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처음 맞는 명절이라고 친구들로부터 응원 메시지. 잘하고 오라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는데 왜 시댁에 도착하기도 전에 혓바늘이 돋고 난리인지. 눈은 폴폴 날리고, 혀를 달싹일 때마다 통증은 느껴지고, 공연히 긴장되는 것이 내가 결혼했구나, 하는 절절한 현실. 지금쯤이면 엄마가 부쳐놓은 부침개나 주워 먹고 한과나 아삭거리며 휴일을 만끽하고 있으련만.
시어머니는 편한 때 오라고 하셨지만 결혼하고 처음 맞는 명절인데 집에 있기도 뭐해서 설 하루 전날 저녁에 집을 나섰다. 친정에 들어온 선물세트 중에 정종, 한우 등을 차에 싣고 한 시간 반을 달려 시댁에 도착. 어머님은 그새 시금치와 당근으로 만두피에 물을 들여 알록달록 만두도 빚어놓으시고, 인삼 넣은 식혜도 해놓으시고. 가족들 먹을거리를 미리 준비해 놓으신 덕분에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 날은 같은 층에 사시는 큰댁에 인사를 드리고 와서는 어머님, 남편이랑 고스톱을 쳤다. 나는 무려 만오천원을 땄는데 일단 패도 잘 들어왔지만 아무래도 주변에서 은근 밀어주는 것 같았다. 계속 치고 싶었지만 내일을 위해 취침. 시댁에서 처음 자는 거라서 잠이 잘 안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피곤했던 까닭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까무룩 잠에 빠졌다.
다음날. 자명종을 맞춰놓고 자서 일찍 일어나긴 했는데 밖이 조용했다. 씻으러 나가보니 어머님이 일어나 계셨는지 안방에서 조그맣게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깰까봐 밖에 안 나오시고 그냥 방에 계시는 것 같았다. 친정엄마가 시킨 대로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옷을 갈아입고 큰댁에 갈 준비를 했다. 남편은 아직 아무도 안 일어났을 거라며 더 자라고 하는데 긴장 탓인가. 이상하게 머리가 맑았다. 내가 커피를 타려고 하자, 어머님은 아버님이 밭에서 따오신 딸기에 꿀과 우유를 넣어 주스를 갈아주셨다. 이어서 남편과 아버님이 기상, 어머님이 마련하신 몇 가지 음식을 싸가지고 큰댁으로 갔다.
종가집이 아니다보니 모인 인원은 단출했다. 차례를 지내고 아침을 먹고 났는데 큰댁 농장에서 일을 한다는 베트남 아가씨가 새해 인사를 왔다. 그녀는 결혼식 때 나와 남편을 봤다고 했다. 결혼식에 와주셔서 고맙단 말을 하고 싶어 고맙습니다, 가 베트남어로 뭐냐고 물었더니 깜언, 이란다. 그녀는 언뜻 촌스러웠지만 눈빛이 맑고 목소리가 고왔다. 배부러요, 하면서 음식을 극구 사양하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은 명절 때 참 외롭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내 위치가 세뱃돈을 줘야 되는 입장이려니 생각하고 아예 기대를 안 했는데 큰아버님과 시아버님이 세뱃돈을 챙겨주셨다. (실은 신정 때 서른이 되었다고 남편한테 삼십만원을 세뱃돈으로 받았었다. 호호.) 작은 댁 도련님들과 여섯 살배기 시누이가 세배를 해서 남편과 나도 미리 준비해 간 빳빳한 새 지폐로 세뱃돈을 주었다. 작은 어머니가 무지 좋아하셨다. 우리 엄마도 옛날에 그랬는데. 엄마한테 맡겨라, 그리고는 영영 종적을 감춰버리는, 세뱃돈의 묘연한 행방.
어머님이 들려주신 들기름, 참깨, 딸기 등등을 싣고 와서 오후엔 친정에서 연휴를 즐겼다. 차가 밀려 생각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역시 친정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사뿐사뿐. 아무리 시어른들이 잘해주셔도 친정만큼 편할 수는 없다. 오랜만에 오빠와 올케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남편도 결혼하면서 든든한 형님이 생겼다고 늘 좋아하곤 했다. 오빠는 잔정이 없고 냉정한 편이지만 자기 가족들한테는 참 잘한다. 저녁을 먹고 나서 여기서도 고스톱을 쳤다. 가장 신난 건 우리 아빠. 오리지널 타짜인 아빠와, 계산과 잔머리의 달인인 오빠, 이상하게 운 좋은 올케, 그리고 어떤 패가 들어와도 절대 죽지 않는 무대뽀인 나. 결국 보다 못한 오빠가 너는 웬만하면 광을 팔던가, 죽지 그러냐, 는 결정적인 말을 해왔고 처음엔 아빠가 몽땅 따는 분위기였는데 내가 빠지자 오빠와 남편이 번갈아 따곤 했다. 오빠 왈, 깐따삐야가 빠지니깐 판이 재미있네. 서로 견제하면서 치니까 치는 맛도 나고. 엄마랑 이것저것 집에 가져갈 걸 챙기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또 오빠의 목소리. 역시 깐따삐야가 없으니깐 판이 잘 돌아가. 글치 뭐. 우리 집은 내가 항상 화근이지 뭐. 오기로 다시 끼려고 했는데 남편이 따는 중이라서 참았다.
밤늦게 돌아와 곯아떨어져서는 오늘 아침도 친정에 가서 먹었다. 남편한테는 점심 건너뛰게 여기서 어여어여 많이 먹으라고 부추기면서. 오빠 내외가 서울로 올라간 뒤, 엄마가 챙겨주는 것들을 바리바리 싸서 귀가. 이제야 오롯한 내 시간을 맞았다. 예전 같으면 엄마랑 수다를 떨든가, 친구를 만나 영화라도 보려고 궁리하든가, 아마 그랬을 것이지만 오늘은 그저 무한정 쉬고 싶다. 혓바늘에 오라**를 바르고 입 꼭 다문 채 뒹굴뒹굴 해야겠다. 냉장고에 먹을 게 잔뜩이고, 빨래도 해널었고, 집도 뭐 비교적 깨끗하고. 내일 아침까지는 무조건, 무조건 쉬고 말거야! 어머니 세대와는 달리 요즘은 명절에도 그다지 할 일이 없지만, 어머니 세대와는 달리 요즘 며느리들은 그다지 깡도 없어서 평소보다 조금만 더 움직여도 이렇게 엄살을 부린다. 어쨌든! 결혼하고 처음 맞은 명절. 무사히, 즐겁게 보낸 것으로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