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 조나단, 비상이 꿈꾸는 낙하


갈매기의 꿈, 리처드 바크


  모든, 낙하하는 것의 지향점은 비상이다. 모든 낙하하는 것의 도달점은 그것이 부딪친 곳이다. 바로, 그곳. 도달점과 지향점 사이에는 수천 개의 시선이 얽히고설키어 있다. 어떤 시선에 발목이 잡히고 또 어느 시선에 목이 조일지 모른다. 그리하여 수천 개의 시선에 길들여지고 수천 개의 시선이 길러낸 ‘나’가 된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암전. ‘기억할 수 있는 동물’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이 되어 버린 ‘나’가 이제와 묻는다. 다시 날기 위해서, 다시 부딪쳐야만 하느냐고.

  비상과 낙하를 오가는 갈매기가 말한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바닷가, 먹이 찾기에 바쁜 갈매기들 틈에서 자꾸 머리를 처박던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톤은 수많은 비행 기술을 연마한 끝에 시속 300km로 날게 된다. 스스로도 갈매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 순간이라 칭하던 그의 성공을 축하하는 갈매기는 아무도 없다. 갈매기들에게 날개란 먹이를 찾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조나단은 ‘무책임하게 무모한 짓을 했기 때문에, 그로서 갈매기 가족의 위엄과 전통을 헤치면서…’ 그렇기에 조나단은 버려질 운명이다. 그가 갈매기 사회의 습속화된 도덕에 따라 다시 약속하는 갈매기가 된다면, 그의 날개를 버리고 그의 부리로 먹이를 찾는 일에 더욱 집중한다면, 가족의 품으로 무리 속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여질지 모른다. 어떤 형벌이든 반성과 항복의 제스쳐를 통해 소멸될 기회를 얻는다. 형벌은 길들임을 위한 것이니 다시 길들여지겠노라 약속만 한다면야 형벌의 목적은 충분히 이룬 셈이니까. 그렇게 늘 외면받던 조나단 갈매기, 용서하고 받아준다는 그들의 눈을 바라보겠는가. 조나단 갈매기는 약속의 의지로 눈을 내리까는 대신 이렇게 외친다.

  “삶의 의미를, 삶의 더욱 높은 목적을 찾고, 그것을 실천하는 갈매기보다 누가 더 책임이 있단 말입니까? … 이제 우리는 살아갈 이유가 생긴 것이 아닙니까! 배우고, 발견해 내고, 자유로와지고 하는!.”

  추방. 그가 머물던 한 세계가 닫혔다.


  내 가족과 종족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추위와 고독과 두려움을 겪으며 조나단은 여전히 비행기술을 연마한다. 그는 이미 날기를 사랑하고 비행을 통해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무수한 노력으로 비행기술을 터득하며 마침내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초현실적 공간까지 날아오른다. 가고 싶어 하는 어느 장소나 어떤 시각에도 갈 수 있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장소를 갈 수 있는 비행 기술. 그가 꿈꿨던 세계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조나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가 자신을 추방한 갈매기 무리로 돌아갈 결심을 했을 때 그의 머릿속에 맴돈 것은 스승의 말,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라.”였다.

  조나단은 그가 배우고 깨달은 매우 간단한 것들에 대해, 갈매기가 나는 것은 당연하며 그들의 본질은 자유이며, 자유를 방해하는 건 어떤 형태의 의식, 미신, 제약이든 물리쳐야 한다는 것에 대해 얘기했다

  “자유로 이끌어 가는 법만이 참된 법이다. 그 밖에 다른 법은 없다.”

  그의 세상에서 자유는 끊임없는 날개짓, 끊임없는 비상이었을 것이다.


   뭐, 갈매기 얘기였지만 이들의 비행하는 삶 속에서 니체의 영원회귀와 초인을 읽는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단순히 반복된 삶이 아니라 생성의 반복이고 그것은 또한 삶의 경이로움이자 그 자체로 삶의 구원이다. “영원히 회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서, 어떤 포만이나 권태, 피로도 모르는 생성으로서, 자기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나의 이해가 니체의 이러한 세계를 ‘사랑’으로 읽고 있다. 갈매기 조나단과 그의 스승들의 자기극복과 의지, 그들의 날개짓에 대한 무한한 경외와 사랑이 니체가 말하는 것과 닿아 있지 않는가. 어릴 적 조나단을 만났을 때만 해도 그저 그 모든 일상에 만족하고 물음없이 살아가는 생이 아니라 비상을 꿈꾸는 이의 삶으로 읽었는데, 오늘 다시 니체와 맞물려 자아실현 이외의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을 만난다. 조나단과 그의 스승들의 창조력은 꿈을 실현했다는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사랑하는 날개짓은 그들에게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며 자유이며 춤이었다. 그들의 날개짓은 삶에서 본질적인 물음으로 인도하며 또한 그 물음이 단지 물음으로 끝나도록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생을 사랑했고 그들의 생을 의지로 이겨냈다. 조나단은 추방당한 곳으로 되돌아와 자기가 그러했던 것처럼 무리 속에서 외면받으며 비상하는 날개짓을 꿈꾸는 이들에게 “한계를 넘어서”기를 가르치며 자신을 신적 존재로 여기는 것을 부인하며 특별할 것 없는 새임을 강조한다. 

   머리를 처박기만 하던 어린 갈매기가 저렇듯 놀랍게 성장하는 것을 보며 ‘조나단은 매우 특별한 갈매기였기에’ 그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 생각해왔다. 이미 선택되어 그 길고 가는 갈매기라고 생각했는데 조나단은 끊임없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의 제자 플래처도 깊게 모셔두었던 조나단에 대한 ‘신적 존재’라는 이미지를 내려놓는다. 그저 스승에 대한, 스승의 제자들과 세상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깨달을 뿐이다.

  먹이를 위한 날개짓이 공격적이고 매섭다면 그저 그것에 대한 사랑으로 이루는 날개짓은 얼마나 힘차고 아름다울까. 비상을 꿈꾸는 자, 바닥에 처박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비상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사랑스런 춤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리처드 바크의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성직자들로부터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한다. 이 책의 첫 출판이 1970년이라는 것을 보면 얼마 되지도 않은 때다. 성직자들은 “신성한 신의 영역에 인간이 도전한, 오만한 죄로 가득한” 책이라 했다. 출판 거절도 여러 번 당했다고 한다. 금기와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보이는 조나단의 행동이 누군가의 눈에는 불쾌했던 모양이다. 길들여진 눈은 늘 그것만 본다. 갇힌 프레임 속에서 확장될 수 없는 니체가 바라본 약자들의 논리를 갈매기의 꿈을 바라보는 이들을 통해 발견한다. 나 또한 강자는 악한 자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던 사람으로서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라는 개념의 전환을 새긴다. 이 사회에서 병든 자들을 기꺼이 불쌍히 여겨주는 강자가 되어, 아모르 파티를 외칠 수 있기를 소원한다. 그리하여 지금, 조나단과 같은 무한한 비상의 날개짓을 위해 바닥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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