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은 생각이란 걸 하지 마라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돌베개, 2007-01-12.
『이것이 인간인가』는 프리모 레비의 수용소에서 겪은 생생한 체험담이다. 이탈리아인인 그가 어떻게 수용소로 가게 되었는지, 수용소에서 어떠한 삶을 겪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당연 전쟁의 참상과 전쟁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과 인간성의 소멸을 그려낸다.
내용에서 이미 ‘감정’이 어떤 상태로 이르게 될 지 예감할 수 있는데 프리모 레비의 문체는 시종일관 담백하다. 그런 까닭에 프리모 레비는 ‘독일인에 대한 분노’는 어디있느냐는 질문까지 받는다. 하지만 독자들은,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힘든 상황을 겪은 이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덤덤하게 지난 일들을 전하는 프리모 레비의 문체에서 오히려 냉정한 분노를 경험하게 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욱 명료해지고 그리하여 전쟁의 참상이, 고통을 겪은 인간의 비애와 고통이 극대화된다.
역사와 삶 속에서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가복음 4장 25절」)’라는 잔인한 법칙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며 삶을 위한 투쟁이 원초적인 메커니즘으로 축소되어버리는 수용소에서, 이 불공평한 법칙은 공공연히 효력을 발휘하며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다.
프리모 레비는 “끝도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자신들을 건져낸 것이 살려는 의지나 의식적인 체념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불편함, 구타, 추위, 갈증’이었다”고 말한다. 평범한 인류의 표본이었기 때문에. 인간을 파괴하고 인간을 죽이는 인간을 목격하는 일은 수용소에서 비일비재했다. 프리모 레비는 “인간이 다른 인간의 눈에 하나의 사물일 뿐인 시절을 보낸 사람의 경험이 비인간적”이라고 말한다. 프리모 레비는 인간이 광기에 물든 저 2차 세계대전에 인간을 사물화하는 인간들을 목격했다. 지금은 광기도 전쟁의 시대도 아니건만 ‘인간을 사물화’하는 무수한 인간들에 둘러싸여 있다. 진정 지금 이 현실이 수용소의 생활이란 말인가.
인간성이 무너져가는 상황에서도 인간이기를 잊지 않는 작은 노력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프리모 레비가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에게 더욱 연민하게 되고 더더욱 가슴 아린다. 그렇기에 더더욱 극악의 인간성 상실로 제 면면을 유지한 인간들에 대한 분노가 가득찰 수밖에 없다. 지난 그 일들이 결코 ‘지나가지’ 않을 일로, 지속될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준다. 프리모 레비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기를 시작했다 말했다. 또한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라 말했다. 프리모 레비라고 어찌 분노가 없겠는가. 프리모 레비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그런 그의 기록이니만큼, 이 글이 가진 힘은 단지 피폐한 경험의 표출이 아님을 그 참상의 묘사가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간을 죽이는 건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거리낌 없이 시체와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옆 사람이 가진 배급 빵 4분의 1쪽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렸던 사람은,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미개한 피그미, 가장 잔인한 사디스트보다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전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더운 날이 이어져 이러다 돌아버리겠다 싶다. 폭염에 미쳐갈 지경일 때 더욱 돌아버릴 폭언들과 그에 따른 해명을 듣다 보면 이까짓 폭염쯤은 얼마나 약한 열기인가 생각하게 된다. 여긴 수용소도 아닌데 프리모 레비의 말은 이다지도 완벽하게 들어맞고 있을까.
“아들같이 생각해서” 폭언과 폭력을 일삼고, “아들같이 생각해서” 가두고 잠도 못자게 하며, “아들같이 생각해서” 인간이하로 대우한 군장성 부인의 말은 여지없이 이 말을 떠올리게 한다. “딸같이 생각해서” 성추행하고, ”엄마같이 생각해서“ 막말·폄하하고, ”여친이라 생각해서“ 마구 때리고, ”가족같이 생각해서“ 노예처럼 부리는.
이것이 인간인가.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인간 군상의 생생한 활동사항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쯤되면 전쟁이, 수용소만 문제가 된 환경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어느 정도 인간의 ‘의지’라는 부분도 작용함을 믿게 된다. 더욱 피폐한 인간을 만들어가는 환경은 전쟁, 수용소일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곳, 끔찍한 인간성 말살 장소에서 인간성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인간성 상실의 최악을 보여주는 무리들도 있다. 그처럼 제 손에 권력이란 것이 주어졌을 때 인간성을 말살하는데 최적인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도 아닌 상황에서 이러하다면 이들이야말로 전쟁을 일으키는데 적극적이고 수용소를 운영하는데 최적화된 인간들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권력을 쥐면 그 권력을 마구잡이로 난사하는 것이 일인 것처럼 행하는 이들이 증가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이 사회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국민을 위해”라고 말하는 국회의원들도 당선배지를 달고 나면 ‘국민’ 따윈 안중에도 없다. 그들 모두는 마치 수용소에 들어앉은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으로 철저하게 인간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종족으로 전락한다. 역시, ‘생각하는 사람’의 전형에서 가장 재빨리 멀리 있는 사람들인가. 이따위 사람들은 제발 생각이란 걸 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특히, 저 따위의 생각들은 함부로 입밖으로도 내뱉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권력을 잡으면 눈이 뒤집히는 것이 인간인가. 정말 그런 건가. 그렇다면 권력없는 인간은 늘 이런 권력을 쥔 인간들의 행태를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 수용소에서도 그렇지 않은 이들이 존재하듯 모든 권력을 가진 이가 부당한 행동놀이에 빠져사는 것은 아니다. 결국 권력을 감시하고 제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대다수의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에 갑질 사례에 대한 전수조사가 실시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또 한동안 극도로 열을 올릴 이야기들을 들어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 결코 갑질 사례가 없을 리가 없으니까.
이것이 인간인가. 이 말이 거듭 입속에 되뇌지는 것은 ‘그들’로 인해 힘겨운 삶을 겪은 이들의 삶에 대한 얘기임과 동시에 ‘그들’의 생각과 태도, 그들 자체에 대한 비난의 말일 것읻. 이것이 인간인가. 앞으로도 이 말을 얼마나 생각하고 말하게 될 것인가 생각하면 이 사회가 ‘인간성’을 제거하는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구나란 생각도 거듭 들게 된다. 프리모 레비의 말을 인용하면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엔 이 말로 바꿔지리라 싶다.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쉬운 일도, 간단한 일도 절대 아니지만 ‘갑질쟁이들’ 당신들은 그 일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