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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업 사회 -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
구도 게이.니시다 료스케 지음, 곽유나.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 펜타그램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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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누구나 무업 상태가 될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무업 상태에 처하게 되면 그로부터 빠져나오기가 힘든 사회를 ‘무업사회’(p26)라고 정의한다. 무업 상태에 빠지게 되면 인간관계나 사회적 관계 자본 및 의욕까지도 함께 잃어버리기가 쉽고 인간관계를 상실하면 충고나 응원을 받는 것도 어렵게 되고, 자기 긍정감이나 동기부여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쉽다(p30). 일본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하지만 영 낯설지가 않다. 그렇다. 이런 청년들의 습은 우리에게도 단지 명명만 달리한 채 일상화되고 논의되고 있다. 일찌감치 삼포세대, 칠포세대를 넘어 헬조선이라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업사회는 한 부분의 모습이다.

  무업사회의 핵심은 ‘그로부터 빠져나오기 힘들다’라는데 있다. 개인이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고려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것이 능력의 모자람이라는 이유로 여러 재능을 업그레이드 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상황이다. 능력과 적성이라는 문제는 차치하고 ‘일자리’를 ‘잡아야’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까 무업사회의 현실, 무업자가 증가하는 상황은 경기 침체나 노동환경 악화와 같은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청년’에 온갖 수사여구를 들이대며 청년들에게 ‘열정’을 강요한다. 불합리의 요소에 힘들어하고 반박하는 이들에게 ‘철없음’과 ‘어리석음’과 ‘고난을 극복할 의지가 없는’ 애들이라는 낙인을 찍으며 그들이 부여한 ‘청년’ 앞에 놓인 수식어와의 괴리를 슬퍼한다. 자신들이 살아간 가난한 사회에서의 그 열정이 왜 요즈음의 청년들에게는 없는지를 비교하며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놓았더니 한없이 나약한 낙오자를 만들어놓았다며 한탄한다.

  이러한 프레임 속에서 다양한 청년 무업자들이 세상과는 단절된 채 살고 있다. 저자는 고도 성장기에 구축된 ‘일본형 시스템’과 ‘사회 안전망’의 부실이 변화된 노동조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청년 무업자들을 양산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청년들은 나라의 미래이므로 청년 무업사회를 그대로 두면 사회의 지속가능성이 위협받는다며 이에 대한 정책과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저자가 주장하는 무업사회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 일단, 저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청년들에게 가해진 수식어의 문제를 지적한다. 청년들에게 씌어진 부정적인 인식, 나약하고 게으르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오로지 개인의 성격의 문제로 치부되면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문제라고 한다면 속출하고 있는 수많은 청년 무업자라는 ‘개인’의 상황이 당혹스럽게 여겨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한 인식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장애가 된다면 그 인식을 바꾸는 것이 당연, 필요한 일이다.

  결국 이러한 개인이 늘어간다는 것은 누구나 무업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꼭 새겨봐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일하지 않는 것과 일할 수 없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저자는 일단, 10여 년 동안 현장에서 NPO 활동을 하며 만난 수만 명의 무업자에 대한 정성조사와 2,300건의 정량조사를 통해 분석한 자료를 토대로 사회경제적인 이유를 무업사회의 원인이라 보면서 무업상태인 청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한다.

  저자들의 조사 결과 ‘청년 무업자’의 75.5%가 취업 경험이 있었으며, 한 번도 일한 적이 없는 사람은 24.5%로 나타났다. 이러한 통계적인 결과들을 보더라도 청년 무업자들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 싶은데 일할 수 없는 상태’,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질병·부상’으로 일을 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것은 일을 하면서 무리한 업무와 작업 환경의 문제로 질병을 얻은 경우이다. 청년 무업자들을 일을 하기 싫어하지 않는 게으르고 무능한 청년들이라는 상태로만 바라본다면 이와 같은 형태의 청년 무업자들의 문제를 해결할 길은 없다.

  이 책이 실제로 청년 무업자들의 상태를 수치로 나타냄으로써 청년무업상태의 깊은 내용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객관적인 수치를 바탕으로 이들이 더 깊은 무업의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 이유를 면담을 통해 알아가는 것은 이미 오해와 편견 속에 갇힌 사고로 문제를 바라보는 이들의 잘못된 방법이 문제를 더욱 양상하고 있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어떤 형태로든 무업 상태가 길게 이어지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지속된다. 심리적인 위축에 빠지며 지속적인 악순환에 처한다. 게으르고 무능하여 무업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무업 상태가 이들에게 심리적인 위축을 가져다주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저자는 무업 상태의 청년들에게 취업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이것의 성과가 없는 것은 오로지 이 무업 상태의 문제를 ‘취업’에 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우도 실업률을 높이기 위한 단순한 일자리 창출을 만들어 취업률 높이기에 혈안이 된 정책들이 양산되고 있다. 하지만 평생을 위한 일자리가 단순한 생색내기형태의 정책으로 급속히 창출된다 한들, 지속되는 문제 해결의 방안이 되겠는가.

  사회는 일하는 청년세대가 고령의 세대를 돌보는 형태의 시스템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청년들이 GDP 생산에 앞장서며 사회보장의 책임을 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에 책임을 담당할 세대가 없다는 것은 사회 전체의 어두움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당장의 정당지지율이나 선거의 표를 의식한 정책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안전한 정책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절실한 이유이다.

  고도 성장기에 만들어진 ‘일본형 시스템’과 ‘사회 안전망’이 청년 무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면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 ‘일본형 시스템’은 ‘일본적 경영’, ‘일본적 복지사회’, ‘중앙집권적 재분배 시스템’으로 구성된다, 특히 ‘일본적 경영’은 ‘신규 졸업자 일괄 채용’, ‘종신 고용’, ‘연공서열형 임금’, ‘기업별 노동조합’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 제도에 맞추어 청년들은 취업준비를 하고 교육기관은 이에 맞추어 취업지도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탈락하면 새롭게 이 사회에 진입할 수 없으며 직장생활이 사회생활과 직계되기 때문에 그 어떤 사회참여가 어려운 상태를 만든다. 또한 일본은 최소한의 복지, 잔여적 복지만을 시행함으로 사회복지가 필요한 이들에게 전달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문제를 양산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 못하다.

  우리나라 역시, 어느 순간 선진국형의 사회보장제도가 아니라 일본형의 사회복지를 선호하고 있다. 그러니까 보편적 복지가 아니라, ‘삼성 회장 손자에게도 무상급식이 필요하냐’와 같은 말로 선별적인 복지를 주장하는 것이다. 정부에서 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복지만을 주장하며 사회안전망을 축소하려 한다.

  청년 무업자가 양상되는 상황과 그에 대한 해결방안은 우리사회와 너무 닮아 있다. 무엇보다 ‘인식’이, 그들에게 가해지는 오해와 편견들이 문제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그래서 같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도 객관적인 통계자료로 편견의 시각을 반박해 주고 선거로 인해 회심성의 정책이 양상되지 않기만을 이 책을 통해 일본이 전해주는 미래사회의 암울함을 제발 보기를 바랄 뿐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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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의 말-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한나 아렌트, 마음산책, 2016. 1.

 

  “무엇이 남아 있느냐고요? 언어가 남아 있어요"

 

  인터넷을 통해 소통은 매우 빠르고 범위도 넓어졌는데도 소통되지 못하는 느낌이 드는 사회. 분명한 언어들로 표현을 해도 오독되며, 분명한 표현조차도 내뱉지 못하는 사회다.  우리가 구현하는 언어는 이 시대에 어떻게 전달되고 있을까.

  악의 평범성을 얘기한 한나 아렌트. 당시의 그 시대에 그녀의 그 통찰은 분노를 야기했다. 마땅히, 당연히, 으레히...그래야 하는 것이고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그녀의 예리한 시각은,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그녀의 언어는 강했고 아름다웠다.  당연 그로 인해 그녀가 치뤄야 할 것은 너무나 많았다. 

  정치에서 여성 진출이 많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 정치인에 대한 시선은 그 역할과 능력을 부정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흘러가는 것 같다. 최근 어느 의원은 여성정치인은'모자라야'한다는 듯한 의견을 피력하며 그것이 선거에서 성공하는 전략이라고까지 말했다.

  더 이상 할말이 무엇이 있으랴. 사회를 보는 예리한 시각과 통찰, 그것을 이끌어내는 정치이론가로서의 한나 아렌트의 말이 논란만 부추기고 제 역할이 무언지 모른채 정치인 코스프레를 말하는 그들의 언어에 질린 소심한 유권자에게 어떤 통쾌한 의견을 전해줄런지!!

 

자아연출의 사회학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기하는가

 

어빙 고프먼, 현암사, 2016. 1.

 

 

  “왜 내 삶은 연극이ㅣ 되는가

 

 삶이 연극과 같다는 말에 이렇게 공감이 될수가. 분명 나는 분신술을 쓰는 것처럼 여러 개의 나로 분리하여 사회를 살아나가고 있다.

 점점 익숙해지는 이 모습들이 어느 순간, 내가 누구였는지 나의 자연스러운 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렇다고 그 모든 것들이 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채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자아 연출의 사회학은 나만 이렇지 않다는 위안을 주는 책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이처럼 살아가는 나를 위한 사람을 어여삐 여겨 이들에 대한 삶을 세심하게 살펴 글로 펴냈다. 정말 나는 왜 이렇고 사회는 왜 이럴까. 이 책을 읽으면 감이 잡히려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

 

하워드 진, 이후, 2016. 1.

 

 

  “이 책을 읽고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이미 당신은 청춘이 아니다"

 

  나는 청춘일까.

  청춘이고 싶은 마음과 그렇게 되지 못하는 괴리 속에서 나의 청춘은 저 멀리에서 멈춰 있다. 다시, 가슴뛸 수 있을까. 너무 오래 나는 멈춰 있다. 정말 다시 뛸 수 있을까.

  이 책은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에세이다. 진보적 지식인이 행한 일들의 기록이다. 행동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오래 전의 일들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회운동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토대는 같은 것 아니겠는가. 뭐, 지금 시대가 역행해 과거로 가고 있기도 하고.....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대한민국 보통 가족을 위한 독서 성장 에세이

 

김정은, 휴머니스트, 2016. 1.

 

 

  “우리 가족, 함께 성장하다

 

  새해, 설날도 다가오고. 열풍을 가져온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가 가족의 가치를 조명하며 가족에 대한 옛 향수를 자극하고 가족애를 드높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눈에 띄는 책이다.

  한 가족이 함께 독서를 하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 어랏. 근데 이 가족도 심상치는 않다. 아빠는 파업중, 엄마는 직업병으로 백수라고? 아이들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독서를 통해 서로 공감하고 소통을 했다는데.....

 아 이런, 부러운 가족......요즘 들어 기가 찬 뉴스, 하루 걸러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 기사가 즐비하는 상황에서 더욱 더 가치있게 눈이 가는 책이다.

 

 

 

명상록을 읽는 시간- 아우렐리우스를 읽으며 나의 명상록을 쓰다

 

유인창, 바다출판사, 016. 1.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끌어가는 삶이 절실해질 때!!

마음 평온의 기술! .

 

  새해가 밝았음에도 마음이 평온하지 못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저자는 살아가다 보면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끌어가는 삶이 절실해지는 시간이 온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그 시간을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어떤 것? 글을 적어 보라고. 일상의 성찰의 기록들이 삶의 기술로 이끌어주며 원칙을 만들어준다고고 말한다.

 복잡하고 시끄러러운 중에도 유독 시끄러운 것들에 '클릭'하며 더욱 껄끄럽고 시끄럽게 생활해 나가는 이 시대에 올곧히 나와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가는 방법을 한번 들여다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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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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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텍스트의 해석과 실천


 라캉, 푸코. 그리고 르장드르.

 명확성, 명료함과는 상관없이 라캉과 푸코에 빠져든 때가 있다.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는 집착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줄곧 내 스스로 이해하는 것으로 텍스트를 읽어가라고. 이해되지 못하면 반복하고 그럼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들여다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위안하며 독려하면서 놓지 못하던 텍스트들. 그리하여 타인에게 라캉이나 푸코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해 줄 깜냥과는 별개로 오로지 끌림으로서 글을 읽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번 사사키 이타루의 야전과 영원도 그 연속선상에 있다.

  그 때문일까, 생각보다 가벼운 맘으로 텍스트를 읽을 수 있었다. 사실 그 어떤 텍스트에 대한 해석, 그에 따른 논쟁들은 항상 재밌는 요소이니까. 나의 이해와 타인의 이해를 이리저리 비교해가며 책을 읽는 맛은 또다른 난해함에 허덕이는 결과를 낳지만, 그 자체만으로 행복하기 그지없다. 내가 이해한 텍스트를 다른 이가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지는 눈앞에 상대를 앉혀 놓고 토론하는 듯이 여겨지며 그래서 더 끙끙 앓기도 하게 되는.

  서문을 읽으면서부터 이 책은 밤새 쌓인 눈을 처음 밝는 듯한, 사각이는 촉각과 사각하는 청각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문체의 영향이 큰 듯하다. 대부분의 철학서, 사상서들이 지적용어를 곁들인 채 만연체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면 이 책은 매우 간결하다. 그래서인지 읽는 순간에는 이상하리만치 명료함을 느낀다. 무언가 이해를 하고 넘어가는 듯이 책장의 넘김이 자연스러워진다. 덧붙여 시적인 느낌까지. 거듭 밤사이 쌓인 눈을 처음 밟는 듯한 느낌으로 읽어가게 되는 책이다. 책의 제목마저도 야전과 영원이라니. "영원“한 ”밤“의 ”투쟁“에 바치는 책.

  

시계는 어둡고 도통 믿음직스럽지 않다. 그것의 승부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쓰는 일의 우연성이야말로, 쓰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도박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야전과 영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책의 중심에 있는 개념이다. “영원한 야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통일된 시점 따위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영원한 야전”이다.(p17)


 야전과 영원은 푸코, 라캉, 르장드르의 텍스트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다. 저자의 텍스트 해석은 이렇게 이야기된다. “통일된 시점”이라거나 “필연성” “전체성”을 보장하는 “끝(종언)”을 무슨 이이 있어도 부정한다고. 텍스트의 존재 방식을 갱신해야 한다고. 거기에 끝도 없고 새로운 시대도 없으며 단지 “다른 형식의 요청”에 답할 필요가 있다고.

  

우리는 고안해내야 한다. <준거>와의 다른 관계를. 어떻게 쓰면 될까? 어떻게 춤추면 될까? 어떻게 노래하면 될까? 어떻게 그리면 될까? 어떻게 낳으면 될까? 어떻게 이야기하면 될까? 어떻게 먹으면 될까? 갖가지 고안이 혁명의 긴 도정을 위해, 그 자체가 혁명인 도정을 위해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중세 해석자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직전까지 유스티니아누스와 트리보니아누스의 가공할 서적 50권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무엇인가 잊고 있을지도 모른다. (p434)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단순히 활자에 대한 탐욕을 넘어서 내가 글을 읽는다는 행위가 종국에는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단순한 지적욕망과 자기만족, 그리고 덧붙여진 습관을 통해 책을 읽으며 결국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끊임없이 이해하고자 하는 텍스트에 매달리는 것은 그 자체에만 의미부여를 하는 것일까.

 책을 읽는다는 것이 내 삶과 같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것이 내 삶의 양분으로 지속되어 나를 키우는 것이라면 나 또한 저자가 말하듯이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것에서 더 나아가야 하리라. 개념에 대한 문장에 대한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넘어선 실천에 대한 의지까지를. 라캉이 푸코가 르장드르가 소쉬르가 한 말에 대한 텍스트의 이해를 저자의 생각과 비교하고 비교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진 함의에 대한 현실적인 적용을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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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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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분리와 도덕적 감수성



 어쩌면, 행복한 삶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박제된 감정으로 시선을 두고 있다면 헬지옥 사회에서 적어도, 행복이란 말이 적절치 않더라도, 분노와 우울의 감정으로 힘들진 않을 테니까.

  감정은 이성의 반대가 아니다. 감정은 이성과의 연결과 유대 속에서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이성’을 막아 놓은 상태에서는 당연 감정도 막힐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그래서 저자들이 얘기하는 ‘도덕적 불감증’은 당연하고 보편타당한 생각의 흐름을 통제당한 박제당한,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억제시킨 결과일 것이다. 이성과 감정의 자연스러운 교류의 차단은 합리적 사고를, 합리적 감정의 분출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성조차하지 못하게 한다.

  삶을 둘러싸고 있는 그 공간자체가 차지하는 전방위적인 공포인 정치, 국가권력이 개인의 삶 하나하나를 철두철미하게 조롱하는 상황은 의식과 감성으로 완벽히 무장해도 깨지지 않은 채 이어진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자유를 자유화할 상황이 주어지지 않는 철저한 공포의 정치. 여기에 각 개인은 무지와 무기력, 굴욕감으로 대응된다. 그것이 가져온 결과가 감수성의 결여가 되고 악으로 귀결되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져 온 현실사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알베르 카뮈가 말했다고 하잖은가. 더 큰 선 등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범죄가 인간의 범죄 가운데 가장 극악하다고. 카뮈에 말에 언뜻 드라마 펀치의 대사가 생각난다. ‘선’의 편으로 여겨지던 최명길이 어쩌면 악의 편으로 대변되는 조재현의 악행을 끊임없이 막기 위해 대응하는 논리는 ‘그것만은 막고 싶다’였다. 그것, 악인이 행하는 ‘악’으로 인해 ‘선’이 좌절되고 파괴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점진적으로 보다 강한 ‘악’을 잘못된 것인지 모른 채 행하던.

 공포의 사회에서 마음속에 자라난 무지와 무기력, 굴욕감은 이렇듯 선과 악의 경계마저도 허물어 버린다. 타당한 이성이 압도되어 극악의 감정으로 침몰되는 이 깨져버리는 균형은 필연코 이성과 그에 따른 자연스런 감정을 잃게 한다. 폭력을 매일 보면 그것은 더 이상 경악이나 혐오를 불러일으키지 않고 우리에게서 자라나기(p93) 때문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망각하고 만다. 기억하지 않음이 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므로. 그러고 보면 오래도록 기억보다 망각이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어왔다. 끊임없는 혼란과 공포와 거짓 속에서 기억이 힘이 되리라 기대하던 오랜 시간들은 점점 망각이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까지를 안정시키는 일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현재의 삶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추구하기에 이미 우린, 욕망을 껴안고 있는 존재들이니까.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은 일견 수긍이 되기도 하면서 이해를 거부하고픈 말이다. 욕망이란 다양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욕망의 종착역이 같다는 전제를 부여하니까. 마치 욕망은 한정되어 있기에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욕망을 쟁취하지 않으면 나의 욕망이 충족되지 못함이 당연한 듯한 귀결로. 같은 욕망덩어리를 배분하는데 누구든 최종적인 승자가 되기를 원하므로. 타자의 욕망이 나의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한 언제든 빼앗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불안과 두려움, 공포를 조장하며 순응화시키는 것이 공고히 권력화된 정치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몰고 가는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일까. 우리의 굴욕감도 무지도 무기력도 전복될 수 없는, 변혁될 수 없는 것일까.

 욕망의 분리가 필요한 것은 그래서다. 타자의 욕망을 내 것화 하지 않을 때, 각각의 욕망을 지닌 개개의 인간으로 분리할 때 비로소 나와 너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각각의 욕망이 충족될 수 있는 방법은 타인의 욕망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욕망들이 숨쉬는 환경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그 모든 욕망들이 실현될 수 있음을 이해하고 갈구할 수 있는 방법적인 것을 이룰 수 있는 것. 물론 욕망이란 바람직한 것이어야 할 테고. 욕망들이 타인의 것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도덕적 감수성의 문은 열리게 되지 않으려나. 누르는 대로 억압하는 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에 갇혀서 늘 대립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욕망을 채워나가는 것이 함께 굴욕감을 던져버리는 것임을. 함께 경직했던 이성을 부여잡고 그에 따른 감정도 채우는 일임을 알아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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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비평의 인문학

황정아 (지은이) | 창비 | 2015-12-15

 

 

  개념의 동시대성을 고찰하는
인문학의 새로운 칼날
.

 

  어느쪽에서는 인문학 열풍이라고 하고 어느쪽에서는 인문학 위기라고 말한다. 헬조선의 사회에서 어떤 이는 인문학을 답이라고 길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인문학으로 먹고 살기 힘들다 말한다. 인문학에 부여된 이 상반된 논리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자리잡고 있을까.

  이 책은 인문학 열풍 앞에서 그 미래를 모색하는 연구방법론이라고 소개된다. 인문학의 개념이 지닌 의의를 논하며 그것이 현대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지를 탐구해온 작업의 집적물이라고 한다.

 이 책을 통해서 현사회의 무수한 관념과 함께 사회에 대한 개념이 정리될 수 있을까. 현사회를 비평의 눈으로 읽어낼 수 있을까.

 

 

 

 

북유럽 신화, 재밌고도 멋진 이야기

H. A. 거버 (지은이) | 김혜연 (옮긴이) | 책읽는귀족 | 2015-12-12 

 

 

 

“겨울밤에는 기인 이야기를 읽고 싶다" 

 

 러시아에 유명한 장편소설이 많은 이유는 추위와 긴 겨울, 밤 덕분이라고 한다. 새해도 밝았지만, 어쩌면 아직은 싱숭생숭한 나날들. 겨울밤, 이야기를 읽고 싶다. 어린 시절의 향수처럼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처럼, 그냥 재밌는 이야기들,
 신화는 그런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결국엔 모든 신화들이 비슷하다고 하지만. 북유럽의 신화엔 또 어떤 상상엵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이 있을런지.
  신화는 수많은 이야기와 영화, 그림, 음악 등의 창작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토르>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등의 영화도 북유럽 신화에 바탕한다고 하니 재미또한 옹골지게 있을 듯하다. 

 

 

 

그림자 노동

이반 일리치 (지은이), 노승영 (옮긴이) | 사월의책 | 2015년 12월

  

 

 노동을 하고 싶은데 노동할 곳이 없는 현실에서 읽게 되는 그림자 노동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저자는 우리가 노동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는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고 하는데, 과연 얼만큼 뒤집어질 수 있는지가 궁금해지는 책이다.

 어쩌면 익히 느끼고 있는 것들을 얘기할지도 모른다만, 그 숨겨져 있는 '의미'를 조금 더 명징하게 읽어내보자.

 노동이 있되 노동이 없는 이 현실에서.

 

 

 

자아의 원천들

 찰스 테일러 (지은이), 권기돈, 하주영 (옮긴이) | 새물결 | 2015년 12월

 

 

  도덕만 이야기하는 철학은 공허하지만 

도덕을 이야기하지 않는 철학은 존재할 수 없다." 

 

  앗, 선택하고 보니 1000페이지가 넘는 책이다...음..

  철학서들은 읽고 나면 명확성보다는 오히려 혼돈의 시간을 안겨준다. 하지만, 그 혼돈이 참 좋다.

 이 책은 반인간주의와 반도덕주의가 지배한 20세기 하반기의 유럽과 미국의 주류 철학에 맞서 '인간됨'과 '인간 주체'를 도덕철학적으로 옹호하며 근대를 둘러싼 지금까지의 서구 사상의 해석의 모든 지형도를 전복시키는 동시에 철학이 현실과 맺는 관계 또한 새롭게 조명하는 책이라고 한다.

  어쨌든 내 속에 반항적 기질이 다분한 건지, 주류에 대해 '전복'적인 이야기에 혹한다. 여기에서 다루는 전복성은 얼마나 설득적일 수 있으며 얼마나 흥미진진할지를 기대하며. 

 

 

외톨이 선언

애널리 루퍼스 (지은이), 김정희 (옮긴이) | 마디 | 2015년 12월

 

 

  군중이 아닌 개별자로서 나를 마주하기

 

  고독마저도 감미롭다는 광고 카피가 생각난다.

  하지만, 현대 세상에서 고독한 개인, 외톨이는 그닥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다. 오히려 왕따로까지도 연결이 되려고 한다.

  이 책은 세상 곳곳에 숨은 외톨이를 찾아나서는 대중문화.심리 교양서다. 저자는 외톨이에 대한 오해를 밝히고 진면모를 보여주고자 종교에서 광고, 의복, 범죄, 예술, 기행, 환경, 문학, 종교, 대중문화에 이르는 다양한 시선을 통해 외톨이의 의미를 찾아낸다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혹은 예술가라고 부르는 이들은 다 외톨이였나?

 많은 사람들 속에 있어도 외롭다고 하는 우리들은, 그럼에도 외톨이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외톨이 선언이라는 책이 어떻게 바꾸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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