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달이: 다양한 장르를 읽는다. 인디밴드의 일상적인 노랫말부터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까지, 요시타케 신스케의 그림책부터 햄스터에 대한 101가지 비밀까지. 책을 좋아하는 엄마 덕분에 뱃속에 있을 때부터 지금껏 꾸준히 활자에 노출되어 왔으나 요즘엔 아빠와 한 팀이 되어 즐기는 휴대폰 게임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학교와 언론을 통해 안전교육을 받아서인지 스스로 조절하며 이용 중이긴 한 것 같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그토록 책을 사랑하던 영달이가 다른 데 시선을 빼앗기는 것이 못내 아쉽다. 지금은 열심히 독서록도 작성하고 알라딘 장바구니에 책을 골라 담기도 하고 이런 책을 사달라, 저런 책이 보고 싶다고 이야기 하지만 머잖아 영달이도 이상한 줄임말을 써가며 듣도 보도 못한 활자로 비밀스런 문자를 주고받는 건 아닐까. 책을 권해주면 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엄마가 고르냐고 째려보면서 세상에 책보다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 나를 완전히 간서치 취급하면서 소외시키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세상에 재미있는 책, 예쁜 장정의 책, 갖고 싶은 책, 휴대폰처럼 다 보고 나면 꺼지는 책이 아니라 여전히 손에 남아 있는 책들이 많고 또 많다. 요즘 들어 영달이는 내가 읽는 그림은 없고, 글밥은 많은 책들에 관심을 보인다. 재미있는데 말해 줄 수 없다고 하면 빼앗아 읽기도 한다. 이 또한 즐거운 일이다.
남편: 우선 책을 고르는 안목이 없다. 이 남자가 사들인 책은 주로 알라딘 중고로 되팔거나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한다. 스스로도 쉬이 인정하는 바. 누군가에게 실낱같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라며 나날이 되판다. 그럼에도 직장 동료들과 영달이의 눈에는 뭔가 책 좀 읽는 인간으로 비춰지고 싶은지 늘 책을 끼고 지낸다. 소파 위에, 화장대 위에, 식탁 위에, 가방 안에, 언제나 책이 있다. 내 책장을 뒤적이며 본인이 읽을 만한 책들을 가져가기도 하고 매일 소량의 페이지를 짤꼼거리며 읽다가 잠이 들곤 한다. 문맥에 따른 자연스런 띄어 읽기를 못하여 영달이에게 구박을 받고 내가 책에서 읽고 들려준 내용을 본인이 책에서 읽었다며 나에게 들려줄 때, 뒤통수를 가격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간혹 책을 읽고 제법 쓸 만한 비평을 하기도 하는데 같은 책을 읽고도 다르게 느낀다는 점이 재미있어서 내가 몹시 좋게 읽었던 책이나, 반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책을 읽히면 의외의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하지만 이 남자가 추구하는 주요한 쾌락의 원천은 주로 네 글자로 된 제목의 웹툰 만화들이다. 뭔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뉴스라도 보고 있나 다가가 살펴보면 어김없이 웹툰을 보고 있다. 매번 기승전결이 똑같은 영웅 스토리가 질리지도 않는지... 정말 질린다.
나: 며칠 전 경향신문에서 소설가 한강이 “책을 읽지 않을 땐 자신이 부스러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읽고 나면 부스러졌던 부분이 다시 모아지는 느낌이 있어요.” 라고 이야기한 인터뷰 기사가 있었다. 작가의 말들을 수첩에 메모해 두었다. 나 역시 그렇다. 인생의 힘들었던 시기마다 내게 찾아와준 책이 있었고 글로 맺은 인연들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텅 빈 책장은 텅 빈 냉장고만큼이나 나를 우울하고 허기지게 만든다. 너무 꽉 채우지는 말고, 어느 만치 여유 있게, 책들끼리 적당한 기울기로 가지런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고, 손이 자유로울 만큼 공간을 확보하여 쉽게 넣다 뺐다 할 수 있는 폭과 깊이로 정리된 책장... 그 앞에 서거나 앉아서 요즘은 책에 관한 책, 책읽기에 관한 책, 글쓰기에 관한 책, 인생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다. 삼십대 초반까지는 줄곧 소설 위주로 읽었는데 다시 푹 빠져서 읽고픈 마음은 늘 있는데도 주로 손이 가는 책은 위와 같은 책들이다. 허구와 타인의 삶에 감정을 몰입하기에는 내 생활이 너무 빠듯한가 보다. 보다 젊었던 시절에는 주디도, 안나도, 캐서린도, 개츠비도, 다 나 같았는데 지금 다시 그 소설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계속 읽다 보면 언젠가 그 작품들과 다시 만날 날도 있겠지. 책의 미래를 염려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지속가능한 종이책 독자로 남고 싶다. 영원히.