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리 블라이의 세상을 바꾼 10일 넬리 블라이 시리즈
넬리 블라이 지음, 오수원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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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이 말해준다

넬리 블라이의 세상을 바꾼 10일, 넬리 블라이, 2018.


  정신병원은 항상 음침한 느낌이 든다. 미학적인 설계와 쾌적한 설비를 갖추어 새로 건축했다고 해도 말이다. 정신병원은 어쩌다 무섭고 음침하고 문제가 많다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나. 수많은 다큐에서 실제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가상으로 접한 정신병원의 실상이 너무 생생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정신병원이 행하고 있는 다양한 불법적인 행태가 끊이지 않고 드러나고 있어서다. 정신병원 운영자의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는 정신병원 건물, 그 공간 자체를 공포의 공간으로 확정짓는다.

  2020년 봄을 향해 달려가는 시점, 감염병 확산으로 특정 병원의 정신병동에서 사망자가 증가하고 있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공간에 들어가 확인하고픈 심정이다. 지금 상황과는 많이 다른 110년 전 정신병동을 잠입 취재한 기자가 있다.  <뉴욕월드>지는 뉴욕의 정신병원에 들어가 환자 처우와 관리 방식을 취재해 보도해 달라 요청했고 그 요청을 수락한 기자는 넬리 블라이, 병원 잠입시 이름 넬리 브라운, 본명 엘리자베스 코크레인. 넬리 블라이는 “할 수 있으며 해보겠다고 했고, 실제 그렇게 했다.” 그건, “정신이상자들, 신이 만든 피조물 중 가장 무력한 사람들이 친절하고도 적절하게 진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픈 욕구”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넬리 블라이의 블랙웰스 섬의 정신병원 내부 취재기이다. 어떻게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가를 유머를 곁들여 이야기한다. 정신병원에 들어가려면 환자가 되어야 한다. 거짓 환자 행세를 하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넬리 블라이의 심정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정말 끔찍한 기분”이다. 왜냐면.


이렇게 잘생긴 청년 앞에서 정신이상자 연기를 해야 하다니!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다. 젊은 여성이라면 내 말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넬리의 유머코드는 이야기 곳곳에서 발현된다. 심각한 상황에서 종종 나타난다. 넬리의 환자 ‘연기’는 완벽했는지 몰라도 의사들의 진단은 완벽하지 않았다. 넬리는 쉽게 정신병원에 갈 수 있었다. 하긴 블랙웰스 섬의 정신병원은 환자를 강제로 입원시키고 가혹행위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의사들의 능력에 대한 신뢰는 전보다 훨씬 떨어졌고, 정신이상자를 가장하는 내 능력에 대한 확신은 전보다 더 높아졌다. 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난폭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의사도 정신이상 여부를 제대로 판별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넬리가 직접 겪고 보고 들은 정신병원의 실태는 끔찍했다. 기본적으로 의사와 간호사는 제대로 일하지 않으며 환자를 거칠게 다룬다. 입소자 중에는 단지 영어를 하지 못해서 들어오게 된 외국인과 남편 말에 따르지 않아서, 갈데없고 일자리가 없어서 수용된 여성도 있었다. 처우는 매우 열악했고 형편없는 식사는 당연했다. 형편없는 식사라고 하니 어떤 형태일지 상상이 가는데, 실제로 최근 코로나 19 사태로 코호트 격리된 병원의 의료진과 환자에게  청도군이 제공한 식사가 떠오른다.

 중국에서 귀국하여 정부가 제공한 식사와 매우, 매우 차이가 난다. 중앙정부와 지자체라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건 엄청난 문제다. 더구나 도시락까지 확인해야 하는 담당자의 말은 직무태만임은 물론이고 업체와의 어떤 유착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 심각한 전염병 사태에 체력과 면역력을 위해서는 더욱 영양가 있는 식사가 제공되어야 하건만 소꿉장난 할 때나 만드는 허구 도시락도 이것보다 나을 듯 싶을 정도이다. 현재에도 이런 형태가 일어나고 있으니 110년 전의 실태는 얼마나 더 열악했을까.

  열흘간의 정신병원의 실태를 꼼꼼하게 관찰하고서 정신병원을 탈출해 실태를 고발한다. 전문가와 함께 병원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아마도 내부고발자가 있었던 듯 병원은 준비를 갖춰 조사단을 맞았다. 병원에 대한 처벌과 즉각적이고 보다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지만 넬리의 폭로 기사 덕분에 뉴욕시는 환자들을 위한 예산액을 100만 달러 더 책정했다.

  넬리의 잠입취재기에 나타나는 일들은 현재에도 일어나는 일이다. 권력과 유착해 조사를 어물쩡 넘기는 경우까지 참 닮아 있는 모습이다. 여성이 있어야 할 곳은 가정뿐이라는 어느 신문사 기사에 여성을 가두는 것은 국력 낭비라는 항의 편지를 쓴 넬리 블라이. 그곳 신문사 편집장은 반박 기사를 쓴 넬리의 재능을 알아보고 기자로 채용한다. 기레기가 아니라 발로 뛰는 기자로서 넬리 블라이는 성심을 다한다. 그렇게 취재한 정신병원 잠입취재기인 이 기록은 200쪽 정도의 작은 판형인데 분량이 아쉽다는 느낌을 준다. 10일간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좀더 세세하고 정밀했으면 좋았겠다. 그곳에서 느꼈던 순간순간의 감정과 상황을 잘 느껴보고 싶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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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5 1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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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6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복지국가의 탄생 - 사회민주주의자 웹 부부의 삶과 생각 대우휴먼사이언스 19
박홍규 지음 / 아카넷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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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서비스 정신


복지국가의 탄생 - 사회민주주의자 웹 부부의 삶과 생각, 박홍규, 2018.


  한국사회에서는 보수(부르지만 극우에 가까운)라는 집단은 선거철이 되면 어김없이 복지관련 공약을 남발하면서도 뒤로는 복지예산을 깎으려 안달하고 정부의 복지 정책을 포퓰리즘이라 비난한다. 더 나아가 복지정책이 나오기만 하면 어김없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빨갱이 좌파 정책이라 부르며 정책에 반대하기 바쁘다. 그러면서, 늘 정부가 혜택을 주지 않는다고 손을 흔든다. 전세계적으로 복지국가를 지향세는 확산되어 가는 상황에서 복지정책이 수립될 때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좌파는 안돼’ 외치는 이들이 정녕 그 뜻을 알고 외치는 건가 궁금해진다.


사회주의라는 말에도 여러 뜻이 있지만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재산권, 즉 사적 소유의 권리를 사회적 차원에서 제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 극단적인 제한, 즉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로 하자는 것이 공산주의인 반면, 모든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아니라 중요한 사회적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되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기본적으로 사유화를 인정하는 것이 사회민주주의다. 반면 모든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인정하는 것이 자본주의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중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를 우리나라 헌법이 금지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 반대로 인정하고 있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인정된다. 가령 우리나라에도 국유산업이 상당수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 헌법은 도리어 순수한 의미의 자본주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책은 복지국가의 이념을 정립하고 그것을 실천한 사상가이자 실천가인 영국의 웹부부의 사상과 실천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재벌 딸인 비어트리스 웹과 가난한 공무원 시드니 웹의 결혼이 이루어진 과정, 그들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협회 조직 활동 과정이 담겨 있다. 특히 저자는 웹 부부가 제시하는 복지국가 이념을 살펴보고자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전개된 웹 부부 수준의 노동조합운동을 포함한 사회개혁운동이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임금투쟁 같은 이익투쟁만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지금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전반적 사회개혁운동과 함께 전개되는 노동조합운동이다. 민주화, 교육개혁, 도시개혁, 공해반대, 생태보존, 반전평화 등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연대하면서 사회변화를 주도할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만을 좁게 외골수로 계급투쟁의 수단으로 파기보다 다른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과 함께 폭넓고 유연하게 사회변화의 동반자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복지국가의 핵심은 가난의 책임을 개인이 아닌 국가로 보는 것이다. 웹 부부 역시 「소수파 보고서」에 이러한 생각을 기본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빈곤선의 개념을 제시하는 ‘내셔널 미니멈(national minimum)’의 창시자였다.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최저임금제, 1일 8시간의 노동으로 최저 휴식보장, 최저위생보장, 아동의 대학까지의 교육과 장학금을 지급하는 최저아동보장이 핵심으로 이는 현대의 최저생활보장의 개념과 같다.  저자는 웹 부부의 정신을 공공의 정신이라고 얘기한다.  


자본주의 정신 대신 공공의 정신이 필요하고, 사적인 부의 축적이라는 동기 대신 공공서비스라는 동기가 필요하며, 그것에 의해 비로소 사회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했다. 사회의 합리적 재조직화, 공공복지의 제도화, 각자의 공공정책에 대한 보편적 참여, 즉 사회환경의 전반적 변화는 인간의 정신, 성격, 동기에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다.


  웹 부부의 사상은 현재에도 세계가 지향하는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한 세기 전의 두 부부가 제시하고 발전시켜간 사상이 현대에도 유효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논의가 타당하고 탄탄했다는 얘기일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최저생활보장에 대해 반발이 심한 것을 보면 지금도 한 세기 전의 영국 사회를 이끌었던 이들의 생각과 차이가 없는 세력들이 존재한다는 말일 게다.

  웹 부부 각각 뛰어난 사상가이고 실천가였다 하더라도 그들의 생각과 이론이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다. 사상의 한계점과 개인의 한계점이 있다. 저자는 다른 학자, 동료들의 웹 부부에 대한 견해를 덧붙이고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지적한다. 분명한 건, 웹 부부의 복지국가에 대한 생각이 오늘날 복지국가의 기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웹 부부는 1912년 한반도를 1주일간 방문하여 당시 한반도 최고급 호텔에 머물면서 글을 썼는데 한반도 사람들을 세계 최하의 문화 수준을 가진 미개인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2020년 한국은 영화산업의 심장부인 미국 오스카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주요 부분을 휩쓸었고 BTS가 전세계가 음악 시장을 휩쓰는 등 문화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 이런 때 웹 부부가 한국을 방문했다면 평가는 달랐을 텐데. 

  한국에서 보수는 웹 부부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을 것 같은데 백여년전 두 부부의 한국에 대한 평가 때문이 아니라 두 부부가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가 ‘닥치고 싫은’ 맹목적인 집단과 그래야만 잘 살 수 있는 집단들일 것이다. 그런 집단에게 시드니의 견해를 자알, 보라고 내밀어 본다.


시드니는 집단주의적 경향이 모든 국민에 의해 효과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 목표는 모든 국민이 현 정부에 대해 일체감을 갖도록 지향되어야 하며, 그 조직은 정부의 행동이 특정 계급의 권력이나 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복지를 균등하고 일관적으로 실현하여 계속적인 사회발전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집단주의를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것을 방해하는 지주와 자본가에게 집단주의적 이념을 침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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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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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순교자, 김은국, 문학동네, 2010.


 

  “그런데 그 신목사를 당신이 경멸할 수가 있겠소? 그리고 나를?”

  “당신은 분명 우릴 경멸하고 있어. 그렇지 않소?”

  “왜 그래? 자넨 나까지도 경멸하고 있나?”

  “내가 경멸하는 건 자네들의 그 행동이야!”


  소설에선 거듭 ‘경멸’이란 단어가 나온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통해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경멸’이다. 사전상 말뜻을 머리로 ‘이해한다’, ‘알겠다’가 아니라 마음으로 ‘알겠다’. 앞으로 경멸이란 단어가 어떤 상황과 감정에서 사용할지를 체감했다. 1950년도 6·25전쟁 당시의 현실을 바탕으로 관념적인 이야기를 잘 펼쳐내고 있다. 관념이란 으레 머릿속으로 맴돌기 마련이다. 알듯 하면서도 아리송하다. 명쾌함을 같기 까지는 더 많은 생각과 시간이 필요하다. 읽는 순간엔 가슴이 벅차지만 소설을 바탕으로 한 물음이 명쾌하게 완료되었다고 보기엔 어렵다. 그렇게 한곳에 밀쳐두었던 생각들이 요즈음의 상황에서 되살아난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신천지교인들의 코로나 증가 상황과 그들의 대응방식을 통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쾌해 지려나 보다.   


목사님의 신이건 그 어떤 신이건 세상의 모든 신들은 대체 우리에게 무슨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은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지도 않을뿐더러 인간의 비참, 살육, 굶주린 백성들, 그 많은 전쟁, 그리고 그 밖의 끔찍한 일들과는 애당초 아무 상관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6·25전쟁 당시 평양에서 공산군 비밀경찰에 체포된 열 네명의 목사 중 열 두 명이 총살당한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육군본부 소속 이대위가 파견된다. 이들의 총살 이유가 무엇인지 이대위는 생존자 신목사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려 하지만 신목사는 침묵한다. 이대위는 사건의 진실을 알고자 하고 장대령은 진실과는 상관없이 사망한 목사들을 순교자로 규정한다. 이 사건을 훌륭한 선전 자료로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아주 중대한 종교탄압의 경우”로 이용하기 위함이다.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이 미스터리처럼 펼쳐지며 흥미를 자아내고 ‘진실’에 대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태도가 큰 줄기이다. 종교나 믿음, 신앙과 신이란 무엇인가는 지속될 질문이라면 그에 답하는 과정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성립되고 변화되고 완성되어 갈 것이다.


목사님의 신 ― 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예상가능하다. 그 고난을 신이 주셨고 고난 동안 함께 하실 거다…이에 대해 신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는 이들이 각각의 ‘신’을 믿는 자가 될 것이고 “뭔 소리래”라고 하는 이들은 신을 믿지 않는 자가 될 것이다.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이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방법일까, 고난을 주는 방법일까. 고통스런 상황을 극복하고 견디어 낼 수 있기 위해 무언가에 의지하려는 인간에게 신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신’을 믿는 방식에도 이해관계가 있다는 것을 ‘신’의 존재를 설파하려는 신도들에 의해 알게 된다.


기독교인이나 목사도 인간이란 점을 잊지 마시오. 그들을 잴 때는 다른 인간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척도와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 그 감정과 허약함을 재어야 하지 않겠소? 나는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어떤 성직자도 육체적 정신적 고문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종교인에 대해 남다를 것을 기대하는 심리. 기대가 무너지고 나면 인간 자체가 아니라 그 종교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 말이다. 신이, 교리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종교적 신념이 있을 필요가…. 목사든 신의 대변자라 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해석한 대로 말하는 신의 말씀, 그 교리는 신도들의 행동을 통해 전파될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의 믿음도 그를 통해서 큰 힘을 얻었소. 그의 행동과 신앙의 말들―그렇소. 그 사람의 그 견줄 데 없는 신앙의 말들을 통해서 큰 힘을 얻은 거요. 나는 그 사람 덕분에 내 믿음의 현 상태를 검토하고 하나님에 대한 나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료 교인들과의 관계를 다시 검토해볼 수 있었소.


  그렇기에 어떻게든 종교인들은 자세는 달라야 한다. 그토록 부르짖고 진실을 밝히려 자, 숨기려는 자, 왜곡하는 자, 신의 존재를 각자의 이익으로 해석하려는 이들 중 결국 승자는 누가 될까. 마을 사람들은 열두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받들며 그들의 희생과 영웅적 행동에 감사한다. 그렇기에 그 사건에서 살아남은 신목사에 대한 비난은 당연한 양상이다. 진실은 그렇지 아니하다, 그런 냄새를 풍기면서도 솔직하게 사건의 진상을 이야기하지 않는 신목사와 이대위와의 언쟁, 현장에 있었던 제3의 인물의 시각에서 보는 사건의 진실 등이 켜켜이 쌓여 신과 믿음, 삶과 죽음의 문제, 거짓과 진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난 화자 이대위의 말과 사고에 의지했다. 나의 감정이 냉정하라고 요구하면서도 거침없는 분노와 경멸이 차올랐으니.


이봐, 난 자네도 그 누구도 경멸하지 않아! 내가 경멸하는 건 자네들의 그 행동이야! 그들이 원하는 것,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걸 주었다고? 하지만 왜 그 사람들을 속여야 하나? 이미 수없이 속고 속아온 사람들을 무엇 때문에 또 속이는 거야? 그들의 비참한 생애 어쩌자고 거짓말까지 보태는 거냔 말야? 그들이 원하는 걸 주었다고? 그래 그들이 원하는 것이 거짓말 한 보따리란 걸 자네가 어떻게 알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정말 그런 것인지 자넨 자신 있어? 그들에게 필요한 건 진실이야.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이야말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고, 자네들은 그걸 줘야 하는 거야. 이 모두가 그들을 위한 것이고 그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아니지! 자네들이 그러는 건 선전을 위해서, 교회를 익명에서 구해내기 위해서야. 만사 괜찮아질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들을 잘 보살펴주시고 국가는 그들의 운명을 진지하게 걱정해주고 있고 그러니 만사 괜찮아질 것이다―사람들이 이렇게 믿게 하기 위해서지. 그것도 그들의 이름으로 말일세. 난 지쳤어. 이 모든 가식, 이 모든 고상한 거짓말,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위해 저질러지는 이 모든 것이 이젠 역겨워 견딜 수 없어.


  며칠 사이 하루하루 기사를 보는 내 심정이 그렇다. 걱정과 분노를 넘어서 쌓여 있다 폭발하게 되는 경멸. 개별적인 교리의 내용이 다르더라도 종교 그것이 가진 궁극적인 목적, 보편성은 있으리라는 내 당연한 믿음은 무너진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신’의 존재함을 증명받고 공동체의 존립을 유지하는 원대한 뜻을 펼치는 기회일지 모르나 나는 신의 존재를 말하는 그들의 행동으로 다시 한번 신의 존재를 의심할 뿐이다. 신, 그들만의 신. ‘내’게만 존재하는 신. 그들 식의 ‘순교’가 아니, 순교라는 단어 자체가 내게 상당한 모욕감을 준다. 순교라니, 신이라니. 무엇이, 무엇을 위해? 아니, 마귀라니?

  소설은 인간 행동의 이기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1950년 전쟁의 참혹함 상황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지금 인간의 이기를 발현할 특수한 상황인 건가. 모두 신목사 같은 존재들만 있는 건가.

  작가는 ‘노벨문학상 후보’였던 김은국 작가다. 세계 최고의 문학상이라 일컫는 노벨상 후보이자 커피 광고에 나온 작가로 기억된다. 번역서임을 보며 미국으로 건너간 작가가 미국인이기도 하다는, 아니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살아계셨다면 더 많은 작품을 쓰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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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주
김소윤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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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주가 없다


난주, 김소윤, 2018.


죄인 정난주는 더럽고 탐욕스러운 사학에 심취하여 임금께 씻을 수 없는 불충을 범하였고 제사를 폐하는 무부무군한 패륜을 저질렀다…… 죽은 자의 나라가 되살아난다는 요언을 일삼고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혔으며…… 나라를 파는 데 앞장선 대역죄인 황사영의 처로 백성을 현혹한 죄가 죽어 마땅하나……


  지구 탄생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이니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탄생과 죽음이 있었다. 구전과 문자로 전해지고 기록된 사람이 있는 반면 존재함조차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이 이 세상에 머물렀다. 이렇게 존재했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건 아련함으로 인해 흥미를 끈다. 시대와 상황, 생각하는 바가 다른 어떤 사람의 생애가 회자된다는 건 현재에 우리들에게 어떤 종류이든 울림을 주기 때문일 텐데, 난주란 인물은 어떨까.

  으레 사람을 소개할 땐 누군가와의 관계성을 앞세우긴 하지만 난주를 소개할 때에도 이렇게 시작한다. 정약용의 조카. 정약현의 딸. 정약용과 그 집안이 가지는 영향력이 있기에 정난주가 정약용 집안이라는 점에서 예상되는 바가 있다. 지식인, 강인함, 종교적 신념, 더불어 박해, 탄압 그런 것.

  황사영은 신유박해로 천주교가 처형되고 탄압을 받자 그 실태를 명주천에 적어 북경에 있는 프랑스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된다. 포교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 함대를 보내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이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천주교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고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 관비가 된다. 이러한 정난주의 삶을 그려낸 소설이다.

  정난주의 삶은 주어진 환경의 영향과 개인의 심성과 신념에 기인한다. 당시의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에도 천주교에서 구원와 삶의 가르침을 얻고자 한 정난주는 살아가는 내내 종교적 신념을 굳건히 하고 그에 따른 삶을 살아나간다. 흐트러짐 없이 강인하며 품격을 잃지 않는 정난주의 태도는 많은 이들에게 공경과 공격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정난주의 삶의 태도가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고 그 태도가 종교적 신념에 따르는 삶이라고 했을 때 소설에선 종교적인 색채가 그렇게 눈에 띄게 느껴지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핍박받은 천주교인이라는 점과 그 이미지만을 안고 있다. 어쩌면 천주교만이 가진 색채와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 아니라서일 수 있겠다. 그저 매우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수준에서 종교적인 뉘앙스를 다루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살아온 방식보다 살아갈 방식이 더 힘겨운 상황에서 정난주가 지켜가는 삶의 자세는 매우 인상적이다.

  정난주는 매우 격정적인 상황을 자주 맞닥뜨리지만은 가장 격정적인 장면은 아들에 대한 것이다. 난주는 제주도로 유배가는 길목에서 어린 아들을 ‘버린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부모들이 아이를 입양 보낸 것이 생각나는데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로 살아갈 아들의 미래를 염려하며 아들 경헌을 추자도 갈대밭에 내려두고 떠난다. 다행히 경헌은 마을에 살던 노인의 손에 길러졌다. 평생을 그리움과 죄책감 가득 살아가는 정난주의 마음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이후 정난주는 제주에서 다른 아이들을 제 자식처럼 거두고 보살피며 살아간다. 아들과 함께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장면만큼이나 인상적인 장면은 마을에 전염병이 돌 때이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난주>를 떠올리게 된 건 이 부분 때문이다.

  마을에 전염병이 돈다. 그 시작이 난주의 양딸 보말로부터 시작된다. 세상 가장 무서운 전염병, 마마님의 급속한 확산에 전염병 치료를 맡게 되는 정난주는 실로 성심성의껏 치료에 힘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니 어떤 차별도 없이 병의 위중을 보아가며 치료에 힘썼고 최선을 다했지만 병의 시작이 양딸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에 대한 책임감 또한 막중했으리라. 어떤 경우이든, 어떤 종교이든 인간에 대한 존엄과 사랑이 핵심이고 본질이 아닐까. 그런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려고 포교 활동을 하는 게 아닌가?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그런 삶의 태도를 실천하며 자신이 믿는 종교의 뜻을 보여주는 거 아닌가?

  가짜뉴스가 나돌고는 있다고 하지만 감추고, 무질서하며, 보편적인 예의를 갖추지 않은 종교인들의 태도가 종교 자체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소설 <난주>는 집단의 힘이 세상에 내놓은 영향이 아니라 오로지 한 개인의 성정으로 만들어간 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종교적 힘이 <난주>의 삶을 이끌었을까 했던 생각은 종교의 힘이 아니라 개인의 힘이라는 생각을 더하게 한다. 그리하여 지금 ‘난주’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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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손님 (양장)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안드레 애치먼 지음, 정지현 옮김 / 잔(도서출판)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이름을 불러줘


그해, 여름 손님, 안드레 애치먼, 2018.


  그해 여름을 기억하며 시작하는 소설은 “나를 당신의 이름으로 불러 줘요”라는 말로 끝맺는다. 제목이 전체 소설 이미지를 가늠‧장악한다는 점에서 원제와 다른 번역본 제목은 상반된 느낌을 준다.  <그해, 여름 손님>은 나른하고 간지럽고 아련한 느낌이다. 과거의 어느 시간대에 머물러 있는 느낌을 준다. 시간과 공간이 주는 이미지, 감각적인 분위기에 더 휩쓸려 보게 된다. 반면 원제는 강하고 격렬한 느낌이다. 아련함보다는 움켜쥐려는 느낌과 대화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두 이미지를 겹쳐두고 보면 결국 이 소설은 사랑이야기다. 아주 익숙한. 그렇잖은가?


내가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세계였다. 하지만 이 세계가 좋았다. 이 세계의 언어를 배우고 더욱 좋아졌다. 그것은 내 언어이고 호칭이었다. 가장 깊은 곳의 갈망이 정감 어린 농담으로 밀수되는 곳. 두려운 일에 미소를 보이는 것은 더 안전해서가 아니라 내가 새로 발 들인 세계의 모든 욕망은 오로지 연기로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이란 경험해보기 전에도 사랑하는 그 순간에도 늘 판타지일 것이다. 열일곱 살 엘리오는 ‘한번도 와 본 적 없는 세계’라고 말한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사랑을 채워가는 과정의 호기심, 떨림, 두려움은 엘리오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엘리오는 감성적이고 감각적이고 또한 열일곱 소년의 무게로 자유분방하고 매우 도전적이기도 하다. 그해 여름 이탈리아 해안가의 별장에서 소년은 부모님이 초대한 학자 스물넷의 올리버를 만난다.

  소설은 회상이기에 올리버를 만난 그해 여름은 특별히 기억된다. 햇살 하나까지도.

  올리버이기에 엘리오의 마음이 끌린 것일까. 그때 그해, 열일곱으로 성장한 엘리오의 그 나이가 그 마음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어쩌면 일탈, 그러나 사랑. 어쨌든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더욱 적극적이다. 올리버의 시각으로 쓴 책이기에 엘리오의 감정이 뚜렷이 드러나지만  학자로서 스물 넷 성인으로서 올리버는 좀더 제 감정을 컨트롤하려 한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연주할게요,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내 손가락이 벗겨질 때까지. 난 당신을 위해 뭔가 해 주는 게 좋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테니까 말만 해요.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았어요. 친근하게 다가가는 나에게 또다시 얼음처럼 차갑게 반응할 때조차. 우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 여름을 눈보라 속으로 가져가는 쉬운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거예요.


  우리나라와 외국의 문화는 매우 다르고 특히 성과 사랑의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엘리오를 미성년자로 두 사람을 동성이라는 틀로 가두고 보면 이 사랑은 매우 ‘문제시’되는 것으로 치부된다. 실제 상황이라면 엄청난 파급력으로 가십의 대상이 되어 포털을 뒤흔들고 있을 얘기다. 어쩐지 이탈리아에서 벌어지는 이 이야기는 배경 때문인지 소설을 읽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인지, 전혀 놀랍고 심각하게 보이지 않는다. 엘리오와 올리버만이 조심스럽다. 그들 또한 마냥 자유롭지 못하기에 그들의 사랑은 좀더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눈짓과 손짓으로 오간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란 어느 정도 타인에게 감춤과 드러냄의 밀당을 지속하는 과정이다. 그러하기에 틀을 치우고 본다면 그냥 사랑하는 사람들이 ‘썸’을 타고 사랑을 확인하는 일련의 감정과 상황이 자연스럽고 감각적으로 펼쳐진다. 그 간질거림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수많은 이들의 첫사랑처럼. 

  그래서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열일곱 소년이라거나 동성애라거나. 특별할 것 없는 사람과의 사랑이야기라고. 하지만 이것 역시 ‘틀’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의 작용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소설을 읽어가며 사랑에 눈뜬 소년의, 특히 피아노 치는 아이의 감성은 다르구나 생각하면서 읽었지만,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 딱히 이 문장이 다가왔던 건 아니다. 우리에겐 너무도 유명한 “김춘수의 꽃”이 있어 이 문장에 대한 생각은 나름 각인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지점에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 어떤 느낌이지 생각했다. 

 

그동안 난 어디에 있었던 거지? 올리버, 내가 어릴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요? ‘이게 없는 삶은 무슨 의미일까?’라는 질문이기도 했다. 끝에서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만둔다면 난 죽을 만큼 괴로울 거예요. 그만둔다면 난 죽을 만큼 괴로울 거예요.”라고 말한 사람이 그가 아니라 나인 이유였다. 그것은 내 꿈과 환상, 그와 나, 그의 입에서 내 입으로, 다시 그의 입으로 입에서 입으로 왔다 갔다 하는 욕망의 말을 완성하는 길이었다. 내가 외설스러운 말을 시작했는지 그가 부드럽게 따라 하다가 말했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 줘.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 태어나 처음 해 본 일이었다. 그를 내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 나는 그 전에, 어쩌면 그 후에도 타인과 공유한 적 없는 영역으로 들어갔다.


  공유. 타인과의 합일. 사랑할 땐 흔히 눈이 먼다고 한다. 생각은 많이 하지만 한 부분에 집중되어 생각되기도 하고. 엘리오는 올리버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사랑과 정체성에 대해 생각한다. 열일곱 소년은 더욱 더,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휘둘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각하는 것은, 어떤 순간에도 나는 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그 이상적인 뜻을 수긍하면서도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나는, 사랑할 때일수록 내 이름을 지켜야 할 거라는 생각을 아주 굳건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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