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친다! 받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은이), 이순영 (옮긴이), 문예출판사, 2024-10-15.
대체로 책을 읽고 나면 줄거리나 주인공 이름은 생각나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더라도 더구나 톨스토이의 책이라면 더더욱 생각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이던가, 누군가 이 책을 이야기할 때,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라, 바보 이반이 있었는데, 이반이 무슨 일을 했더라, 왜 바보라고 했던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거였지? 책은 읽었지만 전혀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대표적인 책이 되어버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내용이었을 텐데 왜 암전인 건가. 그때에는 이래서 독서를 한 후 기록을 해두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만을 했었다.
세월이 흘러 여전히 제목만 생각나며 내용이 가물가물한 이 책을 꺼내 들고 통째로 사라진 기억을 찾아 나섰다. 어라, 바보 이반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등장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던 이유를 찾게 되었는데 그건 아마도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방관적, 방어적이었던 내 감정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을까. 즉, 이런 형태의 이야기를 쉽게 수용하지 않았던 건 예전에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책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표제작으로 단편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단편 전체 ‘기독교적 사상’을 핵심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그렇다. 그것이 문제다. ‘기독교적 사상’이 무엇인가.
사람들이 자신을 염려하고 돌봄으로 살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오직 사랑으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이며, 하느님은 그 사람 안에 살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언제부턴가 종교, 특히 ‘기독교’ 사상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와닿지 않는다. 정확히는 보편적인 진리를 ‘기독교’의 형식으로 전달하면 그렇게 되는 모양이다. 깨달음보다 반박이 뒤따르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라고 하면 너무하고, 기독교인이라고 해야 적확할까. 그러니까 기독교 사상을 수용하고 이를 실천한다는 ‘기독교인’이 ‘기독교’와 일치되게 생각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궁극이 ‘사랑’이라면 그들에게 사랑이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사이비 종교라는 타이틀이 붙은 종교를 통으로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면도 있지만, ‘하느님의 뜻’ 그에 대한 해석과 실천하는 이들의 정신세계와 그들만의 세상에 계속 ‘받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이 책을 읽으며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는 이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 더 맞다.
‘JMS’ 같은 부류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신’으로 받들어지는 것도 ‘한미정상회담’ 전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라는 이들이 극우 커넥션을 찾아 벌인 행태도, 보석과 사치품을 들고서 청탁이며 부의 축재에 안달하느라 ‘혐오’를 널리 퍼뜨리는 행태들도 모두, ‘교인’이란 이름 아래 행해지고 있다. 세계로까지 복음을 널리 떨치고 있는데, 「바보 이반」 속 이반의 두 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탐욕스럽고 악랄한 그들이 부르짖을 ‘신’, 그들이 전파하는 ‘신’의 가르침이라니. 악은 꼼꼼하다고 하는데 더없이 성실하고 꼼꼼한 그들의 탐욕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한없이 베풀고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성경에서 그들이 뽑아내는 메시지는 왜 그토록 저렴하고 더러울까. 「촛불」 속 세상처럼, 여전히, 늘.
지주가 농노를 지배하던 시절 이야기다. 지주들 가운데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과 하느님을 기억하면서 농노를 가엾게 여기는 지주들이 있는가 하면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지주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악랄한 자들은 농노 출신 관리인, 말하자면 보잘것없는 출신으로 귀족 대열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이런 자들 때문에 농노들의 삶은 더욱 힘겨워졌다. -「촛불」
이런 자들 때문에 어떤 교인들은 계속 힘겨워지고 농도들의 삶은 피폐해진다. 한국에서도 제법 발생하는 사건인데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아래 사건을 보면서, 종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한다.
“신에게 바치는 제물"…4세 아들 호수에 던진 엄마“
https://mobile.newsis.com/view/NISX20250827_0003304704
‘바치겠습니다’, ‘바친다’ 이런 단어에 정말 ‘받친다’, 아니 ‘빡친다’려나. 권력을 가진 자, 기득권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인 앞에 ‘장’이나 ‘권력’을 붙인 이들의 행태, 그들에게 세뇌받고 그들에게 끊임없이 ‘바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이것이 정말 구원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맹목적인 믿음과 신념, 그건 종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긴 하다. 한편으로는 톨스토이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이 아닐진데, 왜 나는 이 책을 보면서도 늘 다른 부분에 더 꽂히는지 모르겠다. 마침 이 글을 읽을 시점에 나타난 일들이 강해서, 혹은 역시나 하고 터진 특정 종교들-그러나 특정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다. 아무튼 ‘바친다’, ‘구원’ 저러한 단어들에 연상되는 것이 그저 사랑이기만 하다면, 정말로 보편적 진리이면 좋으련만 태극기하면 어느새 태극기 부대를 떠올리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을까.
“하느님을 위해서지. 하느님이 생명을 주셨으니 마땅히 하느님을 위해 살아야지. 하느님을 위해 사는 법을 배운다면 더는 슬퍼하지 않게 될 걸세. 그리고 만사가 편안해질 거야.”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