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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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순교자, 김은국, 문학동네, 2010.


 

  “그런데 그 신목사를 당신이 경멸할 수가 있겠소? 그리고 나를?”

  “당신은 분명 우릴 경멸하고 있어. 그렇지 않소?”

  “왜 그래? 자넨 나까지도 경멸하고 있나?”

  “내가 경멸하는 건 자네들의 그 행동이야!”


  소설에선 거듭 ‘경멸’이란 단어가 나온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통해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경멸’이다. 사전상 말뜻을 머리로 ‘이해한다’, ‘알겠다’가 아니라 마음으로 ‘알겠다’. 앞으로 경멸이란 단어가 어떤 상황과 감정에서 사용할지를 체감했다. 1950년도 6·25전쟁 당시의 현실을 바탕으로 관념적인 이야기를 잘 펼쳐내고 있다. 관념이란 으레 머릿속으로 맴돌기 마련이다. 알듯 하면서도 아리송하다. 명쾌함을 같기 까지는 더 많은 생각과 시간이 필요하다. 읽는 순간엔 가슴이 벅차지만 소설을 바탕으로 한 물음이 명쾌하게 완료되었다고 보기엔 어렵다. 그렇게 한곳에 밀쳐두었던 생각들이 요즈음의 상황에서 되살아난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신천지교인들의 코로나 증가 상황과 그들의 대응방식을 통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쾌해 지려나 보다.   


목사님의 신이건 그 어떤 신이건 세상의 모든 신들은 대체 우리에게 무슨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은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지도 않을뿐더러 인간의 비참, 살육, 굶주린 백성들, 그 많은 전쟁, 그리고 그 밖의 끔찍한 일들과는 애당초 아무 상관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6·25전쟁 당시 평양에서 공산군 비밀경찰에 체포된 열 네명의 목사 중 열 두 명이 총살당한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육군본부 소속 이대위가 파견된다. 이들의 총살 이유가 무엇인지 이대위는 생존자 신목사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려 하지만 신목사는 침묵한다. 이대위는 사건의 진실을 알고자 하고 장대령은 진실과는 상관없이 사망한 목사들을 순교자로 규정한다. 이 사건을 훌륭한 선전 자료로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아주 중대한 종교탄압의 경우”로 이용하기 위함이다.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이 미스터리처럼 펼쳐지며 흥미를 자아내고 ‘진실’에 대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태도가 큰 줄기이다. 종교나 믿음, 신앙과 신이란 무엇인가는 지속될 질문이라면 그에 답하는 과정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성립되고 변화되고 완성되어 갈 것이다.


목사님의 신 ― 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예상가능하다. 그 고난을 신이 주셨고 고난 동안 함께 하실 거다…이에 대해 신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는 이들이 각각의 ‘신’을 믿는 자가 될 것이고 “뭔 소리래”라고 하는 이들은 신을 믿지 않는 자가 될 것이다.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이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방법일까, 고난을 주는 방법일까. 고통스런 상황을 극복하고 견디어 낼 수 있기 위해 무언가에 의지하려는 인간에게 신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신’을 믿는 방식에도 이해관계가 있다는 것을 ‘신’의 존재를 설파하려는 신도들에 의해 알게 된다.


기독교인이나 목사도 인간이란 점을 잊지 마시오. 그들을 잴 때는 다른 인간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척도와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 그 감정과 허약함을 재어야 하지 않겠소? 나는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어떤 성직자도 육체적 정신적 고문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종교인에 대해 남다를 것을 기대하는 심리. 기대가 무너지고 나면 인간 자체가 아니라 그 종교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 말이다. 신이, 교리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종교적 신념이 있을 필요가…. 목사든 신의 대변자라 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해석한 대로 말하는 신의 말씀, 그 교리는 신도들의 행동을 통해 전파될 수밖에 없다.  


나 자신의 믿음도 그를 통해서 큰 힘을 얻었소. 그의 행동과 신앙의 말들―그렇소. 그 사람의 그 견줄 데 없는 신앙의 말들을 통해서 큰 힘을 얻은 거요. 나는 그 사람 덕분에 내 믿음의 현 상태를 검토하고 하나님에 대한 나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료 교인들과의 관계를 다시 검토해볼 수 있었소.


  그렇기에 어떻게든 종교인들은 자세는 달라야 한다. 그토록 부르짖고 진실을 밝히려 자, 숨기려는 자, 왜곡하는 자, 신의 존재를 각자의 이익으로 해석하려는 이들 중 결국 승자는 누가 될까. 마을 사람들은 열두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받들며 그들의 희생과 영웅적 행동에 감사한다. 그렇기에 그 사건에서 살아남은 신목사에 대한 비난은 당연한 양상이다. 진실은 그렇지 아니하다, 그런 냄새를 풍기면서도 솔직하게 사건의 진상을 이야기하지 않는 신목사와 이대위와의 언쟁, 현장에 있었던 제3의 인물의 시각에서 보는 사건의 진실 등이 켜켜이 쌓여 신과 믿음, 삶과 죽음의 문제, 거짓과 진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난 화자 이대위의 말과 사고에 의지했다. 나의 감정이 냉정하라고 요구하면서도 거침없는 분노와 경멸이 차올랐으니.


이봐, 난 자네도 그 누구도 경멸하지 않아! 내가 경멸하는 건 자네들의 그 행동이야! 그들이 원하는 것,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걸 주었다고? 하지만 왜 그 사람들을 속여야 하나? 이미 수없이 속고 속아온 사람들을 무엇 때문에 또 속이는 거야? 그들의 비참한 생애 어쩌자고 거짓말까지 보태는 거냔 말야? 그들이 원하는 걸 주었다고? 그래 그들이 원하는 것이 거짓말 한 보따리란 걸 자네가 어떻게 알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정말 그런 것인지 자넨 자신 있어? 그들에게 필요한 건 진실이야.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이야말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고, 자네들은 그걸 줘야 하는 거야. 이 모두가 그들을 위한 것이고 그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아니지! 자네들이 그러는 건 선전을 위해서, 교회를 익명에서 구해내기 위해서야. 만사 괜찮아질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들을 잘 보살펴주시고 국가는 그들의 운명을 진지하게 걱정해주고 있고 그러니 만사 괜찮아질 것이다―사람들이 이렇게 믿게 하기 위해서지. 그것도 그들의 이름으로 말일세. 난 지쳤어. 이 모든 가식, 이 모든 고상한 거짓말,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위해 저질러지는 이 모든 것이 이젠 역겨워 견딜 수 없어.


  며칠 사이 하루하루 기사를 보는 내 심정이 그렇다. 걱정과 분노를 넘어서 쌓여 있다 폭발하게 되는 경멸. 개별적인 교리의 내용이 다르더라도 종교 그것이 가진 궁극적인 목적, 보편성은 있으리라는 내 당연한 믿음은 무너진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신’의 존재함을 증명받고 공동체의 존립을 유지하는 원대한 뜻을 펼치는 기회일지 모르나 나는 신의 존재를 말하는 그들의 행동으로 다시 한번 신의 존재를 의심할 뿐이다. 신, 그들만의 신. ‘내’게만 존재하는 신. 그들 식의 ‘순교’가 아니, 순교라는 단어 자체가 내게 상당한 모욕감을 준다. 순교라니, 신이라니. 무엇이, 무엇을 위해? 아니, 마귀라니?

  소설은 인간 행동의 이기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1950년 전쟁의 참혹함 상황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지금 인간의 이기를 발현할 특수한 상황인 건가. 모두 신목사 같은 존재들만 있는 건가.

  작가는 ‘노벨문학상 후보’였던 김은국 작가다. 세계 최고의 문학상이라 일컫는 노벨상 후보이자 커피 광고에 나온 작가로 기억된다. 번역서임을 보며 미국으로 건너간 작가가 미국인이기도 하다는, 아니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살아계셨다면 더 많은 작품을 쓰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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