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학자가 쓴 고구려사
강인구 외 옮김 / 학연문화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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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李 · 孫 두 선생님의 내용 전개에서, 고구려 왕들에 대한 평가는 혹독하고 인색하며, 고구려의 국가정책은 대부분 부도덕한 행위로 일관되게 貶下하고, 고구려와 중국 정권의 갈등과 충돌 부분에서는 사료의 취사선택과 평가에서 불균형이 자주 발견되며, 국제관계에서 冊封과 朝貢이라는 당시의 일반적인 국제관계를 지나치게 사실관계로 확대하였다는 일반의 평이 있었다. 예를 들어 對隋 · 對唐 전쟁을 기술함에 있어서 중국측만을 일방적 主로 기술하고 고구려를 상대위치에 놓고 짧게 기술함으로서 이 책이 高句麗史인지 中國史인지 의문이 든다는 말도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화사상 중심사고에서 나온 주장, 고구려를 속방시한다든가, 변방정권시 한다든가 하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제외하면, 특히 고구려의 문화에 관하여는 탁월한 안목과 오랜 현장경험을 토대로 쓰여졌기 때문에 어느 저서보다 정확하고 자세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독자들에게 큰 써비스가 될 것으로 믿는다.

역사는 李 · 孫 두 선생님의 깊은 학문적 업적과 높은 학자적 양심을 굳게 믿는 입장에서 이 現狀을 두 가지로 해석하고 싶다. 하나는 中華思想이 아직도 중국사회에 뿌리 깊이 남아있고, 다른 하나는 중국이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필요하였던 사상 통합이 상존한 상황에서 정치경제적으로는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하는 시대적 환경도 영향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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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서문(p.22)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이다.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 이 책의 장단점을 잘 표현한 글이라 생각해서 옮겨왔다. 맞다. 이 책은 동북공정과 함께 추진된 고구려 중국사 만들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안에는 우리가 보는 내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억지 주장을 펴는 부분도 있고 황당한 부분도 있지만, 반대로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잘 정리해놓은 부분들도 있기 때문에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생각한다. 즉, 이 책을 읽고 중국 학계의 견해에 쉽게 동조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소리이다. 

먼저 이 책은 고구려사에 대해 아주 가볍게 읽을 수 있게 만들어졌다. 본래 제목도『高句麗簡史』였으니까 말이다. 편차의 목차는 고구려의 흥기, 확장, 통치, 고구려와 중원의 관계, 강역, 도성, 경제, 외교, 멸망, 문화 이렇게 10개로 이뤄져 있으며 2명의 공저자가 반반씩 나눠서 정리했다. 그러다보니 양자간에 겹치는 내용도 다소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몇몇 요점만 잘 집어서 정리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책을 주욱 보면 알 수 있는 점은 비록 이 책의 주인공은 고구려지만, 역사서술의 주체는 중원 왕조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중국 군현이나 주변 세력에 대한 고구려의 정복 결과를 이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대무신왕이 남쪽으로 낙랑군을 공격하자 후한의 광무제가 병력을 보내 낙랑군을 수복하게 된다. 그 사실을 두고 저자는 고구려의 세력확장이 제한을 받았지만 한반도 북부지구의 점령은 동한의 인가를 얻게 되었다(p.53)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실력으로 점령한 영토를 두고 마치 후한과 협상을 벌여 영토를 양분해 다스리기로 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던 것이다. 더불어 모본왕에 대해 논할때는 주인장이 개인적으로 '하북정벌전'이라 부르는, 고구려의 하북지방에 대한 약탈전과 관련된 내용은 아예 기재하지도 않았다(p.54). 단지 그가 포악하고 정치를 잘 못해 부하에게 죽었고 그로 인해 대무신왕이 닦아놓은 기반이 흔들렸다는 해석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에 반해 국조태왕에 대해서는『후한서』의 기록을 참고하여 그가 즉위 69년, 76세의 고령으로 죽었다는 해석을 내놓아 눈길을 끌었다. 이 부분은『삼국사기』에 적힌 국조태왕의 기록과 다른데 이 부분에 대해서 주인장 역시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중국측 해석이 적절하다고 생각도 든다. 어쨌든, 이 기록을 책에서는 국조태왕이 한의 현도군을 공격했다가 5만명이 패하고 전사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거론했는지 몰라도 한국 학계와 다른 내용들은 눈여겨볼만 했다. 또한 연개소문에 대해 굉장히 악감정을 갖고 책을 썼는지 연개소문 당시 고구려인들 스스로 그 폭정에 못 이겼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고구려가 멸망한 당위성을 그 부분에서 찾고자 하는 노력이 보였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고구려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니 그리 되면 고구려 문화가 중국과 많이 다르고 또 우수하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졌음을 살펴볼 수가 있다. 특히 중국은 진한 시대 이래 일찍이 노예제 통치를 벗어나 봉건사회 대발전기로 진입했지만 고구려는 770여년간 노예제 통치를 유지했다고 적고 있다. 역대 통치자들이 군사력에만 힘을 쏟아 생업에는 힘쓰지 않았으며 그나마 노예제도 발달된 노예제가 아니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p.103). 하지만 뒤에 가면 고구려의 노예제 통치는 발달된 노예제에 속한다고 한 부분(p.107)이나 5세기를 전후로 해서 노예제 생산관계가 완강하게 존재하고는 있지만 이미 쇠퇴하여 해체되고 있었다(p.209)는 내용이 나와 논지에 일관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사실을 아니라고 전제하고 억지로 끼워맞추다 보니 생기는 당연한 현상이라 하겠다.

이렇게 억지스러운 주장을 펼치는 부분은 고구려의 군사 업적과 관련해서 간간히 눈에 띈다. 209년 산상왕때의 환도성 천도를 공손강의 고구려 침략과 맞물려 해석하는 부분(p.129)이나 안시성에서 고구려군 45만의 지원군 중 15만이 대패하였다는 대목(p.160), 고-당 전쟁 이후 고구려는 10개의 성과 4만의 병력을 잃었지만 당군은 강대한 고구려군의 저항 아래 2천여명이 전사하고 물자를 낭비했다는 해석(p.161) 등이 그러하다. 고구려사에 대해 조금만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 보면 웃어넘길만한 부분들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책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라고 할 수도 있는 부분은 뒷부분에서 살펴볼 수 있다. 흘승골성,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장안성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를 토대로 구성한 고구려의 도성 부분과 중국에서 출토된 각종 고고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고구려의 경제 부분과 문화 부분이 그러했다. 한국 학계와 다른 입장 차이를 떠나서 한국학자들이 쉽게 제시하지 못하는 중국 본토의 자료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어 이 주제를 갖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자료들을 다시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보다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있겠지만 일단 그러한 자료들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는 것이라 본다. 

역자도 이미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중국 학자가 쓴 책이므로 사관이나 자료 해석에서 있어 분명 문제가 있다. 하지만 우리와 다른 해석을 하는 부분들이 있어 이를 토대로 우리의 견해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와 왜 다른 해석을 하고 있으며, 어떤 부분에서 어떤 자료들을 갖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고구려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꼭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만 글을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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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북구의 신들 판타지 라이브러리 2
다케루베 노부아키 지음, 박수정 옮김 / 들녘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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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신화 관련된 서적인데 일반적으로 쉽게 접하던 그리스 · 로마 신화가 아닌 켈트와 북구의 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생소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에 중고서점에서 덜컥 집어들었던 책이다. 책장을 처음 넘겼을 때에는 그림도 있고, 글자도 별로 없고 그래서 게임 해설서에 들어갈만한 허구의 내용인가? (게다가 판타지 라이브러리라는 시리즈명으로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하고 생각했는제 맨 뒷장에 적지 않은 분량의 참고문헌을 보고는 개설서로 쉽게 내놓은 연구서적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요정과 신들의 세계라. 우리나라에도 외국 신화에 대해서 이처럼 연구하는 연구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본 학문 분야의 범위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책의 내용은 크게 켈트(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를 중심으로)와 북구(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아이슬란드를 중심으로)라는 서로 다른 지역에 대한 신화세계를 서술하고 있다. 주인장은 켈트나 북구나 큰 차이점을 못 느끼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상당히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간 이쪽 신화에 대해서는 오딘, 토르 정도만 알고 있었고 지그프리드나 아더왕 관련된 영웅신화만 가볍게 인지하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책을 읽으면서 정말 잘못 알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저자는 전체적으로 상당히 쉽게 서술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이야기 풀어 쓰듯이 말이다. 내용은 최대한 간결했으며 신화세계의 시작과 끝을 일목요연하게 캐릭터(신)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었다. 마치 기전체(紀傳體) 중 본기나 열전 부분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 서술이 가능할 정도로 각 세대마다 활약하던 신들이 자리잡은 것이 흥미로웠다. 그리스 · 로마 신화가 수평적인 느낌의 다양한 캐릭터(신, 인간, 영웅, 괴수 등)들이 활약하던 세계라면 켈트 · 북구 신화는 선후관계가 명백한 수직적인 느낌의 캐릭터(신, 거인, 영웅 등)들이 투쟁하던 세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신화세계의 연표를 정리해놓은 것도 좋았다. 

켈트와 북구의 신화는 전체적으로 상당히 다이나믹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스 · 로마 신화에 대한 책들을 보면 한결같이 얘기하는 것이 인간과 어울려 인간과 똑같은 감정과 희노애락을 갖고 있는 신, 인간과 친근한 신의 이야기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그에 비해 켈트와 북구의 신화는 상당히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이는 이들 문화권의 특징과도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거친 환경(파도와 싸워가며 거친 자연환경을 극복해야 했던)에서 살던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문화는 그리스나 로마인들에게 바바리안이라고 손가락질 받았을 지언정, 분명 수준높은 문화를 이룩했었고 이러한 신화 역시도 그러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 생각한다. 신화 중간중간에 보면 기독교의 전래에 맞물려 사라져가는 신화에 대해 얘기하는데 조금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 

얼마전 '베오울프'라는 영화를 보면서도 그랬다. 처음에는 실사가 아니라 3D 애니메이션이어서 놀랐는데 암튼, 영화의 배경은 덴마크(아마도)였고, 북구 신화를 기본으로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애니 속 내용이 실제 신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라도 책을 뒤적거렸는데 일단 별로 연관성은 없었다. 책에 의하면 신화세계에 인간이 개입될 여지는 별로 없었고(물론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 · 로마 신화보다는 훨씬 덜), 오히려 인간의 시대가 되면 신은 존경의 대상에서 사라지면서 크기가 작아져 요정이 되었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도 기독교가 언급되면서 사상적인 혼란을 겪는 부분이 잠깐 언급되고 있다. 마녀에 의한 저주가 사라지듯이 북구의 신화도 사라지는 것을 묘사한 것 같아 내심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암튼 책을 읽는 내내 주인장은 신과 거인, 여러 괴수들이 등장하는 거칠면서도 오히려 사실적인(여기서는 인간 본연의 본능적인 부분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다) 내용에 상당한 흡입력을 느꼈다.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는 라그나뢰크(신들의 황혼)에서 세계가 정화되고 신과 거인족이 멸족의 위기 속에서 피튀기는 전투를 벌인다는 내용이나 죽음을 생의 연결고리로서 크게 나쁘거나 위험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내용, 자신의 욕망을 위해 친구나 부하를 희생시키고 배반을 밥먹듯이 하는 오딘에 대한 내용 등이 신선했다. 또한 오딘이 전투에서 용맹함을 발휘하는 신이 아닌 마술과 계략을 주로 사용하는 주신이었다는 사실이나 티르가 신들의 지장(智將)이었다는 사실도 새로웠다.

더불어 이들 신화세계에서 주목할 점은 항상 '전쟁'이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일대일 싸움이라든가, 정적을 베는 그런 복수전의 수준이 아니라 수천수만의 대군이 붙는 전면전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기원전 1세기 백제의 건국신화만 봐도 신화적 색채가 사라진다는 점을 알 수 있고, 중국의 경우도 기원전 8~3세기 춘추전국시대에 신화적인 색채가 점점 엷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에 반해 켈트나 북구의 경우는 A.D 이후에도 이러한 신화세계가 상당히 잘 보존되고 계속 다듬어졌다는 사실에서, 역사적 사실을 상당수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아더왕 전설이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는데 섬이라는 자연적 배경을 갖춘 켈트신화의 경우는 바다를 통한 외부 침입자에 의해 섬의 주인이 계속 바뀌는 내용이 그러하고, 북구신화의 경우는 여러 소국으로 난립해있던 북구 내 통치자들간의 대립과 거친 자연환경을 극복해내는 내용이 그러했다. 

왜 판타지소설이나 게임에서 켈트 · 북구 신화를 주요 골자로 삼는지 알 수가 있었다. 이처럼 격렬하고 투쟁적인 요소들이 잔뜩 있는데 누가 그리스 · 로마 신화로 게임을 만들겠는가? 더불어 유럽의 중세 암흑시대라고 불리는 시기 활약하던 세력들의 사상적 근원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켈트 · 북구 신화라고 생각하니 조금 아이러니하기까지 했다. 로마인들이 무지하고 야만적이라 비판하던 자들에 의한 암흑시대 이후 유럽은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될 수 있었고 더 강해져 곧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읽는 내내 상당히 재밌는 신화세계를 지닌 북유럽이나 영국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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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전쟁의 나라 - 7백 년의 동업과 경쟁
서영교 지음 / 글항아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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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학자 중에서 보기 드문 전쟁사학자이자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를 100기가 바이트 이상 소장하고 있다는 저자에 대한 소개. 지금까지의 저자 소개와 다른 듯 해서 눈길을 끌었다. 주인장도 전쟁 관련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300기가 가량 보유하고 있기에 1000기가 바이트가 어느 정도 분량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우리나라에는 전쟁사학자 혹은 전쟁고고학자가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전쟁사 혹은 군사사 관련 저서가 아예 출간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공자라 불릴만한 학자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출간 당시부터 언론의 주목을 상당히 끌며 인터넷 서점 사이에서 적지 않은 광고가 났었다. 당연히 주인장도 출간되자마자 덜컥 사서 읽어봤다.

저자는 일단 고구려의 중장기병에 대한 오해로 운을 떼고 있다. 중장기병이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리 강력한 병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중장기병에 대한 진실과 오해가 널리 회자되고 있는만큼 다소 진부한 소재가 아니었나 싶었다(물론 한번쯤은 짚고 넘어갔어야 했지). 오히려 중장기병이 왜 그 당시에 갑자기 주목받으며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었는지를 전쟁史적인 관점에서 다뤄줬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저자는 고구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법한 중장기병을 언급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글을 써야할지를 암시하는 듯 했다. '기존의 상식을 뒤엎어버리겠다'는 식의 암시를 말이다. 

책의 제목만 주욱 봐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이번 책에서 고구려와 유목세계의 관계, 고구려의 유목국가적 요소에 주목해 글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선비족과의 지루한 공존과 대립, 삼연과의 관계와 북위와의 대립구도, 돌궐과의 관계 및 수-당과의 전쟁 등 일관되게 유목세계와의 관계를 정립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유목세계가 갖는 기병군단의 위력을 고구려와 등치시켜 소개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아니나다를까 저자는 자신이 특히 많이 참고한 책을 머리말에 소개하고 있었는데 노태돈 선생님의『고구려사 연구』와 부락성의『중국통사(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목세계를 다룬 책들이었다. 잠깐 소개하자면 이재성의『고대 동몽고사 연구』, 지배선의『중국동북아세아사 연구-모용왕국사』, 스기야마 마사아키의『유목민이 본 세계사』, 잭 워터포드의『칭기즈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르네 그루쎄의『유라시아 유목제국사』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는 중대한 실수를 한 듯 싶었다. 예전에 지배선 선생님의『고구려 · 백제유민 이야기』를 보면서도 느꼈듯이 저자는 고구려를 유목국가로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김용만 선생님의『고구려의 발견』에서 '정착형 기마민족'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는 다양한 족속과 다양한 생업경제를 보유한 민족이 살고 있는 국가였다. 즉, 고구려에 있어 유목국가적 요소는 전부가 아닌 일부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는 마치 유목국가적인 요소가 고구려의 전부인양 언급하고 있다. 고구려가 농경을 중시한다고, 혹은 장창으로 무장한 대기병용 보병부대가 존재한다고 해서 고구려의 역사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에는 기병만 있었던 것도 아니며 반드시 유목세력과의 관계성만 강조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소 기울어진 시각으로 고구려사를 바라본 것이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고구려의 초기 경제활동이 약탈경제였다는 것은 주인장도 인정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자연환경 속에서 고구려인들은 생존해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 강하게 체력을 기르고 전투기술을 연마하며 잦은 전투 속에서 살아남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은 평생을 그렇게 살지 않았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페르시아까지 벌벌 떨게 만들었던 강력한 군사강국 스파르타와 고구려인은 다르다. 스파르타가 아무리 그리스 문화의 패자라 하더라도 일개 도시국가에 불과했다면 고구려는 훗날 제국으로 발돋움한 국가였다. 유목국가와 같은 약탈경제와 상업활동으로만 국가가 운영되기 힘들다는 소리다. 늘어난 인구와 정착문명을 통해서 고구려는 국경을 유지 혹은 확대하며 영토를 보존해야만 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 고구려에 있어 농경의 중요성을 제외시킨다는 것은 안 될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그 부분을 거의 고려치 않았다. 

3세기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도성이 초토화되고 4세기 모용씨의 전연에게 다시금 도성이 초토화된다. 그 원인을 저자는 고구려 문명의 원시성에서 찾고 있다. 다시 말해 유목국가적 요소의 하나로서 도시, 성곽, 정착형 경제기반 등이 고구려에 부족했기에 금새 힘을 회복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사실일까? 하지만 그 말은 유목세력은 거대한 성곽도시나 도성을 갖추지 못 했다는 잘못된(?) 상식에 근거한 듯한 단정적인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저자는 고구려의 산성을 농성장이 아닌 기병의 격납고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산성을 기병이 운용되는데 필수적인 요소로 본 것이었다. 공성전이 아닌. 그러면서도 저자는 뒷부분에 안시성 전투를 언급하면서 공성전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었다. 아이러니 아닌가. 공성전은 기본적으로 보병이 주축이 되어 진행되는 전쟁 방식이며 기병은 공성전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로마 보병군단의 포위 섬멸전과 공성전이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너무 기병과 유목세계적 요소만 강조한 듯 싶어 아쉽다.

그러다보니 3~4세기에도 고구려가 '원시적'이라는 말을 들어야만 했던게 아니었나 싶다. 게다가 저자는 여러 전투 장면에 대해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을 정리하는데 급급해 그에 대한 여러 연구성과를 소개하지 않고 있었다. 비류수가에서 패한 동천왕의 철기에 대한 언급도 그러하거니와(동천왕의 철기도 그렇다. 이는 동시기 다른 국가보다 이른 철기의 등장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함구하고 있다) 주필산 전투와 안시성 전투에 대한 부분도 그러했다. 물론 저자의 일관된 주장에 따라 글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지만, 다른 연구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이 빠져 있어 설득력이 약해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책은 고구려 전쟁사에 대한 종합적인 개설서라기 보다는 저자 개인적인 저서로만 그칠 수 밖에 없지 않나 싶다. 

고구려는 분명 쉼없이 전쟁을 치뤄온 국가였으며 그 전쟁을 통해서 성장하고 단련되어온 국가였다. 그렇다고 성장의 원동력에 전쟁이 전부였던 국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는 그 부분을 놓친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고구려가 초기 수렵 혹은 유목생활을 하며 약탈경제체제를 유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멸망기까지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양성이야말로 제국이 갖는 특징. 그것은 역시 고구려에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그 부분 또한 놓친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해석에 자의적인 부분이 들어갈 수 밖에 없었고, 기존의 다양한 연구성과를 무시(?)할법한 해석도 소개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분명 저자가 야심차게 준비해서 내놓은 책이지만 비판받을 소지가 크기에 주인장 개인적으로 아쉽다.

하지만 이 책이 그리 잘못된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먼저 주인장이 이 책에서 가장 눈여겨 본 부분은 2가지였다. 첫째는 북연을 둘러싼 북위와의 대립 과정을 굉장히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다른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부분인데 저자는 북위의 실권을 쥔 풍태후와 장수태왕의 대립구도라는 설정 속에서 북연-북위-고구려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북위의 납비 사건이 보다 잘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와 북위의 국제 관계를 너무 사료 그대로 해석한 면은 좀 성급하지 않았나도 생각해 보았다(이는 훗날 최유의 안원왕 구타 사건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어쨌든, 당시 조공기사만 가득한 북위-고구려 관계사에 대해서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단, 이 부분이 이 책의 근본적인 주제인 '전쟁'과 그다지 큰 연관이 없다는 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구려의 전마 생산과 유목민(6장) 부분은 이 책에서 주인장이 가장 주의깊게 봤던 부분인다. 온달전을 토대로 복원한 고구려 국마 관리 체제가 그러했다. 국마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으며 막연히 고구려에도 국마를 생산하는 목장이 있었겠지~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고려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환경이 지나치게 달라지면서 수입산 말이 죽을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단순히 국마(전마)는 훈련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환경에 적응시키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조 송나라에서 고구려에서 말 800필을 수입해갔다는 것도 저자는 환경에 적응된 말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는데 이 역시 주목할만한 견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이런 부분에서 그동안 간과하고 있었던 면이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서 다시금 생각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아마 이런 해석은 저자가 고구려와 유목세계적인 요소를 강조하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었을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여러 장단점을 갖춘 이 책은 고구려 전쟁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분명 의의가 있다 하겠다. 하지만 너무나 불완전한 책이 아닐 수 없다. 쉽게 이 책의 견해들을 인용하거나 받아들이는데도 꺼려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다소 파격적인(?) 주장들을 내놓은 책인만큼 한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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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 2007-11-20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모든 것이 다 언급된 백과사전을 원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고구려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책을 자세히 읽어 보세요. 유목민과 수렵민은 상당히 다른 개념입니다.
고구려인들은 척박한 숲속에 살아가는 수렵민입니다. 유목민은 풍요로운 초원에서 살아가지요
동천왕의 '철기'는 중장기병이라기 보다 날랜 효기입니다. 같은 기록을 하고 있는 신당서, 구당서 2개를 비교하면 구당서에서 철기지만 신당서에서 효기로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치통감에도 그렇습니다.
중장기병의 강력함에 대하여 체험을 하시는 것이 좋을 듯도 하구요. 가장 쉬운 것은 무거운 옷을 입고 발목에 쇠를 감고 산을 오르시면 됩니다.



麗輝 2007-11-20 18:18   좋아요 0 | URL
고구려에 대한 환상이라. 글쎄요.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건지.

먼저 유목민과 수렵민은 분명 다른 개념이며 그것은 이 책보다는 다른 책들에 더 자세히 나와있죠. 심지어 같은 유목민 중에서도 수렵민으로 분류가능한, 혹은 수렵민과 상당부분 생활풍습이 겹치는 집단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하자노프 선생님이 쓰고 김호동 선생님이 번역한『유목사회의 구조』라는 책에 오히려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암튼 이는 넘어가도록 하죠.

저는 개인적으로 고구려인들의 전신인 부여인, 그의 전신인 고리국(혹은 탁리국)인들이 어떤 경제체제를 지니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여야 동방에서 가장 넓다란 대지를 가졌고 오곡을 생산했다니 농경이 중요한 생업경제였겠지만 분명히 수렵과 유목도 병행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고리국도 그랬을 것이며 고구려인도 그랬을 겁니다. 단, 지형적인 조건상 부여와 달랐던 고구려인들은 초반에는 수렵과 유목 등의 비율이 높았겠지만, 만주와 요동, 한반도 일대를 확보한 뒤에는 농경의 비율도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즉, 님 말씀처럼 고구려인들을 두고 척박한 숲속에 살아가는 수렵민이라 단정하는 건 무리라는 것입니다. 이미 기원전후한 시기에 만주 일대에서 철제보습 등의 유물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농경의 증거지요. 그것이 고구려인이든 고구려의 전신이든 말입니다. 그 지역에서 이미 농경이 시행되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동천왕이 동원한 철기 5천에 대한 기록은『삼국사기』에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라고 적혀있으며(참고로 삼국사기에 鐵騎라는 표현은 단 2번 나오며 나머지 1번은 견훤 열전에 등장합니다), 님이 말씀하신『구당서』,『신당서』에서도 한번 검색해봤습니다. 일단 양당서의「고구려전」에서는 '鐵騎'라는 단어가 검색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본기를 검색했더니『구당서』에서 13번,『신당서』에서 6번 검색됐지만 동천왕의 철기 5천에 대한 기사는 아니더군요. 또한『신당서』에서는 驍騎로도 검색했는데 13건이 나왔지만 동천왕에 대한 기록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자치통감』도 한번 봤습니다. 효기로 검색했더니 73건 중 대부분이 '효기장군' 혹은 '효기교위'라는 관직명만 나오더군요. 철기는 36건이 검색됐는데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기사를 봤지만 동천왕(位宮)이 철기 5천을 동원했다는 기록 없이, 관구검의 토벌 내용만 나와있더라고요.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幽州刺史毌丘儉以高句驪王位宮數爲侵叛,督諸軍討之;位宮敗走,儉遂屠丸都,斬獲首虜以千數. 句驪之臣得來數諫位宮,位宮不從,得來歎曰:“立見此地將生蓬蒿.”遂不食而死. 儉令諸軍不壞其墓,不伐其樹,得其妻子皆放遣之. 位宮單將妻子逃竄,儉引軍還. 未幾,複擊之,位宮遂奔買溝."

『四庫全書』를 검색했는데도 별다르게 찾아볼 수 있는 자료가 없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잘 몰라서 그러니까 나중에 님께서 다시 한번 자료를 제시해주시거나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특히 동천왕의 철기를 중국측 사서에서는 효기라고 표기해놨다는 내용은 처음 듣는 거니까 꼭 좀 알려주셨으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차후에 제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요. 아~그리고 님께서 따로 동천왕의 철기를 효기로 판단하는 근거도 같이 말씀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장기병의 강력함에 대해서 왜 체험을 해 보라고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위에서 중장기병은 강력하지 않다고 말했던 적은 없었던 듯 한데요. 암튼 뭐...중장기병의 강력함을 알아보는데 님이 제시한 방법은 큰 도움이 안 될 듯 합니다. 무거운 옷을 입고 발목에 쇠를 감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오히려 그렇게 입힌 말을 타보는 것이 낫겠죠. 중장기병은 4~5세기 무렵 동아시아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병종입니다. 그리고 그 위력을 발휘하죠. 하지만 전 그 파괴력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군사편제가 변화하는 원인과 주변 환경을 알아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었던 겁니다. *^^*

알라딘에서 이렇게 제 비평에 대해 토론한 적도 처음이네요. ^^ 언제 한번 제 까페 한번 들리세요. 다음의 뿌리아름역사동아리(http://cafe.daum.net/yeohwicenter)라는 곳입니다. 아~마지막으로...저는 모든 것이 다 언급된 백과사전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전쟁사가의 눈으로 고구려를 바라봤다면 그에 상응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오히려 유목세계와의 관련성 여부를 더 중시했던 것 같습니다. 즉, 거시적으로도, 미시적으로도 고구려 전쟁사에 대해 표현하는데 미흡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럼 이만~*^^* (제 비평에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지원 2007-11-23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가의 눈으로 본 고구려 상응하는 내용은 무엇인지요.

직접 고구려 전쟁사를 집필하실 만큼 유식하세요.

단점이 많은 책이 나왔으니 하번 써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오해가 있었나 보내요 중장기병이 강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님께서 철을 두르고 말에 철갑을 입히고 행군을 해보시면 됩니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스팀을 받을 것입니다. 님께서는 말과 기수가 하중을 느끼지 않은 터미네이트 싸이보그로 보고계신게 아닌지요

한문을 잘하시니까. 762년 구당서 복고회은 전을 보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반란군 사조의의 10만 철기가 당조정이 동원한 회흘의 유목민 기병 3000정도에게

전멸당한 사실이 있습니다.

저는 사학과를 다니는데 논문을 보다가 알게되었습니다

1241년 유럽의 중장기병이 몽골 유목기병에 전멸한 것을 설명해 주세요.

몽골인들은 유럽인들이 지치기를 기다렸다지요.

중장기병이 4-5세기에 폭팔적으로 증가했다는 증거가 어디있습니까. 저도 알고 싶내....

고구려 벽화에도 1/10를 넘지 않는데..............

중장은 말위에서 활을 쏠 기예가 없는 말탄보병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麗輝 2007-11-24 17:56   좋아요 0 | URL
음냥...위의 세줄은 그냥 해보신 말씀이겠죠? 흐음.
저는 그냥 학생일 뿐입니다. 책이라니요. 당치도 않지요.
하지만 이 정도 주제라면 앞으로 책을 쓸만큼 매력적이겠죠.

그리고 중장기병은...강력하지 않다고 하신 거였나요??
흠. 그럼 제가 잘못 이해했네요.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강력한 병종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중장기병에 주목하죠. (저자가 지적했듯이) 왜 그럴까요? 그건 실제로 중장기병을 활발하게 활용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방진을 이룬 장창병에 약하고 움직임도 둔하고 유지비도 많이 드는데 어째서?

극도로 증가시킨 방어력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전쟁사가들이 말하길 방진을 이루고 기병대에 맞서는 보병은 엄청난 용기와 인내를 필요로 하며 그것은 오랜 훈련을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다고 하지요. 또한 방진을 이루고 기병대를 맞서면 이탈하고 싶은 보병을 쉽게 통제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이래저래 중장기병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어쨌든, 중장기병은 님이 말씀하시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운용되었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병종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걸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겠지요. (아~그리고 저는 돈이 그리 많지 않아서 말에 철을 두르고 실험을 할 여건이 안 되네요. 아마 저자도 그랬을테고요. ^^)

단, 중장기병은 단독으로 나선 작전에서는 취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조의의 10만 철기가 3000의 회흘 기병에게 전멸당했다고 하셨죠.『구당서』권121「열전」제71〈僕固懷恩〉전을 보니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네요. 아~참고로, 사학과 다니신다고 하셨는데, 저는 고고학과를 다닙니다. 아마 한문 해석 능력은 제가 더 떨어질 듯 하네요. ^^

十月, 詔天下兵馬元帥雍王為中軍先鋒, 以懷恩為副, 加同中書門下平章事, 領河東、朔方節度行營及鎮西、回紇兵馬赴陝州, 並令諸道節度一時齊進. 懷恩與回紇左殺為先鋒, 觀軍容使魚朝恩、陝州節度郭英乂為後殿, 自澠池入;陳鄭節度李抱玉自河陽入;河南副元帥、雍王留陝州. 懷恩等師至黃水, 賊徒數萬, 堅柵自固. 懷恩陣於西原上, 廣張旗幟以當之, 命驍騎及回紇之眾傍南山出於東北, 兩軍舉旗內應, 表裡擊之, 一鼓而拔, 賊死者數萬. 朝義領鐵騎十萬來救, 陣於昭覺寺, 賊皆殊死決戰, 短兵既接, 相殺甚眾. 官軍驟擊之, 賊陣而不動. 魚朝恩令射生五百人下馬, 弓弩亂髮, 多中賊而死, 陣亦如初. 鎮西節度使馬璘曰:「事急矣!」遂援旗而進, 單騎奔擊, 奪賊兩牌, 突入萬眾之中, 左右披靡, 大軍乘之而入, 朝義大敗, 斬首一萬六千級, 生擒四千六百人, 降者三萬二千人.

762년 당 대종이 즉위하면서 그해 10월, 장남인 옹왕 이적을 천하병마원수로 삼고 복고회은으로 하여금 보필하게 하네요. 그리고 님 말씀대로 (사)조의는 철기 10만을 보유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회흘의 유목민 3천기 얘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암튼,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네요. 16,000명이 죽고 4,600명이 포로로 잡히고 32,000명이 항복했다 하니 大敗라고 표현될 만합니다(53%에 가까운 손실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더 자료를 찾아봐야겠지만 복고회은의 기록만으로는 당시 정황을 자세히 알기 곤란할 듯 합니다. 이 부분은 어떤 논문을 보셨는지 알려주시면 제가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몽골인들에게 전멸당한 중장기병...아까 위에서 언급했지만 유럽의 기사는 다른 기마대와 공조해서 작전을 벌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세시대 유럽에서 오랜 지위를 누려왔던 기사들은 대개 돌격에 의한 충격으로 적 보병을 분쇄하죠. 하지만 그것도 아쟁쿠르 전투 이후에는 불가능해집니다. 위세가 많이 꺾였죠. 하지만 동시대 동양에서는 그보다 훨씬 다양하고 융통성있는 기병 운용 전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유럽과 질적으로 달랐죠.

몽골기병의 전광석화같은 전술에 느려터지고 무거운 갑주로 무장한 유럽의 기사는 속소무책으로 당했을 겁니다. (님 말씀대로 지치기를 기다린 것도 있지만 공수의 빠른 전환과 騎射의 가능 여부도 큰 영향을 미쳤죠) 물론 몽골 역시 중장기병과 경기병을 보유하고 있었고요. 이는 고구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알기로 중장기병만 갖고는 충분히 전장에서 그 위력이 발휘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즉, 김지원님은 중장기병이 그닥 잘난 병종이 아니다라는 저자의 말씀에 동의한다는 말씀이신 거군요. 이번에는 제가 맞게 이해했나요? 저 역시 그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중장기병이 갖는 장점을 무시하면서까지 그런 평가를 내릴 필요는 없을 듯 하네요. 보니까 저자도 장점은 인정하되 사람들이 너무 장점만 보니까 단점도 같이 봐야 한다~즉, 사고의 전환을 꾀해야 한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던데요. 그리고 저는 장, 단점은 물론이고 중장기병이 유행했다가 인기를 잃는 과정까지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고요.

마지막으로 중장기병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증거. 노태돈 선생님의『고구려사 연구』에서는 등자 수용과 맞물려 기병의 양적 증가가 이뤄졌다고 하십니다. 즉, 말을 잘 탈줄 모르는 한족을 대거 점령한 유목제국들(삼연과 북위 등)이 넓어진 영토에 발맞춰 군대의 규모를 증가시키다보니 등자가 필요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기사가 아닌 단순 돌격에 의한 중장기병이 육성되기 시작했다고 보신 거죠.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와 달리 이용범 선생님은「고구려의 요서 진출지도와 돌궐」에서 고구려가 유연의 철공으로 성장한 돌궐과의 대립에서 보다 개선된 무기와 마구의 필요성으로 등자를 발명해 중장기병을 활용했다는 설을 제기하고 계십니다.

즉, 님 말씀대로 중장기병은 말 위에서 활 쏠 줄 모르는 병종입니다. 창 들고 냅다 뛰는 애들이죠. 그런데 왜 애들을 많이 만들었을까? 그건 바로 기병은 필요한데 탈 줄 모르는 놈들만 있으니 그런 현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등자도 만들어야 하고, 돌격만 하니 갑옷도 잔뜩 늘려야 했겠죠. 참고로 중장기병은 등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고구려의 경우 등자 없이도 중장기병을 운용했습니다. 즉, 이들은 후대에 증가하는 중장기병과 질적으로 달랐다고 봐야겠죠. 이는 벽화고분에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등자없는 중장기병들이 많으니까요.

또 고구려 벽화에서 전체 병종의 1/10이 넘지 않는다고 하셨죠. 맞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생각해볼 부분이 있지요. 일단 벽화의 군대 사열이 의장대를 대상으로 한건지 실제 출정을 하는 부대에 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이 차이는 상당히 큽니다. 그러니 벽화 자료가 중장기병에 대한 주자료로 활용되기는 힘들 듯 합니다.

다만, 4세기 중엽의 안악3호분, 4~5세기의 약수리고분, 5세기초의 덕흥리고분을 보면 모두 중장기병이 등장하고 있으며 특히 고구려 벽화고분 양식의 변천을 규명해주는 연결고리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는 약수리고분에는 왕릉으로 추정되는 안악3호분과 비교했을때 중장기병이 무려 4명이나 더 등장해 12명까지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죠. 약수리고분이 만들어질 무렵이 바로 중장기병의 운용 범위 확대와 맞물려 고구려의 영토 확장이 이뤄지는 시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똑같이 중장기병 12명이 그려진 약수리고분과 덕흥리고분의 주인공들은 모두 광개토태왕의 신하들 무덤으로 봐야할 것이고 이처럼 고분벽화를 보면 고구려의 영토 확장으로 인한 새로운 자원과 인력 확보, 그리고 중장기병 생산이 제철산업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중장기병 관련해서 제가 참고하는 논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金斗喆, 2000,「韓國 古代 馬具의 硏究」, 동의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김성태, 2001,「高句麗 兵器에 대한 硏究」,『高句麗硏究』12.
徐榮敎, 2003,「高句麗 壁畵에 보이는 高句麗의 戰術과 武器-기병무장과 그 기능을 중심으로」,『고구려연구』17.
徐榮敎, 2004,「고구려 騎兵과 鐙子-高句麗古墳壁畵 분석을 중심으로」,『歷史學報』181.
이인철, 1996,「4~5세기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중장기병」,『군사』33.

이상입니다. 답변이 되셨길 바랍니다.

p.s) 그나저나 제 질문에는 답변을 안 해주시고...쩝...-.-;;

김지원 2007-11-28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 물어보신 관련 논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영교,「高句麗 중장기병에 관한 제문제」『학예지』13, 육사 박물관 2006입니다. 이 논문을 보시면 충분히 제가 말했던 의도를 아실 것입니다. 기사에 능한 유목민이 어떠한 존재인지 말입니다.
고고학 하시는 분들은 기수나 말의 역량(맕타고 활쏘는 기사와 창술- 이를 받쳐주는 잘 훈련된 말)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쇠만 만이 나오면 증거로 충분히 여겨요. 물질적인 시각이에요. 인간의 기예에 대한 고려가 부족합니다. 그리고 말이 얼마나 영리하고 어떠한 종자이며 어떠한 훈련을 받아야 효율적인 말입니다. 무게를 견디고 얼마나 행군을 할 수 있으며, 얼마나 먹는지 생각하셔야 합니다.


2, 안악3호분벽화 덕흥리 벽화 외에 등자의 연대를 알려주는 문헌자료가 없는 것은 아시지요. 발굴된 고고학자료로는 연대측정 쉽지 않아요/ 고고학자들 사이에도 편차가 워낙 거대하니까요. 벽화자료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안악 3호분이 왕릉이라니? 동수 묘입니다. 잘아시는 분이.......?.

3, 앞으로 위에서 님께서 제시한 논문 정말 읽어보신 것입니까. 좀 꼼꼼히 보셨으면 합니다. 님이 제시한 위의 논문 들 가운데 모든 답이 있어요.

그리고 질문이 있습니다. 중장기병을 동원해서 내몽골로 원정을 간다면 어떠할 까요.(광개토왕?) 님께서는 항상 갑옷을 걸치고 행군을 하실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쇠를 좋아하시니까요.

麗輝 2007-11-28 19:24   좋아요 0 | URL
1. 아. 육사박물관 논문이었구나. 흐음. 어쩐지 못 찾았다 했네. 감사합니다. 한번 찾아볼께요. 육사박물관 논문은 제가 본 적이 없어서요. 그런데 전 기사에 능한 유목민이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해서 토론을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는데요. 다만 그 원문기사가 소개된 논문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아~혹시 육사박물관에서 나온다는『학예지』논문을 pdf로 구하셔서 보시는 건가요? 그럼 좀 자료 공유를 부탁드려도 될런지. ^^;

으음. 맞습니다. 고고학 연구자들은 그런 부분에 대해 아무래도 사색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지요. 그런 부분은 문헌사학에서 많이 하는 편이고요. 그렇다고 철기가 많이 나오면 충분하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일단 철기가 많이 나오면 좋지만 보존처리에 상당한 시일이 걸려서 보고서로 발간될 정도로 자료화하려면 많은 노력과 자금이 들어가거든요. 암튼 철기가 많이 나오면 일단 그에 대해서 적절한 해석을 내리죠. 철기가 어떤 유구(주거지인지, 대장간인지, 고분인지 등등)에서 나왔는지도 중요하니까요.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뭐 고고학사 책 보면 신고고학이나 탈과정주의고고학이니 떠들지만 아직 우리나라 고고학계는 전통고고학을 이제 막 벗어나려는 단계니까요. 그래서 저도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고요. 인지과정주의고고학적인 시각이 많이 필요할 듯 합니다. 하지만 님이 말씀하시는...말이 얼마나 영리하고 어떠한 종자이며, 어떠한 훈련을 받아야 효율적이며, 무게를 견디고 얼마나 행군을 할 수 있고, 얼마나 먹는지 등등을 종합적으로 연구한 연구성과가 있습니까? 전 이번에 서영교 선생님 책에서 그런 부분을 조금이나마 다룬 것이 굉장히 획기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혹시 이 책 말고 다른 자료에서도 그런 부분을 다룬 연구성과가 있는지 알고 계시다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예전에 마사회에서 나온 관련자료들을 보긴 봤지만 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종합적으로 정리한 연구성과는 없는 것 같더라고요.

2. 등자는 안악3호분, 덕흥리고분의 기병그림에 있다? 제가 지금 도록을 다시 봤는데 두 고분은 비록 명문덕분에 연대를 알 수 있지만 발 있는 부분을 아무리 살펴봐도 등자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혹시나 제가 잘못 봤나 싶어서 서영교 선생님의「고구려 기병과 등자-고구려고분벽화 분석을 중심으로」을 보니 안악3호분, 약수리고분, 덕흥리고분에는 등자를 착용한 중장기병이 없다(44p 마지막 문단)고 하시네요. 제일 처음 나온 곳은 5세기 초,중반 경인 장천 1호분의 수렵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시는군요(42p 첫문단).

제가 알기로 가장 널리 알려진 등자(중장기병 도입과 관련해서)는 415년 죽은 풍소불묘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위 논문에도 나와있는 내용입니다. 더불어 조양 원태자 벽화묘 등에서 이보다 이른 시기의 등자 그림이 있기는 하지만 실물자료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하는군요. 아마 이 부분은 헤깔리신 듯 합니다.

그리고...음...발굴된 고고자료는 연대측정이 쉽지 않은게 아니라 연대측정을 기다리는데 오래 걸리는 것 뿐입니다. 기계를 갖고 있는 곳이 별로 없으니까요. 무지 비싸답니다. -.-; 요즘은 예전에 널리 쓰이던 C14보다 AMS라고 해서 더 소량의 시료를 갖고 더 정확한 연대 측정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수준높은 연대측정 기술을 가진 일본에서는 시료만 충분하다면 ±5년까지 오차를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이 부분은 과학이 발달하면 더 나아지겠죠 뭐. 아~하지만 국내학계에서 이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치를 잘 믿지 않는 분들도 많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니까 주관적인 입장에서 본 단순한 편년에서는 고고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분명 있지만 방사성탄소연대측정치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벽화자료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라...제 말을 오해하신 듯 합니다만. 전 어디까지나 벽화자료가 주 자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어떤 연구에 있어서 모든 자료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합니다. 단, 어떤 특정 자료에 더 비중을 두느냐 하는 차이겠지요. '중요하지 않다'가 아니라 다른 고고자료에 비해 '덜 중요하다'였습니다. 등자 및 마구를 연구하는 많은 사학자, 고고학자분들이 계시지만 모두들 가능성을 열어두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벽화라든가, 새로운 물질자료가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벽화에 그려진 중장기병과 등자는 어떤 특정 사건 및 장면을 묘사한 경우가 많을테니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겁니다.

벽화 중에 전투장면(페르시아나 이집트, 그리스의 유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이나 전쟁기록을 묘사한 내용은 없으니까 안악3호분의 행렬도 정규편제 하의 군대배치가 아니라 특수한 경우라고 볼 여지를 남겨둬야 한다고 했던 거고요. 뭐 제가 이런 전후 사정을 얘기 안 했으니까 이 부분에 오해가 있었다면 제가 사과를 드리지요. 이제 제 진의를 알아주실런지요. ^^

그리고 안악3호분에 대해서는...학계에서 동수묘, 고국원왕묘, 미천왕묘 등 설이 분분합니다. 그리고 저는 모든 견해들을 봤을때 고국원왕인지 미천왕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동수묘보다는 왕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편이고요. 이 부분은 논외의 주제이니까 님과 제가 생각이 다르다는 것만 짚고 넘어가죠. (그리고 저 잘 몰라요~-.-;)

3. 앞에서 제시한 논문은 다 읽어볼 수 밖에 없었죠. 리포트를 쓰기 위해 봤던 참고문헌 들이니까요. 제 까페에도 올려놨었고요. 흐음. 지금은 뭐 바쁘기도 하고 다른 공부를 해야 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때 더 꼼꼼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답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변...중장기병을 동원해서 왜 내몽골로 원정을 가야 할까요? 반드시 중장기병만 데리고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아~그리고 중장기병의 경우 항상 그 완전무장 상태로 집결지부터 전장까지 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비는 따로 이동하고 덕분에 시종이 달라붙지요. 여분의 말이나 소도 준비해야 하고요. 뭐 경기병이 이동한다 해도 비슷한 상황이지만요.

마지막으로...왜 제게 자꾸 이런 방향으로 말씀하시죠? 제가 언제 중장기병이 최고라고 했나요...아니면 쇠를 좋아한다고 했나요...^^; 제가 토론에 대해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봤거든요. 근데 님의 질문 방향이 자꾸 애초의 것에서 변질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건 다음 댓글에...

麗輝 2007-11-28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토론이 자꾸 방향이 엇나간 것 같아서 따로 글을 적습니다.
제 서평을 보고 님은 다음과 같은 부분을 말씀하셨죠.

1. 백과사전을 원하냐, 고구려에 대한 환상이 있냐. 고구려는 수렵민이다. 그러면서 동천왕의 철기는 날랜 효기이다. 양당서에도 철기와 효기가 혼용되어 쓰인다. 자치통감도 그렇다. 그런데 갑자기 중장기병의 강력함에 대해 체험해보라고 하셨죠. 이는 님은 중장기병이 그닥 쓸만한게 아니기 때문에 그리 말씀하신 것이고요.

-> 그래서 답변을 했죠. 백과사전을 원하는게 아니고 수렵과 유목에 대해서도요. 님은 제가 고구려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정확하게 안 적었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죠. 어떠한 부분에 대해 그러냐고. 대답없으셨고. 그리고 동천왕의 철기는 효기이다. 제가 물어봤죠. 무슨 근거로 그렇냐고. 말씀 안 하셨고. 양당서의 철기, 효기 혼용 기록들에 대해서도 제가 찾아봤는데 없으니 알려달라고 했는데 역시 묵묵부답이셨고. 그리고는 갑자기 중장기병??? 제가 서평에서 중장기병은 졸라 좋은 유닛이다. 서영교의 주장은 틀렸다. 이런 말을 했었나요? 다만 중장기병이 그닥 안 좋은 유닛이라는 것은 다 알려진 진부한 주장이니 다른 부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어땠을까. 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아마 여기서부터 님의 오해가 계속 지금까지 지속된 것 같습니다.

2. 유식 어쩌구, 책을 써보라 어쩌고...저를 비꼬시려고 쓴 어투같았지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오히려 오해를 했다고 하면서 중장기병은 강하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하셨습니다. 복고회은전 얘기도 그때문에 하신거고. 그리고 유럽의 기사가 몽골 기병에게 계속 밀린 이유 말해달라고 하셨고. 갑자기 중장기병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 말씀해달라고 하셨고. 고구려 벽화에도 중장기병은 1/10을 넘지 않고 그 놈들은 단지 기예없는 말탄 보병일 뿐이라고 하셨죠.

-> 그래서 대답했죠. 처음껀 넘어가고. 중장기병에 대해서 전 이제 님의 견해를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님은 중장기병이 강하지 않다고 말씀하시고 싶은 거였죠. 그래서 저도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전 한마디 더 덧붙였을 뿐입니다. 그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도 수요가 늘었고 계속 활용되었다고 말이죠. 그리고 저도 중간중간에 님의 견해에 동의한다는 얘기를 계속 덧붙인 것 같은데요. 전 중장기병의 발생 원인과 경과, 쇠퇴 등에 대해서 다뤄야 했고 그래야만 그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계속 중장기병이 쓰인 이유를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면 저자가 책 서두에 던진 주제가 보다 빛을 발했을 것으로 생각했으니까요.

3. 그리고 오늘 확인해보니. 뭐 고고학 얘기하시고 벽화 얘기하시고 동수묘도. 그리고 논문에 대한 부분. 마지막 질문...중장기병 끌고 내몽골고원 원정가면 어떻겠냐...

-> 고고학이야 답변 드렸고. 그런데 님도 고고학에 대해서 그닥 자세히 알고 계시지는 않는 듯 합니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깐요. 흠. 그리고 벽화도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달랐고요. 이건 뭐 헤깔리신 것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한 답변은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논문은 당연히 제가 읽어봤으니 제시한 것이죠. 온라인상에서 모르는 상대에게 "이거 읽어는 봤냐? 더 꼼꼼히 읽어봐라."라고 말하는 것은 매너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설사 제가 그걸 안 읽어보고 알려드렸다 해도 말이죠. 그보다 남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 하고 이런 얘기를 하게 되면 그 화살은 본인에게 돌아옵니다. 이번 경우처럼 말이죠. 제가 님한테 "님은 뭐 이런 것도 모르고 자꾸 말 꺼내냐~더 공부해라"는 식으로 말하면 님은 분명 기분이 나쁠 겁니다. 뭐 이것도 넘어가죠. 마지막 중장기병에 대한 질문. 위에서 전 님에 대한 오해를 풀었습니다. 하지만 님은 그러지 않았고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계십니다. 제가 질문드린 사항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말이죠.

이상입니다.

흐음. 저한테 문제가 있는건지, 님한테 문제가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의사 전달이 잘 안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듯 합니다. 예전에도 다음까페에서 이런 식의 토론이 진행된 적이 있었는데...그때 그분은 아니시겠지만. 암튼 이제는 정말로 상호간에 오해가 없이 다음 얘기를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김지원 2007-11-28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주인장의 성실한 답변 고마왔습니다. 그 진실 진지함에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정말 젠틀하세요. 제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주인장님에게 이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본 주인장의 환상은 고구려를 제국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구려는 끝내 5부체제의 시스템을 극복하지도 못했고, 극복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1. 고구려는 제국이 아닙니다. 고구려는 족성적인 질서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했습니다. 삼국사기 온달전을 보면 국왕주최 사냥대회에 5부인들만 참여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전인구 가운데 5부인은 소수입니다. 광개토왕 비문이 건립 목적도 수묘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는데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와세다대학교 이성시 교수의[표상으로서 광개토왕의 비문] [[만들어진 고대]] 삼인 2001. [고구려 연개소문에 대하여] 조선사연구회논문집 31호 1993년東京 를 보싶시요.

2. 앞서 말씀드린 구당서와 복고회은전의 철기를 신당서 신당서 복고회은전의 그것과 비교해 보세요. 같은 기록을 전하지만 신당서는 철기를 날랜기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광개토왕 장수왕대 고구려는 적지 않은 농업지역을 차지합니다. 그들은 그들을 신민으로 불렀습니다. 곡식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부렸던 것입니다. 대 고구려가 백제를 누러고 차지한 것도 중국에 대한 인삼교역 독점권이었습니다. 고구려인들은 이익과 통상을 위한 전쟁을 했던 것입니다. 고구려는 부여의 금광산, 말갈제부족의 모피무역 등등과 관련이 있습니다. 농경민 출신 군주로서는 그러한 마인드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료가 있습니다. 그것도 5세기 말--6세기 초반의 것입니다.

아무조록 누구보다 성실하신 주인장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답변이 부족하면 다시 질문해 주세요. 구체적으로 하셔도 됩니다.




麗輝 2007-11-29 11:05   좋아요 0 | URL
1. 고구려는 제국이 아니다. 족성적인 질서를 끝내 극복하지 못 했다. 글쎄요. 온달전에서의 사냥대회때 5부人만 참석했다는 것 같고는 족성적인 부분을 면치 못 했다...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단지 국가 최고행사에 그에 걸맞는 사람들만 참석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으니까요. 대신 평양에서의 석전이나 동맹제는 전국민(왕을 포함해서)이 함께 할 수 있는 행사니까 그걸 보면 또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히려 고구려의 늘어난 세력과 인구, 영토를 봤을때 제국적 국가통치체제로 가지 않고서는 유지하기가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는 그런 사냥대회보다는 국가체제나 정치적인 다른 시각에서 봐야하지 않을까 싶거든요. 그리고 광개토태왕비문의 건립 목적 중 하나가 수묘인제도의 제정과 역대 왕릉의 정비인 것도 사실이지만...그게 제국이 아니라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흠. 그리고 말씀하신 논문은 찾아보겠습니다. 제가 안 본 것만 다 보셔서...분야가 달라서 그런가...-.-;;

2. 아~그 말씀이셨군요. 흐흠...효기라...그건 제가 지금 대강 봤는데 못 찾았습니다. 이건 시간을 좀 두고 살펴봐야할 것 같네요.

아~그리고 고구려가 백제를 누르고 차지한 것이 중국에 대한 인삼교역 독점권이었다...는 것. 어떤 사료에서 나온 건지 좀 알려주셨으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차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차, 인삼, 약재에 대한 책이랑 사료를 죽 봤는데 그런 사료는 못 봤습니다. 물론 고려인삼, 백제인삼이 중국인들에게 아주 인기가 높았다는 것은 알지만 인삼교역 독점권을 두고 양자가 다퉜다고 볼만한 정황근거는 찾지 못 했거든요. 흐음. 암튼 아주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마지막 문단은 고구려는 단순한 농경국가가 아니었다...라는 걸 말씀하시려는 것 같은데 저 역시 동의합니다. 단 고구려의 여러 요소(수렵민족적, 유목민족적, 농업민족적, 해양민족적 등등)가 있는데 저자는 전쟁사라는 분야를 다루면서 유목민족적인 면을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수렵민족적인 것도 고구려 초기를 설명할때를 제외하고는 그닥 책 구성의 전체적인 부분에서 중요한 면을 차지하는 것 같지 않고요. 그래서 그런 식의 조금 치우친 서술이 안타깝다고...서평에 썼던 겁니다.

아~마지막으로 저는 단순히 고구려는 황제가 지배하던 황제국이었다...라는 식으로 고구려를 제국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 혹시나 해서.

암튼 이번 기회에 이런저런 토론을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이런 적이 처음이라서요. 아~혹시 육사박물관 관련 논문들은 어디서 구하시나요? 국회도서관? 혹시 이런 아이템을 구할만한 좋은 싸이트를 알고 계시면 추천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 그럼 이만~날씨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이미 군사적으로 조선의 허약함을 여실히 드러냈던 7년여의 조-일 전쟁. 이후 조선은 절치부심 국가를 재건하지만 목적없는 군사력 회복은 허공에 쏘아대는 화살과도 같았다. 1차 조-청 전쟁(정묘호란)때 한차례 곤혹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그로부터 9년 후, 2차 조-청 전쟁(병자호란)을 맞이하여 그 허약함을 또 한차례 여실히 드러냈다. 얼마전 온 몸에 페인트를 뒤집어쓴 삼전도비가 전쟁의 결과물이다. 치욕스런 삼전도에서의 항복 의식. 과연 전장터였던 남한산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것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

이미『칼의 노래』와『현의 노래』에서 세부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인물과 심리묘사를 보여줬던 김훈은 이 책에서도 그의 장기를 재인식시켜주고 있다. 주인장이『칼의 노래』에서 보여줬던 이순신의 섬세한 내면묘사와는 조금 다른 스타일의 내면묘사가 소설 속에 등장한다. 이제는 이순신 하나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이라는 철벽을 사이에 둔 여러 사람들에 대한 심리묘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멍청이 임금 인조(하지만 소설 속에서 인조는 상당히 줏대있는, 그러면서도 왕의 위엄을 잃지 않는 임금으로 나온다)와 영의정 김류, 예조판서 김상헌, 최명길과 이시백,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마치 그 당시를 재현한 영화 한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저자는 다양한 시각에서 여러 인물들을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을 1636년 12월 14일~1637년 1월 30일까지의 조선으로 안내하고 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현실과 명분의 대립에서 찾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독자들을 안내할 뿐, 이렇다 저렇다 결론짓지 않고 있다. 실천 불가능하지만 반드시 조선이 버리지 말아야 명에 대한 의리, 오랑캐에 대한 비복종. 성문을 열고 항복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만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사대부들의 고집스러움에 고통받는 것은 남한산성 내의 백성들과 조선팔도의 백성들이리라. 김상헌이 성밖으로 내보내 정황을 살피게 했던 서날쇠가 대표적이리라. 조정은 해준게 아무것도 없지만 그는 무던히 일어나 임금과 사직을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럼에도 일국의 예판이라는 자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사히 다녀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치사하고 비열한 고관대작의 오만함이 꼴배기 싫지만 그럴 수 없는 장면이었다.

마치『조선왕조실록』을 꺼내 한장 한장 넘기는 듯한 기분이다. 성안에 갇혀있는 동안 저자는 성 안팎을 넘나들며 너무나도 자세히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었다. 주인장은 한때 인기를 끌었던 소설『미실』을 보면서『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을 했었는데 주인장의 그런 평을 빗대어 그럼 이 책은 어떻느냐~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조선왕조실록』을 정리해 나열한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저자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렇게 그해 겨울,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었다고 거듭 말했는지도 모른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 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 하고, 이뤄지지 않아서는 안 될 결과가 일어났다. 그 해 임금이 그 곳에 있던 시기에 말이다.『미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을 꼽으라면 주인장은 '여운'을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여운을 남긴다. 독자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면서 어떤 답을 내리게 하지 않는다. 계속 사색하게 한다. 그래서 주인장은 김훈의 책을 즐겨 읽는다.

특히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내내 작가의 관점은 백성들에게서 떠나질 않는다. 흔히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대청항쟁에 대해 이야기할때 나오는 주화파와 주전파의 대립도 이 책에서는 여러 구성요소 중 하나일 뿐이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가장 고통받고 가장 큰 희생을 치루고 가장 노력했던 민초들임을 저자는 은연 중 내비치는 것 같다. 임금이 먹을 수라상에 올릴 반찬이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은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 하고 성안에서 병사와 관리와 임금을 보필할 민초들의 삶은 점점 더 힘들어지기만 한다. 벤뎅이젓갈 하나에 성안이 난리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진다. 꼴에 문명국의 임금으로서 비록 적군이지만 오랑캐 장수에게 내린다고 새해에 음식을 보냈다가 수치스럽게 퇴짜맞는 장면에서는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이 정도 상황에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다는 말인가. 너라는 인간은! 인조~오!! 분노가 치밀고 주먹이 쥐어질 정도다. 그 상황에서 주전이나 주화니 떠들어대는 한심한 작태가 우습다. 저자는 어느새 주인장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삼배구고두. 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의식이란다. 한국사에 이처럼 치욕스런 삶을 살았던 자, 또 있었을까. 부끄러운 역사면서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다시는 되풀이되서는 안 되는 순간이다.

주인장은 저자가 이렇게 자세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에 대해 대단하다고 말하고 그칠 수가 없었다. 저자도 한국인인데...분노하고 치가 떨리지 않았을까? 어떻게 그 감정을 억누르고 냉정한 필치로 이렇게 묘사할 수 있지? 저자의 주관적인 평가나 개인적인 감정은 책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무덤덤하게, 냉정하게 당시의 상황을 마치 남 이야기하듯 그려내는 저자가 대단하게 보였다. 그래서 더욱 더 책이 전하는 메세지가 주인장에게 강하게 전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단하다...

한번쯤 꼭 읽어보길 권하는 책이고 싶다. 금년 하반기 들어 최고의 책을 꼽으라면 주인장은 아마 이 책을 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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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와 패배 클라시커 50 9
볼프강 헤볼트 지음, 안성찬 옮김 / 해냄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오늘 조금 특이하면서도 재밌는 전쟁사 책을 하나 소개할까 한다.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했고 전산학강사와 자유기고가로 활동했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전쟁사를 독특하게 소개하고 있다. 

먼저 그는 정통(?) 전쟁사학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그의 문체에서는 자유분방함이 묻어 있었다. 전쟁을 간단하면서도 요점만 짚어서 언급하는 방식이라든가, 마지막 부분에 저자 자신의 간단한 비평(분석이 아닌)을 적어놓는 것 등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롭게 책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다양한 연구성과를 섭렵하여 객관성을 보강하였는데 여러가지 전쟁에 대한 견해들을 소개하고 정리만 할뿐, 자신의 전문지식을 활용해서 어렵게 책을 써 나가지 않았다. 그 점이 어떻게 보면 세기의 중요한 전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로 하여금 부담이 적게 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각 장은 4~5쪽의 적은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점들 때문에 이 책은 전쟁사를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도판과 도면들이었다. 전쟁의 흔적과 전투 장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도판, 도면이 300컷이나 실려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전쟁을 소재로 삼은 유명한 미술작품들이 상당수 등장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물론 제1 · 2차세계대전으로 넘어오게 되면 사진이나 기록영화, 엽서, 영화의 한장면 등이 자주 소개되었지만 고대 및 중세시대 전쟁에 대해서는 여러 화가들의 미술작품을 소개하고 있어 쉽게 접할 수 없는 자료들을 많이 접할 수가 있다.

그와 더불어 독특한 점을 하나만 더 꼽자면, 전쟁을 묘사한 예술작품들, 즉 영화나 책, 음악 등을 소개하고 있어 이 점이 주인장에게는 가장 마음에 들었다. 흔히 알고 있듯이 역사를 영화나 책 등으로 재현해낸 작품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널리 사랑을 받아왔다. 가장 최근까지도 주목받았던 스파르타군의 테르모필라이 전투라든가(『불의 문』이나 영화〈300〉에서 알 수 있듯이), 대표적인 고전으로 꼽히는 트로이 전쟁(브래드 피트의 매력이 한껏 발산된)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파트가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렵고 다소 이해하기 난해한 전쟁에 대해 보다 쉽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특히 주인장은 여기서 소개된 전쟁영화를 다운받아서 보거나 책에 나온 박물관 싸이트나 책 등을 검색해서 자료를 얻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 점이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이라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특징은 각 장마다 마지막에 전쟁의 진행과정과 역사적 영향 등을 요점정리식으로 정리해놨다는 사실이다. 각 전쟁에 대해 역사적 배경, 시기, 장소, 목표, 전쟁 상대 및 지휘관 및 무기, 손실, 승자, 전투진행과정(상당히 정확한 것은 일자와 시간까지 표기), 평가 등의 항목으로 나눠서 한쪽에 요약정리를 해놓고 있었다. 마치 전쟁사 관련 교과서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지금까지 여러 전쟁사 서적을 봐도 이처럼 간결하면서도 요점을 짚어서 정리해놓은 책은 보질 못 했다. 아~물론 그렇다고 기존의 다른 서적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주인장은 지금 저자가 아주 독특한 구성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전쟁사 책을 썼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다만 아쉬운 점을 꼽자면 제목은 역사를 바꾼 세기의 전쟁 50이지만 주인장이 보기에 각 전쟁들을 구분한 기준이 애매모호하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뭐 수백년만에 중국을 통일한 거대제국 수-당과 겨룬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겠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부터 저자는 일관되게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전쟁을 언급하고, 마지막에는 1 · 2차 세계대전을 언급할 뿐이었다. 물론 세키가하라 전투도 한 파트를 장식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전쟁의 주 전장은 서구 열강을 벗어나질 않았다.

즉, 50개의 주요 전쟁을 구분하는 기준이 모호하여 그야말로 시대와 역사를 구분하고 변혁을 가져올 정도의 '결전'을 소개하지 못 하고 있는 듯 했다. 대표적인 예로 그리스 내에서의 패권 다툼인 레욱트라 전투(테베와 스파르타의 대결)를 투르 & 푸아티에 전투(이슬람교의 물결을 막아낸)나 아쟁쿠르 전투(기사시대의 몰락을 가져온), 세키가하라 전투(에도막부의 등장에 결정적 기여를 한), 노르망디 상륙작전(독일제국에 결정타를 날린) 등과 나란히 소개한 것이 그러했다. 차라리 레욱트라 전투보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해서 소개하는 것이 더 적합할 듯 싶었다. 이렇듯 저자는 말로는 세기의 주요 전쟁 50이라고 했지만 따지고보면 이런저런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전쟁을 선정해놓았다. 

또 중간에 도판이 잘못 삽입된 점 등을 빼면 전체적으로 상당히 재밌고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정통 전쟁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책은 전반적으로 어렵거나 이해하기 난해한 군사용어로 도배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독특한 구성과 재미있는 내용으로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어 상당히 좋은 개설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에 대해 가볍게 알고 싶다면 주인장은 이 책을 한번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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