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은 아닌 것 같고.” 영화관 앞에서 색깔사주를 봐주는 사주도사가 Y를 보자마자 한 이야기란다. 이어지는 얘기 또한 하나도 맞는 게 없어서 Y는 왜 이렇게 못 맞히는 거냐며 화를 냈단다. E와 나는 거기 순 엉터리라며 깔깔거렸지만 도사의 추측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긴 했다. 도사는 무슨 도사. 그저 첫 인상을 보고 대략 판단했던 것이다. Y는 척 보기에도 공무원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마치 연예인 같고, 그녀의 삶도 어떤 면에서는 연예인스럽다.

  새내기 시절, 처음 만났을 때부터 Y는 우리 과의 다른 아이들과는 좀 달랐다. 아담하고 예쁘장한 외모에 경상도 말씨는 어찌나 애교스러운지 여자인 내가 보기에도 참 감질나도록 귀여웠다. Y가 마침 기숙사 부근에서 자취를 했기 때문에 기숙사에서 지내던 K와 나는 그녀와 종종 어울렸다. Y는 겉으로 비춰지는 모습과는 다르게 순진하고 씩씩한 아이였다. 그녀의 교태와 끼는 타고난 것도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 생존본능 같은 것이었다. K는 그런 그녀를 기특해하며 아껴주었다. Y는 예쁜데다가 귀엽기까지 해서 스캔들이 끊일 새가 없었는데 믿음직한 남자친구가 생기고 부터는 성실한 연애모드로 전환,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당시 동아리 활동에 몰두하고 실존에 눈 뜨느라 고통스러웠다... 면 썩 오버고 원래 제 앞가림 하나도 버거웠던 나는 이런저런 딴짓에 관심을 쏟느라 과 친구들과 좀 멀어지게 되었는데 어느 날 K가 Y와 절교하는 사단이 벌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로 K는 무서우리만치 놀라운 집중력으로 학업에 전념했고 Y는 알바를 뛰어 모은 돈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버렸다. 이후에 나는 어쩌다보니 회색분자마냥 두 사람 모두와 잘 지내게 되었다. 둘 다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고, 둘 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어서, 그냥 갈팡질팡하는 사이 그리 되어버렸다. K가 워낙 완고하고 순수했던 반면, Y는 사과할 타이밍을 영영 놓쳐버렸다. K의 고집도 대단했지만 Y도 사과는 진심으로 해야 했다.

  사실 잘 지냈다고는 하지만 Y는 여러모로 나와 달라서 마음을 깊이 나누거나 하지는 못했다. 그녀가 힘든 속내를 털어놓아도 나는 그녀의 여성스러운 외모 이면에 탄탄히 단련된, 똑똑하다 못해 영악스러울 정도로 강한 생활력을 보았기에 그녀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사는 법을 일찌감치 깨우쳤고 같은 조건이라면 나보다 더 잘 살 것이었다. 만약 조건이 다르다면 그 조건을 뛰어넘어서라도 반드시 잘 살고야 말 것이었다. 근처 학교로 실습을 나갔을 때, 지도 선생님이나 아이들을 향한 Y의 상냥하고 다정한 태도에 감탄을 넘어 질투까지 느꼈던 적이 있다. 때로, 아니 종종, 열 마디의 간절한 말 보다 한 번의 눈웃음이 훨씬 효과적이란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 또한 그다지 차갑거나 무뚝뚝한 편이 아닌데도 연하고 달콤한 배 같은 Y 앞의 나는 설삶은 말대가리 같았다. 그때 Y의 능란한 사교술은 부러운 한편, 두렵기도 했다.

  그 동안 띄엄띄엄 연락을 하고 가끔 얼굴을 보고 그랬는데 이번에 만난 Y는 나에게 여러모로 고맙다고 했다. 시험 정보를 알려준 것, 결혼식에 초대한 덕분에 여러 동기들과 만나고 인사할 수 있었던 것. E 말로는 식사할 때 테이블에 의자가 부족했는데 K가 얼른 의자를 하나 당겨서 Y에게 앉으라고 했던 모양이다. 오래도록 정을 주었던 친구와 멀어졌을 때 실망과 아픔도 컸겠지만 연애하고, 사랑하고, 아기도 낳고 하다 보니 K도 이젠 이해 못할 것이 무엇이랴, 싶었을 것이다. 더구나 Y가 어마어마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세월도 많이 흘렀으니 어디 연수라도 가서 마주치면 그땐 더 반갑게 인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같은 지역에 있는 학교에 근무하다보면 동기만큼 편한 동료도 없다. 학부 때 안 친했던 사람도 같이 근무하다 친해지는 경우도 봤다.

  그나저나 꽤 오랜만의 만남이었는데 Y는 “결혼, 꼭 잘하고야 말거야!”라는 대사를 남겨 E와 나는 또 한번 감탄했다. 너무 솔직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는데 급기야는 애인이 있는 남자한테 대쉬했던 경험까지 털어놓는다. 내가 그래도 별별 책도 다 읽고 결혼까지 한 사람인데 촌스럽게 놀라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거 참 용감하고 멋지다고 말하기엔 그새 유부녀 모드에 길든 탓인지 차마 호응불가. 애인이 있는데도 너와 연락을 주고받은 상대 남자가 나쁜 쉐X 같다고 소심한 반발만 했을 뿐.

  조만간 지인들과 함께 엮은 책도 나오고 지역의 좋은 학교로 발령을 앞둔 Y는 혼자 객지에 나와서도 참으로 꿋꿋하게, 부지런히 인생의 지형도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그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E와 나는 우리는 온실 속의 화초마냥 자라서, 어쩌고 해가면서 그녀의 야무진 생활력을 존경하고 시기했다. 항상 자신의 욕구에 솔직하고 다가온 기회는 반드시 잡고야 마는 Y. 나는 그녀가 아니고, 그녀처럼 되려다가는 곧장 시스템 에러를 일으키고야 말겠지만 어느 순간에도 현실을 불평하는 대신,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를 재빨리 생각하고 처신하는 그녀의 현명한 낙천성만큼은 두고두고 본받아야 할 미덕이란 생각이 든다. 다만, 아름답고 능력 있는 여성들에게 인생이 걸어오는 트릭이란 게 있다. Y가 그 트릭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보다 높은 경지의 내공을 쌓았으면 좋겠다. 그녀는 특별하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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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01-24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그래도 별별 책도 다 읽고 결혼까지 한 사람인데 촌스럽게 놀라지 않으려고 애썼다.-> ㅋㅋㅋ 귀여우신 깐따삐야님.

깐따삐야 2009-01-25 13:11   좋아요 0 | URL
헤에...^^ 암튼 얘기 듣고 좀 황당했는데 열 여자 마다 안 하는 게 남자더라구요.

Mephistopheles 2009-01-24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극단으로 절대 치닫지 않는 회색이 최고라니까요...으흐흐(나름 알라딘 회색분자 메피스토가)

깐따삐야 2009-01-25 13:13   좋아요 0 | URL
메피님 경지에 이르기엔 저는 아직도 고집이 넘 세요. 메피님과 열심히 어울리다 보면 언젠간 저도! -_-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