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 조나단, 비상이 꿈꾸는 낙하


갈매기의 꿈, 리처드 바크


  모든, 낙하하는 것의 지향점은 비상이다. 모든 낙하하는 것의 도달점은 그것이 부딪친 곳이다. 바로, 그곳. 도달점과 지향점 사이에는 수천 개의 시선이 얽히고설키어 있다. 어떤 시선에 발목이 잡히고 또 어느 시선에 목이 조일지 모른다. 그리하여 수천 개의 시선에 길들여지고 수천 개의 시선이 길러낸 ‘나’가 된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암전. ‘기억할 수 있는 동물’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되어 버린 ‘나’가 이제와 묻는다. 다시 날기 위해서, 다시 부딪쳐야만 하느냐고.

  비상과 낙하를 오가는 갈매기가 말한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바닷가, 먹이 찾기에 바쁜 갈매기들 틈에서 자꾸 머리를 처박던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톤은 수많은 비행 기술을 연마한 끝에 시속 300km로 날게 된다. 스스로도 갈매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 순간이라 칭하던 그의 성공을 축하하는 갈매기는 아무도 없다. 갈매기들에게 날개란 먹이를 찾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조나단은 ‘무책임하게 무모한 짓을 했기 때문에, 그로서 갈매기 가족의 위엄과 전통을 헤치면서…’ 그렇기에 조나단은 버려질 운명이다. 그가 갈매기 사회의 습속화된 도덕에 따라 다시 약속하는 갈매기가 된다면, 그의 날개를 버리고 그의 부리로 먹이를 찾는 일에 더욱 집중한다면, 가족의 품으로 무리 속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여질지 모른다. 어떤 형벌이든 반성과 항복의 제스쳐를 통해 소멸될 기회를 얻는다. 형벌은 길들임을 위한 것이니 다시 길들여지겠노라 약속만 한다면야 형벌의 목적은 충분히 이룬 셈이니까. 그렇게 늘 외면받던 조나단 갈매기, 용서하고 받아준다는 그들의 눈을 바라보겠는가. 조나단 갈매기는 약속의 의지로 눈을 내리까는 대신 이렇게 외친다.

  “삶의 의미를, 삶의 더욱 높은 목적을 찾고, 그것을 실천하는 갈매기보다 누가 더 책임이 있단 말입니까? … 이제 우리는 살아갈 이유가 생긴 것이 아닙니까! 배우고, 발견해 내고, 자유로와지고 하는!.”

  추방. 그가 머물던 한 세계가 닫혔다.


  내 가족과 종족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추위와 고독과 두려움을 겪으며 조나단은 여전히 비행기술을 연마한다. 그는 이미 날기를 사랑하고 비행을 통해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무수한 노력으로 비행기술을 터득하며 마침내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초현실적 공간까지 날아오른다. 가고 싶어 하는 어느 장소나 어떤 시각에도 갈 수 있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장소를 갈 수 있는 비행 기술. 그가 꿈꿨던 세계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조나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가 자신을 추방한 갈매기 무리로 돌아갈 결심을 했을 때 그의 머릿속에 맴돈 것은 스승의 말,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라.”였다.

  조나단은 그가 배우고 깨달은 매우 간단한 것들에 대해, 갈매기가 나는 것은 당연하며 그들의 본질은 자유이며, 자유를 방해하는 건 어떤 형태의 의식, 미신, 제약이든 물리쳐야 한다는 것에 대해 얘기했다

  “자유로 이끌어 가는 법만이 참된 법이다. 그 밖에 다른 법은 없다.”

  그의 세상에서 자유는 끊임없는 날개짓, 끊임없는 비상이었을 것이다.


   뭐, 갈매기 얘기였지만 이들의 비행하는 삶 속에서 니체의 영원회귀와 초인을 읽는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단순히 반복된 삶이 아니라 생성의 반복이고 그것은 또한 삶의 경이로움이자 그 자체로 삶의 구원이다. “영원히 회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서, 어떤 포만이나 권태, 피로도 모르는 생성으로서, 자기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나의 이해가 니체의 이러한 세계를 ‘사랑’으로 읽고 있다. 갈매기 조나단과 그의 스승들의 자기극복과 의지, 그들의 날개짓에 대한 무한한 경외와 사랑이 니체가 말하는 것과 닿아 있지 않는가. 어릴 적 조나단을 만났을 때만 해도 그저 그 모든 일상에 만족하고 물음없이 살아가는 생이 아니라 비상을 꿈꾸는 이의 삶으로 읽었는데, 오늘 다시 니체와 맞물려 자아실현 이외의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을 만난다. 조나단과 그의 스승들의 창조력은 꿈을 실현했다는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사랑하는 날개짓은 그들에게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며 자유이며 춤이었다. 그들의 날개짓은 삶에서 본질적인 물음으로 인도하며 또한 그 물음이 단지 물음으로 끝나도록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생을 사랑했고 그들의 생을 의지로 이겨냈다. 조나단은 추방당한 곳으로 되돌아와 자기가 그러했던 것처럼 무리 속에서 외면받으며 비상하는 날개짓을 꿈꾸는 이들에게 “한계를 넘어서”기를 가르치며 자신을 신적 존재로 여기는 것을 부인하며 특별할 것 없는 새임을 강조한다. 

   머리를 처박기만 하던 어린 갈매기가 저렇듯 놀랍게 성장하는 것을 보며 ‘조나단은 매우 특별한 갈매기였기에’ 그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 생각해왔다. 이미 선택되어 그 길고 가는 갈매기라고 생각했는데 조나단은 끊임없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의 제자 플래처도 깊게 모셔두었던 조나단에 대한 ‘신적 존재’라는 이미지를 내려놓는다. 그저 스승에 대한, 스승의 제자들과 세상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깨달을 뿐이다.

  먹이를 위한 날개짓이 공격적이고 매섭다면 그저 그것에 대한 사랑으로 이루는 날개짓은 얼마나 힘차고 아름다울까. 비상을 꿈꾸는 자, 바닥에 처박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비상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사랑스런 춤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리처드 바크의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성직자들로부터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한다. 이 책의 첫 출판이 1970년이라는 것을 보면 얼마 되지도 않은 때다. 성직자들은 “신성한 신의 영역에 인간이 도전한, 오만한 죄로 가득한” 책이라 했다. 출판 거절도 여러 번 당했다고 한다. 금기와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보이는 조나단의 행동이 누군가의 눈에는 불쾌했던 모양이다. 길들여진 눈은 늘 그것만 본다. 갇힌 프레임 속에서 확장될 수 없는 니체가 바라본 약자들의 논리를 갈매기의 꿈을 바라보는 이들을 통해 발견한다. 나 또한 강자는 악한 자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던 사람으로서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라는 개념의 전환을 새긴다. 이 사회에서 병든 자들을 기꺼이 불쌍히 여겨주는 강자가 되어, 아모르 파티를 외칠 수 있기를 소원한다. 그리하여 지금, 조나단과 같은 무한한 비상의 날개짓을 위해 바닥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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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는 아름답다

 

달과 육펜스, 서머셋 몸


 

“찰즈 스트릭랜드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 사람에게는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위대함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 내가 말하는 위대함이란 출세한 정치가나 성공한 군인에게서 느끼는 그런 위대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같은 위대함은 인간 자체가 지니고 있는 위대함이라기보다는 단지 그가 가지고 있는 지위가 위대하게 보일 뿐인 그런 위대함이 아닐까.…거기에 비할 때 찰즈 스트릭랜드의 위대함은 진짜였다.”


   이렇게, ‘달과 육펜스’의 처음은 시작한다. 마흔 살, 이제 삶의 안정을 취했다고 여겨지는 나이의 가장이 안정적인 가정과 직장이라는 삶을 버리고,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내용이 바로 ‘달과 육펜스’다. 제목에 대한 끌림, 주인공에게 느껴지는 강렬함.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쓰여진 전혀 허구이지 않은 이야기. 주저없이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달과 육펜스를 꼽을 수 있는 건, 찰즈 스트릭랜드에게 나를 이입시키기 때문이다.

   찰즈 스트릭랜드는 한 가장의 가장으로서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살아가던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주식 중개인으로서 성실히 일하던 평범한 가장이 직장과 가족을 버렸을 때는, 분명 다른 여자에게 열렬하게 빠졌을 거라는 많은 이들의 분노에 찬 생각과 달리, 그의 행동은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열정 때문이었다. 그림에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괴팍한 예술가 지망생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가난하고 고된 삶은 개의치 않고 그림에 대한 열정과 예술혼으로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아나가고 있었다. 물론 그의 괴팍스럽고 냉소적인 태도는 사람들 속에 섞이지 못하고 그림 또한 인정받지 못했다. 몇 년의 방랑을 거듭하며 찰즈 스트릭랜드는 마지막으로 타히티 섬에서 정착했다. 이곳에서 17세의 원주민 소녀 아타와 결혼하여 열대의 울창한 나무 숲, 그늘 속으로 구불한 오솔길을 따라서도 한참을 가는 산호초 섬, 에덴 동산 같은 곳에서 생활하였다. 그 곳에서 스트릭랜드는 행복해 했다.

   스트릭랜드의 말년 생활을 전해준 의사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나병이었고 마지막엔 눈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번도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거나 용기를 잃은 적이 없었고 마지막 운명하는 순간에도 단 한번도 평온을 잃거나 흔들린 적이 없었다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으면 시체를 묻고 난 후 집에 불을 질러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무 조각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다 타서 재가 될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면 안 된다는 약속을 하게 했다. 그가 그린 벽화와 함께 찰즈 스트릭랜드도 한줌 재로 남았다.


   달과 육펜스는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했다. 실화인 듯 허구인 듯 스트릭랜드가 고갱인 듯 이 화가에 대한 강렬한 인상은 늘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또한 달과 육펜스라는 제목이 너무 좋았다. 이때부터 13살이란 나이에 만난 스트릭랜드는 내 인생을 표면적으로 지배하는 주인공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조용히, 조용히 살아가고 있자. 하지만, 곧 나도 나의 열정을 불태우고 살자. 열정적으로, 자유롭게 살아가자. 그래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아직 마흔이 안됐으니까, 그때가 되기 전까진 육펜스를 움켜쥐고 있는 나를 합리화한다. 그래서인지 스트릭랜드처럼 그림을 그리는 시기를, 자연스레 마흔 살을 데드라인으로 삼고 있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안된다고, 늦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늘,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에 대해 고민한다. 나는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시체처럼 일을 하는 것이 오로지 안정적인 수입 때문이라는 자괴감과 함께 말이다. 그러면서도 선뜻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건, 그 일에서 안정된 생활을 얻을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직장인으로 살아가기를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꿈만 꾸고 있다. 그것에 가는 것이 마냥 두렵기도 한 것 같다. 마치 내 꿈을 실현하고 나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한 꿈꾸는 삶을 동경하며 그렇게 사는 것에 길들여진 것이 아닐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늘 재능이 있다고 믿어 왔는데 그 길을 걷다 보니 아무런 재능이 없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꿈꾸는 삶에서 발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작가 서머셋 몸은 찰즈 스트릭랜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영혼 속에는 원래부터 어떤 창조적 본능이 뿌리 깊이 박혀 있었으나, 주위의 환경 때문에 그것이 오랫동안 가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 창조 본능은 마치 암세포가 살아 있는 조직 속에서 커 가듯이 맹렬하게 자라나다가, 끝내는 전신을 사로잡아 그로 하여금 꼼짝없이 어떤 행동을 일으키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내 속에도 시작하기도 전에 구겨 넣은 창조적 본능이 아직까지 살아 있기를 바란다. 조금 늦었더라도 그것을 건드리면 맹렬하게 타오르기를 바란다. 어쨌든 달과 육펜스는 끊임없이 나를 일깨우는 책이다. 찰즈 스트릭랜드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지금은 현실과 타협하고 있지만, 곧 달을 찾아 가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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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나라의 역사는 같다

응구기 와 시옹오, 민음사, 2015.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아프리카 출신 작가가 쓴 소설 제목인 피의 꽃잎들은 유독 붉은 빛을 띤 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저 벌레가 먹어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피처럼 붉은 색을 띠고 있을 뿐이다. 소설 전편에 흐르는 비장미는 피처럼 붉은 색과 텅 빈 열매에서 연상되는 반향, 작가가 서두에 인용하고 있는 요한묵시록 6장과 월트 휘트먼의 시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인생이 더한 비장미도 빼놓을 순 없겠다. 작가인 응구기와 시옹오의 인생에선 소설 하나로 정권으로부터 미움을 사 사형선고를 받고 망명자가 된 살만 루시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응구기 와 시옹오 역시도 살해위협에 시달리며 겨우 목숨을 구했으며 오랜 세월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생활을 하게끔 하는데 이 책 피의 꽃잎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이야기의 시작은 용의자를 체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지역 유명 인사들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고 용의자인 네 사람이 차례로 소환되며 자신의 행적을 진술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밝혀 나간다. 범인을 밝히는 과정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떠올리게 하고, 얘기의 진행과정은 아프리카의 역사를 보는 듯하다. 더 정확히는 대한민국의 역사라고나 할까. 여기에 아프리카, 케냐라는 명칭만 바꾼다면, 등장인물의 이름을 김씨, 이씨, 박씨…들로 바꾼다면 이것은 여지없이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아닌가.

  민중들의 삶은, 권력을 가진 이의 포악함은 어느 나라나 같은가. 식민지, 건국, 독립, 민중, 지식인, 배반, 분노, 투옥, 독재, 자본… 어찌 이 세상은 이다지도 다르지 않고 같을까.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지만 우습게도 역사에서 우리들 각자는 보는 곳이, 보고 싶은 것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소설에서 또한번 신념과 믿음이 인간의 영혼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게 한다.

  작가가 열심히 읽었던 오적(五賊). 소설 속의 인물이 한국의 책들을 열심히 읽고 있다는 구절을 정말인가, 오타인가 하며 읽었건만 작가는 정말 김지하의 오적을 좋아하고 열심히 읽었다했다. 작가가 읽고 의지를 다졌던 그 책의 저자가 자신이 쓴 소설 속 인물 추이와 같은 걸 안다면. 강신주가 지적했듯이 “왕정-부르주아 프레임에서 부르주아는 보수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부르주아-민중 프레임이 설정되면 부르주아는 보수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이 이렇게 딱 어울릴 수가 없다. 딱 추이와 김지하의 연상이 맞아 떨어지지만 적어도 작가가 이 소설을 썼을 당시인 1977년도의 김지하는 추이는 아니었다. 추이가 처음의 추이가 아니듯이.

 상당한 분량의 이 소설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식민주의와 이후의 아프리카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 자본이 얽히고 민중들의 피폐한 삶과 그들을 짓밟는 권력과 자본가들이 등장할 수밖에. 그리고 늘 그렇듯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가치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로 인한 갈등들이 지속되고 이러한 사회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는.

  그래서 결론은 어떻게 되는가? 미래를 꿈꾸는 것인지, 과거에 머무르는 것인지, 현재를 타개할 수 있는 것인지. 작가는 그 모든 비극의 상황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낙관을 희망하고는 있다. 그 미래라는 것이, 낙관이라는 것이 소설의 마지막 소제목처럼 “투쟁은 계속된다”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또한 새로운 세대들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열린 길은 모두 하나로 통하네. 일방통행이지. 더 심한 가난과 불행으로 이어지지. 가난은 죄네. 그런데 생각해 보게. 가난이라는 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건 가난한 사람들일세. 그래서 그들은 그것 때문에 처벌을 받고 지옥으로 보내지네. 하! 하! 이 지옥에서 내가 가진 유일한 빛은 조지프였네. 이것이 내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라네. p555


제국주의, 자본주의, 지주, 지렁이, 기생 상태와 상호 포식을 사회의 최고 목적으로 삼고 배가 불룩한 진드기들과 빈대들을 낳는 체제. 이 체제와 부당 이익만을 추구하는 신들과 그것의 하수인들이 그의 어머니를 무덤으로 몰아갔다. 이 기생충들은 늘 노동자들에게 피의 희생을 요구할 것이다. 모든 땅을 외국인들에게 팔아넘겼던 소수의 인간들은 피골이 상접한 사람들이 외로운 무덤을 향해 걸어갈 때조차, 민중의 피를 마시고 동일한 피부색과 국가주의에 대한 위선적인 기도를 읊조릴 것이다. 모든 노동자들은 이 체제와 그것들의 신들과 그것의 부하들에 맞서 의식적이고 지속적이고 단호하게 싸워야 했다!

  내일은 노동자들과 농부들이 투쟁을 이끌고 권력을 잡아, 피에 굶주린 신들과 그들의 하수인들로 구성된 체제를 무너뜨리고,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와 피를 마시고 인간의 살로 포식을 하는 시대를 끝장낼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때가 되어야만, 남자와 여자의 왕국이 진정으로 시작될 것이고, 생산적인 노동 속에서 기뻐하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p670~671


  이 소설을 통해서 아프리카, 케냐의 역사와 상황에 대해 좀더 알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앞서 말했듯 그것은 결국 모든 식민국가의 역사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희망의 내용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거기에 안타까움이 있을 뿐. 더구나 소설이 씌어진 1977년의 시대에서 40년 즈음이 지난 지금, 아프리카의 상황을 알기에 더더욱 그렇다. 소설 속 중심 인물인 무니라, 압둘라, 완자, 카렌자에게서는 당시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유형과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식민시대의 전형성이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여성 완자의 캐릭터였다. 그 시대에 우리는 결국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었던가.

  ‘피의 꽃잎들’과 같은 책들이 나온다면 여전히 부르르 떨며 작가를 쫓아내거나 사형시키려는 나라가, 정권이 있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체제와 개인의 의지, 신념, 그리고 희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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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저, 어크로스, 2013년 04월.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에서 보듯 이 책은 세대론에 관한 담론이다. 청춘, 이십대의 목소리를 보여주는데 저자가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일간지와 계간지에 쓴 칼럼과 기고문 등을 바탕으로 한다.

  저자는 청년 세대가 가지는 냉소와 무기력을 발견하고 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지금 사회는 ‘청년’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고 저자는 이것은 청년들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적 충격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좌절되는 이 시대에 대한 청년들의 냉소와 열폭과 무기력을 낳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탐구하면서 청년들을 바라보는 청년세대가 말하는 진짜 청년들의 모습이다.

  저자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1부에서 청년 문제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일상을 드러내고 2부에서는 청년 문제에 대한 담론을 이야기한다. 3부에서는 사회문제와 청년 문제를 함께 바라보며 어떠한 인식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한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은 2013년도 초반이다. 저자가 2007년부터 쓴 글에서 시작되었다 하니, 1983년생인 저자가 20대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니 정말로 20대가 쓴 20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20대에서 30대가 말하는 자신들의 이야기보다 다른 세대가 보는, 이삼십대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리하여 걱정스럽고 우려스러운(같은 말인가^^::) 이십대 담론이 즐비했다. 더불어 암울한 미래를 염려하며 그들은 청춘들에게, 젊은 세대에게 좀더 열정적으로 살 것을 채찍질하거나 좀더 이기적이지 않기를 주문했다. 혹은 그들의 삶을 반면교사로 삶아 자신들의 삶과 비교하여 새롭게, 미래에 대한 다짐을 하거나 새로운 자신들의 역할을 정립하거나.

  그러한 비판과 혹은 격려를 들어야 했던 이삼십대의 목소리는 어떠할지, 이 책의 저자를 통해서 그들이 바라보는 이 시대와, 그들의 세대의 관심사를 들을 수 있었다. 뭐, 어찌보면 결론은 다르지 않은 듯한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지금 세상살이는 힘들다는 것이고, 문제가 많다는 것이고, 누구든 나서서 이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려니 여러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이고, 그런 사회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지쳤다는 것이다.

  진보논객, 청년논객이라 불린 저자 한윤형은 박가분과 함께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로 시끄러웠다. 자숙한다며 사회를 말할 자격이 없다며 글을 접겠다고 했는데, 당분간인지 완전히인지는 모르겠다. 그때 이후 두 사람의 글을 안 읽었는데 꼭 그것이 영향이 아니라, 어차피 읽을 책들도 많았으니까. 그런데 예전에 읽은 이 책의 제목이 그냥 생각났을 뿐이다.

  청춘을 위한 나라도 없고, 노인을 위한 나라도 없고, 여성을 위한 나라도 없고, 아이들을 위한 나라도 없고....요즘 올라오는 기사들을 보면서...아, 나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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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이탈리아에는 피자, 한국에는 파전



  사상가, 정치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잡지 연재, 강연, 의회 의사 진행 발언을 모은 100년 전 글을 읽는다. 활자화 된 년도를 보고서도 1917년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람시가 현재 이 세상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먹는다. 이탈리아라는 것을 알면서도 책 속의 이야긴 이탈리아가 아니다.

 

 “우리는 앞으로 20년 동안 이 위험한 두뇌를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저런 주장을 하며 심지어는 그에 따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검사는 재판에서 이렇게 말했고 사법부는 20년 4개월하고도 5일의 형을 확정했다. 유치하고 치졸하다기보다 글만으로도 그람시에 대한 파시스트 정권의 공포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람시의 두뇌는 옥중에서도 잘 작동되었고 그가 옥중에서 쓴 글들은 수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탈리아를 넘어 전 세계에 널리 읽혀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자칫하다가는 여론의 뭇매를 맞을 지 모를 ‘증오’란 단어가 들어간 책제목을 보면서 역시나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는 과격해’라는 피상적인 도식을 적용하며 공격할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관심’은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무정물이며 그것이 활용되는 방식에 의해 무관심의 가치와 위치가 정해진다. 분명 그람시는 이 무관심을 활용하는 ‘사람’에 대해 증오한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은 살아 있고 삶에 참여하는 인간이기에 삶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 무관심한 사람을 증오한다고. 

  나는 많이 지쳐 증오할 힘마저도 잃어버렸다. 한때는 무관심이 가장 문제라며 부르르 떨기도 했지만 점점 무관심에 종속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생각하길, 무관심하지 않다가 활동과는 무관한 ‘눈팅’인 것 역시 무관심에 속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4~5년에 한번 있는 투표활동만으로 나, 무관심하지 않소라고 하기엔 턱없어 보인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늘 따라 다니지만 무엇을 하기도 무엇을 해야 할지도 결정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간다. 그람시의 “진보라는 현상은 일반적으로 많은 개인들이 하나의 정의로운 행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되새기면 무관심뿐만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고, 그리고 실질적인 활동이 필요함을, 사상가들이 늘 강조하는 말들이 이것임을 반복적으로 습득하게 된다.

  100년 전 민중의 정치적 무관심이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발현하고 더욱 더 공고히 했다고 그람시는 말한다. 독재정권에 맞서 열렬히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애쓴 무관심하지 않은 이들이 바꾼 대한민국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나. 무관심한 이들이 다시 바꿔 놓았다. 그람시가 정의한 ‘무책임하며 언제나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참여하지 않으며 역사 속에서 미래를 만들어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일들은 ‘따로 누군가가 할 일’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길들여 온 사람들이.

  그 사람들 속에 속하지 않기 위해 머리로는 많은 생각들을 한다. 무엇을 해야 할까,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아 뭘 해야 할지 우왕좌왕하다가 또 어떤 날은 끝없는 한숨 속에 놓인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놓아 버린 지가 오래되어서일까.

  

  이탈리아에는 피자, 한국에는 파전

  이탈리아에는 마피아, 한국에는 조폭

  이탈리아에는 파시즘, 한국에는 유신

  이탈리아에는 무솔리니, 한국에는.......

  이탈리아의 무관심, 한국의 무관심


  철학자 크로체는 ‘역사’가 항상 ‘동시대적’이라고 했다. 100년 전의 이탈리아의 역사가 대한민국에서 재생되고 있다.


‘독재’라는 단어를 못 쓰도록 하며, 다시는 쓰지 못하여 저절로 사라지게 하려고 한다. 독재라는 단어를 다른 단어, 예를 들면 ‘불가피함’이나 우국, 애국 등의 ‘민감한’ 단어들로 대체하려고 한다.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역사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이들이 바로 독재자이다. p121


   민중이 이룩한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선 무관심해서는 안된다고, 무기력하고 기생적이며 비겁한 무관심에 길들여져 가면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일이라고 그람시는 말한다. 그러니까,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셈이다. 내 삶의 주인이 되지 않아, 그렇게 만드는데 공을 세운 이들을 위해 내가 가해자가 되어 간다는 생각을 하며 그람시의 증오를 받지 않기 위해 무관심에서 벗어날 방법을 힘껏 찾아야 할 시기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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