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나라의 역사는 같다

응구기 와 시옹오, 민음사, 2015.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아프리카 출신 작가가 쓴 소설 제목인 피의 꽃잎들은 유독 붉은 빛을 띤 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저 벌레가 먹어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피처럼 붉은 색을 띠고 있을 뿐이다. 소설 전편에 흐르는 비장미는 피처럼 붉은 색과 텅 빈 열매에서 연상되는 반향, 작가가 서두에 인용하고 있는 요한묵시록 6장과 월트 휘트먼의 시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인생이 더한 비장미도 빼놓을 순 없겠다. 작가인 응구기와 시옹오의 인생에선 소설 하나로 정권으로부터 미움을 사 사형선고를 받고 망명자가 된 살만 루시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응구기 와 시옹오 역시도 살해위협에 시달리며 겨우 목숨을 구했으며 오랜 세월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생활을 하게끔 하는데 이 책 피의 꽃잎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이야기의 시작은 용의자를 체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지역 유명 인사들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고 용의자인 네 사람이 차례로 소환되며 자신의 행적을 진술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밝혀 나간다. 범인을 밝히는 과정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떠올리게 하고, 얘기의 진행과정은 아프리카의 역사를 보는 듯하다. 더 정확히는 대한민국의 역사라고나 할까. 여기에 아프리카, 케냐라는 명칭만 바꾼다면, 등장인물의 이름을 김씨, 이씨, 박씨…들로 바꾼다면 이것은 여지없이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아닌가.

  민중들의 삶은, 권력을 가진 이의 포악함은 어느 나라나 같은가. 식민지, 건국, 독립, 민중, 지식인, 배반, 분노, 투옥, 독재, 자본… 어찌 이 세상은 이다지도 다르지 않고 같을까.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지만 우습게도 역사에서 우리들 각자는 보는 곳이, 보고 싶은 것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소설에서 또한번 신념과 믿음이 인간의 영혼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게 한다.

  작가가 열심히 읽었던 오적(五賊). 소설 속의 인물이 한국의 책들을 열심히 읽고 있다는 구절을 정말인가, 오타인가 하며 읽었건만 작가는 정말 김지하의 오적을 좋아하고 열심히 읽었다했다. 작가가 읽고 의지를 다졌던 그 책의 저자가 자신이 쓴 소설 속 인물 추이와 같은 걸 안다면. 강신주가 지적했듯이 “왕정-부르주아 프레임에서 부르주아는 보수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부르주아-민중 프레임이 설정되면 부르주아는 보수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이 이렇게 딱 어울릴 수가 없다. 딱 추이와 김지하의 연상이 맞아 떨어지지만 적어도 작가가 이 소설을 썼을 당시인 1977년도의 김지하는 추이는 아니었다. 추이가 처음의 추이가 아니듯이.

 상당한 분량의 이 소설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식민주의와 이후의 아프리카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 자본이 얽히고 민중들의 피폐한 삶과 그들을 짓밟는 권력과 자본가들이 등장할 수밖에. 그리고 늘 그렇듯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가치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로 인한 갈등들이 지속되고 이러한 사회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는.

  그래서 결론은 어떻게 되는가? 미래를 꿈꾸는 것인지, 과거에 머무르는 것인지, 현재를 타개할 수 있는 것인지. 작가는 그 모든 비극의 상황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낙관을 희망하고는 있다. 그 미래라는 것이, 낙관이라는 것이 소설의 마지막 소제목처럼 “투쟁은 계속된다”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또한 새로운 세대들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열린 길은 모두 하나로 통하네. 일방통행이지. 더 심한 가난과 불행으로 이어지지. 가난은 죄네. 그런데 생각해 보게. 가난이라는 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건 가난한 사람들일세. 그래서 그들은 그것 때문에 처벌을 받고 지옥으로 보내지네. 하! 하! 이 지옥에서 내가 가진 유일한 빛은 조지프였네. 이것이 내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라네. p555


제국주의, 자본주의, 지주, 지렁이, 기생 상태와 상호 포식을 사회의 최고 목적으로 삼고 배가 불룩한 진드기들과 빈대들을 낳는 체제. 이 체제와 부당 이익만을 추구하는 신들과 그것의 하수인들이 그의 어머니를 무덤으로 몰아갔다. 이 기생충들은 늘 노동자들에게 피의 희생을 요구할 것이다. 모든 땅을 외국인들에게 팔아넘겼던 소수의 인간들은 피골이 상접한 사람들이 외로운 무덤을 향해 걸어갈 때조차, 민중의 피를 마시고 동일한 피부색과 국가주의에 대한 위선적인 기도를 읊조릴 것이다. 모든 노동자들은 이 체제와 그것들의 신들과 그것의 부하들에 맞서 의식적이고 지속적이고 단호하게 싸워야 했다!

  내일은 노동자들과 농부들이 투쟁을 이끌고 권력을 잡아, 피에 굶주린 신들과 그들의 하수인들로 구성된 체제를 무너뜨리고,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와 피를 마시고 인간의 살로 포식을 하는 시대를 끝장낼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때가 되어야만, 남자와 여자의 왕국이 진정으로 시작될 것이고, 생산적인 노동 속에서 기뻐하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p670~671


  이 소설을 통해서 아프리카, 케냐의 역사와 상황에 대해 좀더 알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앞서 말했듯 그것은 결국 모든 식민국가의 역사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희망의 내용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거기에 안타까움이 있을 뿐. 더구나 소설이 씌어진 1977년의 시대에서 40년 즈음이 지난 지금, 아프리카의 상황을 알기에 더더욱 그렇다. 소설 속 중심 인물인 무니라, 압둘라, 완자, 카렌자에게서는 당시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유형과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식민시대의 전형성이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여성 완자의 캐릭터였다. 그 시대에 우리는 결국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었던가.

  ‘피의 꽃잎들’과 같은 책들이 나온다면 여전히 부르르 떨며 작가를 쫓아내거나 사형시키려는 나라가, 정권이 있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체제와 개인의 의지, 신념, 그리고 희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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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저, 어크로스, 2013년 04월.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에서 보듯 이 책은 세대론에 관한 담론이다. 청춘, 이십대의 목소리를 보여주는데 저자가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일간지와 계간지에 쓴 칼럼과 기고문 등을 바탕으로 한다.

  저자는 청년 세대가 가지는 냉소와 무기력을 발견하고 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지금 사회는 ‘청년’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고 저자는 이것은 청년들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적 충격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좌절되는 이 시대에 대한 청년들의 냉소와 열폭과 무기력을 낳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탐구하면서 청년들을 바라보는 청년세대가 말하는 진짜 청년들의 모습이다.

  저자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1부에서 청년 문제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일상을 드러내고 2부에서는 청년 문제에 대한 담론을 이야기한다. 3부에서는 사회문제와 청년 문제를 함께 바라보며 어떠한 인식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한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은 2013년도 초반이다. 저자가 2007년부터 쓴 글에서 시작되었다 하니, 1983년생인 저자가 20대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니 정말로 20대가 쓴 20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20대에서 30대가 말하는 자신들의 이야기보다 다른 세대가 보는, 이삼십대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리하여 걱정스럽고 우려스러운(같은 말인가^^::) 이십대 담론이 즐비했다. 더불어 암울한 미래를 염려하며 그들은 청춘들에게, 젊은 세대에게 좀더 열정적으로 살 것을 채찍질하거나 좀더 이기적이지 않기를 주문했다. 혹은 그들의 삶을 반면교사로 삶아 자신들의 삶과 비교하여 새롭게, 미래에 대한 다짐을 하거나 새로운 자신들의 역할을 정립하거나.

  그러한 비판과 혹은 격려를 들어야 했던 이삼십대의 목소리는 어떠할지, 이 책의 저자를 통해서 그들이 바라보는 이 시대와, 그들의 세대의 관심사를 들을 수 있었다. 뭐, 어찌보면 결론은 다르지 않은 듯한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지금 세상살이는 힘들다는 것이고, 문제가 많다는 것이고, 누구든 나서서 이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려니 여러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이고, 그런 사회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지쳤다는 것이다.

  진보논객, 청년논객이라 불린 저자 한윤형은 박가분과 함께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로 시끄러웠다. 자숙한다며 사회를 말할 자격이 없다며 글을 접겠다고 했는데, 당분간인지 완전히인지는 모르겠다. 그때 이후 두 사람의 글을 안 읽었는데 꼭 그것이 영향이 아니라, 어차피 읽을 책들도 많았으니까. 그런데 예전에 읽은 이 책의 제목이 그냥 생각났을 뿐이다.

  청춘을 위한 나라도 없고, 노인을 위한 나라도 없고, 여성을 위한 나라도 없고, 아이들을 위한 나라도 없고....요즘 올라오는 기사들을 보면서...아, 나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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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이탈리아에는 피자, 한국에는 파전



  사상가, 정치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잡지 연재, 강연, 의회 의사 진행 발언을 모은 100년 전 글을 읽는다. 활자화 된 년도를 보고서도 1917년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람시가 현재 이 세상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먹는다. 이탈리아라는 것을 알면서도 책 속의 이야긴 이탈리아가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 20년 동안 이 위험한 두뇌를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저런 주장을 하며 심지어는 그에 따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검사는 재판에서 이렇게 말했고 사법부는 20년 4개월하고도 5일의 형을 확정했다. 유치하고 치졸하다기보다 글만으로도 그람시에 대한 파시스트 정권의 공포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람시의 두뇌는 옥중에서도 잘 작동되었고 그가 옥중에서 쓴 글들은 수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탈리아를 넘어 전 세계에 널리 읽혀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자칫하다가는 여론의 뭇매를 맞을 지 모를 ‘증오’란 단어가 들어간 책제목을 보면서 역시나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는 과격해’라는 피상적인 도식을 적용하며 공격할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관심’은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무정물이며 그것이 활용되는 방식에 의해 무관심의 가치와 위치가 정해진다. 분명 그람시는 이 무관심을 활용하는 ‘사람’에 대해 증오한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은 살아 있고 삶에 참여하는 인간이기에 삶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 무관심한 사람을 증오한다고. 

  나는 많이 지쳐 증오할 힘마저도 잃어버렸다. 한때는 무관심이 가장 문제라며 부르르 떨기도 했지만 점점 무관심에 종속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생각하길, 무관심하지 않다가 활동과는 무관한 ‘눈팅’인 것 역시 무관심에 속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4~5년에 한번 있는 투표활동만으로 나, 무관심하지 않소라고 하기엔 턱없어 보인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늘 따라 다니지만 무엇을 하기도 무엇을 해야 할지도 결정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간다. 그람시의 “진보라는 현상은 일반적으로 많은 개인들이 하나의 정의로운 행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되새기면 무관심뿐만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고, 그리고 실질적인 활동이 필요함을, 사상가들이 늘 강조하는 말들이 이것임을 반복적으로 습득하게 된다.

  100년 전 민중의 정치적 무관심이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발현하고 더욱 더 공고히 했다고 그람시는 말한다. 독재정권에 맞서 열렬히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애쓴 무관심하지 않은 이들이 바꾼 대한민국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나. 무관심한 이들이 다시 바꿔 놓았다. 그람시가 정의한 ‘무책임하며 언제나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참여하지 않으며 역사 속에서 미래를 만들어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일들은 ‘따로 누군가가 할 일’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길들여 온 사람들이.

  그 사람들 속에 속하지 않기 위해 머리로는 많은 생각들을 한다. 무엇을 해야 할까,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아 뭘 해야 할지 우왕좌왕하다가 또 어떤 날은 끝없는 한숨 속에 놓인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놓아 버린 지가 오래되어서일까.

  

  이탈리아에는 피자, 한국에는 파전

  이탈리아에는 마피아, 한국에는 조폭

  이탈리아에는 파시즘, 한국에는 유신

  이탈리아에는 무솔리니, 한국에는.......

  이탈리아의 무관심, 한국의 무관심


  철학자 크로체는 ‘역사’가 항상 ‘동시대적’이라고 했다. 100년 전의 이탈리아의 역사가 대한민국에서 재생되고 있다.


‘독재’라는 단어를 못 쓰도록 하며, 다시는 쓰지 못하여 저절로 사라지게 하려고 한다. 독재라는 단어를 다른 단어, 예를 들면 ‘불가피함’이나 우국, 애국 등의 ‘민감한’ 단어들로 대체하려고 한다.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역사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이들이 바로 독재자이다. p121


   민중이 이룩한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선 무관심해서는 안된다고, 무기력하고 기생적이며 비겁한 무관심에 길들여져 가면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일이라고 그람시는 말한다. 그러니까,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셈이다. 내 삶의 주인이 되지 않아, 그렇게 만드는데 공을 세운 이들을 위해 내가 가해자가 되어 간다는 생각을 하며 그람시의 증오를 받지 않기 위해 무관심에서 벗어날 방법을 힘껏 찾아야 할 시기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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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소용돌이에 잠기는 것이 아닌가

 

새로운 계급투쟁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한 세기를 풍미했고 여전한 지속성이 있는 계급투쟁. 지금 다시, 계급투쟁에 대한 지젝의 선언은 어디서, 무엇에서 출발한 것일까. 무엇이 새로운 계급투쟁의 상황을 만들고 있는가. 모두가 눈에 본 사건은 유럽 사회에 발생한 테러와 난민 행렬이다. 지속적인 이슬람 테러 위협과 난민 증가라는 문제에 쌓인 유럽은 이 위기상황을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지젝이 보기에 원인은 분명하다. 이것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한 징후이며 문제의 핵심은 ‘계급투쟁’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을 이 책에서 구체적이고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서구 생활방식을 뒤흔들고 있는 진짜 위협은 이민자가 아닌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력이다. 미국만 하더라도 중소도시에서 일어난 최근의 경제적 변화는 이민자 전체가 미친 영향보다 더 크게 공동체를 파괴했다! p24

 

우리는 무엇이, 그리고 누가 난민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만들었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첫 단계는 당연히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력과 군사개입 과정에서 난민 발생의 원인을 찾는 일이다. 이 시대의 민낯인 ‘신 세계질서’의 지속적 혼란이 난민 발생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p53

 

   아프리카의 경우 전쟁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공권력이 붕괴한 때문이며 이것은 세계적 정치-경제의 결과이자 서구 자본주의가 개입한 결과이기도 하다. 결국 서구사회가 난민 발생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난민은 전쟁을 피해 보다 잘 살 수 있기를 희망하며 제 나라를 떠나지만 서구사회는 이들의 유입에 위협을 느끼며 난민을 극렬히 거부하거나 또는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던진다.

   모두가 희망하건대 더 좋은 세상, 더 나은 세상을 꿈꾸지만 현실은 전혀 유토피아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가난과 고통과 위험과 같은 힘든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하는 이유가 된다. 있지 않거나 혹은 그러한 곳일까를 찾으러 다니기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지 못할 이유는 무어란 말인가!

   여기에 지젝이 제시하는 해답이 있다. 현실을 바꾸자고. 이 모든 불운한 상황을 빚어내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해 대항할 필요가 있다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계급투쟁이며 연대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음이 갈수록 분명해지는 지금 그동안 꿈꿔온 ‘아래로부터의’ 다양한 풀뿌리 민주화운동을 통한 모든 변화의 시도 역시 결국 실패할 운명이다. 그러므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악순환을 효과적으로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일종의 ‘군사화’다. 이는 자율규제 경제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다른 이름이다. p103

 

   여러 난관은 있다. 지금처럼 이슬람에 대한 혐오적인 반응이나 정치적인 논리로 수를 재는 상황에서는 과연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을까. 무조건적인 수용이나 무조건적인 비판이 가져오는 것은 한계일 수밖에 없다. 우리 속에 내재한 금기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제거할 필요가 있지만 그것이 ‘서구’의 것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젝은 모두가 의무적으로 지킬 최소한의 규범, 대표적으로 종교의 자유, 집단적 폭력에 대항하는 개인적 자유의 보호, 여성 인권 등,을 만드는 것과 이 제한 내에서 상이한 생활방식에 무조건적 관용을 행해야 한다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종교와 인종으로 문제의 본질을 비켜가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난민 문제의 발생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난민의 주원인이 글로벌 자본주의와 그를 둘러싼 역학관계라는 것을. 그렇기에 이것은 공동의 문제라는 것을. 함께 투쟁해야 하는 것임을.

 

이제 우리는 계급투쟁을 다시 의제로 삼아야만 한다. 이를 수행할 유일한 길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를 강조하는 것뿐이다. p117

 

   결국 그렇다. 이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계속 들여다보면 남는 것은 자본주의와 계급문제다. 교묘하게 피해가고 덮어두기 위해 애를 쓰지만 불쌍하게도 모든 원흉은 자본주의로 귀결되고 마는 것을 보면 그 엄청난 위력을 다시금 실감한다. 하지만 어제도 그제도 그랬듯이 우리는 항상 알고 있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원인이 그렇다는 것을, 그래서 함께 우리 모두 함께 해 나가야 한다고 수많은 사상가들이, 아니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들이 외쳐왔고 행동해왔다. 스테판 에셀로 분노하고 참여하고 공감하자고 말하지 않았던가.수많은 이들의 목소리와 행동은 넘쳐나는데, 왜 문제의 원인은 제거되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세를 과시하고 있는 걸까. 어쩔 땐 이런 책들을 읽으면 힘이 빠지기도 한다. 늘 그러니까. 원인은 아는데 해결방안도 아는데, 문제를 못 풀고 있는 것 같아서. 앞으로도 계속 이 소용돌이에 빠진 채 잠기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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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카메론에 시비걸기 ■


1. 쏙쏙 골라 보는 재미가 있다?


        요컨대 이 이야기를 읽으시는 분들은 나쁜 자극을 주는 것은 피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읽으면 됩니다. 그 때문에 읽는 사람을 그르치지 않도록 이야기 첫머리에 모두 그 내용 전체의 줄거리가 짧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p798


  그러니까 보카치오는 100가지 이야기를 다 읽을 필요 없고 골라 읽으라 한다. 그렇다

면? 했지만 이미 나는 착실히 처음부터 읽은지라 골라 읽지 못했다. 그것은 보카치오가 맨 마지막 장에서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서두에 저렇게 써 놓았다면 맘이 좀 달라져 골라 읽었을까? 아닐 것이다. 보카치오는 글을 다 쓰고 나서 어떤 심경인지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차례에서 이야기의 주제가 나오지 않은 이상,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역시 책을 들춰서 찾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아주 세세한 제목까지 목차에 달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첫째 날, 둘째 날 이런 형태로 차례가 기술되는 것이 아니라 각 날의 이야기의 ‘주제’를 목차로 내세웠으면 한다. 왜냐고? 저자의 의도대로 “골라 읽기 쉽게”


2. 성별 구분이 안 가는데?


  굳이 성별구분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야기 형태로 이루어진 소설들을 볼 때 켄터베리 이야기도 그렇고 변신이야기도 그러했지만 이야기하는 화자에 따라 방식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데카메론의 100가지 이야기는 남성과 여성이 이야기하고 있고 그들 각자는 나름 다른 성격들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이러한 구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열 명의 화자는 오로지 한 인물로 느껴졌다. 바로 보카치오 자신의 목소리다. 주제에 따른 이야기의 성격에 따라 이야기를 하는 방식, 문체, 톤 등을 좀 달리했으면 어땠을까. 좀 더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것이다. 열 명의 화자가 등장하지만 이들의 역할이 과연 있는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느 순간 이야기의 내용에 따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재미없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서 듣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이야기가 지루한 감도 없지 않다. 좀 더 생동감있는 이야기로 만들려면 열 명의 화자들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어떻게 만들어 낼까? 전체적으로 흔들리지 않으면서 각각의 특징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방안을

  어쩌면, 이것은 번역의 문제였을 수도 있겠다. 그것을 알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특히 완역판이라 소개하는 최근 번역본인 민음사는 “『데카메론』은 분량이 방대하고 거침없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며 전반적인 시대 상황이나 영향을 준 작가들과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요구하는 까닭에”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내가 알지 못하는 이탈리아어로의 데카메론은 지금 내가 느끼는 것보다 조금 더 ‘야한?’ 느낌이었을까. 


3. 페스트는 왜 등장하는데?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페스트의 영향으로 씌어진 것이라 한다. 당시의 전 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이탈리아에서도 절정이었고 그로 인한 참상을 직접 겪은 보카치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데카메론 이야기는 이러한 페스트가 창궐하던 도시, 보다 건강한 삶과 정신을 위하여 교외로 떠난 10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들이 페스트를 피해서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느냐가 아니라 페스트를 피한 상황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 마지막까지도 그래서 페스트는?이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들 열명이 나누게 된 이야기가 모두 페스트 때문이라 말하지만, 나는 좀더 페스트로 인한 참상이나 생각들이 더 필요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페스트는 하나의 도구이긴 했지만, 그 역할이 나는 왜 미미하게 느껴졌을까.


4. 아리송해


  데카메론이 금서인 적도 있다고 하고 오늘날은 꼭 읽어야 하는 고전이라 하기도 한다. 둘 다에 약간의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보카치오는 이랬나보다, 저랬다보다 생각하다 보니 자꾸만 아리송해진다. 그는 중세시대의 가치와 신념이 무너지고 인간의 삶과 욕망을 직시하여 데카메론을 서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위선적인 종교인의 행태를 묘사하고 특히 여성의 욕망에 관대한 입장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보면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라고 했다가 또 다른 이야기를 보다 보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하여 언뜻 드는 생각은, 온전히 이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받을 비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느냐, 어느 정도는 생각하면서 글을 썼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카이오가 여성의 성적 욕망과 자유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듯이 얘기되는 평이 많은데 그에 대해 3초 동안 의문이 들었다. 진짜인가. 사실, 그 시대에 보다 여성이 주도적으로 성적 쾌락을 충족시키는 이야기는 없었던 듯하고, 그러나 이야기가 없다고 해서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니까 별개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또한 어디서 이야기를 모았다고 했으니 이미 그런 이야기들은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 중간 중간에 화자들이 논평하는 이야기 중 다소 여성의 욕구나 욕망, 여성 자체에 대해 낮게 평가하는 듯한 발언도 있다는 사실이다.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라고 하지만, 사실 신들의 세계에서 신들도 더하면 더했지 다르지 않았던 것을, 다시 신들의 세계로 돌아간 이야기 아닌가 얼핏 생각하기도 했다.

 다시 3초간 지나간 생각, 데카메론에 대해 성직자들에 대한 비판과 위선에 대한 고발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같은 맥락으로 여성에 대한 비판과 고발로도 읽을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다시 머리말을 읽어 보다 그는 이 책을 쓴 이유가 사랑에 대한 우울증을 위로하고자 썼다고 했다. 그가 사랑이 깨지고 나서 위로 받은 친구들에게 은혜받은 바를 돌려주고자 이 책을 썼다는 글을 보자, 나는 정말로 3초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를 위로한 친구들에게 나는 이제 괜찮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쓴 것인가? 그래서 나는 여성에게 차였지만 이제 여성에 대한 감정을 다 정리했으니라며 담담하게 여성을 저렇듯 묘사한 것은 아닐까. 특히나 처음과 마지막 에피소드를 대비하여 보면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원체 데카메론에 대한 다양한 평들이 많으니 그것을 곧이 곧대로 수용하며 재밌네, 대단하네라고 생각되기 보다는, 진짜 그런 거야?라며 생각하다 보니 평론가들이 얘기한 것들을 찾아보고자 한 문장 한 문장에 집착되었던 듯도 하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어쨌든 긴 책을 쉽게 읽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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