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파친코 1~2 세트 - 전2권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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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타국


파친코. 이민진, , 문학사상사, 2018.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들이 토해내는 외침은 증오도 원망도 아니다. 어쩐지 이 말은 체념 같기도 하고 그 무엇이든 견디고 이겨내리라는 의지 같기도 하다.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파친코1910년부터 1989년을 배경으로 한다. 선자의 아버지 훈이에서 선자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까지의 4대의 삶이 펼쳐진다. 1부는 부산 영도 바닷가에 살던 선자가 일본으로 건너가기까지의 이야기로 급박하게 읽힌다.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인물이 처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벗어나기를 응원하며 보게 된다. 2부는 일본생활이 중점적으로 다뤄지는데 다소 더디게 읽힌다. 등장인물이 늘어나는 만큼 고민이 짙게 드리워지는 까닭이다. 인물마다 맞닥뜨린 라는 존재의 자각이 내게도 여러 갈래의 생각과 감정을 안긴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선자는 고생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의 삶이 고생이라는 말 외에 다른 게 없는가,라고. 노년의 선자는 그녀의 삶에도 아름다움과 영광이 반짝거리는 순간이 있었노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무엇을, 어느 순간을 그렇게 볼 수 있을까.

  그녀는 평생 동안 다른 여자들한테서 여자는고생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다. 그 말을 하는 여자들 역시도 고생에서 벗어나지 못했겠지만 어쩐지 어린 소녀로, 아내로, 엄마로고생하다가 죽는 삶에 대한 순응이 느껴진다. 고생이란 기차에서 내려올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건가. 양진과 선자 그리고 경희, 그들은 벗어날 수 없는 그 기차를 탄 여자이다.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생계책임은 남성, 아버지의 역할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은 여자. 선자의 가계도를 그려보면 아버지들은 장애를 가졌거나 병자다. 선자의 아버지 훈이는 언청이이며 절름발이다. 모자수의 아버지 이삭은 결핵을 앓는다. 노아의 아버지 한수는 아버지라 불리지 못한다. 그 누구의 아버지도 되지 못한 요셉은 무능력해져가며 피폭자로서 오래도록 병상에 있게 된다. 분명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이긴 했지만 일찍 사망하거나 감춰진 존재가 되거나 변해간다.

  이런 상황에서 선자의 어머니 양진과 선자, 요셉의 아내 경희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전면에 선다. 겨우 끼니를 떼우는 정도가 아니라 삶이 안정될 수 있도록 밖으로 나가 적극적으로 돈을 번다. 이때의 여성들은 전통적인 역할에 갇혀 있지 않다. 어쩌면 아내와 어머니로서 모든 일을 해내야 한다는 강한 일념으로 더욱 더 치열하게 일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경희는 어머니로서의 삶을 바랬지만 아이를 갖지 못하고 점점 피폐해지는 남편과 선자의 아이들을 돌보며 살아간다. 지식인 여성으로서 하고픈 일과 여성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한 남자의 구애를 밀어낸 경희의 삶은 결국 선자의 삶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선택일 수밖에 없었던가 싶은 경희의 삶 또한 고생일 수밖에 없는 여자의 삶, 그 자체이다.

  하지만 선자의 아주버님이자 경희의 남편 요셉은 다르다. 전통적인 역할인식에 갇혀 가족의 가장으로서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에 자책하고 탄식한다.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제수가 하는 일에 반대한다. 요셉은 생계는 남성 책임이라는 명분에만 치중한 채로 타인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가장으로 군림하며 가정의 모든 결정권을 쥐려 하며 여자들을 바깥으로 굴리며 일하게 했다는 비난을 감수하지 못한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가부장적 사고는 완고하며 변화하지 못한다. 요셉이 가진 신앙에 기대어도 이러한 인식은 변하지 않는다. 당시 서구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지식인으로 모순되고 잘못된 사회에 대한 변화를 강렬히 열망하며 변화에 대한 의지 또한 실행력으로 보여주리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요셉은 조국을 위해서, 위대한 이상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라 생각한다. 살아남아 가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셉은 가족이 함께 겪는 힘겨운 현실에서 자의식만을 붙든 채 사회변화에 무력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언청이 유전을 두려워하는 이들로 인해 순자의 아버지 훈이는 겨우 돈을 주어 양진과 결혼한다. 같은 이유로 선자 역시도 나이가 들어도 혼인을 청하는 이들이 없다. 이때 선자는 우연히 도움을 준 일본을 오가는 생선 중매상 한수를 만나고 임신한다. 하지만 한수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먹고 한수의 첩이 되길 거부한다. 평양에서 부산으로 온 이삭은 선자의 하숙집에 머물다 선자 모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결핵을 치유한다. 살아남은 이삭은 선자와 결혼하여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돌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여긴다. 그것은 이삭의 희생이자 임신한 선자에겐 구원이 된다. 그렇게 이삭은 자신의 형 요셉이 살고 있는 일본 오사카로 선자를 이끈다.

  일본에서 한수의 아들 노아와 이삭의 아들 모자수가 태어난다. 자손들은 모두 기독교식 이름을 갖는다. 노아, 모세, 솔로몬. 그러나 단 한번도 이름이 힘이 된 적이 없다. 종교가 그들 삶에 어떤 위로가 되어 주지 못한다. 요셉은 힘겨운 상황에서 가족들에게 권위를 내세우는 존재가 되어 갔을지언정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 암울한 시대 종교가 삶을 버텨내는 구원이자 타인에 대한 관용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전혀 이뤄지지 못한다. 기독교가 일본인의 의식을 좌우하는 종교가 아니기에 일본인에게 기독교인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들을 기대할 수 없다. 선자의 가족이 기독교인이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이삭이 선자와 결혼하는 이유를 만들어주는 용도로 보일 뿐이다.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간다 해도 더없는 고통의 삶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삭의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죽음도 이것을 보여주는 한 요인으로 보인다.

  모자수는 성경의 모세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하도록 이끈 모자수. 그는 가족들이 일본에서 차별과 모욕을 당하며 살지 않도록 이끌 수 있을까. 그가 파친코에서 일하게 되는 것도 신의 뜻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들이 겪는 모든 상황 하나하나에 의도가 있다고 할 지 모른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의 아버지 이삭은 믿었을지 모르나 살아서, 살아가야만 하는 다른 가족들에겐 전달되지 않았는지도. 모자수는 인생은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하는 파친코 게임과 같다고 생각한다.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간대도 모자수의 삶을 확실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다.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삶, 희망을 기대하는 것은 현재 불행이 잔뜩 굴러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좀처럼 불행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생의 아이러니란 삶 자체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어떤 일본인은 운명이라는 말은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의 게으른 변명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조작이 이뤄진 파친코 게임에서 선택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운명이란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의 변명이 아니다. 조작을 일궈놓은 이들이 책임지고 바로잡아야 할 잘못된 일일 뿐이다. 사람에게 행해지는 경멸과 차별도 조작의 한 맥락이 되지 않을까. 이유를 만들어 놓으면 그것 자체가 경멸과 차별의 이유가 된다.

 노아와 모자수의 삶이 부모와는 같으면서도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자와 경희와 요셉이 조선인임을 인식하며 살아온 반면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물을 수밖에 없다.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태어나 살고 있지만 각종 제도에서 노골적인 차별을 당하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경멸어린 시선과 모욕을 견디어야 하는 삶인데 더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가지는 것도 어렵다. 그나마 재력을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파친코이기에 이곳 사업장으로 조선인이 몰린다. 일본은 1952년 이후 일본에서 태어난 조선인들이 열네 살 생일이면 거주 허가를 받아야 하고 3년마다 등록증을 갱신해야 한다고 정했다. 솔로몬은 이 운명에 속해 있다. 일본인은 질서이자 법이라 하겠지만 범죄자에게 적용되는 이 절차를 적용받아야 하는 조선인에게 그것은 조작된 파친코 게임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삶이 결코 공정하게 이뤄질 리 없는 확증 같기만 하다. 결과적으로 노아도 모자수도 솔로몬도 파친코에서 일한다. 그것은 선택으로 불리지만 선택지가 있을 때에 온전히 선택이라는 이름이 빛을 발하는 것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노아와 모자수가 일본에서 자이니치로서 겪는 차별과 모멸은 그들 삶의 방식과 태도를 결정하게 만든다. 노아는 열심히 공부하며 누구보다 뛰어난 학업성적을 유지하며 희망을 꿈꾸고 모자수는 자신에게 조롱을 일삼으면 패주는 등 자신을 대하는 방식 그대로 대응한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자 일찌감치 일하는 것을 선택한다. 노아도 모자수도 보통 이상의 노력과 열성으로 공부하고 일을 한다. 두 형제의 선택은 일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간으로 대접받기 위한 선택이다. 하지만 죽어라고 교육을 받아 일본인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져도 부자가 되어도 노아와 모자수를 한 인간으로 보거나 존경하는 일 따위는 없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금융권에 취직한 솔로몬 역시 일본인 상사에게 이용당하고 끝내 부당해고 당한다. 있어서는 안되는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일본인에게서 기대할 수 없다. 애당초 그럴 의도는 조선인이기에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인은 사람을 조선인이라는 존재성만으로 그들 입맞에 맞게 취급할 뿐이다.

자이니치’. 일본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노아와 모자수를 지칭하는 언어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일본사회에서 그 어떤 노력을 기울인들 구분하여 배제하기 위해 부르는 단어. 차별의 당위성이 마치 단어의 존재에 있는 듯이 자이니치라는 명명은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인의 정신을 파고든다. ‘당신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고 있나요?’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그것에 익숙해질 때보다 부정당하고 공격당할 때다. 이들을 극단의 상황으로, 하나의 답으로 몰고 가도록 이끈 자이니치라는 단어에는 조선인이기에 겪어야 하는 차별과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이라 생각하며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기에 느끼는 혼란과 억울함이 담겨 있다. 가령 솔로몬은 애인 피비가 일본이 조선인을 국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따질 때, 일본 정부가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화를 낼 때면 일본을 옹호하게 된다. ‘이상하게도그렇다고 했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말하고 사고방식을 익히며 성장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피비에게 일본편에 서서 옹호하더라도 자신이 당하는 부당한 처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의하지는 못한다. 오로지 부당함과 이해할 수 없음은 자신의 내부에서만 행해지는 전쟁이 될 뿐이다.

  매슬로우는 인간은 단계적 욕구를 가진다고 했다. 각각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건강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 생존의 욕구라면 점차 소속과 인정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 자이니치에게는 단계적으로 충족시켜가야 할 인간의 욕구가 박탈된 상태이다. 사회에서 건강한 사회인으로 살아갈 동력을 상실하게 한다.

  노아의 극단적 선택은 소속감과 인정의 욕구를 배제당하고 더 이상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처절함을 보여준다. 노아의 비극적인 선택은 자신의 친부가 한수이며 야쿠자라는 것을 알게 된 충격보다 자신의 정체성으로는 일본에 소속될 수 없다는 좌절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 어떤 재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사회에서 존경받을 수 없는 위치의 조선인 야쿠자의 피가 자신에게 흐른다는 것은 그가 욕망하는 욕구에 대한 완전한 단절로 여겨졌을 것이다. 가족 모두를 외면한 채 잠적한 노아를 십여년의 노력 끝에 순자가 찾아냈을 때, 노아는 자살한다. 제 아내와 아이를 두고 벌인 선택이다. 그것은 가족이 자신을 찾아냈을 때 이미 결심한 것이었다. 일본인으로 살며 가족에게서 철저히 떠난 노아가 가족이 자신을 찾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은 일본인이라는 외침이 되는 건가. 노아의 죽음은 충격적이었을지언정 노아에 대한 이해를 더해주진 못했다.

  소설 카테고리를 어디에 놓을지도 약간 고심한다. 소설은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한국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가는 한국계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간 한국계 1.5. 글은 영어로 쓰였고 번역되었다. 번역서이자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니만큼 미국문학이 맞는데 '한국인', 재미교포라는 말은 자꾸 '한국'쪽으로 당기라고 부추기는 것 같다.. 그러면서 생각해보면 파친코 속 등장인물들처럼 '재일교포'에 대해서는 확연히 '한국인'이란 말을 적용하는데 어색함을 느낀다. 이 무슨 편견이고 차별가득한 느낌일까.

  『파친코를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일본인에게 자이니치라고 불리는 재일동포에 대한 인식을 전환할 계기가 없었을 것이다. 강제로 끌려가 되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건만. 그럼 나는 그들을 재일동포로서 바라보려 한다, 이렇게 말하려니 뭔가 어색하다. 굳이 이런 다짐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내가 뭐라고 그들을 동포로 인정하겠다고 한다는 건지도. 이 생각 자체가 오만이다. 이 나라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행하는 갑질아닌가, 이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노아의 말이 떠오른다. 조선인이니 일본인이니 하는 국적에 신경 쓰지 않고 단지 자기 자신으로 있고 싶다는 그 말이…….

  사상가 성 빅토르 휴는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이와 같고 어디든 조국처럼 느끼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 어디든 타국처럼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사람이라고 했다. 어쩐지 강한 사람보다도 완성된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노아의 바람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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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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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일까 성격일까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김금희, 창비, 2014.


  그런 날이 있다. 한없이 센티멘털해지는. 때론 습관같고 때론 성격같은 그런. 센티멘털이란 한없이 축축 처지는 느낌이 들게도 하지만 무아지경으로 밝은 감정이 들게도 한다. 절대로 주위의 상황과는 상관없는.

 『너무 한낮의 연애』김금희 작가의 등단작이 수록된 첫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은 이런 인물들의 등장한다. 화자는 항상 나이며 2~30대로 주위의 상황을 관찰하며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기본적인 정서는 ‘센티멘털’. 급기야 등장인물이 말하고 만다.

 “제 나이 때마다 할 일이 있는데 감상적으로 굴지 마라.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이지.”

  이 단어에 ‘하루 이틀’이 붙음으로써 ‘나’는 ‘뺨을 한 대 올려붙이듯’ ‘가시 같은’ 느낌을 받지만 그 말은 ‘센티멘털’한 삶을 청산할 정도의 움직임을 줄 수 있는 말이었을까. 어느 때에 그 말은 쑥, 훅, 들어오는 비수같지만 센티멘털에 푸욱 푹 담겨진 어떤 삶들이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감도는 아닌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만큼 이들은 무력한 삶에 최적화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정말 습관일까, 성격일까.

  이십대의 삶은 취업과 연애가 최대 목표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것이 이십대 그리고 삼십대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일찍이 누가 정해놓았기에 그것에 도달치 못한 삶들은 쉬이 센티멘털해 질 수밖에 없는 건지. 소설 속 배경은 딱히 지금이 아니다.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축적된 환경이 목표를 성취하는데 장애가 되곤 한다. IMF와 정년보다 이른 퇴직한 부모님은 그의 자녀 세대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부모들 세대에 만든 빚이 자녀에게 전이되고 막막한 가정환경 속에서 이상적인 목표를 생각하기엔 막연해지기도 한다. 어떤 아버지는 루팽처럼 집을 나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어떤 아버지는 과하게 사업을 벌이며 어떤 아버지는 오래도록 병원에 누워 있다. 그래서 그들의 아이들도 방황하고 안정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 도시는 참 묘해서 어느날은 영원히 서울 시민으로 살 수 있을 듯하다가도 월급이 밀리거나 생활비가 떨어져가면 완강히 내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파도의 반대 방향으로 헤엄치는 것처럼, 물살을 세차게 가르면 가를수록 무언가가 나를 저만치 내보냈다. 혹은 인파를 헤치며 무언가에 쫓겨 달아나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렇게 개미굴처럼 이어진 서울의 골목을 내달리다보면 용케 내 이름으로 된 주소를 갖기도 하고, 나만큼이나 우왕좌왕하는 남자들과 연애도 하는 거였다. - 「릴리」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속 ‘나’는 어쩌면 지나친 낙관론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물한살 재수생인데다가 임신을 한 상황에서 ‘나’는 현재의 내 삶에 대한 인식보다 함께 임대주택에 살고 있는 인물들의 삶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나’뿐만 아니라 소설속 등장인물들은 항상 ‘나’의 상황과 병렬적으로 가족이든 타인이든 누군가의 삶을 겹쳐 놓는다. 그들의 삶은 형태는 다를 지라도 공통의 분모로 이야기하자면 상처와 난제에 몰린 삶이다. ‘나’의 상황은 타인의 상황에 빗대어 그 경중이 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타인의 삶을 통해서 내 삶도 보편적인 일상이라는 듯이 무심한,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이 어조. 그럼에도 센티멘털은 잔뜩 묻혀져 있는.


신호가 다시 들어왔지만 발을 떼지는 않았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고,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혹시 그것은 자신감일까. 시간이 남아 있음을 아는 2~30대의 여유. 중년이라면 노년이라면 다르게 읽혀질 세상에 대한 시각. 그것은 곧 극복할 의지를 가질 시간을 만들어 내리라는 말과 같은 것일까. 그들만의 나침반은 따로 있다는, 길을 헤쳐나갈 도구가 있다는 그런 자신감. 그렇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솟아나는 그러한 문제해결방식은 습관일까, 성격일까.


사실이기야 하겠지만 뭐랄까, 아버지 말은 철 지난 유행어처럼 핀트가 안맞는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항로에서 자꾸 벗어나는 건 좌표를 읽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낡은 나침반을 쥔 탓이 아닐까. -「장글숲을 헤쳐서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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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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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부사가 가리키는 것


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  마음산책, 2019.


  분명 나는 소설 카테고리에서 이 책을 본 것으로 안다. 책을 펼쳐 든 순간 당황한다. 아니었나? 에세이였던가. 줌파 라히리의 5년 만의 신작소설이란 글귀를 발견한다. 뭔가 마음에서 벅차오르는 감정이 사그라든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좋아한 만큼 소설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사실을 최대한 뺀다 하더라도 이 신작소설에서 내가 볼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요즘 몇몇의 작가들에게서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경계의 ‘소설’이 출간되곤 하지만.

  몇 년 전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에 살며 이탈리아어를 배우며 글을 쓴다고 했고 실제 그에 관한 글을 써서 출간한다. 작가의 도전에 응원을 보내지만 독자로서의 나는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 아니 그것은 글을 읽은 후에 느끼는 감정이니 오히려 더 알싸한 기분이 든다.

  신작소설 <내가 있는 곳>에 대한 느낌, 작가의 ‘장소부사를 사용한 글짓기’를 읽는 느낌이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수업에서 선생님이 내어주신 글짓기 숙제. 나는 한글로 번역된 글을 읽는 것이므로 그것이 이탈리아어로 쓰여 있는지 영어로 쓰여 있는지 인도어로 쓰여 있는지에 대해 모른다. 그 글이 쓰여진 언어의 수준에 대해서도 가늠하지 못한다. 때론 그것 자체에 대한 감상이나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기댄 수준으로 평가를 하게 된다. 이 글이 줌파 라히리의 작품이 아니라면, 이탈리아 소설로 쓰여진 어느 무명작가의 첫 번째 글이라면, 산문이라면. 그렇다면 이 글을 보는 내 눈은 마음은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줌파 라히리의 작품이라고 하기에 선택했고 그렇기에 실망한다는 점이다.

  줌파 라히리를 지운다면, 작가의 이름을 지운다면 이 소설에 대해서 느끼는 건 무얼까. 어느 도시에서 도시를 형성하는 모든 장소에서 일상의 느낌을 풀어쓴 잔잔한 언어. 담백한 언어로 쓰여진 글. 때론 많은 이들의 일기장에 담담히 적혀져 있을 문구들….


방향 잃은, 길 잃은, 당황한, 어긋난, 표류하는, 혼란스러운, 어지러운, 허둥지둥 대는, 뿌리 뽑힌, 갈팡질팡하는.


이런 단어의 관계 속에 나는 다시 처했다. 바로 이곳이 내가 사는 곳, 날 세상에 내려놓는 말들이다.


  삶이란 일상 속에서 느끼는 모든 혼란과 방황의 감정들을 지우고 채우고 느끼며 나만의 언어로 재해석하며 의미를 채워가는 것이다. 한 여인이 성장하는 동안 가족간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에서 느끼는 외롭고 쓸쓸한 감정과 기억은 장소를 불문하고 나타난다. 까페, 침대, 빌라, 바다와 같은 물리적 장소를 넘어 마음이라는 내면의 장소에서는 언제나 들쑤시는 것이다. 마침내 어디에서든, 아무 데서든 기억과 감정은 생겨나고 그것이 살아가는 이의 숙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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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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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자가 산다


야만인을 기다리며, J. M. 쿳시, 왕은철.


  은 안경을 쓴 남자가 등장한다. 이름마저 졸 대령인 졸라 졸렬하게 느껴지는 그가 등장하자마자 폭력이 난무한다. 야만인이 전쟁준비를 한다는 소문이 돌고 실제 옷가지와 먹을거리가 사라질 때면 도시는 공포에 떤다. 오래도록 제국의 변경도시, 모든 것을 관리·통치하고 있는 나이든 치안판사에 의하면 딱히 실체없는 ‘야만인’의 존재 때문이다. 수도에서 파견된 졸 대령은 제국의 변경 도시를 공포케 한 ‘야만인’을 진압하고선 잔인한 고문을 가한다. 그저 변방의 어부이거나 유목민일 뿐인 그들은 졸 대령의 ‘진실을 얘기하는 말투’를 알아채는 탁월한 능력 발휘로 죽거나, 눈이 멀거나, 장애를 안는다. 그렇게 졸 대령은 ‘야만인’을 소탕하고 수도로 돌아간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야만에는 즉각 폭력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니 ‘폭력을 기다리며’라는 말은 너무나 어색하다. '야만인‘의 존재가 그저 도시 밖의 사람들을 지칭한다는 걸 알게 되면 ’야만인‘이란 단어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고작 생김새가 조금 다른 정도가 변방인에 품는 공포와 거리낌의 이유가 되어 악마화, 야만인으로 되는 건 폭력기술을 탑재하고 사용하는 졸 대령의 행태와 확연히 대비된다. 솟구치는 야만의 열기는 '야만인’에게서가 아니라 ‘야만인’을 지칭하는 이들을 통해 시작된다.

  폭력과 야만을 뿌리고 간 졸 대령의 흔적은 변방도시 곳곳에서 드러난다. 역시 야만이란 졸 대령이 남기고 간 모든 흔적에서 찾을 수 있다. 눈이 멀고 발마저 잘린 ‘야만인’ 여자가 그곳에 있다. 제가 있던 곳으로 갈 수 없는 몸으로 폭력의 흔적을 안고 구걸하고 있다. 졸 대령의 행태에 찬성치 않았던 치안판사는 졸 대령이 폭력을 온몸에 안고 있는 이 여자에게 연민을 품으며 의식주를 챙겨주고 일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그 고문의 흔적을 씻겨주고 오일을 발라주기까지, 매우 자상한 손길로 돌보아준다.

  졸 대령의 끔찍한 고문을 목격한 나는 치안판사의 이 손길에 순간 넘어가버린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이의 마음과 행동은 이래야 한다 생각하며 치안판사의 성정은 따스하다는 착각까지 한 것에 나의 어리석음을 한탄한다. 곧이어 나의 분노는 거세질 수밖에 없었고 ‘야만’의 속성은 잔인한 폭력 더하기 저항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지배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치안판사의 행동은 일제가 우리의 3.1운동 이후에 잠시 행한 문화통치와 다를 리 없는 그런 것 아닌가. 그렇더라도 이런 끔찍한 환경 속에서는 졸 대령보다 치안판사 같은 사람이 더 낫지 않느냐는 얘기가 들리는 듯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누구에게, 무엇이 나을 수 있단 말인가. 제도가 아니라 한 개인의 성향에 기대어 세상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 정의를 기대하는 것은 한계일 수밖에 없다.

  치안판사의 한계는 여실히 드러난다. 무엇보다 치안판사 역시 제국의 관리일 뿐이다.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의 평화를 바라는 방법은 졸 대령과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 제국의 통치 아래서 그가 임기내 이제까지 해오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제국의 관리로서 야만인의 우위에 서서 그들을 대하고 있음은 변하지 않는다.

  치안판사는 개인적으로 고문과 같은 폭력을 좋아하지 않을 뿐 그가 눈먼 여자에게 가하는 것 역시 폭력이다. 당연하게 행하는 치안판사의 성폭력은 빠질 수 없는 ‘야만’의 행태이다. 그것이 졸 대령의 기술과 함께 쓰이지 않아서 순간 착각했을 뿐. 문제는 이러한 착각이 얼마나 잘 먹힐 수밖에 없는가이다. 치안판사는 거듭 남자의 성욕은 당연한 것임을 강조하며  눈먼 여인에게 하는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이 구세주임을, 자신을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깨뜨려버리는 여인의 행동에 그리고 그로 인해 야만인과 내통한 자가 되어 제국으로부터 치욕과 고문을 겪은 이후에 치안판사의 생각은 달라진다.


나는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짓말이고, 대령은 거친 바람이 불며 세상이 험악해질 때 제국이 얘기하는 진실이다. 제국의 통치술의 양면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때 졸 대령의 행동을 탐탁치않게 여기며 논쟁을 벌이기는 했지만 그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든 정의를 위해서든 직접적인 행동력을 보인 적은 없다. 비로소 고문당한 자의 고통과 치욕, 그가 눈먼 여인에게 주지 않았던 자유의 의미에 대해 치안판사의 끊임없는 생각이 이어진다. 존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생각한다. 그는 다르다고. 졸 대령과 같은 제국의 무리와 다르다고도 생각한다. 제국의 변방 오지에 마음속으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한 사람은 있었다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끝장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제국은 낮에는 적들을 쫓아다닌다. 제국은 교활하고 무자비하다. 제국은 사냥개들을 이곳저곳에 파견한다. 밤이 되면, 제국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도시가 약탈당하고, 사람들이 강간당하고,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드넓은 땅이 황폐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미친 상상이지만 전염성이 강하다.


  제국의 그들이 변방 사람들을 ‘야만인’이라 부른다는 것은 곧 그들 스스로를 문명인이라 칭하는 것이다. 문명과 문명인이란 무엇인가는 야만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동일선상에서 생겨난다. 그들의 정의에 따르면 야만인이란 그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 이들이다. 그리하여 이들로 인해 히스테리가 생기거나 동정을 일으키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필요’에 의한 정의로는 문명인들을 침략하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진압해야 할 적이며 그것은 실제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가와는 상관없다. 야만인은 문명인, 제국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키고 연장시키는 도구일 뿐이다. 문명인은 그들이 설계한 ‘도구’를 통해 역사를 만들어가고 역사속에 존재하고자 하지만 험악한 자연에서 그들의 ‘문명’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남아프리카 태생 작가가 쓴 소설을 이 땅으로 소환하여 대입한다. 제국의 졸 대령과 같은 이들은 마치 통일과 평화라는 단어를 탐탁지 않게 여기며 북한이란 핵무기를 가지고 한국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 달라 외치는, 종북과 좌파와 빨갱이의 존재를 늘 부르짖어야 연속한다고 믿는 그 누구들을 닮지 않았는가. 천박한 망언의 제국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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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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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독이어도 오독이어도


창백한 불꽃,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문학동네, 2019.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을 처음 읽는다고 생각했다. 이 책에 대해서 창백하리만치 사전정보없이 읽었다는 말인데 몇 장 넘기지 않고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롤리타』를 떠올리게 하는. 그제야 롤리타의 작가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라는 것이 생각났다. 때때로 『롤리타』의 작가를 험버트로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창백한 불꽃』에도 훗날 충분히 착각할 만한 요소를 만들어 놓았다.

  한번 당한 끝에 작가에게 걸려들지 않겠노라 바짝 다짐을 하고 보니 시 <창백한 불꽃> 작가 존 셰이드, 그 시의 주석을 쓴 찰스 킨보트가 모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이름 속으로 들어간다. 머리말과 주석과 색인이 딸린 시, 운문인지 산문인지, 시가 중심인지 주석이 중심인지, 진실인지 허구인지 헷갈리게 흩어진 낟알을 주워 모으다 한없는 길로 들어가게 되는 소설, 『창백한 불꽃』. 이 글을 읽어나가는 방향이 전적인 독자의 의지인 것 같지는 않다. 시 <창백한 불꽃>의 가치는 찰스 킨보트로 인해 발견되었고 무엇보다 찰스 킨보트 자신의 주석만이 시의 인간적인 사실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주석자의 중요성에 대한 단언이 이 책을 읽어가는 방향을 전혀 제시하지 않은 거라고, 제한하지 않은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창백한 불꽃』에서 구현한 형식은 수많은 평론가들과 출판 관계자들에게 감탄과 찬사의 대상이다. 소설이 씌어진 1960년대에서 머언 2019년을 살고 있는 내게는 시간이 파격적 형식 가득한 작품을 읽게 해 예방주사를 놓아두었기에 경이롭고 얼이 빠질 정도는 아니어서 달뜬 찬사들에 어떤 추임새가 필요할 지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면 이런 책들은 일명 ‘실시간’ 혹은 지금보다는 어릴 때 읽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몹시도 게을러진 나이의 나는 이 귀찮은 독서법에 궁시렁거리며 책장을 넘나들다 작가에겐 형식과 내용 중 무엇이 우선이었을까를 궁금해한다. 내가 보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도.

  처음엔 머리말에서 찰스 킨보트가 어떻게 떠들든 순수하게 시의 의미를 쫓아가려 했다. 허나 시란 언제나 주석에 의지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 고스란히 주석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시에서 생각한 이미지와 주석의 괴리가 커질수록 평범한 인간인 나는 시에서의 강렬한 이미지보다도 주석에서 발화된 이야기를 쫓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찰스 킨보트가 말한 ‘사실성’이겠구나. 최후의 말, 그것이겠구나. 언어유희는 잠시의 놀이터가 되고 다급히 이야기를 쫓아가고 있구나.

  나는 몹시도 평범한 인간, 호모 사피엔스가 그런 종이 아니던가.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것을 믿어버릴 수 있는’ 그런 종족. 이야기에 매몰되고 매몰되는 그런 종.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온전히 그가 창조한 세계를 가지고 수많은 호모 사피엔스를 “관행과 규칙을 따르게 되고 설득당하기 쉽도록” 만들어 놓는다. 주석자의 주석이 허구라는 생각이 스며들어도 주석자 자신이 망상환자가 아닌가 의문이 들지라도 카를 왕과 왕을 암살하려는 그라두스가 떠나온 젬블라라는 나라가 어디인지를 가늠하려 애쓴다.

  그렇다면 이것은 머나먼 북쪽의 나라, 젬블라의 이야기일까. 존 셰이드의 인생회고록 같은 <창백한 불꽃:네편으로 된 시>의 시행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킨보트에게서 젬블라에서 이 모든 혼란을 일으키도록 이끄는 작가 나보코프를 찾으려 애쓴다. 나보코프가 만든 게임판에 휩쓸리지 않겠다 다짐하면서도 머나먼 북쪽 나라는 러시아, 킨보트도 셰이드도 보트킨도 카를왕도 그라두스도 모두 작가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내가 삶 속에서

   사슬고리와 쌀먹이새 같은 일종의 유음어 유희를.

   게임에서 상호 연관된 패턴을,

   오묘한 예술적 수완을, 게임을 하는 그들이

   발견했던 것과 똑같은 어떤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충분치 못하다. 게임을 한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5독과 오독 속에서 아찔하고 다급하다. 이 재밌는 언어유희는 번역이 아닌 채로 즉각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번역자의 주석에 의지해야 하기에 이런 류의 글을 읽을 때면 언제나 나의 언어적 한계로 인해 아쉽기 그지없다. 따지고 들면 배경지식도 한몫한다. 작가는 이 글을 읽는 동안 내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요구를 요하면서도 내 해석에 대한 만족감을 극대화시키진 않는다. 읽어도 읽어도 갈증과 창백함을 안기는 『창백한 불꽃』앞에서 독자로서, 작품을 향한 평가자로서의 입지가 흔들린다. 셰이드가 진저리치는 “읽긴 읽되 바보천치 같이 읽는 것“이 아닐까라는 염려가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킨보트일 수도, 킨보트만큼도, 킨보트일 필요도 없지만 말이다.

  킨보트는 일차적으로는 독자이다. 그러나 킨보트는 존 셰이드의 시와 삶에 과도하게 개입한다. 셰이드 부부와의 친분은 일방적이고 이웃에 인접해 살면서 원활한 스토킹을 가한다.  킨보트는 셰이드가 시를 창작할 때부터 자신이 영감을 주었음을, 젬블라 왕에 관해 쓰기를 재촉했고 설마 정말로 쓸 줄은 몰랐다며 온통 젬블라에 관한 주석으로 도배를 해놓는다. 그 방식은 마냥 무질서하지는 않아서 셰이드의 시어를 붙잡아 언어유희를 펼치며 은근슬쩍 젬블라와 연관시키고, 셰이드가 아내 이야기를 하면 주석에선 젬블라의 카를 왕의 아내 디사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왕을 죽이려는 암살자 그라두스도 언어유희와 함께 등장한다. 세 개의 이야기를 무질서한듯 질서있게 배치한 킨보트의 주석은 시를 보다 잘 이해하고 사실성을 획득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펼쳐놓을 수 있는 무대, 그런 것을 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킨보트는 권위있는 학자이자 시인의 시에 기생하여 제 이야기를 펼친다. 반복되는 시인의 시,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에서 죽은 여새가 시인이라면 그림자는 셰이드가 되는 시. 결국 네편으로 된 시인 창백한 불꽃의 ‘나=죽은 여새’이기보다 ‘나=그림자’라는 등식이 어울린다. 끝내 여새는 죽지 않는가. 또한 자신을 카를 왕과 동일시하는 킨보트는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볼셰비키 혁명으로 망명한 작가와 겹쳐진다.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번역하고 방대한 주석을 단 전적을 가지고 있는 만큼 킨보트가 작가로 등치되기에 작가도 괴이한, 괴랄한 캐릭터였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와 함께 머나먼 북쪽 나라, 젬블라에 대한 그리움과 불안이 가득한 듯이 보여 과한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킨보트가 구축하고 있는 세계는 분명 허위의 먼 풍경이 가득해 보이지만 압도하는 형식을 걷어내고 나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필멸의 존재가 생각해야 할 삶과 죽음. 셰이드의 딸 헤이즐은 ‘새로운 패배와 새로운 비참함을 경험하고 눈물에 젖은 채’ 자살한다.  기이한 고모의 손에서 자란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고 있는 셰이드의 고통은 딸의 죽음으로 더해진다. 사후에 대한 인식도 바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한 경이를, 달콤한 충동을 느끼는 셰이드와 킨보트가 ‘죽음으로의 이행을 멈추는, 참기 어려운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이 시를 짓는 일, 언어적 유희에 휘감기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암살자 그라두스의 존재도 끊임없이 죽음을 환기시키는 인물이 된다. 강렬함이라든지 뚜렷한 신념이 느껴지기보다는 어설픈 살인자로 보일지라도 죽음이란 늘 그렇게 비장미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니까.


   삼단논법: 다른 사람들은 죽는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이 소설에서 오로지 ‘사실성’을 획득하는 것은 ‘인간은 죽는다’라는 것이라 여겨진다. 필멸에 대한 자각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가중시키며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과 달리 특별한 존재로서의 강한 자기애를 발현하곤 한다. 삼단논법의 증명자가 되지 못한 셰이드뿐만 아니라 망상이, 대부분 자기과시 형태로 나타난 킨보트의 죽음에 대한 동경또한 이 같은 맥락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의 삶은 곧 죽음의 이야기다. 세상 모든 필멸의 존재가 영원의 존재이고픈 열망을 담은 것이 예술, 그리하여 언제부턴가 죽음에 대한 인식은 예술혼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시이든지 주석이든지… 5독이어도 오독이어도 거듭 창백한 불꽃을 읽고 남는 것, 그것은 인간의 살아가는 인생의 이야기는 결국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휘갈겨쓴 메시지’에서 결국 살아가야 할 나의 메시지를 찾고픈 열망에 빠진다. 나만의 시어와 주석을 단 삶의 이야기, 인생의 메시지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창백한 불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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