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내 페이퍼에 간간히 등장하곤 했던 S양, 신혼여행 첫날, 늦은 밤 전화를 걸어 결혼은 왜 한 거냐고, 결혼해서 좋으냐고 따져 물어 새벽 내내 울어야했던 기억. 왜 나의 꿈에 나타나는 어린아이는 항상 영달이가 아닌 S양인지, 내가 나로 하여금 의문을 갖게 했던 그녀. 그토록 아련하고 사랑하는 S양이 엊그제 왔었다.
커피숍에 들러 아이스커피 여섯 잔을 사서 친정으로 가는 길, 마음이 참 묘했다. 몇 년 전 큰이모의 장례식장에서 거의 스치듯 헤어진 후 어느덧 이십대 중반이 되어가는 S양이 모처럼 고모와 언니를 보겠다고 온 것이다. 말 그대로, 아주 선명하도록, 예쁘고 착하고 야무진 동생, 사람은 유년기의 본질을 씨앗처럼 간직하는 존재이니 너 역시 그렇겠지.
조막만하고 오밀조밀한 얼굴에 귀여운 눈웃음, 그나저나 내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어머, S야, 너 왜 이렇게 말랐어!” 였다. 아가씨는 아가씨인데 어릴 적 말투와 눈웃음이 그대로여서 감격스럽기도 하고 가느다란 팔목을 보니 애틋하기도 해서 거의 울 뻔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함께 들른 엄마의 형제들, 그러니까 나의 이모, 외삼촌 사이에서 숱한 대화들이 오가고 함께 웃었지만 내내 나의 마음은 S를 향해 있었다. 나는 어쩐 일인지 결혼식장에서 S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고 그 울먹이는 마음이 신혼여행 내내 지속되어서 남편은 영문을 몰라 했었다. 그 후로 S가 몇 번 놀러왔었고 마음이 조금 회복되었다가 그녀가 사춘기를 지나고 여고생이 되고 대학에 가면서, 그리고 내가 정신줄 온전히 붙들고 살기 힘든 영달이 엄마가 되면서, 우리는 조금씩 멀어져갔다.
한 번쯤 연락을 해봐도 좋았으련만 왜 그러지 않았을까. 내 코가 석자라서? 망설이다가 타이밍을 놓쳐서? 외삼촌에 대한 원망 때문에? 그저 알아서 잘 살겠지 싶은 믿음 때문에? 이유는 대려면 여러 가지이고 핑계는 만들려면 수십 가지도 넘겠지만 그냥 그때는 그랬던 것이고 시간은 잘도 흘러 또 다시 우리를 만나게 했다.
마치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S와 나는 연락처를 묻고 서로 편지를 하기로 약속했다. 그때도 쿠키포장지나 귀여운 메모지에 헤어질 때마다 편지를 써주곤 했던 S였다. 집에 있는 앨범에는 뻥이요 과자에 들어있던 메모지에 S가 써준 편지가 아직도 있다. 영원히 언니와 함께 하고 싶다는 말 옆에는 웨이브 단발에 동그란 안경을 쓴 이십대의 내 모습이 그려져 있다. S가 나의 동생이고, 내가 기억하는 그녀가 맞다면, 지금 그녀가 지나고 있는 이십대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당차 보이지만 자기만의 아픔이 있고, 구슬처럼 예쁘지만 단단한 슬픔 같은 것이 있으리라.
그 와중에도 순진하고 바보 같은 언니가 결혼해서 아이 낳고, 생각보다는 좀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진정 진심어린 눈빛으로 나를 놀려댔지만 S야, 언니가 멀쩡할 리가 있겠니. 너나 나나, 그때나 지금이나, 그냥 남들 보기 멀쩡한 척 사는 거야. 다들 그러고 산단다. 딱히 다른 방법이 있지도 않아. 다들 각자 생긴 대로, 깜냥대로, 꼴리는 대로 사는 거란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으니 너도 당분간은 외삼촌 등에 빨대 꽂고 너 하고픈 대로 살아. 못 그랬으니까 실컷 그래본 다음, 그 다음은 그 다음에 생각해도 돼.
그리고 예전처럼,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함께 하자.
(그런데 언니는 요즘도 알라딘에서 책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