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처음 맞는 명절이라고 친구들로부터 응원 메시지. 잘하고 오라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는데 왜 시댁에 도착하기도 전에 혓바늘이 돋고 난리인지. 눈은 폴폴 날리고, 혀를 달싹일 때마다 통증은 느껴지고, 공연히 긴장되는 것이 내가 결혼했구나, 하는 절절한 현실. 지금쯤이면 엄마가 부쳐놓은 부침개나 주워 먹고 한과나 아삭거리며 휴일을 만끽하고 있으련만.

  시어머니는 편한 때 오라고 하셨지만 결혼하고 처음 맞는 명절인데 집에 있기도 뭐해서 설 하루 전날 저녁에 집을 나섰다. 친정에 들어온 선물세트 중에 정종, 한우 등을 차에 싣고 한 시간 반을 달려 시댁에 도착. 어머님은 그새 시금치와 당근으로 만두피에 물을 들여 알록달록 만두도 빚어놓으시고, 인삼 넣은 식혜도 해놓으시고. 가족들 먹을거리를 미리 준비해 놓으신 덕분에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 날은 같은 층에 사시는 큰댁에 인사를 드리고 와서는 어머님, 남편이랑 고스톱을 쳤다. 나는 무려 만오천원을 땄는데 일단 패도 잘 들어왔지만 아무래도 주변에서 은근 밀어주는 것 같았다. 계속 치고 싶었지만 내일을 위해 취침. 시댁에서 처음 자는 거라서 잠이 잘 안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피곤했던 까닭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까무룩 잠에 빠졌다.

  다음날. 자명종을 맞춰놓고 자서 일찍 일어나긴 했는데 밖이 조용했다. 씻으러 나가보니 어머님이 일어나 계셨는지 안방에서 조그맣게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깰까봐 밖에 안 나오시고 그냥 방에 계시는 것 같았다. 친정엄마가 시킨 대로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옷을 갈아입고 큰댁에 갈 준비를 했다. 남편은 아직 아무도 안 일어났을 거라며 더 자라고 하는데 긴장 탓인가. 이상하게 머리가 맑았다. 내가 커피를 타려고 하자, 어머님은 아버님이 밭에서 따오신 딸기에 꿀과 우유를 넣어 주스를 갈아주셨다. 이어서 남편과 아버님이 기상, 어머님이 마련하신 몇 가지 음식을 싸가지고 큰댁으로 갔다.

  종가집이 아니다보니 모인 인원은 단출했다. 차례를 지내고 아침을 먹고 났는데 큰댁 농장에서 일을 한다는 베트남 아가씨가 새해 인사를 왔다. 그녀는 결혼식 때 나와 남편을 봤다고 했다. 결혼식에 와주셔서 고맙단 말을 하고 싶어 고맙습니다, 가 베트남어로 뭐냐고 물었더니 깜언, 이란다. 그녀는 언뜻 촌스러웠지만 눈빛이 맑고 목소리가 고왔다. 배부러요, 하면서 음식을 극구 사양하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은 명절 때 참 외롭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내 위치가 세뱃돈을 줘야 되는 입장이려니 생각하고 아예 기대를 안 했는데 큰아버님과 시아버님이 세뱃돈을 챙겨주셨다. (실은 신정 때 서른이 되었다고 남편한테 삼십만원을 세뱃돈으로 받았었다. 호호.) 작은 댁 도련님들과 여섯 살배기 시누이가 세배를 해서 남편과 나도 미리 준비해 간 빳빳한 새 지폐로 세뱃돈을 주었다. 작은 어머니가 무지 좋아하셨다. 우리 엄마도 옛날에 그랬는데. 엄마한테 맡겨라, 그리고는 영영 종적을 감춰버리는, 세뱃돈의 묘연한 행방.

  어머님이 들려주신 들기름, 참깨, 딸기 등등을 싣고 와서 오후엔 친정에서 연휴를 즐겼다. 차가 밀려 생각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역시 친정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사뿐사뿐. 아무리 시어른들이 잘해주셔도 친정만큼 편할 수는 없다. 오랜만에 오빠와 올케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남편도 결혼하면서 든든한 형님이 생겼다고 늘 좋아하곤 했다. 오빠는 잔정이 없고 냉정한 편이지만 자기 가족들한테는 참 잘한다. 저녁을 먹고 나서 여기서도 고스톱을 쳤다. 가장 신난 건 우리 아빠. 오리지널 타짜인 아빠와, 계산과 잔머리의 달인인 오빠, 이상하게 운 좋은 올케, 그리고 어떤 패가 들어와도 절대 죽지 않는 무대뽀인 나. 결국 보다 못한 오빠가 너는 웬만하면 광을 팔던가, 죽지 그러냐, 는 결정적인 말을 해왔고 처음엔 아빠가 몽땅 따는 분위기였는데 내가 빠지자 오빠와 남편이 번갈아 따곤 했다. 오빠 왈, 깐따삐야가 빠지니깐 판이 재미있네. 서로 견제하면서 치니까 치는 맛도 나고. 엄마랑 이것저것 집에 가져갈 걸 챙기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또 오빠의 목소리. 역시 깐따삐야가 없으니깐 판이 잘 돌아가. 글치 뭐. 우리 집은 내가 항상 화근이지 뭐. 오기로 다시 끼려고 했는데 남편이 따는 중이라서 참았다.

  밤늦게 돌아와 곯아떨어져서는 오늘 아침도 친정에 가서 먹었다. 남편한테는 점심 건너뛰게 여기서 어여어여 많이 먹으라고 부추기면서. 오빠 내외가 서울로 올라간 뒤, 엄마가 챙겨주는 것들을 바리바리 싸서 귀가. 이제야 오롯한 내 시간을 맞았다. 예전 같으면 엄마랑 수다를 떨든가, 친구를 만나 영화라도 보려고 궁리하든가, 아마 그랬을 것이지만 오늘은 그저 무한정 쉬고 싶다. 혓바늘에 오라**를 바르고 입 꼭 다문 채 뒹굴뒹굴 해야겠다. 냉장고에 먹을 게 잔뜩이고, 빨래도 해널었고, 집도 뭐 비교적 깨끗하고. 내일 아침까지는 무조건, 무조건 쉬고 말거야! 어머니 세대와는 달리 요즘은 명절에도 그다지 할 일이 없지만, 어머니 세대와는 달리 요즘 며느리들은 그다지 깡도 없어서 평소보다 조금만 더 움직여도 이렇게 엄살을 부린다. 어쨌든! 결혼하고 처음 맞은 명절. 무사히, 즐겁게 보낸 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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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7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27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9-01-27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에 남편이 새뱃돈을 40만원 준다면....
그땐 한 떡 쏘세요...^^

깐따삐야 2009-01-27 13:37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물어보더라구요. 마흔되면 40만원 달라고 할거냐고. 그래서 넘 멀리 내다보지 말고 내년에 31만원부터 생각하고 있으라구 했어요. 저 잘했져?^^

조선인 2009-01-28 08:27   좋아요 0 | URL
깐따삐야님, 존경합니다. 아이참, 난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깐따삐야 2009-01-28 11:31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용돈 받을 구실은 갖다붙이기 나름이어요.^^

Mephistopheles 2009-01-28 23:24   좋아요 0 | URL
이 페이퍼는 절대적으로 마님에게 보여줘선 안되겠군요!!

마늘빵 2009-01-27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결혼 후 첫 명절, 잘하고 오신거 같은데요? 큭큭, 저는 고스톱을 못치고, 다른 친척들도 못쳤던거 같아요. 아무도 고스톱판을 벌이지 않는. -_- 그냥 형들하고 원카드놀이만 했던거 같아요. 우리 가족뿐 아니라 친척은 놀이문화가 없어요. 걍 과일먹고 티비보고 밥먹고 드러눕고, 다시 과일먹고 티비보고 밥먹고 드러눕고.

깐따삐야 2009-01-28 11:45   좋아요 0 | URL
어른들이 더 잘 아시더라구요. 저희 세대가 암껏도 못한다는 것을요. 흐흐.^^
저도 고스톱 잘 못쳐요. 시댁에서는 땄는데 친정에 오니 판도 커지고 다들 머리 팽팽 굴리며 치는 바람에 나가 떨어졌다는. -_- 가족들끼리 해야 즐거운 놀이문화로 그치지 다른 사람이 내 돈을 그렇게 많이 따가면 이거야 원!

순오기 2009-01-27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명절~ 무사히 마치셨군요.^^
친정에서 바리바리 싸온거로 한참은 버티겠군요~ㅎㅎㅎ
우린 다도를 즐기는 시숙님 덕분에 우아하게 차마시며 강의를 들었어요. 차와 다구도 얻어왔고요~

깐따삐야 2009-01-28 11:50   좋아요 0 | URL
네. 어떻게 잘 흘러갔네요.^^
아직도 친정에서 덜 가져온 게 있어서 오늘 한번 더 다녀오려구요. 우와... 저도 적벽대전2 보고서 다도를 배우면 좋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저는 시댁에서 종이컵에 커피 타서 마셨는데. 비교되네요.ㅋㅋ

이리스 2009-01-27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신한 새댁의 냄새가 폴폴~ 귀여우십니다.. ^^;;

깐따삐야 2009-01-28 11:54   좋아요 0 | URL
집안의 첫 며느리라 그런지 그냥 다 이쁘게 봐주시더라구요. 암만 그래도 시댁은 어려운 것 같아요.^^;;

Alicia 2009-01-2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뱃돈으로 거실카페트가 뭐에요- 깐따님~
저 같으면 옷을 사버릴텐데. ^^
좋아보여요- 달콤따뜻한 홈 스윗 홈. :)

깐따삐야 2009-01-28 11:59   좋아요 0 | URL
앗! 벌써 샀는데. 어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가서 결국 사고 말았어요.^^
가족이 그런 것 같더라구요. 서로서로 잘하려고 들면 화목하고, 서로서로 챙기려고만 들면 각박해지고. :)

전호인 2009-01-28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야말로 새댁의 첫 시댁 명절 참여로군요.
글에 시부모님의 넉넉한 인정이 베어 있네요.

깐따삐야 2009-01-28 12:03   좋아요 0 | URL
저는 그냥 그런갑다, 했는데 오히려 친구들하고 저희 친정부모님이 걱정을 하시더라구요. 얌전하게 잘 있다 오라구요. 얌전은 아니고 잘 있다 오기는 했어욤.
시부모님은 더 못 줘서 늘 아쉬워 하시죠. 들기름 주실 땐 진짜 좋았어요. 친정엄마가 나물 볶을 때 많이 쓰시길래 갖다 드렸어요.^^

웽스북스 2009-01-28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을 어느 시부모님이 안이뻐할 수 있겠어요.
메피님 말처럼 저와는 정말 대조적인 설.. 흐..
복작복작 따뜻해보여서 좋아요

깐따삐야 2009-01-30 01:58   좋아요 0 | URL
저는 웬디양님의 여행기가 넘 부러웠어요. 왜 결혼 전에 친구들과 그런 추억을 더더더 많이 만들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구요. 웬디양님이라도 싱글라이프를 만끽하셔야 합니당.^^
 

  “공무원은 아닌 것 같고.” 영화관 앞에서 색깔사주를 봐주는 사주도사가 Y를 보자마자 한 이야기란다. 이어지는 얘기 또한 하나도 맞는 게 없어서 Y는 왜 이렇게 못 맞히는 거냐며 화를 냈단다. E와 나는 거기 순 엉터리라며 깔깔거렸지만 도사의 추측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긴 했다. 도사는 무슨 도사. 그저 첫 인상을 보고 대략 판단했던 것이다. Y는 척 보기에도 공무원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마치 연예인 같고, 그녀의 삶도 어떤 면에서는 연예인스럽다.

  새내기 시절, 처음 만났을 때부터 Y는 우리 과의 다른 아이들과는 좀 달랐다. 아담하고 예쁘장한 외모에 경상도 말씨는 어찌나 애교스러운지 여자인 내가 보기에도 참 감질나도록 귀여웠다. Y가 마침 기숙사 부근에서 자취를 했기 때문에 기숙사에서 지내던 K와 나는 그녀와 종종 어울렸다. Y는 겉으로 비춰지는 모습과는 다르게 순진하고 씩씩한 아이였다. 그녀의 교태와 끼는 타고난 것도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 생존본능 같은 것이었다. K는 그런 그녀를 기특해하며 아껴주었다. Y는 예쁜데다가 귀엽기까지 해서 스캔들이 끊일 새가 없었는데 믿음직한 남자친구가 생기고 부터는 성실한 연애모드로 전환,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당시 동아리 활동에 몰두하고 실존에 눈 뜨느라 고통스러웠다... 면 썩 오버고 원래 제 앞가림 하나도 버거웠던 나는 이런저런 딴짓에 관심을 쏟느라 과 친구들과 좀 멀어지게 되었는데 어느 날 K가 Y와 절교하는 사단이 벌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로 K는 무서우리만치 놀라운 집중력으로 학업에 전념했고 Y는 알바를 뛰어 모은 돈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버렸다. 이후에 나는 어쩌다보니 회색분자마냥 두 사람 모두와 잘 지내게 되었다. 둘 다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고, 둘 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어서, 그냥 갈팡질팡하는 사이 그리 되어버렸다. K가 워낙 완고하고 순수했던 반면, Y는 사과할 타이밍을 영영 놓쳐버렸다. K의 고집도 대단했지만 Y도 사과는 진심으로 해야 했다.

  사실 잘 지냈다고는 하지만 Y는 여러모로 나와 달라서 마음을 깊이 나누거나 하지는 못했다. 그녀가 힘든 속내를 털어놓아도 나는 그녀의 여성스러운 외모 이면에 탄탄히 단련된, 똑똑하다 못해 영악스러울 정도로 강한 생활력을 보았기에 그녀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사는 법을 일찌감치 깨우쳤고 같은 조건이라면 나보다 더 잘 살 것이었다. 만약 조건이 다르다면 그 조건을 뛰어넘어서라도 반드시 잘 살고야 말 것이었다. 근처 학교로 실습을 나갔을 때, 지도 선생님이나 아이들을 향한 Y의 상냥하고 다정한 태도에 감탄을 넘어 질투까지 느꼈던 적이 있다. 때로, 아니 종종, 열 마디의 간절한 말 보다 한 번의 눈웃음이 훨씬 효과적이란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 또한 그다지 차갑거나 무뚝뚝한 편이 아닌데도 연하고 달콤한 배 같은 Y 앞의 나는 설삶은 말대가리 같았다. 그때 Y의 능란한 사교술은 부러운 한편, 두렵기도 했다.

  그 동안 띄엄띄엄 연락을 하고 가끔 얼굴을 보고 그랬는데 이번에 만난 Y는 나에게 여러모로 고맙다고 했다. 시험 정보를 알려준 것, 결혼식에 초대한 덕분에 여러 동기들과 만나고 인사할 수 있었던 것. E 말로는 식사할 때 테이블에 의자가 부족했는데 K가 얼른 의자를 하나 당겨서 Y에게 앉으라고 했던 모양이다. 오래도록 정을 주었던 친구와 멀어졌을 때 실망과 아픔도 컸겠지만 연애하고, 사랑하고, 아기도 낳고 하다 보니 K도 이젠 이해 못할 것이 무엇이랴, 싶었을 것이다. 더구나 Y가 어마어마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세월도 많이 흘렀으니 어디 연수라도 가서 마주치면 그땐 더 반갑게 인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같은 지역에 있는 학교에 근무하다보면 동기만큼 편한 동료도 없다. 학부 때 안 친했던 사람도 같이 근무하다 친해지는 경우도 봤다.

  그나저나 꽤 오랜만의 만남이었는데 Y는 “결혼, 꼭 잘하고야 말거야!”라는 대사를 남겨 E와 나는 또 한번 감탄했다. 너무 솔직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는데 급기야는 애인이 있는 남자한테 대쉬했던 경험까지 털어놓는다. 내가 그래도 별별 책도 다 읽고 결혼까지 한 사람인데 촌스럽게 놀라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거 참 용감하고 멋지다고 말하기엔 그새 유부녀 모드에 길든 탓인지 차마 호응불가. 애인이 있는데도 너와 연락을 주고받은 상대 남자가 나쁜 쉐X 같다고 소심한 반발만 했을 뿐.

  조만간 지인들과 함께 엮은 책도 나오고 지역의 좋은 학교로 발령을 앞둔 Y는 혼자 객지에 나와서도 참으로 꿋꿋하게, 부지런히 인생의 지형도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그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E와 나는 우리는 온실 속의 화초마냥 자라서, 어쩌고 해가면서 그녀의 야무진 생활력을 존경하고 시기했다. 항상 자신의 욕구에 솔직하고 다가온 기회는 반드시 잡고야 마는 Y. 나는 그녀가 아니고, 그녀처럼 되려다가는 곧장 시스템 에러를 일으키고야 말겠지만 어느 순간에도 현실을 불평하는 대신,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를 재빨리 생각하고 처신하는 그녀의 현명한 낙천성만큼은 두고두고 본받아야 할 미덕이란 생각이 든다. 다만, 아름답고 능력 있는 여성들에게 인생이 걸어오는 트릭이란 게 있다. Y가 그 트릭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보다 높은 경지의 내공을 쌓았으면 좋겠다. 그녀는 특별하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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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01-24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그래도 별별 책도 다 읽고 결혼까지 한 사람인데 촌스럽게 놀라지 않으려고 애썼다.-> ㅋㅋㅋ 귀여우신 깐따삐야님.

깐따삐야 2009-01-25 13:11   좋아요 0 | URL
헤에...^^ 암튼 얘기 듣고 좀 황당했는데 열 여자 마다 안 하는 게 남자더라구요.

Mephistopheles 2009-01-24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극단으로 절대 치닫지 않는 회색이 최고라니까요...으흐흐(나름 알라딘 회색분자 메피스토가)

깐따삐야 2009-01-25 13:13   좋아요 0 | URL
메피님 경지에 이르기엔 저는 아직도 고집이 넘 세요. 메피님과 열심히 어울리다 보면 언젠간 저도! -_-a
 

  내 결혼식 이후로 동기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H가 추수연수 차 고향에 왔고 고3 담임을 하느라 바빴던 S에게도 좀 여유가 생겨 이제야 한가하게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질문공세를 퍼부어댔다. 방학 동안 깨소금 팍팍 볶고 있느냐는 둥, 이제 유부녀라 못 나올 줄 알았다는 둥, 주말인데 남편이 순순히 보내주더냐는 둥 농을 걸어오기도 했다. 실제로 육아에 바쁜 K와 성실히 시댁에 적응하고 있는 M은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모임을 잡아도 연락을 안 하게 되었다. 결혼했다고 제쳐놓으면 매우 섭섭할 거라는 의사표현을 하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싱글들끼리만 만나면 더 재밌어질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전부터 친구는 친구로밖에 안 보인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오고 있지만 남녀 간의 일이란 절대 모르는 거다. 머릿속으로 화살표를 그려본 결과 썩 괜찮은 커플도 있다. 이러다가 조만간 막무가내 뚜쟁이로 나서겠다.

  우리 동기들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 목청을 조금이라도 높이면 온몸이 후덜덜덜 거릴 정도로 노쇠한 교수님이 한분 계셨다. 연구실에서 출발하여 강의실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오래라서 그냥 번쩍 안아오고 싶을 정도였는데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아주 따듯했던 기억이 난다. 교수님은 어느 날 강의 중에 우리를 둘러보시며 그런 말씀을 하셨다. 원숭이띠는 머리가 좋고 재주가 많고 개성이 강하지요. 어린 세대들이 별자리나 혈액형을 과신하는 것처럼 그분도 십이지 같은 것을 맹신하는 편이었나 보다. 사실 우리 학번은 내가 기억하기로도 매사 열의가 있고 각자 개성이 강하기는 했다. 다만 열의는 있는데 어디에 열의를 쏟아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 헤매는 몇몇(나를 포함하여)이 있었다. 한편 교수님 말씀처럼 모두들 개성이 강하긴 했지만 무식할 정도는 아니어서 뭉칠 때 뭉치고 거리를 두어야 할 땐 적당히 거리를 둘 줄도 알았다. 과대표인 K의 포용력과 통솔력이 탁월해서이기도 했겠지만 대개 근본이 착실한, 좋은 아이들이었다.

  마침(?) 우리는 서른이 되었고 나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었는데 무려 십년을 함께 하고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별 느낌 없다가 대세인 반면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다는 막막한 소감도 나왔다. S는 볕이 좋은 오후에 캠퍼스 잔디밭에 모여 과자를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던 스무 살의 추억이 너무 그립다 했다. 날이 저물면 과자가 쥐포가 되고 콜라가 비어로 화하는 신기한 경험이 왜 아니 그립겠는가. 이젠 그렇게 밤을 새우기엔 저질 체력이 되어버린 우리는 힘을 내자고 두 주먹 불끈 쥐는 대신 유일한 자산이었던 열의와 개성이 바닥나고 있지는 않은가. 두려움과 안타까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문득 내 앞의 동기들에 대해 써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아직 젊은 그들을 기억 속에 활자로 새기고 싶어서다.

  E는 학부시절 나와 단짝이었다. (세상에, 우리는 어쩌자고 교환일기까지 썼었다.) 첫 강의 때 우연히 나란히 앉게 되었는데 그때 더듬더듬 수다 떨다가 친해졌던 기억. 김영하와 바나나의 소설을 맨 처음 내게 소개하고 권해준 것도 그녀였다. 뭐랄까. 다소 도도해 보이는 외모에 합리적이고 건조한 성격. 하지만 진짜배기는 그녀의 박학다식하고 엉뚱한 면이다. 삼라만상에 관심이 많고 보도 듣도 못한 이상한 책을 많이 읽는 한편 동방신기 광팬이다. 동방신기 때문에 만나던 남자랑 꽁한 적도 몇 차례. 여러모로 나와 다른 점이 많은 친구인데 차분한 매력이 있고 일단 입이 무거워 믿음이 간다. 나처럼 뜨거운 피를 가진 수다스런 연인을 찾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여자인데다 무려 결혼까지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거나 이해받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느끼기에 더욱 아끼게 되는, 그런 친구다.

  J는 ‘얍삽이’라는 별명을 그대로 삶 속에 구현하며 사는 친구인데 그렇다고 밉상은 아니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공부하러 도서관으로 가는 게 아니라 여자 동기들을 찾으러 도서관에 가던 녀석. 뒤통수만 보고도 우리들을 용케 찾아내 생글생글 웃으며 노트 필기 한 것 좀 빌려줘, 라고 당당히 요구하던 녀석. 그래도 시험 끝나면 결과에 상관없이 밥은 꼭 샀다. 그나저나 지난해 연애를 한 것 같은데 결과가 별로였던 모양이다. 녀석이 군대에 갔을 때 여자 동기들이 합동으로 편지를 써준 적이 있는데 답장을 받아보니 웬걸, 그토록 꼼꼼하고도 절절한 문체라니. 깔끔하고 알뜰한 녀석이라서 된통 멍청한 아가씨를 만날까봐 주의 요망되는 친구다.

  또 다른 J. 아랍삘의 외모에 고지식함이란 무엇인가를 라이브로 전해주는 친구. 좀 답답하고 지루한 면이 있긴 하지만 방학 때면 헌혈해서 영화티켓도 받고 자유이용권도 받아서 호혜를 베푸는 일면도 있었다. 우리는 피 같은 티켓이라면서 겁나게 놀고 다음번엔 다른 걸 타오라고 부추기기까지 했다. 사실 J는 남의 말을 잘 듣기도 하고 부탁도 잘 들어준다. 그런데 안쓰럽게도 말을 되게 안 듣게 생긴 인상을 갖고 있다. 지난 해, 남편과 나를 연결해준 장본인이기도 한데 덕분에 나한테 쓸데없는 구박을 당하기도 했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지지부진한 잔티끌은 없는데 노련하지 못한 무매너가 살짝 에러다. 그래도 남편의 은인이므로 가까스로 특별해졌다.

  그리고 H. 안목도 좋고 참을성도 많아서 남녀 불문하고 오래도록 무난한 벗으로 지낼 수 있는 친구다. 웬만한 것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아량도 갖췄다. 또한 많은 영화를 섭렵한 영화 마니아이기도 해서 함께 영화 이야기를 나눌만한 훌륭한 상대다. 남자 동기들 중에 유일하게 내 속내를 보여주었던 친구이기도 한데 하도 편해서 거의 동성 친구와 다름없이 생각했었다. 예전에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실 때가 있었는데 이번에 만나서는 그 어머니가 노래자랑에 나가서 칠만원과 감자 한 박스를 타오셨다고 자랑하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멀리 발령이 나서 자주 볼 순 없지만 문득문득 스쳐가는 추억이 남다른 친구다.

  S는 아마 우리 가운데 가장 능력 있고 머리가 좋은 친구일 것이다. 학생 때부터 매사 준비성이 철저하고 실천력 또한 대단해서 항상 인생의 어느 단계마다 특출한 성과를 내곤 했다. 그녀의 에너지는 여전히 건재해서 사회에 나와서도 만날 때마다 수업에 대한 유용한 팁도 많이 주고 생활지도에 관한 조언도 열심히 해준다. 무엇보다 S가 지닌 최고의 매력은 불행마저 희화화시키는 묘한 재주를 가졌다는 점. 절망의 구렁텅이를 웃음의 도가니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도 않을뿐더러 설사 주어졌다 해도 타이밍이 어긋나면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다. S는 그런 면에서 절묘한 유머감각을 지녔다. 그러한 S가 올해부터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여 백수와 돌싱만 아니라면 올인을 불사하겠단다. 내가 남자라면 정말 진심으로, 머리 좋고 재미있는 S 같은 여자를 사귀어보고 싶다.

  나오지 못한 동기들을 제외하면 끼리끼리 어울렸던 동기들 중 마지막으로 나. 나는 그들에게 어떤 친구일까. 이번에 그런 말을 들었을 땐 기분이 좀 묘했다. 우리 학번은 그래도 다들 잘 지내지 않았어? 별 문제도 없었고 두루두루 친했잖아. 그러자 좌중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S 왈. 깐따삐야, 너는 그랬지. 너는 정말 모두하고 잘 지냈어. 순간 내가 다 알지 못했던 무언가가 있었다, 라는 느낌과 함께 조금 멋쩍어졌다. 어쩐지 과거의 내가 줏대 없이 느껴지기도 했고 그래도 너는 정말 누구하고나 문제를 일으켰어, 보다 낫지 않느냐고 간신히 위안했다. 그렇다. 매우 가깝게 어울리지 않고는, 혹은 그랬었다 하더라도 아무개와 아무개 사이의 불협화음 전부를 눈치 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과거란 제멋대로 윤색되기 일쑤이기에 꼬박꼬박 인지하며 되새김질 하지 않는 한 원래 그 인상 그대로이긴 어렵지 않던가. 한편으론 자의식 과잉이었던 내가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느라 그만큼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스미지 못했던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의 나는, 많이 어렸던 것이다.

  그처럼 지난 세월의 거울 같은 동기들을 보면서 성장한 모습에 장하기도 하고 그대로인 모습에는 가슴이 따듯해져 오는 흐뭇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보면, 학창시절의 우정이란 참 특별한 것이다. 이제는 서로의 뱃살과 탈모를 염려해줘야 할 정도로 나이를 먹었지만 인생의 어느 시기를 함께 출발했고 같은 길을 걷고 있어서인가. 늘 스무 살인 채로 머물러 경험만 차곡차곡 늘려가고 있는 듯한 탈(脫) 시간의 느낌. 건강하게 모일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그리 되길 바라고, 진정 살아있는 추억의 눈길과 몸짓들로 거기 그대로 있어줘서 소중한, 삼십세 99학번 동기들. 차를 마시고 왔는데도 무엇엔가 담뿍 취한 것만 같은, 그런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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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9-01-18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좋은데요.
뭐랄까..차분하면서도 감성적인.^^

그런데 '돌싱'이 무슨 뜻인가요? (긁적)

Mephistopheles 2009-01-18 09:46   좋아요 0 | URL
"돌아온 싱글"의 준말입니다.
(여기서 엘신님은 글쎄 대체 돌아온 싱글은 뭘 뜻하는 겁니까? 하면 찾아가서 한대 때려줘야지)

깐따삐야 2009-01-18 23:13   좋아요 0 | URL
엘신님- 술 마시고 썼으면 좋았을 텐데 차 마시고 써서 쫌...^^
메피님- 하핫! 정말 그러실 것 같아요. 엘신님은. 때린다고 맞을 엘신님도 아닐 것 같지만요.

L.SHIN 2009-01-19 06:20   좋아요 0 | URL
헹-!
그 정도는 알아요!
그러니까, 애인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시 싱글? 그런 뜻이죠! (히죽)

아니요, 깐따님,
저 맞을거에요. 얼굴에 시멘트 처발라서 딱딱하게 만든 후에.ㅡ_ㅡ(훗)

Mephistopheles 2009-01-19 10:20   좋아요 0 | URL
땡! 이혼남 이혼녀를 지칭하는 겁니다. 시멘트를 얼굴에 직접 바르고 굳히기까지 하신다는데..일부러 때릴 필요는 없죠. 굳어가며 변하는 얼굴표정 관람이나..하면서..으흐흐=3=3=3=3

L.SHIN 2009-01-21 05:42   좋아요 0 | URL
반드시, 무슨 약을 올려서라도, 메피님으로 하여금 딱딱한 시멘트를...
맨 주먹으로 때리게 만들겁니다.ㅡ.,ㅡ

Mephistopheles 2009-01-21 11:42   좋아요 0 | URL
입이 굳었을텐데 무슨 수로 약을 올려요? 메롱

L.SHIN 2009-01-22 05:45   좋아요 0 | URL
입은 뚫어놓을거에요!!! ㅡ_ㅡ (훗)

Mephistopheles 2009-01-22 09:45   좋아요 0 | URL
그럼 입만 때리면 되겠네..ㅋㅋ

깐따삐야 2009-01-22 18:34   좋아요 0 | URL
두분, 요기서 아주 판타지 어드벤처 호러 무비를 찍고 계시는군요!! ㅋㅋ

L.SHIN 2009-01-23 05:32   좋아요 0 | URL
그럴 땐, 입술을 안으로 살짝 말아주면 되지롱~ 메롱.

앗,깐따님. 이번의 승자는 누구일까요? (당연히 저 응원할거죠? 히죽)

Mephistopheles 2009-01-23 09:32   좋아요 0 | URL
엘신님도 참....2009년을 맞이하여 어떻하든지 저를 한 번 이겨보고 싶으신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옛다..님이 이겼습니다. =3=3=3=3=3

L.SHIN 2009-01-24 06:35   좋아요 0 | URL
싫어!
이런식으로 이기는건 싫어! ㅡ.,ㅡ^

뭐..아직 2009년이 많이 남았으니까요,ㅎㅎㅎ

깐따삐야 2009-01-24 11:18   좋아요 0 | URL
흐음. 메피님이 결국 홀라당 내빼셨으니 형님 WIN!

L.SHIN 2009-01-25 06:55   좋아요 0 | URL
으흐흐흐흐 ㅡ_ㅡ (히죽)

Mephistopheles 2009-01-18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드~럽게 까칠하고 변화무쌍하며 지X맞은 M추가요~~=3=3=3=3=3
(서른이 부러운 40대 개봉박두 예정인 메피스토)

깐따삐야 2009-01-18 23:15   좋아요 0 | URL
메피님의 강점은 주제 파악을 잘하신다는 거에요. 정말 멋져요. ㅋㅋ
서른을 뭘 부러워하시고 그러셔요. 제 느낌엔 서른 이후는 그냥 다 도찐개찐 인 것 같아요. 왠지. 흑흑.

L.SHIN 2009-01-19 06:21   좋아요 0 | URL
푸하하핫, 깐따님 댓글에 추천 ㅡ_ㅡb

그런데, '도찐개찐'은..뭔 뜻인가요? (긁적)

깐따삐야 2009-01-20 21:03   좋아요 0 | URL
도찐개찐은 그게 그거임~ 이란 말이에요. 지구말은 참 재밌죠? ^^

L.SHIN 2009-01-21 05:43   좋아요 0 | URL
아항~^^

마늘빵 2009-01-18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자리에서 깐따삐야님이 느꼈던 것들이 제게도 느껴지네요. ^^ 동기들하고 그다지 어울려 놀았던 적이 없는데, 그들은 지금 뭘하고 있나, 어떻게 변했나 궁금하기도 하네요.

깐따삐야 2009-01-18 23:21   좋아요 0 | URL
스무살의 경험치는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봤자 다들 비슷한 것 같아요. 조금씩 어설프고 어리석고 그랬던 시기니까요. 동기들은 모두 변했는데, 어디 한 구석 그대로인 면을 발견하면 재밌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그렇더라구요.^^

프레이야 2009-01-18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 그땐 뭐하고 살았더라, 생각해보게 되네요.
돌아갈 수 있다면...ㅎㅎ
삐야님 좋은 시간 나눴군요. 참 좋아보여요.

깐따삐야 2009-01-18 23:23   좋아요 0 | URL
저도 스물, 그땐 뭐하고 살았더라, 생각해 보기도 하고 돌아갈 수 있다면... 하고 아쉬워 한다는. 히힛.^^
즐거웠어요. 다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잘 되어서 평생 얼굴 보며 살았음 좋겠답니다.

가시장미 2009-01-18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도 홍삼좀 먹어야 할까봐요. 크크

깐따삐야 2009-01-18 23:24   좋아요 0 | URL
이제 우리도 건강보조식품 하나쯤은 챙겨먹는 센스가 필요한 연령인가 보아요. 홍삼은 체질과 무관하게 모두에게 좋은 식품이래요. 한번 드셔 보시와요.^^

레와 2009-01-1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나도 우리 구찌들 보고잡아요.
문자나 날려볼까..하고 불현듯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뜬금없이 보내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요상한 생각도 드네요.

몇년전까진 꼬박꼬박 안부문자도 날리고 했었는데 말입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불필요한 생각이 많아진건지 모르겠어요.

또 하나,
친구 하나하나를 생각하는 깐따삐야님 마음이 이뻐요. 사실 부럽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강렬한 단편 이미지말고, 슬며시 스며드는 어떤 느낌하나 남기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어요.


아흥. 홍삼이나 사러가야지~

깐따삐야 2009-01-20 21:08   좋아요 0 | URL
저희 동기들은 아무래도 같은 직업을 갖고 있다보니 더 자주 보게 되고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많고 그런 것 같아요. 앞으로도 그랬으면 하고 바라게 되네요.

저도 요즘 홍삼 먹고 있어요. 원기회복엔 최고인듯. 레와님도 어서.^^

 

 마트를 나서니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차창에 달려들 듯 내리는 눈은 예쁘지도, 멋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올 겨울 이 도시엔 눈이 적어 그런가. 집으로 곧장 오기 아쉬워 일부러 돌아서 왔다.  


 지나가는 길, 왼편으로 우리가 결혼했던 웨딩홀이 보였고...


 집에 도착하니 벌써 주변은 어둑어둑해져 먹고 남은 콩나물국을 육수로 만두라면을 끓이는데.... 그렇다. 이제 난 저녁에 뭐 먹을까, 를 생각하는 아줌마가 되었을 뿐이고!


 작년 겨울, 요 모습 요대로 썰매타며 신나하던 철딱서니 아가씨는...   


 몇개월에 걸쳐 아무개 총각이 권해주는 많은 차를 홀짝홀짝 마시고는(저 안에 대체 뭐를 넣었길래),   


  거의 제정신, 제모습(?)이 아닌 채로 결혼식을 치른 바. 


 놀러가서도 레포트 걱정에 셰익스피어 하르방한테 니뿡~이나 날려주셨는데, 


 언젠간 바삐 학교로 향하던 다정한 느티나무길이 그리워지겠지. 올봄에도 개나리는 옹긋봉긋 피어날 텐데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남루하도록 진실하여 키 크고, 밝고, 늘 한 곳만을 바라봐주는... 가로등 같은 남자가 되려다 만 그이랑 오늘도 투닥거리며 살고 있다.  

 되도록 무심한 편이었고, 오히려 머릿속 잔상들을 편애하는 쪽이었는데, 나이를 한 살 더 먹어서일까. 사진을 정리하는 동안, 계절에 어울리는 추억 몇 컷 쯤은 '갖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모든 것은 지나가기에 다행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모든 것이 영원할 수 없기에 아쉬운 마음.  

 어쩌면 점점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 줄어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진 속 나와, 내가 보낸 시간들을 응시하는 순간. 그 순간은 내가 보았던 책과 내가 썼던 글처럼, 내게 말을 걸어온다. 스쳐가는 시간 속에서 그러한 순간들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바람. 낭만백수, 라는 로망까지는 아니어도 그 쯤의 여유는 내내 잃지 않았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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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01-13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비록 사진은 나의 기억력을 왜곡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왜곡이 아닌 망각의 늪으로 건너가 버리는 게 기억인 것 같아요. 얼마전에는 대학교 1학년 때 사람들이랑 놀러갔던 얘기를 막 하는데 도무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는 거에요. 아무래도 사진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아직도 혼자 기억 못했어요)

그리고 저 오늘 막 깐따삐야님한테 문자 보내고 싶었는데. ㅎㅎㅎ 왜냐면, 오늘 체크목도리를 샀거든요- (배터리가 없어서 못보냈어요. 흐흐) 사면서 어찌나 깐따삐야님 생각이 나던지 말이죠. ㅋㅋㅋ

깐따삐야 2009-01-13 00:25   좋아요 0 | URL
그쵸? 예전엔 사진 찍히는 것을 되게 어색해했는데 이제는 남겨야겠다는 의무감 비슷한 게 생겨서 그냥 찍히도록 놔두는 편이에요. 나이 먹으니깐 얼굴은 두꺼워지고, 기억력은 감퇴하고, 없던 욕심 생기고... 왜 이래. ㅋㅋ

으흐흐. 그랬군요! 오늘은 눈도 오고 해서 반가운 문자 받으면 기분 좋았을 텐데.^^ 그나저나 곧 체크목도리를 따듯하게 두른 웬디양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죠?!

라로 2009-01-13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여기서 축하드려도 되는건가요????^^;;;
축하해요~. 차를 타주는 섬세한 남자라면(뭘 넣었든~ㅋㅋ)
가로등이 되실것 같은데요!!!!ㅎㅎ
오랫만에 딴따삐아님의 여러모습 반갑기 그지 없습니당~.ㅎㅎ

깐따삐야 2009-01-13 15:08   좋아요 0 | URL
축하 감사합니다. 이젠 차 보다는 밥을 해주는 편이 더 좋다는. ㅎㅎ
nabi님의 가족분들도 안녕하시지요? ^^

조선인 2009-01-13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깐따삐야님의 결혼사진도 보네요. *^^*

깐따삐야 2009-01-13 15:09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 오랜만이에요. 그 날 사진을 이 사람, 저 사람이 많이 찍어 주었는데 부끄부끄해서 한 장만 올려보았어요.^^

레와 2009-01-13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깜.놀.! +_+

쇠골뼈도 보이고, 막~ 우후훗 ^^
사진에 대고 '하이' 요라고 있어요. 으흐흐~

깐따삐야 2009-01-13 15:10   좋아요 0 | URL
하핫. 레와님의 댓글에 저야말로 깜놀! 제가 원래는 저렇다구요. (정말?)

마늘빵 2009-01-1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제가 봤던 그 분이 맞나요? ^^ 위에 최근 사진은 맞는거 같은데, 결혼식 사진은 와 느낌이 많이 다르네요.

깐따삐야 2009-01-13 15:14   좋아요 0 | URL
아프님의 반응은 제 남자 동기들의 반응과 비슷하네요. 메이크업을 넘 과하게 안 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길 망정이지, 아니면 다들 식장이 바뀐 줄 알고 나가버렸을까나요. 평소에 좀 잘하고 다녀야지 이거야 원.-_-

Alicia 2009-01-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뻐요. :)

깐따삐야 2009-01-13 15:15   좋아요 0 | URL
알리샤님 댓글은 10점 만점에 10점~! ㅋㅋ

개츠비 2009-01-14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눈이 부시네요...^^

깐따삐야 2009-01-15 22:40   좋아요 0 | URL
오우 별 말씀을...^^

순오기 2009-01-14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런 사진이 올라와 있었는데~ 뒷북이야요.ㅋㅋ
셰익스피어 하르방은 뿡야를 발사해도 잘 계시던가요?^^

깐따삐야 2009-01-15 22:42   좋아요 0 | URL
유명인사들이 잔뜩이었는데 셰익스피어 하르방을 보고는 반가운 맘에 니뿡!
쟤 뭐니... 하는 표정 같지요.-_-

미미달 2009-01-16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웨딩드레스 입으신 모습 완전 아름다우세요 ㅇㅅㅇ

깐따삐야 2009-01-16 16:18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모든 신부는 다 아름답죠.
미미달님도 결혼식 때는 더더더 예쁠 거에요.^^

다락방 2009-01-16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런 사진이 여기 올라와 있었다니!!
처음 사진은 얼굴이 잘 안보여서 모르겠구요, 웨딩드레스 입은 사진을 보니 어쩐지 아, 깐따삐야님 답다, 싶어져요. 음 따뜻하고 밝은 성격과 살짝 새침한 모습이 동시에 들어있는 얼굴이에요. 예뻐요.
:)

깐따삐야 2009-01-16 16:24   좋아요 0 | URL
처음 사진은 주변에서 장난으로 덮어 씌운 모자 때문에 당최 컨셉이 없죠.
그나저나 사진에서만 새침하네요. ㅋㅋ 저는 다락방님을 뵌 적이 없어서 다락방님은 어떤 모습이실까, 궁금해요.^^
 


 

  영화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도 알겠고 젊은 배우들도 열연을 펼친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돌아서는 순간 자극적인 장면, 또 장면만이 남을 뿐. 여운이 없다. 주진모의 눈빛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앞선 영화들, <미녀는 괴로워>, <사랑>에서 이미 선보였던 것이었다. 조인성은 삼각관계의 중심에서 미묘한 감정의 결을 표현해야 하는 까다로운 역할을 맡았다. 나름 열의를 다하고 있었고 어느 장면에선 찍을 때 몹시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왕의 남자> 이준기 만큼 아름답거나 개성 있지 않았다. 송지효는 몽고 여인처럼 보이기는 하나 원나라 공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당최 무겁기만 할 뿐 특징이 없다.

  그간의 작품들을 보아온 바. 유하 감독은 아마도 영화로 시를 쓰는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내면은 시인인데 외면은 잡설가라고 해야 할까. 질펀한 청승을 고급 서정으로 승화시키기에는 다소 역부족이란 느낌. 표현하려는 메시지와 영화적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반면 스타일의 세련미에서는 줄곧 마이너스다. 그것이 그의 방식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관객의 입장에선 덜 익은 고기, 덜 깎은 과일을 받아든 것처럼 미진한 기분이다.

  한때 유하의 시집을 즐겨 읽던 때가 있었다. 다소 산문적인 그의 시는 대개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정열적이었다. 유하, 이 남자는 연애나 사랑에 관한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 게 틀림없어. 멋대로 추측하기도 했다. 폼 잡지 않는 시는 발랄했고 폼 잡은 시는 가상했다. 그저 직감으로 나와 코드가 맞는 시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메가폰을 잡고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그의 정열이 그를 가만두지 않는구나, 자유롭게 상상했다.

  그래서 <쌍화점>은 참 아쉽다. 세운상가를 배회하던 헐리웃 키드 유하는 젊은 날, 보고배운 것들을 활자를 통해 시로 담아냈고, 성공했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로 표현하는 솜씨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쌍화점>은 뭇 영화들과도 다르고 그가 만든 기존의 영화들과도 다르다. 그런데도 어딘가 관습적이고 상투적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왕의 남자>, <음란서생>, <색, 계> 등등이 중첩되는 느낌. 맨주먹이나 총이 칼로 바뀌었을 뿐. 공민왕(주진모 분)과 홍림(조인성 분)의 대결에서는 왜 뜬금없이 느와르가 떠오를까. 기왕 필요해서 쓴 베드신이라면 좀 더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유하 감독의 여전한 정열, 그것만큼은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역시 그는 절제 보다는 과잉에 능하다. 어차피 예술은 장르 불문하고 은유적으로 청승 떠는 일일 텐데 그의 은유가 다소 뻔하고 거칠다는 점만은 줄곧 아쉽다. 상투적 대사를 남발하느니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좀 더 침묵하는 법을 익혀도 좋을 것 같다. 이미지로서의 표현이 영화란 장르의 특징이자 매력이기도 할뿐더러 사랑은, 말하지 않는 말, 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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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1-10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보고 싶은데 다들 평이 별로라서 아직도 망설이는 중인데...보지 말까요? 과속스캔들도 안 봤지만...^^

깐따삐야 2009-01-13 00:06   좋아요 0 | URL
그런데 관객은 상당히 많았고 반응도 재밌었어요. 웅성거리다가는 다시 잠잠해지고, 다시 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는 또 잠잠해지고. 다른 분들의 리뷰도 참조하셔서 선택하시길요. 저도 악평을 한 것 같지만 유하 감독의 열정 만큼은 좋았어요.^^

Mephistopheles 2009-01-11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에 나온 배우들의 얼굴크기가 모든 것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요...^^

깐따삐야 2009-01-13 00:08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제가 보기엔 송지효-주진모-조인성 순으로 얼굴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조인성을 가장 앞에 세운 것 같아요. 그처럼 조인성은 영화 속에서도 주진모와 송지효를 배려하다가 죽었지요. 쯧쯧!

다락방 2009-01-16 08:49   좋아요 0 | URL
앗, 스폿!!
죽었구나, 조인성이! ㅎㅎ

깐따삐야 2009-01-16 16:26   좋아요 0 | URL
이런이런. 원하던 바가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근데요, 주진모도 죽어요. =333

다락방 2009-01-17 13:27   좋아요 0 | URL
악. 정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