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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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자가 산다


야만인을 기다리며, J. M. 쿳시, 왕은철.


  은 안경을 쓴 남자가 등장한다. 이름마저 졸 대령인 졸라 졸렬하게 느껴지는 그가 등장하자마자 폭력이 난무한다. 야만인이 전쟁준비를 한다는 소문이 돌고 실제 옷가지와 먹을거리가 사라질 때면 도시는 공포에 떤다. 오래도록 제국의 변경도시, 모든 것을 관리·통치하고 있는 나이든 치안판사에 의하면 딱히 실체없는 ‘야만인’의 존재 때문이다. 수도에서 파견된 졸 대령은 제국의 변경 도시를 공포케 한 ‘야만인’을 진압하고선 잔인한 고문을 가한다. 그저 변방의 어부이거나 유목민일 뿐인 그들은 졸 대령의 ‘진실을 얘기하는 말투’를 알아채는 탁월한 능력 발휘로 죽거나, 눈이 멀거나, 장애를 안는다. 그렇게 졸 대령은 ‘야만인’을 소탕하고 수도로 돌아간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야만에는 즉각 폭력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니 ‘폭력을 기다리며’라는 말은 너무나 어색하다. '야만인‘의 존재가 그저 도시 밖의 사람들을 지칭한다는 걸 알게 되면 ’야만인‘이란 단어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고작 생김새가 조금 다른 정도가 변방인에 품는 공포와 거리낌의 이유가 되어 악마화, 야만인으로 되는 건 폭력기술을 탑재하고 사용하는 졸 대령의 행태와 확연히 대비된다. 솟구치는 야만의 열기는 '야만인’에게서가 아니라 ‘야만인’을 지칭하는 이들을 통해 시작된다.

  폭력과 야만을 뿌리고 간 졸 대령의 흔적은 변방도시 곳곳에서 드러난다. 역시 야만이란 졸 대령이 남기고 간 모든 흔적에서 찾을 수 있다. 눈이 멀고 발마저 잘린 ‘야만인’ 여자가 그곳에 있다. 제가 있던 곳으로 갈 수 없는 몸으로 폭력의 흔적을 안고 구걸하고 있다. 졸 대령의 행태에 찬성치 않았던 치안판사는 졸 대령이 폭력을 온몸에 안고 있는 이 여자에게 연민을 품으며 의식주를 챙겨주고 일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그 고문의 흔적을 씻겨주고 오일을 발라주기까지, 매우 자상한 손길로 돌보아준다.

  졸 대령의 끔찍한 고문을 목격한 나는 치안판사의 이 손길에 순간 넘어가버린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이의 마음과 행동은 이래야 한다 생각하며 치안판사의 성정은 따스하다는 착각까지 한 것에 나의 어리석음을 한탄한다. 곧이어 나의 분노는 거세질 수밖에 없었고 ‘야만’의 속성은 잔인한 폭력 더하기 저항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지배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치안판사의 행동은 일제가 우리의 3.1운동 이후에 잠시 행한 문화통치와 다를 리 없는 그런 것 아닌가. 그렇더라도 이런 끔찍한 환경 속에서는 졸 대령보다 치안판사 같은 사람이 더 낫지 않느냐는 얘기가 들리는 듯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누구에게, 무엇이 나을 수 있단 말인가. 제도가 아니라 한 개인의 성향에 기대어 세상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 정의를 기대하는 것은 한계일 수밖에 없다.

  치안판사의 한계는 여실히 드러난다. 무엇보다 치안판사 역시 제국의 관리일 뿐이다.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의 평화를 바라는 방법은 졸 대령과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 제국의 통치 아래서 그가 임기내 이제까지 해오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제국의 관리로서 야만인의 우위에 서서 그들을 대하고 있음은 변하지 않는다.

  치안판사는 개인적으로 고문과 같은 폭력을 좋아하지 않을 뿐 그가 눈먼 여자에게 가하는 것 역시 폭력이다. 당연하게 행하는 치안판사의 성폭력은 빠질 수 없는 ‘야만’의 행태이다. 그것이 졸 대령의 기술과 함께 쓰이지 않아서 순간 착각했을 뿐. 문제는 이러한 착각이 얼마나 잘 먹힐 수밖에 없는가이다. 치안판사는 거듭 남자의 성욕은 당연한 것임을 강조하며  눈먼 여인에게 하는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이 구세주임을, 자신을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깨뜨려버리는 여인의 행동에 그리고 그로 인해 야만인과 내통한 자가 되어 제국으로부터 치욕과 고문을 겪은 이후에 치안판사의 생각은 달라진다.


나는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짓말이고, 대령은 거친 바람이 불며 세상이 험악해질 때 제국이 얘기하는 진실이다. 제국의 통치술의 양면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때 졸 대령의 행동을 탐탁치않게 여기며 논쟁을 벌이기는 했지만 그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든 정의를 위해서든 직접적인 행동력을 보인 적은 없다. 비로소 고문당한 자의 고통과 치욕, 그가 눈먼 여인에게 주지 않았던 자유의 의미에 대해 치안판사의 끊임없는 생각이 이어진다. 존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생각한다. 그는 다르다고. 졸 대령과 같은 제국의 무리와 다르다고도 생각한다. 제국의 변방 오지에 마음속으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한 사람은 있었다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끝장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제국은 낮에는 적들을 쫓아다닌다. 제국은 교활하고 무자비하다. 제국은 사냥개들을 이곳저곳에 파견한다. 밤이 되면, 제국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도시가 약탈당하고, 사람들이 강간당하고,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드넓은 땅이 황폐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미친 상상이지만 전염성이 강하다.


  제국의 그들이 변방 사람들을 ‘야만인’이라 부른다는 것은 곧 그들 스스로를 문명인이라 칭하는 것이다. 문명과 문명인이란 무엇인가는 야만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동일선상에서 생겨난다. 그들의 정의에 따르면 야만인이란 그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 이들이다. 그리하여 이들로 인해 히스테리가 생기거나 동정을 일으키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필요’에 의한 정의로는 문명인들을 침략하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진압해야 할 적이며 그것은 실제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가와는 상관없다. 야만인은 문명인, 제국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키고 연장시키는 도구일 뿐이다. 문명인은 그들이 설계한 ‘도구’를 통해 역사를 만들어가고 역사속에 존재하고자 하지만 험악한 자연에서 그들의 ‘문명’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남아프리카 태생 작가가 쓴 소설을 이 땅으로 소환하여 대입한다. 제국의 졸 대령과 같은 이들은 마치 통일과 평화라는 단어를 탐탁지 않게 여기며 북한이란 핵무기를 가지고 한국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 달라 외치는, 종북과 좌파와 빨갱이의 존재를 늘 부르짖어야 연속한다고 믿는 그 누구들을 닮지 않았는가. 천박한 망언의 제국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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