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 피해는 매우 적으며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새잎, 2011-06-07.
체르노빌 사고와 후쿠시마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는 매우 적으며 원자력 발전이 굉장히 안전하고 경제적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즘 인기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정재승 박사는 탈원전에 관해 이야기했다. 에너지의 안전성 문제 등 장기적으로는 탈원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은 방송 후 같은 학교 교수의 항의로 이어졌다 말한다. 위의 말은 KAIST 원자력및양자공학과 윤종일 교수의 방송 후 한 항의성 발언의 한 부분이다. 원자력 관련 학자들과 관계자들의 입장에서야 당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떠한 차이와 논리를 떠나서 저 발언에 대해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정부는 탈원전 정책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다. 원전을 없애면 당장 전력수급을 어떻게 할 것이냐, 원전 인근에서 부동산 및 다른 관련 업종을 준비하는 이들의 반대, 원자력 관련 학계 및 단체들의 반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은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무한 긍정성 때문이다.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는 매우 적으며”, 여기에 정재승 박사 또한 인용하는 수치들이 서로 다르다고 얘기하고 있듯이 그 근거자료는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체르노빌 사고를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다룬 이야기, 『체르노빌의 목소리』에는 사건을 축소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체르노빌 사건 일지는 없다고 보면 되오. 촬영을 못 하게 했고, 다 비밀에 부쳤소. 누군가 뭐라도 찍기만 하면 관련 기관에서 곧장 그 자료를 압수하고 못쓰게 된 필름만 돌려줬소. 주민을 어떻게 대피시켰는지, 어떻게 짐승을 데리고 나왔는지에 대한 기록물이 없소 비극을 촬영하는 것은 금지됐고, 영웅만 촬영하도록 허락해줬소. p241.
“인명 피해는 매우 적으며“ 메아리처럼 맴도는 이 말 때문에 흥분이 가시지 않는다. 좀더 이성적이어야 하는데, 감정적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럴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탈원전을 지지하는 상황에서 사고의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절규는 이성적 사고로 일관되었던 생각에 감정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선 러시아 환경단체가 수집한 통계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건 후 150만명이 사망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수치를 인정하지 않고 자체적인 인용 통계 수치가 있다고 치자. 수치로 파악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적다’라는 말로 넘겨버릴 수 있는 것인가. 몇세대에 걸쳐 회복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고 살 수밖에 없음을 원자력전문가로서 명백히 인식하지 못할까.
의사 선생님께서 그러는데요, 우리 아빠가 체르노빌에서 일해서 내가 아픈 거래요. 나는 아빠가 갔다 온 다음에 태어났는데도요. p386
원전해체 작업을 하느라, 원전 가까이에 살았기에, 원전에 머물렀던 사람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이 방사능에 노출되어 생명을 잃었다. 이후 출산한 아이들도 사망, 질병에 고통받았다. 수많은 여성이 아이를 원하지만 낳을 수 없었고 출산한 경우 수많은 기형아도 탄생되었다. “인명 피해는 매우 적으며”라니. 지속되는 후유증은 인간뿐 아니라 생태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쳐 거기서 또다시 피해를 얻고 있다. “인명 피해는 매우 적으며”라니. 인용하는 수치를 각각의 기관의 이익을 대표하는 수치를 가져와 사용한다고 해서 그 속에 “인명피해”가 없는가? 당장 폭발 후 투입되어 사망되었던 그 몇십, 몇백명의 목숨은 ‘인명피해’로 거론할 수준이 아닌가?
안전하다. 경제적이다. 그런 사고는 원전 건설 이후 몇 건 발생하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이 무한긍정성. 한번의 사고가 낳는 치명성에 대해서 완전한 방어가 있는가.
얼마 전 창원에서 발생한 엘리베이터 사고에 대해 관계자들의 말 또한 경악스럽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도 전에 문이 열려 추락한 사고에서 절대로 열릴 수 없는 기계이니, 사람이 강제로 문을 연 사고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도대체 기계가 ‘절대로 열릴 수 없다’는 발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기계적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주장, 완벽하다는 주장. 우리는 어떤 기계도 결함을 발생할 수 있음을 알고 있고 노후화될수록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안다. 저 기계의 안전성, 절대적 믿음은 절대적으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의도적 발언으로밖에 안 보인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이후에도 원자력발전소, 원전 전문가들은 주장했을 것이다. 이이상의 사고는 없고 안전하고 완벽하다고. 하지만 지진이 잦은 일본에서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했다. 안전하다, 완벽하다 하지만 다가올 어느 해, 원전이 있는 나라 중 어느 곳에서 사고가 발생할지 모른다.
원자력의 역사는 군사비밀, 기밀, 저주 그 이상의 것(p307)이라는데 어떤 기밀이 있어 전문가들은 ‘원전’을 찬성하는가. 아니 전문가의 차이인가. ‘어떤’ 전문가들은 탈원전에 찬성하니까. 그렇다면 그토록 탈원전에 반대하는 집단은 누구이고 무엇때문인가. 설마, 원전을 지음으로써 얻게 되는 다른 이득을 원해서일까. 원전이 존재해야 당장의 이익을 취할 수 있다면 발생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고’ ‘재앙’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인가, 특정한 기득층의 일상적인 사고수준일까. 떠도는 ‘핵피아’. 믿지 않고 싶지만 그동안 이 나라가 굴러온 형태가 있으니 의심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는 슬픈 현실.
9시 등교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도 통학버스 운전자들과 맞벌이 부모는 반대했다. 출근시간 동안 아이를 맡길 데가 없다는 이유, 그리고 통학버스 운전자들은 생계보장을 이유로 들었다.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유치원생의 등교·등원 시간의 차이로 수입을 얻는데 일괄적으로 등교시간이 정해지면 수입의 구조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너무나 오래 굳어진 교육정책 속 등교시간. 일반적인 성인의 출근시간보다 빠른 아이들의 등교시간이다. 그러한 교육정책 때문에 등교 서비스를 행하는 ‘직업’이 발생했을 것이다. 대학생 연합기숙사를 짓는데 동네 주민이 반대하는 이유의 내실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임대업’을 통해 수익을 얻기 위함이다. 다른 반대의 목소리 또한 허무하게 메아리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가치에 대한, 바람직한 것에 대한 것은 차치해버리고 당장의 ‘내 이익’ ‘나만 돈벌면 장땡이야’란 사고가 너무나 당연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인지 너무나 떳떳하게 그 이유를 내세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더 중점을 두어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있다지만. 결코 무너져서는 안되고 보호해야 하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탈원전정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원전정책의 문제점에 대해 잘 파악하고 궁극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굳건하게 한다. 단지 당장의 전력 공급을 이유로,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허우적거릴 문제가 아니다. 전문가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그들의 지식과 양심에 따라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오로지 “인명 피해는 적으며”와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는 무한낙관과 긍정주의로 당장 한 세대가 살아갈만큼의 앞날만을 보지 않기를 바란다. 그토록 적은 수치만큼의 배포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생명을 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