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의 계보


넬레 노이하우스, 여름을 삼킨 소녀

  

  "그동안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동안 타우누스 시리즈로 범죄 추리 소설을 써오던 작가의 ‘완전히 다른 이야기’란 어떤 것일까. 완전히 다를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은 장르적인 특성을 말하는 것일지 이야기를 말하는 것일지 생각했는데, ‘완전히 다른 이야기’란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등장해서 범인을 추리한다면 얘기의 전개는 같아 질 것이다. 그러니까 비슷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신고만 들어갔다면 청소년보호법을 위반한 범죄자들을 찾는 이야기가 될 것이니까. 아니면 시체만 발견된다면.


 이제 나는 그 친구들이 낯설었다. 그들은 축 늘어져서는 한없이 불평하며 예정된 삭막한 미래로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그 미래 역시 축 늘어져 있고 불만스러울 터였다. p98


  나 역시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미국을 배경으로 한 독일 작가의 소설인데 작가 특유의 추리와 미스터리가 가미되어 있지만 꽤 익숙하다. 방점은 ‘청소년’에 있다. 이 책은 15세 소녀 셰리든의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청소년의 성장 소설이란 늘 방황과 혼란과 반항과 일탈이 상징처럼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것은 규율에 답답해하고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다. “그들은 축 늘어져서는 한없이 불평하며 예정된 삭막한 미래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덧붙여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가족의 주는 억압이다. 이 책 속의 셰리든 역시 이 모든 것을 갖췄다. 하나 더 있자면 출생의 비밀이다. 그녀는 자신이 입양되어 온 것을 알고 있고 양엄마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못마땅해 한다. 그러니 이 아이의 반항의 이유는 이 모든 것이 골고루 결합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소설 역시도 익숙한 ‘청소년’ 소설의 계보를 따르게 된다.

  작가는 자신이 미국 네브라스카를 여행한 기억을 살려 이 소설을 썼다 한다. 독일 타우누스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은 지역적인 차이도 한몫하는 것 같다. 매력적이고 활력적인 이 소녀를 못마땅해 하는 이가 바로 자신의 엄마라면, 그런데 알고 보니 친엄마가 아니라면, 그래서 그렇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소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엄마와 막내 오빠와의 힘겨루기에서 그나마 아버지와 다른 오빠들의 사랑으로 버티고 있다.

  셰리든의 처음의 일탈은 어찌보면 가벼웠다. 친구들과 사유지에서 음악을 들으며 노는 것 정도. 그것이 보다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고 활동이었다. 그러나 반복된 이 행동으로 경찰에 연행된 이후의 금지된 외출과 좋아하는 음악을 할 수 없게 된 소녀는 더욱 더 강도 높은 일탈과 반항의 욕구를 가지게 된다.

  왜 반항의 형식은 성적인 일탈로 나아가는 걸까. 그것은 반항과 일탈의 틀이 너무나 정해졌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사회문화적인 배경의 차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른 나라나 우리나라다 청소년들의 일탈의 궤도는 정해진 듯하다. 어쩌면 그 나이의 셰리단의 성적인 호기심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사랑의 감정과 성적인 호기심은 다른 것이고 이후 셰리든 역시 그것을 안다. 물론 주체적인 듯이 보이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아 보이는 셰리든의 격정적인 여름은 그렇게 모든 것이 성적인 일탈로 향해간다. 

  한여름은 일탈과 동의어가 아니다. 여름은 너무 뜨겁고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격정적인 활동에의 욕구를 가지는 것처럼 얘기한다. 하지만 여름은, 그저 여름이다. 다시 돌아올 여름이고 다른 계절로 향해 갈 뿐이다. 작가가 타우누스 시리즈의 넬레 노이하우스였기에 이 책에 대한 ‘관심’과 ‘찬사’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그 여름을 세 번 삼키고서 출생의 비밀을 알고서 자신은 더한 비밀을 만들어 놓고 셰리단은 이 곳을 떠난다. 그 많은 일들을 겪고서 자유를 찾아 떠나고자 했던 셰리든에게 더 이상의 일탈과 반항은 없게 되는 것일까. 자유를 찾게는 되는 것일까. 청소년들에게,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그 시기의 아이들에게 가족이라는, 부모라는 역할이 미치는 영향력. 그것을 알면서도 부모와 자녀들은 늘 그렇게 대립한다. 결국 모두가 제 감정을 우선하여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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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우누스 시리즈6. 사악한 늑대


늑대는 억울하다



  시리즈의 여섯 번째다. 나올 때가 되었다. 범죄를 다루는 추리소설이라면 당연 빠지지 않는 이야기, 그 사건이 <사악한 늑대>에 담겨 있다. 제목에서 벌써 어떤 감이 느껴진다. 동화를 연상시키는 제목, 프롤로그의 분위기. 그리고 학대당한 흔적이 온 몸에 가득한 채 강에서 발견된 소녀의 시체. 방송의 힘을 빌렸음에도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피해자인 소녀는 여전히 제 이름을 찾지 못한 채 ‘인어공주’로 지칭된다.

  작가의 글쓰기 특징은 이번 책에서도 나타난다. 많은 등장인물이 나타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전 시리즈에선 용의자가 무수히 많았다면 <사악한 늑대>에선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사건을 해결해야 할 형사들이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동안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형사에 의한 용의자로서가 아니라 그냥 등장인물로서다. 결국 이 인물들이 한 지점으로 모아지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며 언제가 되는지 사건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작가는 <사악한 늑대>를 ‘지금까지 썼던 소설 중 최고의 작품’이라 했다 한다. 형식을 말한 것일까, 스토리를 말한 것일까. 시리즈 다섯 편을 읽은 후 몇 년 만에 <사악한 늑대>를 읽었더니 지루함과 예측가능함이 생겼다. 항상 이 작가의 이야기는 ‘범인’을 찾아내는 것보다 ‘왜’에 더 집중되기에 충분히 범인들이 예상되는 것 같긴 하다. 그리고 대략 ‘왜’의 이유도 가늠할 수 있다. 다만 다단계처럼 이루어지는 범죄의 계보에서 꼭대기에 있는 일의 시초가 되는 이의 ‘왜’는 알 수가 없다. 다른 이들은 그에 의해 길러졌기에 전염되고 그 상황에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터득한 채 성격이 형성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가 죽은 이유처럼, 도대체 처음의 이 일을 시작한 이들은 왜 그런 것인가. 단지 성격이 지랄같아서?

  <사악한 늑대>는 아동학대를 다루지만 아동학대 중에서도 여아들에게 주로 해당되는 아동성폭력을 다루고 있다. 변태적이고 비이성적인 경악할 범죄가 혈육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는 놀라움은 그것을 혼자서가 아니라 조직적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데 대한 경악으로 바뀐다. 제 딸을 제 친구들과 함께 하는 변태적 성행위에 들이미는 권력과 재력을 가진 자의 표피는 미혼모와 아이들을 위한 복지활동을 위한 재단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운영하는 재단이란 자신의 변태성향을 충족시켜줄 지속적인 아동공급처일 뿐이다. 악은 악을 양성한다. 그가 양육한 버림받고 갈데 없는 아이들은 일찌감치 그의 노예가 되었다가 그 위에 군림한다. 아동포르노와 스너프 사업으로 확장되어 전세계에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이 집단이 믿는 것은 그들이 가진 폭력성과 또한 그 험악한 취향에 발을 담그고 있는 재력과 권력을 수두룩 가진 이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취향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고 그들의 끔찍한 범죄는 폭로되지 않으며 오히려 다른 이를 범인으로 둔갑시키는 능력까지 갖추었다.

  작가가 처음부터 의심스럽게 몰아간 이는 이 끔찍한 집단을 폭로하려다 억울하게 아동성범죄자로 몰린다. 그리하여 수감되고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채 10여년을 살아온 킬리안 로테문트. 환경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서 그렇다고 한다면 그럼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이들에 대해선 어떻게 말할 것인가.  


겉으로 볼 때는 삶이 많이 바뀌었지만 사람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비밀스러운 욕망과 꿈, 동경은 그대로였다. 평상시에는 잘 참고 지냈다. 하지만 가끔은 이성보다 내적 열망이 강하게 치고 올라와 그것들을 통제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p106


  오래도록 그리고 또한 전세계적으로 이 끔찍한 아동포르노 마피아 일당이 검거될 수 있었던 것은 삶이 추락하는 가운데에서도 지킬 것은 지키며 삶을 이어온 이들 덕분이다. 끔찍한 상황,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그것을 이겨내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킬리안, 한나. 사랑을 위해 제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버리고 아내를 위해 사악한 집단과 맞선 베른트 프린츨러의 굴복하지 않는 노력이, 그들의 꿈이 이뤄낸 결과이다.

  <사악한 늑대>에서 함께 경악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장면은 역시 아이가 “이제 나쁜 늑대가 죽은 거야? 다시는 나한테 아무 짓도 못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부분일 것이다. “늑대가 잡아가”라는 말에 무서워하는 순진한 어린 아이들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늑대를 이용해서 입다물게 하는 사악한 놈들. 아이들은 왜 그다지도 늑대보다 더 무섭고 사악한 놈들보다 늑대를 무서워하는 것인지.

  끔찍스럽게도 가장 악랄한 놈이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이 타우누스 시리즈가 계속될 것임을 알리는 것일까, 아니면 아동성폭력이 계속될 것임을 말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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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우누스 시리즈 5. 바람을 뿌리는 자

직관의 힘


그때까지 휴가 기분을 미처 떨치지 못하고 있던 스탠바이 모드에서 강력계 형사의 수사 모드로 완전히 돌아섰다. 직관과 육감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p45


  추리소설에서 형사는 냉철하고 빠른 판단력과 남다른 두뇌가동력을 보이며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범죄자들 역시 형사들을 뛰어넘는 트릭과 교묘함으로 범죄를 벌이고 빠져나간다. 이들 간의 시소 게임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타우누스 시리즈의 대표적인 형사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이런 모습과는 좀 거리가 있다. 특히 다섯 번째 이야기에선 더 그런 듯하다. 마치 현실의 형사들처럼 내 집안일에 골머리를 앓고 그래서 허둥지둥하는 모습들, 개인 감정이 사건을 추리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특히나, 피아는 직관과 육감에 의지한다.

  직관, 육감이 사건을 분석하고 추리하는 과정에서 제 역할을 잘 이끈다면야 무슨 문제가 있으랴. 때론 설명할 수 없는 육감이라는 것이 사건을 해결해주는 결정적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피아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이번에도 역시 내 직관이 맞았어.”

  직관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만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내내 나타난다. 특히 우리들의 인간관계는, 사람의 사귐은 이 직관에 철저하게 의존하지 않는가. 사람이 사람에게 가지는 마음이란, 거의 직관의 산물인 것을.


바람을 뿌리는 자는 폭풍을 거두는 법입니다! p331


  <바람을 뿌리는 자> 는 시리즈 두 번째 <너무 친한 친구들>을 연상케 한다. 도로건설을 두고 찬반이 양립하는 가운데 발생한 살인 사건엔 수많은 용의자가 발생했다. 누군가가 죽음으로써 이득을 보는 세력이 많을수록 용의자는 늘어난다. 작가는 환경문제를 소설로 다루며 이에 대한 생각을 하게끔 한다. <바람을 뿌리는 자> 역시 환경문제를 다룬다. 사건이 발생한 곳은 풍력회사이며 풍력발전소 건설을 두고 시민단체와 기업 간의 대립이 진행되고 있다.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한 조작은 당연 이뤄지는 것이고 여전히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살인이었을까 의심해 볼만도 하지만, 넬레 노이하우스의 결정적 범인은 항상 눈에 크게 보이는 상황의 용의자가 아니라 숨겨져 있다가 드러나는 사람이다. 또한 권력과 돈을 쥔 이들의 온갖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도 하지만, 개인의 욕망에서 발현된 살인이 자주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번 편 역시 뻔해 보이는 이들은 용의자에서 제외하고 나면 누가 남고, 그들의 살인의 이유는 뭐가 될까.

  살인의 이유는 열심히 설명한다 해도 많진 않은 것 같다. 돈, 질투, 분노, 원한…. 이런 감정의 요인들이 우발적인 상황과 겹치거나 아니면 의도와 겹치거나.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어린 마르크의 감정이 안쓰럽게 다가오는 건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그의 마음에 또다시 상처가 얹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인간을 믿는 직관은 어디서 연유하건대 거짓을 일삼는 이들에게 존경과 신뢰의 마음을 내어주었던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크게 실망을 하지. 하지만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거짓말쟁이들을 가려낼 수 있게 돼. p558


  사람들에게, 어른들에게 거듭 배신당한 17세 소년 마르크의 절규에 피아는 위와 같이 말한다. 거짓말에 길들여지는 건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과정으로 들린다. 거짓과 위선을 가려내는 방법은 이성인 걸까, 직관인 걸까.

  하나의 상황을 둘러싸고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끌어들여 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사기, 배신, 음모를 꾸민다. 아니, 그런 것을 꾸미기 때문에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바람을 뿌리는 자는 결국엔 폭풍을 거둬가게 되는 사회가 된다면 좋으련만. 더한 폭풍의 격랑같은 감정에 휘말리게 되면 좋으련만.

  타우누스 시리즈는 범인을 추리하는 재미가 아니라 이중적이고 욕망덩어리인 인간을 선별하는데 더 유용한 것 같다. 한 사건에 연루되는 수많은 용의자들이 나와 자신들의 이기심이 당연한 듯 드러내는 모양을 보면서 그런 인간들을 가려내는 직관을 더욱 더 키울 수 있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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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우누스 시리즈 4.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쉿! 너만 알고 있어야 돼!


   비밀이 드러나기 위해선 끝까지 비밀을 파헤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의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비밀’이 만들어져야 한다. 비밀이란 항상 ‘너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니까 너만 알고 다른 누군가는 모르게 해야 하는 것. ‘너와 나’가 만들어 내는, 꾸미는 음모가 그러니까 비밀이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역시 비밀을 만들어 내는 자와 비밀에서 소외된 자와의 대결이다. 다른 시리즈에 비해 아멜리라는 발랄한 소녀의 등장이 필요했던 것도 ‘비밀’의 소유자인지 아닌지와 관계가 있다. 한번 구덩이를 파고 난 뒤엔 퍼낸 흙으로 전과 같이 구덩이를 메꿀  수 없다. 무엇보다 이전과는 이미 달라져 있는 흙의 색깔이 조화롭지 못하다. 그러니, 더 많은 흙이 필요하다. 파헤친 색깔의 흙을 표면의 흙 색깔로 만들기 위한 처절한 위장의 흙더미들이. 그렇게 비밀은 만들어진 순간, 더 많은 비밀을 생성하며 덩어리로 구덩이로 삶을 밀어버린다. 그럼에도 그 첫 번째 비밀을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또다른 구덩이를 파헤치며 같은 색의 흙을 찾아 헤맨다.


인생은 그렇게 순식간에 바뀐다. 잘못 디딘 한 걸음, 잘못된 사람과의 잘못된 만남, 그러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p58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 타우누스 시리즈 중에서 가장 열광적인 호응을 얻는 것은 충격의 강도에 있는 것 같다. 타우누스의 공통점은 큰 줄기의 사건으로 둘러쳐 있지만 결국 개인의 욕망, 이기심이 사건의 결정타였고 백설공주에서도 드러난다. 이전에는 권력과 재력가들의 욕망의 문제가 강조되었다고 한다면 백설공주에서는 권력과 재력을 가지지 않은 일상의 이웃들, 너가 그가 그녀가 가하는 이기심이 집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의 범인을 찾아가는 것과 달리 이미 사건은 벌어졌고 범인이 형량까지 치러진 상황에서 그가 진범이 아니라는 데서 오는 충격. 진실이 은폐된 채로 억울한 희생자가 생겼다는 데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그 재판이라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운 형태로 흘러갔음을 알게 되어 감정의 이입이 더해진 것이다.

  흑산도 성폭행 사건이나 22명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의 부모들의 반응이 백설공주 속 사건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와 같다. 거기서 더 나아가 흙을 파헤치고 덮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긴 하다. 폐쇄성은 집단의 지리적인 위치가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 작용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언제까지 비밀의 섬에 갇혀 있느냐는 ‘너에게만 알려주는 비밀’을 공유할 집단을 언제까지 만드느냐에 달려 있는 듯하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죄를 짓더라도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 한 생은 변함없이 계속되리라는 잘못된 기대, 너와 같이 남에게 전가하면 될 것 같은 착각은 어리석음일까 욕망일까.

  잘못된 방식으로 잘못을 공유하게 되면 거기서 헤어나올 수 없다. 그래서 언제나 비밀은 만들어지고 생명력을 갖게 된다. 비밀을 파헤치는 것은 그들 집단에 들어갈 수 없는, 들어가지 않은 자들의 몫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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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덥다


 타우누스 시리즈3. 깊은상처

 넬레 노이하우스.


  다시 한번, 작가가 독일인임을 느꼈다. 한국인이 일제강점기를 어떻게 살아냈는지 현재도 일본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떠한지를 생각하며 독일인에게도 나치의 역사는 깊이 새겨진 영원한 통증일 것이라는 생각을. 1, 2권뿐만 아니라 다른 시리즈를 조금은 흥미 관점을 더 가졌다면 그래서 스토리, 구조에도 치중했다면 3권 <깊은 상처>는 숨막히는 통증으로 읽었다. 책의 첫 페이지에 씌어진 ‘안네에게 바칩니다’라는 문구를 무심히 넘겼는데 책을 덮고 나서야 안네의 일기의 저자, 안네 프랑크라는 것을 깨달았다.

  <깊은 상처>의 사건은 유대인 노인이 나치의 처형 방식으로 총살당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는 독일 태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국적이며 레이건 대통령의 자문이었던 돈과 명예를 지닌 아흔 셋의 노인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당연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에 수용되는 고통을 겪었다. 그런 그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제 집에서 1.6.1.4.5.라는 숫자와 함께 죽은 것이다. 피해자를 부검한 결과는 놀랍다. 이 유대인에게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 노인에게서 나치 친위대 문신이 발견된 것이다. 가족들의 요청으로 미국 정부가 서둘러 이 시신을 수습해 가는데 또다시 같은 방식으로 노인이 계속 살해당한다.

  연속한 사건의 희생자가 나오면 당연, 이들 간의 연결고리를 찾는다. 이 사건들이 가진 공통점이 무언가. 그들 모두에게서 나치 친위대원이었음을 보여주는 물건들이 발견되었다는 점과 명망 높은 재벌가 칼텐제 가와의 친분이다. 수용소와 나치가 연결되니까 16145라는 숫자가 수용소 수감번호인가라는 생각도 들면서 숫자의 의미가 궁금했는데 날짜를 의미했다. 타인의 신분, 그것도 자신들이 죽인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거나 떳떳치 못할 경우이다. 더 이상 뭐라 말할 수도 없는 2차 세계대전의 시기, 나치의 행위들 속에 섞여 개인의 욕심과 욕망을 채운 이들은 또한 수없이 많을 것이다.

  역사적・사회적인 큰 사건은 결국 인간이 겪는 것이다. 그 사건을 겪은 그 시대의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사건>으로 덩어리로 지속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하지만, 그 덩어리들이 모이기까지의 해변의 모래알만큼의 무수한 이야기들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그 수많은 이야기들, 아픔들, 상처들.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을.

  <깊은 상처> 역시도 지워지지 않을 고통 속에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지닌 인물이 현재 사건의 가해자가 된다.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것을 그저 개인의 고통과 상처의 크기와 그것을 극복하는 의지의 차이로 볼 수는 없다.


 그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완전히 윤리의식으로 자리 잡아 그를 괴롭히는 신앙을 저주했다. 아무리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려 한들 소용없다. 진심으로 후회하고 반성하지 않는 한 용서는 없다. p15

 

  정의라고 이름 불리는 것이 어느 정도가 되어야 정의가 구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끔은 의문이 든다. 죄를 저지른 인간들에 대한 재판을 통한 정의실현을 제일 먼저 말하긴 하지만, 그 법적인 정의가 항상 바르게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또한 ‘내’가 당한 것인데 ‘내 의견’은 없이 이루어지는 죄의 형량과 법적 판단이 불합리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휘몰아치는 시간의 흐름들, 인간의 역사 속에 인간이지 않은 이들이 있다. 그들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고통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적’이기에 노력하던 이들은 오히려 후자였다. 이러한 인간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만큼이나 무력하게 느껴지고, 마냥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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