가 서술하기를 만주족은 대륙을 지배하면서 한화(漢化)되어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다고 하면서 가족 제도나 아주 근본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러지 못 했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독재 군주로서의 황제는 가족이라는 사사로운 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선 왕조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부득이하게 형제들을 내친 옹정제를 봤을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독재 군주로서 그는 항상 만인의 위에 당당하게 서야만 했으나 그의 유약한 성격이 이런 점에 있어서 어느정도 약점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고, 옹정제는 스스로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런 부분이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는 그 성격으로 인해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얻었으며 청 왕조의 정치체제를 공고히 다져놓았다. 이 말은 곧 그가 ‘청 왕조 제 2의 건국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는 뜻이 될 것이다.

  사실 만주족은 그 수가 수백만에 불과한 군대식 사회조직을 갖춘 기병이 중심인 군단을 운용하던 동북방의 소수민족에 불과했다. 그 이전에 있었던 몇몇 정복 왕조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비슷한 실례로 만주족과 비슷한 배경의 몽골족은 유라시아를 정복하였고 거대한 대륙을 본국인 대원 울루스와 4한국으로 분할하여 다스렸지만 그 치세는 채 100년을 제대로 넘기지 못 했다. 하지만 청 왕조는 오늘날 중국의 계승선상에 존재했던 마지막 왕조로서 당시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라고도 일컬어지던 나라였었다. 원 왕조보다 그 영토는 적을지 몰라도 중국사에 끼친 영향은 그보다 더 했을 것이다. 왜 이렇게 극단적인 차이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청 왕조의 경우는 옹정제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청 왕조는 중국사의 여러 왕조들 가운데 평균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으며 또한 단 한명의 무식한 군주가 등장하지 않았고, 독살이나 내분으로 비명횡사에 간 군주는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청 왕조가 멸망한 이유는 원 왕조가 그러했듯이, 한족의 반란때문이 아니라 서양 세력의 침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대목인데 당시 청 왕조의 지배를 받던 모든 백성들은 청 왕조를 정통성이 있는 명 왕조의 계승국가로 여겼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면에는 옹정제의 치세가 아주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기실 강희제 치세에만 해도 청 왕조는 거대한 영토에 걸맞는 제국적 시스템이 갖춰지지 못 했었다. 역사에는 가정이란 것이 없지만 그런 상황에서 옹정제가 아닌 다른 정복형 군주가 즉위했다면? 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분명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다음에 즉위할 건륭제가 이룬 업적을 본다면 역시 그에 앞선 옹정제의 치세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평자가 보기에는 옹정제의 이런 성격에서 기인한 그만의 정치 스타일이 청 왕조를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3. 뚜렷한 통치 철학과 뛰어난 정치감각

  옹정제에 대해 논할 때 이 부분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중국사에서 가장 강대했던 왕조야말로 바로 청 왕조라고 생각하는데 그 강성함 이면에는 역시 옹정제가 잘 닦아놓은 정치 체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옹정제는 중앙 관제상 종래의 내각은 형식을 중히 여겨 정무가 막펴 잘 처리되지 못하는 단점을 안고 있음을 알고 별도로 황제 측근의 군기처대신(軍機處大臣)을 두고, 군기처가 내각을 대신하여 6부를 지배하게 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것으로 중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정치제도라고 생각한다. 또한 옹정제가 이런 정치적인 개혁을 한 이면에는 전통적인 농경민족인 한족(漢族)이 아니라 탄력적인 사고를 지닌 반농반목의 만주족(滿洲族)이었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본다. 자고로 무슨 일에 있어서나 경직된 사고가 아닌 탄력적인 사고를 지닌 자야말로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지방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도 크게 신경을 써서, 지방대관에서 주접(奏摺)이라는 친전장(親展狀)에 의해 정치 실정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황제 스스로 뜯어 보고 주필(朱筆)로 주비(朱批:비평)를 써서 발신인에게 반송하여 지시, 훈계를 내렸는데 이것들 중 일부를 모아 편찬하고 또 이 책의 주요 사료로 채택된 것이 바로 앞서 여러번 언급했던「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다.

  이것 역시 앞선 왕조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는데 아마 저자도 옹정제를 논할 때 이 부분을 가장 높게 평가하지 않았을까 싶다. 옹정제는 즉위했을 때부터 청 왕조가 들어서기 전부터 대륙에 만연했던 전통적이고 비효율적인 국가 체제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그것을 자신이 바로 잡으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행한 정치적인 개혁은 하나같이 대단히 훌륭하고 대단히 효과적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특히 지방대관들과 나눈 주접이라는 서신은 옹정제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잘 알려주는 것이다. 청 왕조는 몽골족의 원 왕조와 달리 대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려고 하였가. 그 결과, 철저한 계급주의와 원리주의, 무력 통치를 실행했던 원 왕조와 달리 지배자가 직접 백성을 사랑하고 위할 줄 아는 너그러움과 아량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결국 청 왕조의 치세하의 백성들은 모두 천자의 덕을 칭송하고 자신이 청이라고 하는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옹정제 치세하의 독재 정치는 백성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 청 왕조는 수백년의 시간을 더 유지할 수 있었음도 잊지 말아야만 할 것이다.

  이처럼 여러 통로를 통해 얻은 정보들은 황제에게 접수되어 하나같이 주옥같은 정책 실행에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청 왕조는 그 기반을 공고히 하였으니 옹정제가 행한 정책들이야말로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부분일 것이다.

  또 주목할 것이 당시 지방관리의 봉급이 지나치게 적었으므로 그들에게 양렴전(養廉錢)을 지급한 것인데 말 그대로 ‘청렴 결백함을 기르는 돈’이라는 뜻이며 이는 오늘날 보아도 대단히 합리적이고 뛰어난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과는 다른 일인독재체제하의 봉건국가에서 관리라는 것은 명분과 실익을 동시에 가져다 주는 돈방석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탐관오리로 인해서 수탈받는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옹정제는 당시 어느 정도 묵인되었던 관리들의 생존을 위한 수탈을(물론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법적으로 규제하고 대신 충분히 살만한 생계비를 지급하는 쪽을 택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것은 물론이요, 관리들과 중앙 정부간에도 이득이 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밖에 지방의 천민들을 헤아려 양민으로 만들기도 했으나 이것은 그가 행한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될 듯 싶다. 그는 청 왕조를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에서 더 나아가 백성들이 잘 사난 왕조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 같다.

  이렇게 간단한 몇가지 사례만 살펴봐도 잘 알 수 있듯이 옹정제는 정치력에 있어서 대단히 탄력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이는 그가 그만큼 뚜렷한 통치 철학을 갖고 있었고 그에 따른 뛰어난 정치감각을 갖고 있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학습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이런 것들이 갖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옹정제 당시 총독 삼인방으로 불리던 톈원징, 리웨이, 오르타이 등은 모두 앞에 봤던 옹정제의 정책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사람들인데 옹정제같은 군주 밑에서 그와 같은 정책을 무리없이 수행한 것을 보면 이들의 능력 또한 대단했던 것 같다.

  이처럼 옹정제가 갖고 있던 정치적 능력은 저자가 책에서 표현한 이상이라고 평자는 본다. 명군(名君)과 명신(名臣)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봤을 때 신하들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에 걸맞는 임무를 주어 수행케해 결과물을 얻어내는 것이야말로 옹정제가 보여준, 모든 군주들이 가져야할 정치적 능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4. 유순한 성격과 다른 무서운 결단력

  아무리 옹정제의 성격이 유순하고 부드럽다고는 하나 그런 성인적인 면모 못지 않게 군주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결단력과 위엄, 소위 카리스마일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옹정제는 단지 성격 탓에 아버지 강희제, 아들 건륭제와 달랐을 뿐이지 그가 위엄이나 결단력이 없던 인물, 즉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고 판단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수누 일족과 관련된 기독교 문제도 슬기롭고 위엄있게 잘 해결했으며 그 다음으로 윈난, 구이저우, 광시의 산간에 사는 토착민인 먀오족이 토사(土司:토착 호족) 밑에서 반독립적인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개혁했다. 즉, 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인 유관(流官)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는, 개토귀류(開土歸流)의 정책을 펴서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영토를 확실하게 내지화(內地化)했던 것이다.

  당시 티벳이나 먀오족, 통족 등은 중원 밖의 영역이라 하여 간접적인 통치만을 했었는데 명대부터 그들에게 직접적인 통치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옹정제 치세때에 이르러 대륙 남부에 널리 거주하는 먀오족을 본격적으로 직접 다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 정책에 대해 반란의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워낙 철저하게 시행된 정책에 그들은 속소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듯이 옹정제는 어떤 일에 있어서 한번 결심한 바는 곧바로 실행하였으며, 성급하게 실행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준비해서 한번에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는 저자가 언급하듯이 그가 신하들에게 황제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호령하는 것을 떠나서 그야말로 진정한 군왕의 면모를 훌륭히 갖춘 지도자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평자는 앞서 옹정제의 대외 정책에 대해서 강희제, 건륭제와 달리 소극적이고 크게 내세울만한 업적이 없었다고 한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개념이지, 결코 무시할 수가 없으니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개토귀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대외적으로 티벳의 동란을 평정, 지배체제를 확립하면서 서북 지방에서 강성하던 준가르부를 공격해 격파한 일이다. 옹정제의 치세 중후반에 행해진 이 대외 정벌은 그동안 청 왕조를 다스려온 옹정제의 의지이자 당당함의 표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오정제는 그 치세가 13년으로 아버지인 강희제(61년), 아들인 건륭제(63년)에 비해 극히 짧았지만 중국사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리고 그가 늦은 나이에 즉위했던 점을 상기한다면 그렇게 짧은 치세라고도 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대신 그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지 못한 일들을 해냈다. 바로 청 왕조를 내부적으로 다듬고 고쳐서 기본 틀을 만들어냈으니 그것이야말로 옹정제가 칭송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Ⅲ. 맺음말

  중국사상 가장 강대했던 왕조이자 동시대 전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하고 강대했던 왕조, 그 왕조의 기틀을 다진 옹정제를 보는 저자의 시각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왜 지금까지 이런 시각의 책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이런 인물에 대해 간과하고 있던 평자 본인에 대한 부끄러움도 들었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옹정제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을 뒤엎을 정도로 참신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가 그가 마지막에 강조했던 옹정제 독재정치의 한계에서 인간 옹정제를 뒤돌아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천하의 모든 일을 본인이 직접 관장하고 주재하느라고 개인의 영달과 황제로서의 부귀영화는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 한 사람, 거기다가 독재군주로서 포기하기를 강요받아야만 했던 사생활을 통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은 옹정제를 인간으로서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죽으면서 그가 13년간 이뤄놓은 통치체제가 옹정제 치세만큼이나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던 점 또한 주목할만 하다. 왜 옹정제는 하루에 20~30통, 많을 때는 50~60통의 주접을 읽어야만 했을까? 세상만사를 혼자 다 처리할 수는 없을뿐더러 그 자리가 황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정제가 그렇게 했던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가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 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떤 일을 맡겨도 마음에 들지 않을 바에야 자신이 직접 하자는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자는 앞에서 총독 삼인방으로 불리던 옹정제 치세의 관리들이야말로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그가 청 왕조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독재자가 죽은 이후 그만의 독재정치는 다시 재현되지 못 했다. 철저히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었던 것이 아니라 특출난 개인적 능력에 의해 유지되던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 형태는 남았어도 다시 그처럼 철저하게 운영되지는 못 했던 것이다. 즉, 빛 좋은 개살구 격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래서 더더욱 옹정제라는 인물이 대단하게 평가받아 마땅한 것이고, 그의 치세가 청 왕조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올바른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한국사에서 비교해 본다면 아버지 고국원왕때의 엄청난 국난을 이겨내고 왕위에 올라 조카인 광개토태왕이 대제국을 이룩할 수 있게끔 토대를 마련한 소수림왕과 옹정제를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역시 고국원왕때의 끔찍한 국난이나 광개토태왕 시절의 위대한 대외정복 사업에 대해서는 언급하면서도 그 사이 즉위했던 소수림왕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소수림왕이 없었던들, 우리가 오늘날 아는 자랑스런 고구려사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이만 글을 마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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