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안 읽는 이유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백세희, 흔, 2018-06-20.


  제목이 주는 놀라운 힘, 이 책 또한 그 하나가 아닌가 싶다.

  개인의 치료기록, 나는 기분부전장애(심한 우울 증상을 보이는 주요우울장애와는 달리, 가벼운 우울 증상이 지속되는 상태)라는 병명을 보고는 세상에 우울증이 아닌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증상으로 전문가를 찾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고 그들의 그 적극성, 의지에 놀랐다. 심한 우울증에도 병원을 찾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축적된 이야기였기에 통계는 언제쯤부터 바뀌었을까, 상황을 기민하게 보는 기사는 없던가,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책 제목이 여기저기서 보이고 들렸을 때 나 역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었던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 제목에 공감했지만 굳세게 나를 끌어당기진 않았기에 만날 일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덧 이 책이 회자되는 것만큼이나 팔리는 만큼이나 반향은 생각과는 달라서 책을 읽진 않았다. 그럼에도 강하게 남는 이 제목. 역시 판매의 힘은 제목이 반이다라는 생각을 거듭 했다. 다시 한번 이 책을 떠올린 건 얼마 전 기사 때문이다.

  

벽도, 책장도 있는데 왜 책은 안 읽는가. 솔직히 우린 답을 이미 안다. 다른 이유는 핑계일 뿐, 간단하게 말해 필요 없어서다. 책 읽기를 그토록 권하는 건 공감의 힘을 높이고 시야를 넓히고 논리를 밝혀 줘서다. 우리 사회에서 공감, 시야, 논리란 쓸데 없는 짓이다. 바깥 세상을 이렇게 접어 버리고 나면 남는 건 자기에 대한 몰입이다. 아무리 ‘책에도 귀천은 없다’지만 그저 ‘불쌍한 나’를 쓰다듬는 나르시시즘 에세이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을 채우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 [한국일보, 책 안 읽는 이유, 2018.10.19

: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810191513342440?did=da]


  책을 안 읽는 이유가 어디 하나뿐이겠는가. 독서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퇴폐시켜 버린 그 누군가의 그토록 순수한 교육적 열의가 먼저 떠오른다만 그것을 제쳐둔다면, 베스트셀러 목록을 채우는 것이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책을 읽는 이유가 된다. 지금 책을 읽는 이유가, 이 책을 읽는 이유가 기자가 지적한 대로의 이유라 할지라도 말이다.

  기자의 글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책이 이 책이라서 책을 들춰보고 우울해졌다. 아, 시월의 마지막 날이라 바쁜 일들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시간을 소비하고 난 뒤의 허탈감에 그리고 몇 장 남지 않은 달력에 온 신경이 쏠리며 오로지 나라는 존재가 소멸된 느낌이 들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추워진 날씨가 달갑게 느껴진다. 지금 기분부전장애상태인 건가.

  세상에 자기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저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 거기에 마케팅에 어울리는 글이 있고 아닌가가 있을 뿐. 어쨌든, 작가는 이 우울을 좋은 결과물로 만든 사람이고 나는 아니다. 그렇기에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최근처럼 넘쳐나는 조현병 환자, 우울증 환자들의 끔찍한 범죄 기사들을 접하다보니 거듭 저자의 우울에 경의를! 그리고 이 책은 사람들에게 많이 읽혔고 팔렸다. 그렇게 만들어 준 힘에도 경의를!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어쨌든 누군가를 탓하고 누군가를 해하는 대신에 자신의 내밀한 기록들을 출간한 저자의 우울증을 다시금 보게 된다. 책을 쓴 건 저자일지라도 세상은 상업자본의 힘이라, 출간한 이들의 승인없인 이루어지지 못할 터이니 저자가 출판사 마케팅 일을 하고 있다는 그 놀라운 우연에 놀라움이 사그라든다. 뭔가, 잘 짜여진 판에서 내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느낌이다. 글에 대한 응원이 아니라 우울을 앓고 있는 저자 개인에 대해 응원하고 싶어진다 할지라도 나는 그 마무리를 할 수가 없다. 저자가 다시 2권을 들고 돌아오기까지는.

  그것을 더 부추기는데 내 어릴 적 친구들이 동원되는데 떡볶이쯤이야. 미키도 미니도 도날드 덕도 구피도 플루토도 앨리스도 곰돌이 푸도 어릴 적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 나와 다시금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느낌을 전한다. 나에게만 알려주는 비밀이라는 듯 시크릿, 시크릿을 외친다. 죽고 싶은 일이 있을지언정 그런 생각이 들지언정 떡볶이를 먹다 보면 멋진 인생이 다시 시작될 거라는 이야기는 분명 친구들 모여 한탄하듯 위로하듯 나누는 이야기이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조금만 무엇을 찾아보면 자신을 위로할 이야기들을 만나고 보다 전문가의 견해들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이 뻔하디 뻔하게 흘러 온 말들에 지금, 이 시점에 열광하게 되는 건 정말로 “책 안 읽는 이유” 때문인가. 아니면 그런 책들이 무수히 진열되어 있기 때문인 걸까.

  어떤 책들에선 감정의 격랑으로 피곤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주는 맛을 잊지 못하기에 다시금 슬금슬금 책을 찾게 된다. 믿고 찾는 출판사도 있겄건만. 하지만 이쯤되면 나는 내 취향으로 인해서, 내 성질로 인해서, 정말로 점점 책을 읽지 않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을, 독서의 계절이 이르게 온 추위만큼 완전히 사라지는 이 막연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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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지음, 강미경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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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함에 기대어

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2018.


  올리버 트위스트가 처한 현실에 비해서 책 표지는 참 따스하고 예쁘다. 아마 그것이 다른 출판사의 책을 읽고 나서도 번역에 대한 불만이 겹치어 이 따스해 보이는 표지를 다시 펼쳐든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완역본이라는 것도 많은 지분을 차지하긴 하지만 어쨌든 올리버 트위스트의 마음결 같은 표지의 힘이다. 이 고전이 유치원 비리와 맞물려 생각날 땐 따스한 책표지도 소용없다.

  올리버가 살았던 시대, 그 사회 환경에선 올리버처럼 성장하고 자라나는 것이 미덕일 수가 있을까. 올리버 트위스트는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서로 읽혀진다. 그 시대 아동이 처한 현실은 찰스 디킨스가 겪은 일과 맞물려 생생하다. 하지만 아동문학과 아동 영화로 널리 회자된 것처럼 언뜻 올리버 트위스트는 그 모든 고난과 역경은 올리버 트위스트가 천성적으로 가진 선함으로 헤쳐나가는 것처럼 보이게끔 만든다. 우린 언제나 착하고 선하고 올바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이뤄지기를 응원하지만 조금이라도 그렇지 못하다면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것 자체가 올바르지 않다고 여긴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보여주는 현실의 타개책은 오로지 개인이 가진 ‘선량함의 정도’에 따른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생각하면 미소짓게 되고 응원하게 되는 이 풍자적 이야기에 조금 주춤하게 되는 건 그런 까닭이다.

  개인이 지닌 선량함에 기대어 잘못된 일들이 바뀌기를 기대한다는 건 얼마나 소모적이며 성과없는 일인가. 이 사회는 그것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먼 나라 영국에서 19세기에 일어난 이 이야기의 배경이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몇십년전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지금은 곳곳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형태, 이른바 ‘노예’처럼 지적장애인들을 부리는 일로 지속되고 있다. 개인의 선량함, 그것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인간을 오로지 믿는다는 건 사치스러운 일인 것처럼 여겨진다.


“두 아이 모두 상태가 아주 나빠 장사를 치르는 것보다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이 2파운드 싸거든요. 다른 교구에 두 아이를 떠넘길 수 있다면 말이죠. 사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크오. 재수없게 도중에 죽지 않는다면 말이죠. 하하하!”

 

  여지없이 돈 앞에서는 선량함을 없앨 수 있는 사람, 선량함이라는 것이 없었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때로 이 선량함은 늘 피해자들에게만 끝까지 요구된다. 올리버 트위스트 시대 구빈원을 보며 형제복지원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충격이란 말이 무색할 이 사건은 특별법 제정을 청원하고 있지만 워낙 권력을 쥔 이들이 사건의 중심고리와 연결된 이들이 많아서인지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도 ‘선량함’도 없어 보인다. 여기에 사립유치원들의 패악이 겹치어 얹어진다. 더할나위 없이 선량하고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기 위해 감춘 얼굴. 구빈원의 시대가 아님에도, 돈을 받지 못해서도 아니고 돈을 받고 있음에도 수많은 올리버 트위스트를 양산해낸 이 거대한 구조가 그들만의 ‘선량함’. 이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그들만의 끈끈함. 너무도 뻔하게 그들의 비리와 잘못들을 당당하게 가벼이 여기는 그들만의 그 순수함. 


인간이 같은 인간을 학대하고 못살게 굴 때, 그 끔찍한 증거가 무거운 먹구름처럼 느리지만 확실하게 하늘로 올라가 나중에 우리가 저세상에서 모든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걸 한 번이라도 생각할 수 있다면! 죽은 사람이 뼈저리게 후회하는 고백을 단 한번이라도 상상할 수 있다면! 아무리 거만한 인간이라도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는 증언을 헤아릴 수 있다면! 매일 일어나는 모욕과 부당함, 고통, 불행, 잔혹함이 있을 곳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말들이 얼마나 허황되고 소용없는 것인지 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고 한다.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웃는 얼굴을 하지만 밥을 먹을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올리면서 아흔 명이 먹을 국에 달걀 세 개를 깨뜨려 넣는 감사고 사랑이다. 명품백을 사랑하고 성인용품을 애용하느라 바쁜 사랑. 아이들은 그들에게 숫자고 볼모다. 사립유치원의 행태가 이 책 속 구빈원 직원 범블, 구빈원장, 위원회 위원들이 행태처럼 하나같이 익숙하다. 오래도록 당연처럼 이어져 온 그들의 비리,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한다고 여기는 그 순수함을 보건대 옳고 바른 교육자로서의 자세를 가지어 잘못을 깨달으라 함은 너무나 위험한 발상이다. 축적된 구조적인 문제가 잠시의 눈물 한방울로 해결될 리 없다. 같은 이유로 이런 구조 속에 놓여 고통을 견디는 올리버 트위스트와 같은 아이들에게도 마냥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과 정직과 선함만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런 상황 속에서 올리버 트위스트가 몇 번의 거짓말을 하고 몇 번의 다툼을 일으킨다면 올리버 트위스트는 책 속 결말처럼 뒤쫓기지 않고 포근하고 따스하게 지낼 수 없게 되는 건가. 이 모든 것에 회의가 든다.


내가 모두 진심으로 행복했다고 썼으나 이런 말들은 사족에 불과하다. 뜨거운 사랑과 따뜻한 인간미가 없다면, 자비를 중요하게 여기시고 만물에게 온정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세기는 어쩌면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뜨거운 사랑과 인간미로 아이들보다 돈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인간미라는 것을 알게 되는 시대다. 또한 그들이 하느님께 감사함을 갖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곳은 십자가를 달고 어떤 곳은 만자를 달았다. 어느 한곳도 빠짐없이 하트를 그려놓지 않은 곳이 없다.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아이의 순수함을 마냥 바라는 것이 이기적인 욕심이라는 생각까지 드는 시대다. 그렇게 본을 보여주는 이가 없건만! 인간의 선량함보다 인간의 악랄함을 믿으며 미래를 그려나가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드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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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주 - 우연이라 하기엔 운명에 가까운 이야기, 2018년 뉴베리 대상 수상작
에린 엔트라다 켈리 지음, 이원경 옮김 / 밝은미래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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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한 살의 우주

안녕, 우주-우연이라 하기엔 운명에 가까운 이야기, 에린 엔트라다 켈리, 2018.


  책을 읽으면서 우주로 날아가 버렸다. 나의 열한살은 어떠했더라, 과거에 잠기어 있다보니 아이들의 이야기를 자꾸 놓쳤다. 다시 책장으로 눈을 돌려 커다란 활자의 책장을 술렁 넘겼지만 내 머릿속은 책속 아이들의 세상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그 시절과 지금 이 시절의 어디를 헤매며 무한 글자를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라도 사람들의 삶은 다르지 않고 반복되어 간다. 아이들의 세상에서도 어른들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왕따가 있고 고독이 있다.  


할 일이 무궁무궁해.

친구가 많을 필요는 없어.

친구 따위 없어도 상관없잖아.

나만 있으면 돼. 그렇지?

혼자 노는 게 제일 좋아.

그래야 성가신 일도 적지.


  열한살을 보내고 중학교로 진학하게 될 두 아이는 깊은 고뇌를 짊어지고 있다. 소심한 아이와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끼고 있는 아이. 마냥 수줍고 부끄러움 많고 소심한 아이 버질은 발렌시아에게 호감을 느끼며 친구가 되고파 한다. 하지만 여지껏 한번도 말을 걸어보지 못했다. 그의 이야기 상대는 할머니와 기니피그 걸리버이다. 발렌시아는 친구들이 느리다는 이유로, 발렌시아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일들이 싫다는 이유로 같이 놀지 않기로 한 이후 친구를 잃어버렸다. 홀로 자연과 대화하며 외로움을 달랜다. 그 말이 참 씁쓸하게 울린다. 모두를 괴롭히는데 탁월한 역할을 하는 쳇 블런스에게 이 두 아이도 예외가 아니다. 놀림과 괴롭힘을 받는다. 그 자신 허풍쟁이에다 겁쟁이면서.

  동화속에서 가장 아이답기도 하고 전혀 아이답지 않은 존재가 카오리와 동생 겐이다. 카오리는 어린이들을 상대로 점성술을 알려주는 어른은 절대 사절을 고수하는 열한살 점성술사다. 버질이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하는 순간, 카오리는 절대 우연이 아니라 운명처럼 이어진 버질과 발렌시아의 점괘를 예언한다. 그렇게 우연인듯 운명처럼 버질은 쳇 때문에 우물 속으로 갇혀버리고 우물 속에서 버질이 나오기까지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 책을 연애소설화 시키면 주인공을 못살게 구는 쳇이란 악역으로 인해 운명처럼 만나게 된 버질과 발렌시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동화를 그런 익숙한 드라마로 봐버리면 신비감이 덜해지고 만다. 어떻든 이 동화가 가지는 매력이란 운명이라는 환상성, 그것이니까. 소심한 버질이 우물 속에 갇혀 아무에게도 도움을 얻지 못할 상황에서 할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를 상상하며 그 존재와 대화하며 자신을 다독이는 일, 발렌시아의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성자 르네에게 이야기하며 홀로 외로움과 상처를 다독이는 일을 보면, 섬세하고 여린 아이들이 누군가의 한마디 말로 인해 얼마나 헤매고 있을까 안타까워진다.


“우리 동업해야겠어.” “뭐라고?” 

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카오리가 다시 말한다. 

“우린 동업을 해야 해. 나는 영적인 세계를 알고 넌 자연의 세계를 알아. 더없이 좋은 관계잖아. 그래서 운명이 우리를 친구로 묶어준 거야.” 친구.


  하지만 그날의 사건들은 이렇게 아이들의 일상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한걸음 내딛어간다. 점성술사 카오리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의 힘으로, 전 우주가 만들어내는 신비한 마력으로. 물론 어떤 큰 사건을 겪었다고 사람이 쉬이 변하지는 않는다. 우물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어준 말을 나눠보고픈 아이 발렌시아와 만났음에도 말한마디 하지 못하는 버질의 소심함은 여전했으니까. 고마워라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헤어져 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끝끝내 쳇 블런스는 그 악당의 면모를 유지하니까.

 조용하게 웃음짓게 되는 이야기에 필리핀의 할머니가 들려주는 전통 설화가 얽이면서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장마다 각각의 아이들로 화자가 달라지는 이야기 방식은 동화속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무엇보다 허술한듯 모든 우주의 신비를 믿는 카오리라는 점성술사의 존재가 신비로운 세상을 믿고파하는 아이의 마음 같아서 응원해주고프다.

 

새로이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지. 시간의 마술이란다. 오늘 믿은 것을 내일은 믿지 못할 수도 있어. 보고 있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거든.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다른 세상이 보이는 거야.


  새벽 세 시 삼십분. 이 시간 아이들이 잠들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주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별자리도 흘러가는 조용한 그 새벽. “안녕”이라는 인사말. 누군가의 내딛음이 시작된다. 동화속에서처럼 아이들이 거칠고 힘든 세상에서도 신비함을 믿어가며 긍정의 힘을 믿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성술사를 만나러 가고픈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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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나에서 함께하는 우리로 - 다양한 분야 학자들의 인문학적 소통과 상상
유범상 외 지음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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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생각할까

고독한 나에서 함께하는 우리로-다양한 분야 학자들의 인문학적 소통과 상상 


  ‘함께하는 우리’ ‘공동체’ ‘연대’는 복잡한 사회의 질서가 무너질 때, 상식이 통하지 않고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 대한 대응으로, 구원으로서 이야기되곤 한다. 함께하는 것, 연대는 부조리를 타개하며 실존적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한 힘이 된다. 우울한 한국사회에서 ‘함께하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가 위한 조건들과 방법들을 이 책에선 모색하고 있다. 개인차원에서 고민하고 질문해 봐야 할 주제, 공동체에 관한 성찰, 미래사회를 위한 주제로 나누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견해를 피력한다.

  공동체삶을 중요하고 필요한 가치로 이야기하지만 때로는 어떤 연대의 형태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게 되기도 한다. 지난 촛불집회와 같은 연대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연대방식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사립유치원의 비리근절 토론회에서 보여준 사립유치원연합회의 연대와 같이 특정집단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연대를 위해 올바름에서 비켜선 행동을 보일 때면 함께한다는 가치가 폄하되고 위험해 보일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책은 공동체의 삶, 미래사회를 위한 사회의 연대를 생각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는 성찰부터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당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 생각이 무엇인가도 중요한 부분이다. 자칫하다간 악의 평범성의 대명사 아이히만처럼 되어갈 지 모른다는 무서운 경고, 때론 이익 앞에 무너지고 마는.


현재 추진되고 있는 의료민영화 정책은 국민의 건강증진보다는 시장과 영리를 지향하는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추구에 우선적인 목적을 두고 설계되었으며, 그 정책내용에는 소자본 의료공급자(개원의사), 사회·경제적 소외 지역이나 집단에 대한 이해를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이익’에 관한 집착이 공동체 생활을 저해하는 요인이라면 국민의 건강을 두고 벌이는 의료 관련 정책에 대한 의사집단의 이익추구를 위한 연대만큼 빼놓을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수술실 CCTV 설치에 대해서는 절대 찬성하지 않으며 파업결의를 하며 의사 폭행 문제에만 목소리를 높이는 의사협회의 집단행동. 물론 의사를 폭행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고 강력히 처벌해야 할 일이지만 의료사고, 수술 과정에서의 비상식적 행동, 대리 수술 등의 일들이 부지기수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선 그 어떤 반성도 하지 않는.


민주라는 보편적 가치가 생활화하고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면서 사회참여에 나서는 것뿐이다.


  ‘민주라는 보편적 가치’의 실현이 중요하다 ‘함께 하는’ 것의 중요성에 ‘무엇을’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따지고 보면 조폭들은 항상 그들끼리 조직화된 연대를 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고독한 시시포스들이 무한질주하는 전쟁터”라고 책에서는 말한다. 소위 헬조선이라 불리는 그 모든 상황들은 가혹한 형벌에 처한 시시포스와 다를 리 없는 삶이라고 말이다. 카뮈가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형벌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자살과 종교를 제시했지만 자살은 자신을 살해하는 것이고 종교는 현실도피라는 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저항’이다. 이 저항은 부조리에 대한 자각에서 이루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자각해야 할 부조리는 많다.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친일 과거사, 끊이지 않고 발생하지만 처벌 수준은 턱없이 낮은 성폭력 문제, 복지사회에 대한 불편한 반응, 갑질 문화, 혐오의 확산과 차별 등 백세 사회가 되는 미래사회에서 수명은 길지만 정서적으로는 편안치 못한 환경에 놓이게 되는 일이 확대된다.


하지만 고독한 개인의 자각과 저항은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들지 모른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각한 개인은 무기력함으로 인하여 더 깊은 좌절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따라서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자신을 더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런 부조리를 자각하는 것, 중요하지만 혼자라면 오히려 더 고독하고 비참해질 수 있다는 말이 수긍이 된다. 지난 몇 년간 이런 사람들을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하여 함께 하는 행동을 위해 연대했을 때 사회의 변화 하나는 이루어내었다. 여전히 이뤄가야 할 변화가 많다는 점에서, 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고독한 시시포스가 되지 않기 위하여 나를 성찰하고 ‘민주라는 보편적 가치’의 정의를 정립하면서 연대해야 한다. 이 책은 함께의 가치와 더불어 ‘무엇을’에 대한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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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혐오의 원인과 해방의 전망 -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노라 칼린.콜린 윌슨 지음, 이승민.이진화 옮김 / 책갈피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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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가 떴다

동성애 혐오의 원인과 해방의 전망, 책갈피, 2016.


[다섯 무지개/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8100514351457949]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뒷면 무지개가 뜨곤 했다. 콩레이는 무지개를 보여주진 않았지만 허리케인 플로렌스가 지나가고 난 뒤 미국 뉴저지주에 뜬 다섯 개의 무지개 사진을 보았다. NASA는 ‘과잉 무지개(supernumerary rainbows)’라며 드문 현상이라 했다. 직접 보았다면 얼마나 경이롭게 느껴졌을까.

 최근엔 무지개를 본 기억이 없고 대신 무지개 하면 동성애가 생각난다. 이래서 상징을 만드는 일이 중요한 모양이다. 내게도 레인보우 깃발이 동성애문화상징으로 보다 강하게 각인된 것은 지난 대선전 문재인 후보 국회연설 당시 성소수자 단체의 기습시위 때문이니까 말이다. 레인보우 깃발 제작 당시엔 분홍색이 포함된 여덟색에 ‘섹슈얼리티, 삶, 치유, 태양, 자연, 예술, 조화, 영혼’을 의미하였고 1979년 게이 퍼레이드에 활용할 때부터 남색을 뺀 여섯색이 되었다 한다. 

      최근 지역 곳곳에서 퀴어축제 개최로 보수·기독교 단체와의 충돌이 연잇는다. 기독교인 친구의 동성애 견해에 놀라 이 책을 집어들었지만, 기대했던 바를 충족시켜주진 못했다. 이 책은 동성애 혐오의 원인과 해방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으로 풀어내고 있다. 동성애라는 개념은 19세기 후반에 생겨났고 산업자본주의와 관계가 있고 이전에도 동성애자들은 존재했지만 자본주의에 이르러서야 동성애자 처별과 차별이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에서나 로마에서나 지배계급 부의 주된 원천이 노예제가 성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특히 로마에서는 노예를 부리는 것이 사치스런 소비의 한 형태였다는 게 중요했다. 로마제국 말기에 노예제가 농노제 생산양식으로 완전히 대체된 후에야 비로소 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등장했다.


동성 관계 문제는 가족의 역사와 관련지어 바라봐야 한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동성애자 억압 문제도 풀 수 없다. 모든 계급사회에서 가족은 성적 순종을 강요하는 핵심 제도였다. 그러나 가족의 형태나 가족이 생산과 맺는 관계는 생산양식이 변할 때마나 매우 근본적으로 바뀌었고 19세기에는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등장은 기존 관념을 완전히 바꿨다. 가정과 일터가 분리됐고, 이 ‘분리된 영역’에서 여성과 남성의 임무가 철저하게 나뉘었고, 개인과 사생활이 새롭게 강조됐다. 그 결과 성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사회의 성에 대한 태도는 생산양식과 관계있다는 관점은 기독교의 에이즈의 원인이 동성애라는 주장과 대립된다. 친구는 교회에 강연 온 의사의 “동성애의 결과는 에이즈다”라는 말을 진리라 믿고 있다. 그리하여 그 결과를 생각할 때 동성애에 찬성할 수 없는 일이라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걸 몰랐단 말이야?”

  이 책의 저자들은 ‘동성애자가 에이즈를 퍼뜨린다’는 것은 편견이라고 주장한다. 대다수 에이즈 환자가 에이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성애자의 수도 증가하고 있으며 안전하지 않은 성생활의 문제이다. 그러나 에이즈는 동성애들에 의한 것이라는 거짓말을 언론이 확산하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HIV에 감염된 압도 다수는 가난 때문에 처참한 조건에 놓인 이성애자들이다. 캐냐에서는 인구 18명 중 한 명꼴인 4만 명이 에이즈에 감염됐다. 짐바브웨에서는 성생활이 가능한 5명 가운데 1명이 에이즈에 걸렸다.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서는 젊은 여성의 4분의 1이 HIV 보균자다. 이들 중 절대다수가 남녀 사이의 성행위로 감염됐다. 나머지 사람들은 종합병원이나 전문 병원에서 다른 환자에게 사용된 주사 바늘을 통해 HIV에 걸렸다.


  거의 모든 차별의 근원으로 지적되는 기독교에 의하면 동성애든 여성이든 영원히 차별받아야 하는 존재가 된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생산양식이 차별의 요인이기에 그것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가 보다 싼 값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가족관계와 역할의 억압을 주요 수단으로 삼고 차별을 강행하며 여성과 성에 대한 차별을 부각시켜 왔기에 이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동성애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므로 동성애 억압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사회변혁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에서 벗어나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여기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다.

  고대 사회로부터 동성애가 있었지만 특별한 차별과 처벌이 없던 시대에서 현재에 이르러 혐오와 차별, 처벌이 자행되고 있는 시대에 동성애자들의 차별과 억압에 맞선 투쟁도 지속되었다. 이 책은 동성애 차별 철폐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함께 기록하고 있다. 각각의 투쟁에서의 쟁점과 한계와 대안을 제시한다.

  기독교인 친구들의 동성애에 견해는 뚜렷한 혐오에서 시작하며 그들의 확고한 종교적 신념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의한 의견의 대립은 쉬이 끝나지 않는다. 나와 친구도 이럴진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의 대치가 오랫동안 이어진 것이 이해가 됨직도 하다. 어떤 무엇에 대한 강력한 반박과 주장은 확고한 이론 정립, 명백한 사실에 기반한 증거, 그리고 어떤 형태가 됐든 강력한 믿음이기에 이 책을 보았지만 속시원하진 않았다. 아마도 이 주장은, 분석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이 유명한 원인 분석을 놓고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현실을 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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