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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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그리고 적


적을 만들다, 움베르토 에코, 2014.


  제목은 기억하기에 확실한 우월을 지닌다. 에코의 에세이가 다루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읽은 시간이 지나 기억에 떠올리는 건 역시 제목 <적을 만들다>인 것을 보니까.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뉴욕에서 파키스탄 택시 기사로부터 이탈리아의 적은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적이 없다 답한 에코는 다시 생각한다. 이탈리아가 지닌 불행 중 하나가 적을 두지 않은 것이라고 말이다. 위와 같이 ‘적’이 지닌 가치와 ‘적’의 필요성을 논하는 에코의 의견은 오랜 역사를 통해 실례로 뒷받침되어 왔다. 하지만 ‘적’이란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해주지 않는다. 필요와 가치를 다하기 위한 ‘적’이란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 있다. 

  적을 만들지 않는 삶을 찬양해 왔던 것은 거짓이고 속임수였다. 항상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적’에게 기생해왔던 것은 정치였다. 아니 권력이던가. 어쨌든 북한이란 ‘적’을 항상 필요로 했던 권력을 떠올리면 에코의 의견에 동감하게 된다. 누구를 ‘적’으로 두느냐가 정체성을 확실히 보여준다는 것을.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폭넓은 유연성을 지니는데, 베로나의 스킨헤드족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자신들을 식별하기 위해 그룹에 속하지 않는 자라면 누구든지 적으로 겨냥한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우리를 위협하는 적을 거의 자연적인 현상의 측면에서 규명하는 일이 아니라, 그 적을 만들어 내서 악마로 만드는 과정이다. 


  또한 세상이 수초도 지나지 않아 그것을 요구한다. no야 yes야? 이 편이야, 저 편이야? 묻고, 물음조차 없이 프레임을 씌워 제 기준에 맞춰 타인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단답형의 말 한마디로 속전속결로 이뤄지는 타인에 대한 평가는 어떤 가치를 위해 싸우는 것일까. 난무하는 혐오의 단어와 예의를 상실한 말들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이루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님에 틀림없다. 적이 생겨나고 있음은 확실히 불행의 조짐이다. 작은 잽을 날리며 곳곳에서 들끓는 적. 한때는 이런 적들을 한방에 훅, 날릴 수 있으리란 기대가 가득했는데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서인지 ‘적’이 쌓여간다.  

    

우리의 적이 되는 대상은(미개인들의 경우처럼) 우리를 직접 위협하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를 위협하지 않을지라도 누군가에 의해 위협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자들이다. 따라서 우리와 다르다는 것은 그들의 위협적인 태도에서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다름 그 자체가 우리가 찾는 위협의 신호인 것이다.

 

   가치가 상대적이라고 한다지만 절대적 가치는 있는 법이다. 지켜야 하는 걸 지키는 것과 없어져야 하는 것을 없애는 것, 어느 것이 더 힘든 일일까. 새삼 ‘적을 만드는 일’보다 쉬운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달력 한 장 남은 2018년, 없어야 할 것이 소멸하는 것을 보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가. 비에 씻겨가지도 않을 적이 계속 만들어진다. 쌓여만 간다. 한해의 마무리를 편안하게 하고 싶었건만 요즘 끊임없이 내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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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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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복과 인복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문학동네, 2018.


  소설속 인물을 현실로 끌어들여와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생각하는 일은 아주 오래전에 끝난 것 같다. 언제부턴가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름은 K이거나 M이거나 또는 L이거나 그랬다. ‘J 스치는 바람에 노래 가사처럼 나만의 J를 불러낼 수는 있었겠지만 그런 K, M, J는 익명과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뚜렷하게 이름이 기억되는 작품이 있었던가.

  그 이름들을 수식하는 말에 의해 정체성이 확보된 각각의 주인공들은 고유명사였지만 결국 보통명사가 되어 주위를 맴돈다. 강민호도 권순찬도 최미진도 한정희도 나정만도 박창수도 김숙희도 반경 1km 안에 분명 살고 있을 것 같다. 가까이에 그들이 살고 있기에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삶이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 그들 때문에 잘 살아가려는 내 삶이 방해를 받는다. 타인을 배려하고 약자를 이해하며 더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누구에게나 친절하려 ’애쓰는’ 나의 노력이 끝날 것 같은 기분.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알게 해준 것은 권순찬과 한정희다. 


우리는 왜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지에 대해서.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정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죄와 사람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우리의 내면은 늘 불안과 절망과 갈등 같은 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법인데,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 자신이 다 거짓말 같은데……  [한정희와 나]


  친절, 윤리,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 말이 주는 무게와 권위에 눌려, 경직된 채로 기계적으로 행하고 있음을. 감정이라는 것이 진심이 녹여든 마음은 어떻게 다를지, 어떤 형태로 이뤄지는지를 말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느끼는 당혹감 또한 강박적인 윤리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해와 친절의 한계를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기계적 친절은 나를 더 옥죌지도 모른다. 또한 그 형식적·기계적 배려를 느끼는 이가 결국은 나를 멀리할 지도 모르겠다.


    왜 어떤 사람은 살인자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정상이 되는 것인지.

    왜 어떤 사람은 수치를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염치를 생각하는지.

    나는 지금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


  소설 속 이름들은 윤리적이려 하는 나를 방해하는, 시련을 주는 인물이기도 하면서 윤리적이라고 자부하는 나에 의해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들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이해가 힘들었던 김숙희에 대해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마음과 마음이 오고가지 않은 과장된 친절이 배려가 불편함을 줄 수 있는지 나아가 모욕으로 다가올 수 있음에 대해서도.

  감당할 수 없음에도 거절하지 못하는 탓에 일을 쌓아놓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한때 내가 가장 많이 듣던 말은 일복은 많고 인복은 없다였다. 강민호, 권순찬, 김숙희 등등이 하루 걸러 내게 뭔가를 부탁했고 많은 일거리가 내게로 왔다.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성향으로 인해 힘겨워 턱턱거리면서 나를 탓하다가도 상대방을 탓한다. ‘미안한데’, ‘정말 미안한데’, ‘이러면 안되는 걸 알지만’으로 시작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거절의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거절의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과한 부탁을 하지 않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론 과하고 때론 습관적인 부탁의 말을 하는 자의 윤리를 생각했다. 거절이라는 불친절한 말 한마디를 하는 것을 그토록 꺼리며, 어떤 불편함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은 친절의 과장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에도 불편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배려였을까, 이기였을까. 결국 내게는 힘겨움이란 결과만을 주었던. 그래도 여전히 내가 해야 할 거절보다 그들이 하지 말아야 부탁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내가 있다.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모욕을 당할까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에 대해서.

나는 그게 좀 서글프고, 부끄럽다. [최미진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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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되는 페미니즘


그녀 이름은, 조남주, 다산책방, 2018-05-25.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누군가의 글은 마음을 끌어당기고 누군가의 글을 마음을 닫아버리게 할까. 이런 경험을 하다보면 역시 글을 쓰는 이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글잘쓰는 이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일 지도. 한편으로는 ‘너는 바른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싸가지 없게 들리냐’와 같은 말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책이 하고픈 말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는다. 82년생 김지영 역시도 그렇다. 하지만 같은 말을 전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내가 왜 이 책을 읽었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다르다. 이 책은 왜 소설인가. 왜 소설이어야만 했는가에 대해 나는 아직도 물음을 갖는다. 록산 게이의 소설이 나왔을 때는 록산 게이가 그려내는 소설은 어떨까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졌고 록산 게이가 주장하는 이야기를 다른 형태로 잘 그려냈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 방식이 소설보다는 경험을 녹여낸 에세이가 더 좋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소설이 나쁘진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이지만 다른 형태로, 확고하고 강하게 여성이 처한 현실과 극복방안에 관한 부르짖음을 타인의 경험을 덧대어 은유와 상징으로 엮어낸 『어려운 여자들』도 나쁘지 않았다.

  최근 100만부를 돌파했다는『82년생 김지영』작가의 이후의 책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또한 같은 이유로 읽지 못했던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각이 정지되었다. 할말이 없다가 먼저였지만 곧 록산 게이의 소설이 생각나면서 이 책에 대해 할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별론데가 아니라, 이게 뭐지였다.

  얼핏 책 제목을 보면서 생각하긴 했지만 어쩌면 다르지 않은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난 이 책에 대해 상당한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을까. 소설인가? 왜 작가는 이런 형태로 이 책을 쓰며 소설이라 이름하였을까. 차라리 소설이 아니었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삶을 실제 취재했으므로 그 자체로 이야기는 소중한 경험이고 생각거리를 준다. 하지만 소설에 기대하는 것이 어디 정확한 내용의 전달만을 바라겠는가. 어쩌면 82년생 김지영에서 느꼈던 바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회수하지 못한 마음들이 이 책을 통해 더 느껴졌다.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작가가 우리 사회에 불러일으킨 반향은 매우 긍정적이다. 따라서 그 문제의식을 지속하고 있는 작가에게 더욱 박수를 보낼 일이다. 하지만 문제의식을 좀더 잘 형상화했으면 어땠을까. 책을 읽고 있는 내내 내가 무얼 읽고 있는가, 생각했다. 그녀들의 삶에 공감이 되어야 하는데 조금은… 딴데로 정신팔려 버린. 문학은 무엇인가와 소설과 기사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소설과 인터넷글에 대해서 생각했다. 최근에도 별별 사건이 벌어지며 특히 여성혐오가 극렬한데 개인적인 감정에 치우친 글, 잘못된 정보에 기대어 올린 상황의 한 일면만을 보고 느끼는 글이 생각났다. 많은 이들이 등장하며 나열된 글은 그만큼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과 차별은 연령과 처한 환경을 가리지 않고 끝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다만. 그렇기에 이 글은 르포여야 했다. 소설이 아니라. 문학에 대한 내 생각이 너무 고리타분하여,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인지 이 ‘소설’을 보고 있으면 글을 쓴다는 것에 회의감이 든다.

  이 책이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보이게 할까를 생각했다. 페미니즘이 소비되는 형태에 대해 생각했다. 한국사회는 오랜 동안 페미니즘에 무심했다가 갑자기 왜곡되게 흐르고 있다. 언젠가부터 페미니즘은 사회문제를 인식하는 언어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언어가 된 것 같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시스템에 의해 차별과 억압받은 이들의 투쟁이자 생존의 언어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의해 소비적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이 소설이 그에 대한 대표가 아닐까 한다. 그것에 기대어 기획된 듯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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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여자들
록산 게이 지음, 김선형 옮김 / 사이행성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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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쓸데없는 여자들에 대하여


어려운 여자들, 록산 게이, 2017.


  록산 게이의 소설.

  어려운 여자들은 여성을 보는 입장에서 어렵다는 것일까. 여성들 스스로가 세상을 보는 일이 어렵다는 것일까. 이 어렵다는 말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그 어떤 경우라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록산 게이는 그동안 에세이에서 보여준 외침들을 21개의 단편소설로 묶어 이 책을 썼다. 줄곧 록산 게이가 제기한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힘겨움이 소설화되어 있다. 지금까지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했다면 이 책에는 개인에서 더 확장된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형식적으로 소설이라는 장르를 택하고 있지만 익숙하게 봐온 소설에서는 좀 비껴난 스타일로 자신이 줄곧 전한 메시지를 담아낸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록산 게이의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더 좋다. 소설보다는 더 직접적인 메시지, 그 어투가 더 좋다.

  어려운 여자들, 삶을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끝없이 놓이는 여자들의 삶은 개인에겐 특별(?)하지만 여성들 전체에게 평범화된 일이라 이 일들은 쉽게 잊히고 또한 쉽게 반복된다. 힘겨움을,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하나의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해서 그 유사한 상황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기에 여성들의 삶 자체에 늘 어려움이 깔려 있다. 그리고 카인의 표식처럼 명명된다. 헤픈 여자, 불감증의 여자, 미친 여자…. 여자일 뿐인 여자들….


어린 소녀였을 때 우리 아버지는 여자들은 별로 쓸데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아버지의 죽음에 부쳐]


  나는 지금 어리지 않지만 수많은 아버지들이 여자들은 별로 쓸데가 없다고 자주 말하는 것을 듣는다. 하지만 그들은 늘, 여자들을 필요로 한다. 어리거나, 젊거나, 늙었거나 가리지 않는다. 그 상태 그대로 그들은 쓰임을 달리 한다. 잘 모르는 모양인데 엄청, 쓸모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납치도 불사한다.

  [언니가 가면 나도 갈래]의 어린 두 자매가 피터에게 끌려가 당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매에게 피터는 가석방을 앞두고 새롭게 거듭났다며 용서를 구한다. 가석방을 받기 위해 자매의 용서가 필요하니 얼마나 여자들이 쓸모있는가. 두 어린 소녀를 납치하여 오랜 시간 성적학대를 일삼아 온 피터가 가석방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굳이 놀랍지 않다. 한국의 법은 가석방 받을 형량이 없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그것을 너무 많이 봐 온 까닭이다. 이 단편에서 더 놀라는 건 동생의 덤덤한 말이다.


나는 열 살이고 캐롤리나 언니는 열한 살이었다. 우리는 피터 씨한테 모든 걸 구걸했다. 음식, 신선한 공기, 단 한 순간만 뜨거운 물을 혼자 쓰게 해달라고도 빌었다. 우리는 자비를 구걸했고, 이러다가는 완전히 몸이 망가져버린다고, 제발 잠깐만 쉬게 해달라고도 빌었다. 그는 우리의 애원을 묵살했다. 우리는 애원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도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 -[언니가 가면 나도 갈래]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를 가정하여 걱정할 것이 아니라 걱정하지 않기 위해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변화시킬 방법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는데도 예의와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언제나 행동은 과격한 것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 갈색 피부의 여자를 ‘내 눈 아래’로 보지 않으면 된다.


당신 어머니는 나를 미워하지 않지만 당신이 아버지와 장작을 패러 나갔을 때 나를 따로 불러 세운 적이 있어. 거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와인 한 잔을 주셨지.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불안하게 의자에서 들썩거리며 한 손을 내 무릎에 얹고 세상의 모든 백인 엄마가 당신의 귀한 백인 아들이 갈색 피부의 여자와 어울릴 때 하는 말을 했어. 우리가 낳지도 않은 아이들이 걱정된다면서, 그 애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겠느냐고, 또 당신은 얼마나 힘들겠느냐고 말했어.


  [물, 그 엄청난 무게]는 태어날 때부터 물을 몰고 다니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뭔가 신비로운 것 같지만 비앙카를 따라다니는 물은 환상과 신비로움 아니라 삶을 그늘지게 하고 힘겹게 하는 족쇄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비앙카처럼 물과 수해가 따라다니는 삶을 살고 있다. 라 네그라 블랑카도 예외는 아닌데다 또다른 무게가 따라다닌다.


물과 수해가 비앙카를 따라다녔다. 눈을 들면, 눈을 들어 보이는 곳마다 수해가 따라다녔다. 물 얼룩이 점점 더 시커멓게 번지고 마른 벽과 유리섬유 패널을 가로질러 꿈틀거리면서 썩은 자국과 곰팡이를 남겼다. 굵은 빗방울이 그녀의 팔뚝에, 목에, 이마에, 아랫입술에 떨어졌다. -[물, 그 엄청난 무게]


  [라 네그라 블랑카] '흰 피부의 흑인 여자'를 뜻하는 스페인어다. 소설엔 흑인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여성이며 흑인이라는 이유로 인한 이중의, 가중된 차별은 록산 게이가 겪은 일이니 자신의 투사일 것이다. 또한 거의 모든 흑인 여성들의 삶이기도 하다. 여성이 아닌 그들은 여성의 몸을, 자궁을 탐하면서 당연하게도 그것을 파괴하는데 힘쓴다. 소설속에 쌍둥이나 자매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록산 게이는 파괴된 몸과 마음을 알아주고 위안이 되어 주는 존재로 쌍둥이들을 내세운 것은 아닌가 싶다. 함께 고통받으며 치유하기 위해 함께 힘을 낼 수 있는 존재. 비록 내가 당하여 죽어버릴지라도 같은 몸과 마음의 고통을 아는 ‘정신을 집중하여 진술할 수 있는 존재’로서, ‘의식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존재’로서, 이 세상 모든 여성들이 당하는 고통의 피해자이자 목격자이자 증언자로서의 존재. 고통을 참아가면서 의식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소설 속 그녀가 록산 게이가 전하고픈 말일 것이다.


윌리엄의 주먹이 세라의 턱을 강타하자 날카로운 고통이 뼈저리게 가라앉는다. 뜨거운 눈물이 얼굴에 줄줄 흘러내리지만 그녀는 참으려고 애쓴다. 자기 몸을 덮친 윌리엄의 물컹한 몸뚱어리 너머에 정신을 집중하려 애쓴다. 나중에 진술할 수 있도록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 [라 네그라 블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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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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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ma, just killed a man


빨강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민음사, 2018.


  『빨강 머리 여인』은 오이디푸스 신화와 페르시아의 고전 『왕서』의 재현이다. 익숙한 이 이야기를 에두르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은 직접적으로 이 책과 이야기를 거론한다. 세상엔 이 신화와 고전만이 있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인물들의 삶을 지배한다. 어느 하나 이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들은 자연스럽게 신화와 고전 속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하고, 말하고, 토론하고, 연극으로 만든다. 너무나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이 이야기들을 대면해 식상할 법한데도 저자가 만든 이야기 구조에 금방 빨려든다. 익숙함이 주는 힘인가. 어쨌든 어쩌면 뻔하디 뻔한 신화를 따라가는 이야기가 같은 결말로 갈 것인지, 다르게 갈 것인지, 같다면 그 짜임새는 어떻게 만들어 놓는지가 궁금해진다. 수없이 같은 이야기를 함에도 특정 작가의 책에 더 손이 가는 것은 이처럼 익숙한 이야기임에도 풀어내는 힘에 의해 익숙함을 다르게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터키에서 재현된 이야기는 이스탄불과 왼괴렌을 오간다. 이야기의 중심에 선 젠이 학비를 벌기 위해 우물을 파는 일을 하러 떠난 곳, 그곳이 이스탄불에서 30마일 떨어진 왼괴렌이다. 젠은 기술자 우스타에게 우물파는 다양한 방법을 배우며 또한 그가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그를 아버지처럼 따른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된 후 사라져 희미해진 아버지라는 존재를 젠은 우스타에게 느낀다. 마침 왼괴렌에서 만난 유랑 극단의 빨강머리 여인, 젠의 어머니만큼이나 나이 많은 그 여인에게 매혹을 느낀 젠. 젠은 사라진 아버지와 아버지같은 우스타가 있다. 젠이 오이디푸스의 운명이라면 아버지는 누가 될까. 빨강머리 여인이 그것을 알려 주려나.   오이디프스가 부친살해에 관한 이야기이자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페르시아의 고전 『왕서』는 자녀살해에 관한 이야기다. 젠의 운명은 쉬흐랍일까, 뤼스템일까.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는 반면, 쉬흐랍은 아버지에게 죽는다. 하나는 부친 살해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식 살해 이야기다. 

그러나 이 커다란 차이점은 공통점을 더욱더 강조한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에서도 그랬듯이 쉬흐랍 역시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몇 번이고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독자는 만약 쉬흐랍이 자신이 죽이려는 사람이 아버지인 것을 모르면 무고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죽음의 순간은 도무지 오지 않는다.


  무엇이든.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운명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야기라 말하기도 하고 ‘운명에 맞선’ 이야기라 하기도 한다. 이 상반된 ‘운명’에 관한 해석이 무엇이든 개개인에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 마치 가벼웁게, 재미삼아 본 점괘에 맞추어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왜 거듭 불온한 것에 대해 끌리는지, 자기암시처럼 계속 그것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까닭이 정말 운명이라서일까. 자기충족적 예언. 예언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힘, 어떤 운명적 힘에 기대고픈 마음의 발현인 걸까.

  새삼 부친살해가 서양에선 다양한 형태의 예술로 형상화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한국을 생각하니 예술은 가물가물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나오는 부친살해에 관한 기사만 떠오른다. 최근에도 이런 기사는 계속되었다. 부친살해를 성장이라는 상징과 은유로 얘기한 많은 예술작품이 무색하게도 현실에선 아버지를 살해한 자가 ‘성장’할 수는 없다. 가정폭력범 아버지라면 모를까. 


이성을 잃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푸스와 아들을 죽인 뤼스템이 무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 관객들은 소포클레스의 연극을 관람할 때 오래전에 마흐무트 우스타가 나에게 말했듯이 오이디푸스의 죄악은 아버지를 죽인 것이 아니라 신이 그를 위해 정한 운명에서 도망치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식으로 해석하면 뤼스템의 죄악 역시 아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룻밤의 정사로 아들이 생겼고, 이 아이들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 Mama, just killed a man / Put a gun against his head이라는 가사가 부친살해로 인식되어 금지시켰다, 전쟁에 징집된 소년병이 원치 않는 살인에 대한 죄책감을 호소하는 것이 군사정권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였다고 인식되어 왔는데 어떤 기사에는 보헤미아가 공산권 국가의 영토이므로 ‘보헤미안은 안돼!’가 되었다고 한다. 어떤 것이 정확한 이유이든 이 노래가 1974년부터 1989년 군사정권에 의해 ‘금지곡’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금지곡이라는 명명 자체가 주는 강력한 메시지. 국가는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아버지였는가!


“아버지가 우릴 떠났어!”

“그렇다면 너한테 아버지 노릇을 하지 않은 거잖아. 너도 다른 아버지를 찾아. 이 나라에 아버지는 많으니까. 국가라는 아버지, 신이라는 아버지, 장군 아버지, 마피아 아버지……여기서는 아무도 아버지 없이 살지 못하니까…….”


  소설에서 이 단락을 보는 순간 나는 철저히 아버지를 죽여야만 성장하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떠난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생각을 얼핏 했다. 빨강머리의 여인이 선택한 빨강머리처럼 의도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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