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덥다
타우누스 시리즈3. 깊은상처
넬레 노이하우스.
다시 한번, 작가가 독일인임을 느꼈다. 한국인이 일제강점기를 어떻게 살아냈는지 현재도 일본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떠한지를 생각하며 독일인에게도 나치의 역사는 깊이 새겨진 영원한 통증일 것이라는 생각을. 1, 2권뿐만 아니라 다른 시리즈를 조금은 흥미 관점을 더 가졌다면 그래서 스토리, 구조에도 치중했다면 3권 <깊은 상처>는 숨막히는 통증으로 읽었다. 책의 첫 페이지에 씌어진 ‘안네에게 바칩니다’라는 문구를 무심히 넘겼는데 책을 덮고 나서야 안네의 일기의 저자, 안네 프랑크라는 것을 깨달았다.
<깊은 상처>의 사건은 유대인 노인이 나치의 처형 방식으로 총살당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는 독일 태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국적이며 레이건 대통령의 자문이었던 돈과 명예를 지닌 아흔 셋의 노인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당연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에 수용되는 고통을 겪었다. 그런 그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제 집에서 1.6.1.4.5.라는 숫자와 함께 죽은 것이다. 피해자를 부검한 결과는 놀랍다. 이 유대인에게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 노인에게서 나치 친위대 문신이 발견된 것이다. 가족들의 요청으로 미국 정부가 서둘러 이 시신을 수습해 가는데 또다시 같은 방식으로 노인이 계속 살해당한다.
연속한 사건의 희생자가 나오면 당연, 이들 간의 연결고리를 찾는다. 이 사건들이 가진 공통점이 무언가. 그들 모두에게서 나치 친위대원이었음을 보여주는 물건들이 발견되었다는 점과 명망 높은 재벌가 칼텐제 가와의 친분이다. 수용소와 나치가 연결되니까 16145라는 숫자가 수용소 수감번호인가라는 생각도 들면서 숫자의 의미가 궁금했는데 날짜를 의미했다. 타인의 신분, 그것도 자신들이 죽인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거나 떳떳치 못할 경우이다. 더 이상 뭐라 말할 수도 없는 2차 세계대전의 시기, 나치의 행위들 속에 섞여 개인의 욕심과 욕망을 채운 이들은 또한 수없이 많을 것이다.
역사적・사회적인 큰 사건은 결국 인간이 겪는 것이다. 그 사건을 겪은 그 시대의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사건>으로 덩어리로 지속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하지만, 그 덩어리들이 모이기까지의 해변의 모래알만큼의 무수한 이야기들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그 수많은 이야기들, 아픔들, 상처들.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을.
<깊은 상처> 역시도 지워지지 않을 고통 속에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지닌 인물이 현재 사건의 가해자가 된다.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것을 그저 개인의 고통과 상처의 크기와 그것을 극복하는 의지의 차이로 볼 수는 없다.
그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완전히 윤리의식으로 자리 잡아 그를 괴롭히는 신앙을 저주했다. 아무리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려 한들 소용없다. 진심으로 후회하고 반성하지 않는 한 용서는 없다. p15
정의라고 이름 불리는 것이 어느 정도가 되어야 정의가 구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끔은 의문이 든다. 죄를 저지른 인간들에 대한 재판을 통한 정의실현을 제일 먼저 말하긴 하지만, 그 법적인 정의가 항상 바르게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또한 ‘내’가 당한 것인데 ‘내 의견’은 없이 이루어지는 죄의 형량과 법적 판단이 불합리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휘몰아치는 시간의 흐름들, 인간의 역사 속에 인간이지 않은 이들이 있다. 그들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고통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적’이기에 노력하던 이들은 오히려 후자였다. 이러한 인간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만큼이나 무력하게 느껴지고, 마냥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