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결혼식 이후로 동기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H가 추수연수 차 고향에 왔고 고3 담임을 하느라 바빴던 S에게도 좀 여유가 생겨 이제야 한가하게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질문공세를 퍼부어댔다. 방학 동안 깨소금 팍팍 볶고 있느냐는 둥, 이제 유부녀라 못 나올 줄 알았다는 둥, 주말인데 남편이 순순히 보내주더냐는 둥 농을 걸어오기도 했다. 실제로 육아에 바쁜 K와 성실히 시댁에 적응하고 있는 M은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모임을 잡아도 연락을 안 하게 되었다. 결혼했다고 제쳐놓으면 매우 섭섭할 거라는 의사표현을 하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싱글들끼리만 만나면 더 재밌어질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전부터 친구는 친구로밖에 안 보인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오고 있지만 남녀 간의 일이란 절대 모르는 거다. 머릿속으로 화살표를 그려본 결과 썩 괜찮은 커플도 있다. 이러다가 조만간 막무가내 뚜쟁이로 나서겠다.
우리 동기들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 목청을 조금이라도 높이면 온몸이 후덜덜덜 거릴 정도로 노쇠한 교수님이 한분 계셨다. 연구실에서 출발하여 강의실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오래라서 그냥 번쩍 안아오고 싶을 정도였는데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아주 따듯했던 기억이 난다. 교수님은 어느 날 강의 중에 우리를 둘러보시며 그런 말씀을 하셨다. 원숭이띠는 머리가 좋고 재주가 많고 개성이 강하지요. 어린 세대들이 별자리나 혈액형을 과신하는 것처럼 그분도 십이지 같은 것을 맹신하는 편이었나 보다. 사실 우리 학번은 내가 기억하기로도 매사 열의가 있고 각자 개성이 강하기는 했다. 다만 열의는 있는데 어디에 열의를 쏟아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 헤매는 몇몇(나를 포함하여)이 있었다. 한편 교수님 말씀처럼 모두들 개성이 강하긴 했지만 무식할 정도는 아니어서 뭉칠 때 뭉치고 거리를 두어야 할 땐 적당히 거리를 둘 줄도 알았다. 과대표인 K의 포용력과 통솔력이 탁월해서이기도 했겠지만 대개 근본이 착실한, 좋은 아이들이었다.
마침(?) 우리는 서른이 되었고 나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었는데 무려 십년을 함께 하고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별 느낌 없다가 대세인 반면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다는 막막한 소감도 나왔다. S는 볕이 좋은 오후에 캠퍼스 잔디밭에 모여 과자를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던 스무 살의 추억이 너무 그립다 했다. 날이 저물면 과자가 쥐포가 되고 콜라가 비어로 화하는 신기한 경험이 왜 아니 그립겠는가. 이젠 그렇게 밤을 새우기엔 저질 체력이 되어버린 우리는 힘을 내자고 두 주먹 불끈 쥐는 대신 유일한 자산이었던 열의와 개성이 바닥나고 있지는 않은가. 두려움과 안타까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문득 내 앞의 동기들에 대해 써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아직 젊은 그들을 기억 속에 활자로 새기고 싶어서다.
E는 학부시절 나와 단짝이었다. (세상에, 우리는 어쩌자고 교환일기까지 썼었다.) 첫 강의 때 우연히 나란히 앉게 되었는데 그때 더듬더듬 수다 떨다가 친해졌던 기억. 김영하와 바나나의 소설을 맨 처음 내게 소개하고 권해준 것도 그녀였다. 뭐랄까. 다소 도도해 보이는 외모에 합리적이고 건조한 성격. 하지만 진짜배기는 그녀의 박학다식하고 엉뚱한 면이다. 삼라만상에 관심이 많고 보도 듣도 못한 이상한 책을 많이 읽는 한편 동방신기 광팬이다. 동방신기 때문에 만나던 남자랑 꽁한 적도 몇 차례. 여러모로 나와 다른 점이 많은 친구인데 차분한 매력이 있고 일단 입이 무거워 믿음이 간다. 나처럼 뜨거운 피를 가진 수다스런 연인을 찾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여자인데다 무려 결혼까지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거나 이해받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느끼기에 더욱 아끼게 되는, 그런 친구다.
J는 ‘얍삽이’라는 별명을 그대로 삶 속에 구현하며 사는 친구인데 그렇다고 밉상은 아니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공부하러 도서관으로 가는 게 아니라 여자 동기들을 찾으러 도서관에 가던 녀석. 뒤통수만 보고도 우리들을 용케 찾아내 생글생글 웃으며 노트 필기 한 것 좀 빌려줘, 라고 당당히 요구하던 녀석. 그래도 시험 끝나면 결과에 상관없이 밥은 꼭 샀다. 그나저나 지난해 연애를 한 것 같은데 결과가 별로였던 모양이다. 녀석이 군대에 갔을 때 여자 동기들이 합동으로 편지를 써준 적이 있는데 답장을 받아보니 웬걸, 그토록 꼼꼼하고도 절절한 문체라니. 깔끔하고 알뜰한 녀석이라서 된통 멍청한 아가씨를 만날까봐 주의 요망되는 친구다.
또 다른 J. 아랍삘의 외모에 고지식함이란 무엇인가를 라이브로 전해주는 친구. 좀 답답하고 지루한 면이 있긴 하지만 방학 때면 헌혈해서 영화티켓도 받고 자유이용권도 받아서 호혜를 베푸는 일면도 있었다. 우리는 피 같은 티켓이라면서 겁나게 놀고 다음번엔 다른 걸 타오라고 부추기기까지 했다. 사실 J는 남의 말을 잘 듣기도 하고 부탁도 잘 들어준다. 그런데 안쓰럽게도 말을 되게 안 듣게 생긴 인상을 갖고 있다. 지난 해, 남편과 나를 연결해준 장본인이기도 한데 덕분에 나한테 쓸데없는 구박을 당하기도 했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지지부진한 잔티끌은 없는데 노련하지 못한 무매너가 살짝 에러다. 그래도 남편의 은인이므로 가까스로 특별해졌다.
그리고 H. 안목도 좋고 참을성도 많아서 남녀 불문하고 오래도록 무난한 벗으로 지낼 수 있는 친구다. 웬만한 것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아량도 갖췄다. 또한 많은 영화를 섭렵한 영화 마니아이기도 해서 함께 영화 이야기를 나눌만한 훌륭한 상대다. 남자 동기들 중에 유일하게 내 속내를 보여주었던 친구이기도 한데 하도 편해서 거의 동성 친구와 다름없이 생각했었다. 예전에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실 때가 있었는데 이번에 만나서는 그 어머니가 노래자랑에 나가서 칠만원과 감자 한 박스를 타오셨다고 자랑하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멀리 발령이 나서 자주 볼 순 없지만 문득문득 스쳐가는 추억이 남다른 친구다.
S는 아마 우리 가운데 가장 능력 있고 머리가 좋은 친구일 것이다. 학생 때부터 매사 준비성이 철저하고 실천력 또한 대단해서 항상 인생의 어느 단계마다 특출한 성과를 내곤 했다. 그녀의 에너지는 여전히 건재해서 사회에 나와서도 만날 때마다 수업에 대한 유용한 팁도 많이 주고 생활지도에 관한 조언도 열심히 해준다. 무엇보다 S가 지닌 최고의 매력은 불행마저 희화화시키는 묘한 재주를 가졌다는 점. 절망의 구렁텅이를 웃음의 도가니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도 않을뿐더러 설사 주어졌다 해도 타이밍이 어긋나면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다. S는 그런 면에서 절묘한 유머감각을 지녔다. 그러한 S가 올해부터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여 백수와 돌싱만 아니라면 올인을 불사하겠단다. 내가 남자라면 정말 진심으로, 머리 좋고 재미있는 S 같은 여자를 사귀어보고 싶다.
나오지 못한 동기들을 제외하면 끼리끼리 어울렸던 동기들 중 마지막으로 나. 나는 그들에게 어떤 친구일까. 이번에 그런 말을 들었을 땐 기분이 좀 묘했다. 우리 학번은 그래도 다들 잘 지내지 않았어? 별 문제도 없었고 두루두루 친했잖아. 그러자 좌중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S 왈. 깐따삐야, 너는 그랬지. 너는 정말 모두하고 잘 지냈어. 순간 내가 다 알지 못했던 무언가가 있었다, 라는 느낌과 함께 조금 멋쩍어졌다. 어쩐지 과거의 내가 줏대 없이 느껴지기도 했고 그래도 너는 정말 누구하고나 문제를 일으켰어, 보다 낫지 않느냐고 간신히 위안했다. 그렇다. 매우 가깝게 어울리지 않고는, 혹은 그랬었다 하더라도 아무개와 아무개 사이의 불협화음 전부를 눈치 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과거란 제멋대로 윤색되기 일쑤이기에 꼬박꼬박 인지하며 되새김질 하지 않는 한 원래 그 인상 그대로이긴 어렵지 않던가. 한편으론 자의식 과잉이었던 내가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느라 그만큼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스미지 못했던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의 나는, 많이 어렸던 것이다.
그처럼 지난 세월의 거울 같은 동기들을 보면서 성장한 모습에 장하기도 하고 그대로인 모습에는 가슴이 따듯해져 오는 흐뭇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보면, 학창시절의 우정이란 참 특별한 것이다. 이제는 서로의 뱃살과 탈모를 염려해줘야 할 정도로 나이를 먹었지만 인생의 어느 시기를 함께 출발했고 같은 길을 걷고 있어서인가. 늘 스무 살인 채로 머물러 경험만 차곡차곡 늘려가고 있는 듯한 탈(脫) 시간의 느낌. 건강하게 모일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그리 되길 바라고, 진정 살아있는 추억의 눈길과 몸짓들로 거기 그대로 있어줘서 소중한, 삼십세 99학번 동기들. 차를 마시고 왔는데도 무엇엔가 담뿍 취한 것만 같은, 그런 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