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의 청첩장을 받아들었을 때 취향대로 고상한 걸 잘 골랐다 싶었는데 첫 장을 열었을 때 예의 그 못난 글씨체로 쓰여 있는 글. 아직도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는 나라는. 황송했다. 19년간의 세월을 헤아려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만큼 E는 주저 않고 나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는 친구였고 매사 건조하고 조심스러운 그 성정 상 과연 뜨거운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우려했는데 E의 결혼으로 다시 한번 인연은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E의 남자는 마치 장모님 앞에 마주선 사위마냥 한결같이 사근사근했고 어쩔 줄 몰라 했으며 새로운 시작 앞의 설렘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나는 마치 모자란 딸을 시집보내는 친정엄마라도 된 듯 E의 말투에 서운해 하지 말고 맞벌이인 만큼 집안일도 분담해야 한다는 시시한 훈계를 늘어놓았다. 몸이 잔뜩 불어서 결혼식에 예쁘게 하고 갈래야 갈 수 없다는 점이 우울할 뿐. EE의 그 분이 서로에게 보호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기쁘다.

 

# 영달이의 공개수업이 있었다. 1등으로 도착. 등록부를 작성하고 창문으로 빼꼼히 교실 안을 들여다보니 귀여운 꼬마들이 웅성웅성. 영달이는 반가움 반, 쑥스러움 반, 알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나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시간이 되자 엄마, 아빠, 할머니들이 모여들었고 아이들은 저마다 우리 엄마다, 누구 엄마야, 하며 부산해졌다. 담임선생님은 집안일은 누구의 일일까요? 로 시작해서 집안일은 가족 모두의 일이라는 바람직한 결론으로 수업을 맺었으나 내 옆에 서 있던 학부모 한 명이 종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바람에 잠깐의 소동이 있었다. 복도에 나와 앉아 정신을 차린 모습을 보고 돌아오는데 하필이면 아이 공개수업 때 그런 모습을 보였을까, 그 엄마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고 미안할까 싶었다. 나야 사정이 허락해서 연가를 내고 매년 공개수업을 참관하고 있지만 엄마가 못 왔다고, 또는 올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서운해 하거나 울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띄면 복잡한 생각이 든다.

 

# 영달이는 쟤 아빠를 많이 닮은 아이다. 내가 낳았으니 나와 닮은 점을 찾아보려고 유심히 살펴보곤 하는데 말투나 주먹질 빼고는 마치 데칼코마니, 도플갱어란 말이 떠오를 정도로 아빠와 판박이다. 집착이 강한 나와는 달리 매사에 무심하거나 초연한 편이며 책과 글 외에 뾰족한 취미가 없는 나와는 달리 손재주가 뛰어나 잡기에 능하다. 영화든 책이든 쉽사리 인물에게 감정이입이 되던 나와는 달리 영달이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분명한 편이고 문자를 다루는 것보다는 수를 다루는 모습이 더 편안해 보인다. 생김새나 표정은 물론 체형까지 남편을 빼닮아서 가끔은 이질감과 거리감이 확연히 느껴질 정도이다. 나보다 덜 예민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다가도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을 도무지 모를 때는 답답하기도 하고, 나보다 더 현실적이라서 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유년기의 행복은 곧 허무맹랑한 꿈과 상상력 아니었던가, 싶은 생각이 들면 아이러니해지곤 한다. 남편 말대로 영달이는 누군가를 전적으로 닮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쩐지 세월이 갈수록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의 진정성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 나이를 먹으니 친구들끼리 만나면 건강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허리와 갑상선이 좋지 않아 수영을 시작했다는 K는 할머니들로 왁자지껄한 오전반에 다니고 있는데 한참 어린 수영강사로부터 잔소리를 듣는 일도 이젠 익숙해졌다며 웃었다. 물이 두려워 수영장이나 물놀이를 가도 멀찌감치 앉아 바라만 보는 나로서는 부러우면서도, 결국 수영장에는 얼씬도 못하겠지만, 어제 물리치료실에 누워 무릎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자니 수영을 다닌다는 친구가 계속 떠올랐다. 만인이 나에게 수영을 권하고 있는데 내 마음 하나가 움직이지를 않아서 한창 나이에 할머니들 틈에 섞여 누워 있다는 사실이 한심하기도 하고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생각하고 만다. 물도 싫고, 수영도 싫고, 오가는 시간도 아깝고, 다녀와서 해야 할 일이 많은 것도 싫고, 온통 싫은 것 투성이로 핑계를 만들면서 말이다.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뽑던 흰머리는 이제 뽑으면 땜통이 생길 지경이라 뽑지도 못하고, 안 좋던 무릎은 조금 무리했다 싶으면 더욱 삐걱대고, 소화력도 예전 같지 않아서 체하는 일이 비일비재니 아, 나이 먹는다는 것이, 하루하루 늙어간다는 것이, 내 나이 39 곱하기 278킬로미터의 시속으로 인생을 달려간다는 것이 문득문득 아쉽고 안타까워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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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8-05-18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김새나 표정은 물론 체형까지 ㅎ 아빠를 정말 많이 닮았군요^^
우리 아이들 체형은 저를 닮았어요. 하필이면 하체비만을....
요즘 저도 무릎을 구부렸다 펴면 소리가 나요. 아직 아프진 않지만 좀 뻐근한 느낌...
저녁에 감자랑 호박 넣어 부침개 먹었더니 소화가 되지않아 후회하고 있습니다.
과식하고 후회하고....반복되네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겠지요.

깐따삐야 2018-05-19 16:44   좋아요 0 | URL
저와 남편은 둘 다 하체가 그래서 영달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ㅋㅋ
앞으로는 관절과 위장이 거는 대화에 좀 더 귀기울여야겠습니다.
세실님도 바쁜 일상이겠지만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